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뉴욕에서 날아온 쑥

● 칼럼 2016. 7. 13. 08:22 Posted by SisaHan

외출에서 돌아오니 큼지막한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소지품 정도로 짐작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니 싱싱한 부추가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부재중 친구 L 부부가 다녀 간 것이다. 언제고 지나는 길에 들리겠다는 전언은 있었지만 막상 빈 걸음으로 돌려세우고 나니 서운한 마음 그지없었다.
L 부부의 정성 속에 자라난 부추들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부추김치, 부추 전, 부추 샐러드 등 건강이 뚝뚝 묻어나는 유기농 밥상을 상상하며 부추 반찬에 한껏 골몰 해 있을 즈음 조그만 비닐봉지가 딸려 나왔다.
무엇일까, 부드러운 감촉으론 생물이 아닌 듯 하여 콧잔등을 들이 미니 친근한 냄새가 후각을 간질인다. 나의 급한 마음 알기라도 하듯 살짝 여민 봉지를 풀어보니 데친 쑥 한 덩이가 얼굴을 쏙 내민다. 늘 이맘때면 더 그리운 고향 냄새를 풍기면서.
내 궁금증이 통했던지 L에게서 전화가 왔다. 뉴욕 아들네 갔다가 꺾어 온 쑥이라며 옛 생각하며 쑥버무리를 해 보란다.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에서 날아 온 쑥이라 생경함마저 들었지만 쑥은 나에게 그냥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두고 온 고향과 내 유년기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추억의 산물이다.
꽁꽁 뭉쳐진 쑥 덩이를 풀어헤치니 상념속의 그것과 거리가 좀 있는 모습이다. 냄새는 분명한데 생김새는 사촌 내지 육촌 정도에다 크기는 또 얼마나 월등한지, 넓은 미국 땅 덩어리를 그대로 닮은 듯 했다. 모국 토종 쑥이 이 정도 크기라면 말려서 약용으로나 쓰일 텐데 하는 맘으로 한 잎을 뜯어 씹어 보았다. 다행히 싱겁다고 느낄 정도의 여린 맛이 모든 음식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친구가 권유해 준 쑥버무리 보다 더 간절한 쑥 국과 쑥 개떡을 염두에 두고 일부는 냉동고에 그리고 나머지는 숭숭 썰어 국 끓일 준비를 했다.
식탁에 앉은 아이가 쑥 국을 보며 의아해 한다. 연유를 들려주었더니 ‘혹시 센트럴 파크에서 꺾으신 게 아닐까요? 하며 씩 웃는다. 학창 시절, 하계 강좌를 위해 뉴욕에 머물 무렵, 센트럴 파크에서 많이 본 식물이라며 그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얼굴이 상기되어 간다. 우리 시대의 전유물로만 여긴 쑥이 후세에도 쑥쑥 뻗어가고 있으니, 그래서 쑥인가 보다.


어린 시절 쑥 캐기는 우리 자매들에게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봄이 되면 할머니는 곧잘 바구니와 칼을 챙겨 선바람을 잡으시고 우린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의 엄호 아래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면 자매들은 앞 다투며 앞산으로 달렸다. 아버지의 엄한 훈육 탓에 집안에선 실컷 웃고 떠들 수 없었던 그 시절 쑥 캐기는 얼마나 달콤한 구실이었던가.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까마득히 잊어버린 한 기억을 끄집어 낸다.
형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었을 때, 엄마인 내가 떡 해준다며 쑥을 캐 오게 했단다. 형제를 포함한 또래 여섯 명이 산으로 몰려가서 쑥은 뒷전이고 칼싸움, 총싸움 하며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른단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행복하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아들들에게 쑥 캐러 보낸 젊은 엄마의 속내는 호연지기를 염두에 두었다기 보다 자신이 경험한 해방구를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떡은 해주더냐고 물었더니 사 주어서 먹은 기억이 어렴풋하다고 한다.
쑥 바구니가 오죽 신통찮았으면 사서 먹였겠냐 고 뒤늦게 한마디 했더니 아이는 ‘그러게요.’ 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추억 저편으로 이끌어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벤진의 추억’을 넘어

