[한마당] 몰염치의 반격은 시작됐다

● 칼럼 2016. 12. 19. 21:2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한달여 동안 실로 격동의 세상사, 인간사의 급류를 실감케 했다.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손에 땀을 쥐고 한편의 다큐멘터리 화면에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이라면 맞을까.
애써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첫 담화를 발표하던 대통령이 그 사이 무소불위의 권능을 박탈당하고 관저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3만여 명이 모여 외치던 함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 2백만 명도 훌쩍 뛰어넘는 거대 인파가 되어 전국을 뒤덮고 청와대 코앞이 촛불바다가 되는 세계적 장관을 이뤘다. 대통령 신봉자들만 있는 것 같던 그의 정치적 고향에서는 “수십년 뒷받침 해준 우리가 잘못했다”며 사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구속도 각오해야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희롱과 조롱을 넘어 아예 그를 감옥에 쳐 넣으라고 거꾸로 당당하게 윽박지르는 세태로 급변했다.


댓글 부정선거라고 정권 심기를 건드렸다가 시골 한직으로 쫓겨 다니던 강골검사가 비검을 마패처럼 차고 특검의 수사팀장으로 ‘암행어사 출도’를 했다. 심지어 ‘충견’이라는 치욕을 견디며 ‘유체이탈 가이드라인’의 어명에만 칼을 휘두르던 검찰이 돌연 대통령을 향해 칼끝을 겨누는 기특한 일도 벌어졌다. 그들의 녹슬고 무뎌졌을 칼질이긴 했지만, 그 것을 기초로 국회는 마침내 탄핵을 압도적으로 가결했다.
한달여 사이 그렇게 세상이 급전했다. 촛불혁명, 시민혁명, 민의의 혁명…혁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규탄함성을 지르던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으로 달라진 세상을 만끽한다. “이제 저 위선의 지도자와 불의한 세력들 세상은 끝났다. 헌법재판소도 감히 엉뚱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겠나, 정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의로운 낙원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렇게 낙관들이 떠돈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의 호위무사’로 불리던 친박이라는 여당 국회의원들이 무슨 신호탄을 기다렸다는 듯, 탄핵 찬성파 비박 의원들을 무차별 비난하면서 당에서 꺼지라고 기세등등하게 나왔다. 궤변과 억지뿐이던 그들이 탄핵 이후 쥐구멍을 찾을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가. 낯이 두꺼워도 유분수요, 철판을 깔아도 정도껏이지, 눈을 부릅 뜬 국민들 시선은 묵살한 채 적반하장의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어이없는 행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상식을 뒤엎고 자해 소동처럼 할 테면 해보라는 친박의 역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통령 처리가 헌재에 넘겨지면서 촛불이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된 순간, 저들은 행동에 나섰다. 결론부터 본다면, “우리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 다시 복권한다”는, 박근혜식 죄의식 없는 확신범이라고 할 정신구조요 권력에만 매몰된 집단들의 전형적인 행태다.
가만히 살펴보면, 대통령이 직무정지 됐고 주변 인물들 여러 명이 낙마했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아직 미미하다. 촛불민심은 폭포처럼 휩쓸었지만, 대통령 대행을 그들 편이 하고 있고, 공권력과 정보기관도 그들 수중에 있다. 실질 권력의 칼자루는 여전히 자신들이 쥐고 있는 것이다. 헌재에도 자기세력이 있다고 믿기에, 한번 붙어보자고 버티는 대통령과 저들은 같은 부류의 일란성 쌍둥이들이다. 언제든 상식이하의 반격과 민심을 깔아뭉개는 망동으로 고개를 쳐들고 나올 염치없는 무리들이다. 그리고 그들 세력은 도처에 막강한 카르텔로 포진해 있다. 그래서 “촛불을 더 강하게 들자, 이제 시작이다”는 경각심을 외치는 것이다.


지도자를 잘못 뽑은 착각과 실수로 혹독하게 당하는 국민적 업보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다음에는 정말 잘 뽑아야지, 모두가 깨달았을 것으로 잘들 하겠거니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국정농단 규탄의 와중에 갑자기 뜨고지는 정치인들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잠깐 짚어보라. 겨우 한달 여 사이에 인물이 크게 바뀌었나. 그 사람들은 여전한데, 조급하게 급변 시류에 부화뇌동하여 환호하고 비난하는 ‘돌개바람’ 국민심리를 읽을 수 있다. 바람에 휩쓸리는 그런 감정적 선택이라면 선거 때 감언이설이 난무할 때 또다시 허황된 인물의 꼬임에 표를 넘기지 말란 법이 없다.
교육의 수준과 정치인 선택의 기준, 민주주의 척도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금언을 새겨야 한다. 세계가 놀란 촛불의 위대한 모습이 정치와 정치인의 수준으로 나타나려면 끝까지 냉정과 이성의 머리로 감찰하며 계속 압박을 가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우롱한 죄의식 없는 확신범들은 언제든 작은 틈새만 보이면 격렬하게 반동한다는 몰상식의 속성을 알고 대비하는 집단지성, 역시 관건은 국민들의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준엄한 분별력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 칼럼 2016. 12. 19. 21:1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 현기환의 경우
“자율성 좋아하네.”
4·13 총선 참패 한달 뒤.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선출 인사차 청와대를 찾은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당-청 관계의 자율성”을 언급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은 체구의 김광림 정책위의장이 커다란 덩치의 정 원내대표를 뜯어말리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후문이다. 자율성 싫어하던 현 전 수석은 정무수석직에 있을 때 부산 엘시티 사업과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며 신체의 자유를 잃었다. 말은 씨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2. 김기춘의 경우
“나라가 망해 가는 조정에는 사람이 없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 10월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한비자>를 인용해 “지도자”,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망국지정(亡國之廷)에는 무인(無人)이라….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 즉 망징 47가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군주가 법에 맞추려고 힘쓰지 않으며, 논설하기를 좋아하여 그 실용성을 추구하지 않으며, 겉꾸밈에만 빠져들어 실제 공적을 돌보지 아니하며, 고집이 세서 남과 화합하지 못하고, 간하는 말을 거슬러 남을 이기고 싶어하며, 사직을 돌보지 않고 자만심이 강하고, 탐욕스럽게 고집을 세우고 외교가 서투를 경우에 그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말은 씨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3. 박한철의 경우
“사또 재판을 할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를 받아든 헌법재판소 배보윤 공보관의 말이다. ‘신속한 결정을 위해 탄핵 사유가 분명한 사안부터 선별심리하면 된다’는 헌법학계 일각의 지적을 조선시대 고을 원님 재판이라며 낮춰본 것이다.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과 재판관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건 어떤가.
“맹자에 피음사둔(言皮淫邪遁)이라는 말이 있다. ‘번드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라는 뜻이다”, “그들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하는 광장의 중우(衆愚), 기회주의 지식인·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는 것이 옛 성현들의 가르침”,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이를 모르는 뱁새는 정성껏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 “소위 대역(大逆) 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사또 재판에나 나올 법한, 온갖 비법률적 표현으로 도배한 결정문을 쓴 이들이 지금의 헌재 재판관들이다. ‘사또 재판 안 한다’는 말이 씨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4. 탄핵 반대 57인의 경우
“정치인이자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탄핵으로 되갚은 이들의 패륜은, 반드시 훗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국회 탄핵소추안 처리에 불참하며 끝까지 ‘충성’을 바친 친박계 최경환 의원이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 탄핵 반대표를 던진 친박 의원 56명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314년 전인 1702년 12월14일 밤. 사무라이 낭인 47명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모였다. 이튿날 새벽 베어든 목을 주군의 무덤에 바친 복수담 실화는 이후 주신구라(忠臣藏)라는 이름의 인형극·가부키 등으로 만들어져 현대 일본에서도 여전히 인기다. ‘충성과 복수에 대한 일본식 미화와 찬양’이라지만, 이 복수극의 발단이 고작 ‘와이로’, 즉 뇌물이라는 사실은 우습다. 사무라이 낭인 47명에 대한 막부의 최종 처분은 할복하라는 것이었다. 말은 말로 끝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 김남일 - 한겨레신문 정치팀 기자 >


[1500자 칼럼] 그랜드 벨리 통신 2

● 칼럼 2016. 12. 6. 20:0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저들을 어찌할꼬

이른 아침 커튼을 젖히니 검붉은 아침 해가 가까운 편백나무 숲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흐린 날씨가 연일 계속되는 요즘이라 탐스러운 해돋이는 반가움을 넘어 감동이었다. 나는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일출 광경을 음미하다 아랫동네로 시선을 돌렸다. 된서리가 내려 희뿌옇던 동네가 아침 햇살이 닿자 말갛게 깨어나 신선함을 더한다. 싱그러운 나의 아침은 이렇게 찬란한데, 고국소식은 눈만 뜨면 해외 톱뉴스거리이니, 소시민의 출근길이 천근만근 무겁다.
 
나는 서둘러 채비를 차리고 근거리에 있는 사업장에 바쁜 듯 들어선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건만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괜히 과장된 움직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곤 직원들이나 손님들에게 다소 과한 아침인사를 보낸다. 속에선 더 크게 더 신바람 나게 외치라고 하지만 생각 뿐 자격지심으로 움츠려드는 행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말이라도 걸어오면 한 두 마디 단 답으로 끝내고 종종걸음 치기 일쑤다. 얼굴 맞대고 몇 마디 더 걸쳤다간 작금의 고국 사태로 이어지기 십상이라 나름대로 연막을 치는 것이다. 평소 활기 넘치는 나의 생활태도가 이렇게 위축되다보면 얼마 안가서 대인공포증까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일상이다.