● 칼럼 2016. 7. 13. 08:21 Posted by SisaHan

사람은 누구나 평소의 언행을 통해 보편적인 평가를 받는다. 선거 때 표의 심판도 물론 그렇다. 특히 공직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이기가 아닌 이타(利他)정신이 투철한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된다. 봉사와 헌신의 섬김의식과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 아니면 유권자를 속이는 표의 구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인사회에 있어서도 평소 동포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하며 덕을 쌓은 인물이라면 자연스럽게 추앙을 받고, 원한다면 주류정치의 문턱도 쉬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의 후원 열정이 저절로 달아오를 테니까.
하나의 추억을 꺼내보자. 캐나다 한인사회의 주류정치 도전사에서 2006년 3월30일 치러진 온주의원 보궐선거는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극적이고 뿌듯한 선거전일 것이다. 선거에서 한인후보는 분패했지만, 한인의 단결과 저력을 보여준 사례로는 오늘 현재까지 단연 일등감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후보 벤진, 42살의 이 젊은 후보는 혜성처럼 정계에 나타난 한국명 진병규였다. 그는 한인사회에 얼굴을 내민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측면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다만 그는 주류방송사의 기자와 앵커로 16년간 명성을 쌓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부친이 캐나다 대사를 지낸 연고가 있었다. 주수상의 보좌관 자리에 보임됐다가 수상의 천거로 보선에 나선 그는 그래서 한인사회에 친근하게 다가왔다. 「유명 방송인 출신 한인을 주의원으로 만들어 큰 정치인으로 키우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작동되면서 그의 선거전은 마침내 한인들의 ‘원풀이 대상’으로 부상해 동포사회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 후원회장을 맡은 원로 이상철 목사는 이렇게 호소했다. 『~벤진은 동포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어서 정계에 등단하면 한인 동포사회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낼 것도 분명하다. 동포사회는 벤진을 도와 그를 큰 인물로 키워 캐나다 전체를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해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로 선거활동을 적극 돕는 일과 선거 자금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 목사의 호소와 설득이 아니어도 한인사회에서는 주의원과 연방의원을 내야 한다는 한인 정치인 대망의 목마름이 강했던 터라, 좀 과장해서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다시피 캠페인을 도왔다.
하지만 선거구는 NDP거물 고 잭 레이튼의 아성이었던 토론토 댄포스였다. 자유당 사상 가장 높은 39.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아깝게 2천4백여 표 차로 분루를 삼켰다. 그럼에도 한인사회는 큰 아쉬움 못지않게 서로 박수를 치며 자부심을 주고 받았다. 선거운동 불과 25일만에 후원금을 15만 달러나 모으는 저력으로 자유당과 온주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벤진은 졌지만 동포사회는 이겼다」는 말이 시사 한겨레 지면에 등장하고 한인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선거 열흘 후 한인회관에서는 이례적으로 ‘후원 감사의 밤’이 열려 주정부 인사들과 한인동포 등으로 붐빈 행사장은 마치 당선감사의 밤 같은 분위기를 보였다.
이날 벤진은 이렇게 말했다. 『한인사회의 힘을 이제는 자유당과 주정부 등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후원금을 보내주고 희망을 보내준, 동포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으며 정계에 많은 후배들이 진출할 길을 여는 정치적 경력을 쌓아 나가겠다…』 당시 살아있던 부친 진필식 전 대사는 『뜨거운 성원에 감사하며 가족의 영광…우리 민족혼이 바람을 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누렸던 벤진은 선거 후 한인사회에서 잊혀졌다. 그의 당시 약속은 빈말이 됐고, 한인동포들은 한 때 그런 젊은이가 있었다는 아련하고 허탈한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 ‘벤진의 추억’의 전말에서 느끼듯 한인사회와 정치인의 여망과 보응(報應) 사이에 거리감이 없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토로한다.
벤진에 이어 2012년에는 실협 전무를 지냈던 김근래 씨가 주의원에, 그리고 2014년에는 연방 총선에 조성용 씨와 주총선에 조성준 시의원이 잇달아 도전했다. 그 때마다 한인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인 정치인을 만들자!”며 힘을 모아 도왔다. 특히 조성용 후보는 불과 9표 차이로 후보경선에서 분패하는 아슬아슬한 고지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다시 조성준(Raymond Cho:80) 시의원이 온주의원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나섰다. 그런데 왠지 조 후보를 후원하는 열기가 종전처럼 뜨겁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시의원 8선에 이르기까지 돕는데 동포들이 지친 것일까?
온주 보수당이 당수까지 나서 전력 지원하고, 선거구가 시의원 선거구와 겹친데다 사퇴한 당선 의원과 한번 겨룬 적이 있는 지역이어서 승리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조 시의원은 8선을 거치며 선거에는 경험도 많고 노련하다. 나이가 많은 것이 걱정이지만, 꼭 당선돼 이번만은 한인사회의 ‘원한’을 꼭 풀어줬으면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법조 비리의 기막힌 반전

● 칼럼 2016. 7. 13. 08:18 Posted by SisaHan

그가 소록도를 찾은 것은 2004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 섬에 강제수용돼 인권을 유린당한 한센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정부는 2001년 5월 구마모토 지방법원에서 ‘나병예방법’(1996년 폐지)에 따른 강제격리 규정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오자 한센병 보상법을 제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 일본 구마모토의 변호사단체가 대한변호사협회(변협)에 이 사실을 알려왔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한센인들도 똑같은 정책으로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협이 일본 후생성을 상대로 보상금 청구 소송을 추진한다면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변협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주저없이 소송을 맡겠다고 나섰다. 수임료가 없는 공익소송인데다 승소 가능성도 희박해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고참 변호사와 함께 단둘이서 소송에 착수했다. 주중엔 ‘생업’을 처리하고, 주말엔 한센인들을 만나는 ‘이중 생활’이 시작됐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두 아이와 동행할 때도 많았다. 혹시라도 한센병에 감염될까 걱정해주는 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록도를 찾을 때마다 오히려 힐링이 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할머니들께서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손으로 박수치면서 ‘우리 변호사님 오셨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소록도 주민들이 끓여준 된장찌개는 일류 호텔의 뷔페보다 맛이 좋았다.
이들의 소송은 일본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지만, 일본 정부의 2006년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내 한국의 한센인들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본의 양심적인 변호사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일본 법정에서 벌어질 심문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그와 고참 변호사의 도전이 없었다면 특별법은 결코 불가능했다. 동료 변호사들의 가세로 한센인 소송 지원단을 만든 그들은 2011년부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고, 지금 대법원과 서울고법 등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난달 20일 열린 역사적인 소록도 현장 재판은 이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것이다.