지금의 황망한 고국 상황은 내 개인의 잘못이 아니기에 자존심을 조금 굽히면 되련만 이곳 공직자들의 올곧은 집무 과정을 간접 경험하곤 더 안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 올곧은 공직자들이 내 가까운 이웃이자 우리의 고객이기에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 터를 잡은 곳은 그랜드 밸리의 신흥주택지이다. 오래 전 주택단지가 완공되어 주민들의 입주가 끝났건만 외부공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날 잘 조성된 인도를 느닷없이 파헤치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잘 마무리된 도로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다시 까는 작업을 반복하고, 많은 비가 내린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공사 차량이 몇 대와서 맨홀 깊숙이 안전 점검을 한다. 그리곤 부족하다 싶으면 하수관을 교체하랴 부분 땜질을 하랴 며칠을 보낸다.
도로 곳곳에 빨간 깃발이 꽂히거나 주황색선이 그어지면 그 주변은 반드시 대형 공사로 이어진다. 주민의 입장에선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지만 책임자는 이에 아랑곳 않고 파고 묻기를 밥 먹듯이 한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개보수 작업은 주택 시공자와 관계 공무원의 끝없는 줄다리기였다.
정해진 규격이나 함량에서 조금이라도 미달되거나 오차가 생기면, 그 작업이 아무리 돈이 많이 들었던들 두 번 세 번 혹은 될 때까지 가야 완공 판정을 받는다. 오죽하면 시공업자를 측은하게 여겼을까.


구시가에서는 건물을 지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완공 판정을 못 받은 사례가 있다. 처음엔 설마 했는데 이런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해가 되었다.
주택 시공업자나 건물주 인들 부족한 부분을 금전으로 해결 보려는 마음이 왜 없었을까, 아니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는 투철한 공인 정신을 가진 지방 공무원들이 한국의 현재 상황을 얼마나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한국 사람이라곤 유일한 우리 가족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 너무 커서 괴로운 것이다.
열심히 사는 소시민들에게 극도의 수치심을 안기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 날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히로뽕 시대’와 결별하기

● 칼럼 2016. 12. 6. 20:0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올해는 참 수상한 해다. 합리적 예측이나 상상력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벌어지는 일은 드물다. 지난 6월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이 나오더니, 급기야 지난 8일 미국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버렸다. 하나하나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 올해 벌어진 기상천외한 사건들은 한국에서 정점을 찍은 듯하다. ‘박근혜 게이트’에 견주면, 브렉시트나 트럼프의 당선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사우스코리아’를 국제 뉴스의 주요 무대로 만든 것은 순전히 박근혜와 최순실의 공이다.
한파가 닥친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 때도 아이를 목말태운 아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의 손을 꼭 붙잡고 행진하는 부모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왜 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는가? 박근혜에 대한 분노인가, 농락당한 법치주의·정의를 되살리기 위해서인가? 나는 왜 이 거리에 서 있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촛불을 든 건 ‘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7년 전 봄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언처럼 내게 남긴 말이다. 나는 평생 궁핍했던 어머니가 남긴 그 말의 의미를 잘 안다. 아니, 직감한다. 그건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깊이 심어 놓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잘살아야 한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1988년 8월2일 일기에서 박정희 시대를 이렇게 평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우리는 잘살아야 하고, 잘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물질적으로 잘산다는 것을, 그는, 그냥 잘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조금 부유해졌다고, 과연 잘사는 것일까? 그는 물질을 올리고, 정신·신앙·문화를 낮춘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다. 언제까지?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을 때까지!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박정희는 상징을 팔았다지만 그의 아들은 직접 히로뽕을 맞고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된 딸은 ‘뽕을 맞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뒤늦게 발각됐다. 박정희가 키워낸 재벌들은 그의 담론을 가장 충실히 따랐다. 청와대의 ‘강요’에 못 이겨 돈을 냈다고 우기지만, 재벌들이 돈을 뜯겼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장사꾼이다. 적게 주고 오히려 많이 챙겼을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는 정치권력과 재벌이 서로 주고받으며 배를 불리는 박정희식 모델의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재산의 적정한 분배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뒷받침한다고 봤다. 그래야 서로에게 ‘쫄지’ 않는 자유민이 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로마가 점령한 식민지의 부가 로마로 유입되면서 로마인들이 물욕과 탐욕에 물든 것을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박정희가 퍼뜨린 ‘히로뽕’에 중독된 사회, 사회의 부가 소수에 집중된 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다 피폐해져서, 물질적 쾌락만 남은’ 박정희식 인간의 전형을 최순실한테서 본다. 그건 일그러진 우리 욕망의 자화상일 수 있다. 박근혜를 대통령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 민주공화국을 바로 세울 수는 없다. 잘 살려면 박정희가 퍼뜨린 ‘히로뽕’을 끊어야 한다.
< 황상철 - 한겨레신문 국제뉴스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