변호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지금보다 따가운 때가 또 있었을까. 일부 전관 변호사들의 일탈로 변호사 집단이 탐욕의 화신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는 ‘0’이 한두 개 더 붙는다. 서민들은 평생 구경도 못하는 액수다.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전화 한 통화로 사건을 처리하는 ‘신공’을 부리는 대가다. 그 신공을 가능하게 만든 건, 그들과 똑같은 전관예우를 꿈꾸는 후배 판검사들이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공생 관계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법조인의 직업적 소명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나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변호사들이 더 많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한센인 변호인들처럼 말이다. 전관 변호사들의 ‘전화 한 통 값’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임료조차 받지 않는 공익소송 전담 변호사들도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운호 법조비리’ 수사를 계기로 상대적으로 이들이 주목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조짐이 영 좋지 않다. 정운호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 여파로 사건이 대형 로펌에 몰린다는 소식이다. 홍만표·최유정 변호사가 받았다는 어마어마한 수임료 탓에 로펌의 수임료 단가가 올랐다는 말도 들린다. 최근의 롯데그룹 수사는 대형 로펌의 배만 불려줄 것이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 대형 로펌이야말로 변호사 시장을 교란한 주범으로 꼽히는데 ‘법조로비’ 수사의 수혜자라니 기막힌 반전이다.
< 이춘재 - 한겨레신문 법조팀장 >


[1500자 칼럼] 서해에 국가는 없다

● 칼럼 2016. 7. 4. 16:49 Posted by SisaHan

북방한계선 근처로 몰려오는 중국 어선을 바라보며, 서해의 어부들이 묻는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여론에 밀려 정부가 무력시위에 나섰다. 단속이 효과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정부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벌어지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은 한-중 관계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결과다.
중국 어선들은 북방한계선을 타고 들어왔다가 단속을 하면 북쪽으로 피신한다. 북한 경비정이 내려오지 못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2009년 ‘대청해전’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 어선을 단속하기 위해 북방한계선으로 내려온 북한 경비정을 우리 함정이 격침시켰다. 2014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우리 군의 최우선 목표는 북방한계선 사수다. 목표를 달성했다.
결과는 어떤가? 북한은 단속할 수 없고 우리 어선은 접근하기 어려운 틈을 타, 중국 어선들이 몰려왔다. 긴장의 바다가 중국 어선들 입장에서는 기회의 바다가 되었다. 평화의 바다가 되지 않으면 중국 어선을 단속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서해에서 긴장의 파도가 친 것이 벌써 9년째다. 어민들의 절망이 깊다. 정부는 언제나 지원대책을 말한다. 늘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고기를 못 잡고 관광객이 오지 않는데,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해양 생태계도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한강 하구의 생태계가 깨지면 결국 서해 중부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민들은 답을 알고 있다. 아니 누구든지 이성의 눈으로 보면 출구를 알 수 있다. 여당 의원과 여당 소속의 인천시장이 ‘남북공동어로’와 ‘남북해양시장’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2007년의 10.4 선언을 파기해 놓고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에라도 답을 안 것이 어디인가? 환영할 일이다.
다만 남북공동어로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돈을 주고 북한 어장을 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동어로 수역은 바다의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평화수역 말이다. 누구의 바다가 아니라, 공동의 바다를 만들자는 것이다. 북방한계선이라는 직선을 고집하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점선의 지혜를 받아들여야, 남북 어부들의 협력이 가능해진다. 경제적 접근만으로 어렵고, 평화와 경제가 어우러져야 한다.


공동어로 수역을 어디에 만들어야 할까? 이익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고, 그곳에서 호혜의 협력을 시작해야 한다. 연평도 앞바다가 충돌의 바다가 된 이유는 그곳이 바로 황금어장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바다를 공동번영의 바다로 전환한 해외 사례들이 적지 않다.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누구나 답을 안다. 박근혜 정부가 현실을 보기를 바랄 뿐이다. 서해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연계가 왜 문제인지를 알려준다. 서해처럼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적지 않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모두스 비벤디(잠정협정)의 지혜다. 비핵화에 모든 현안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와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서해는 역설의 공간이다. 냉전의 현장으로 변한 서해가 한반도에서 시들시들 말라죽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언제나 평화의 꽃은 갈등의 땅에서 핀다. 관계가 악화되면 접경은 전선으로 변하지만, 관계가 개선되면 접경에서 협력이 시작된다. 서해에서 무너진 평화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부들이 삶을 지속하는 것, 그것이 서해를 지키는 일이다. 국가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어부들에게 정부가 답할 차례다.
< 김연철 -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