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주 노동자 교수

● 칼럼 2016. 10. 18. 19:00 Posted by SisaHan

캐나다 대학에 임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중국인 교수임용후보자와 저녁 식사가 있었다. 대학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협상의 자리였다. 5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식사 도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캐나다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서 교수를 뽑는 자리에, 정작 캐나다인은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미국인, 필자는 한국인, 임용결정권을 가진 연구소장은 오스트리아, 후보자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동아시아 국가에서 외국인 교수를 보는 일도 이제 어렵지 않다. 중국은 엄청난 자본을 무기로 선진국의 외국인 교수를 유혹 중이고, 3년 연속 노벨상에 빛나는 일본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찾아가는 나라다. 한국도 2002년부터 외국인 전임교원을 늘리려는 자구책으로 브레인 풀 제도를 도입했고, 꾸준히 외국인 전임교원을 확보해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그 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참담한 일이다. 서울대를 떠나는 외국인 교수들에 대한 인터뷰가 신문을 도배 중이고, 외국인 전임교원의 수는 3년 연속 하락 중이다. 한국 대학은 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전시행정의 결과란 참혹하다. 취지는 좋았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평가에 외국인 교원의 가중치를 높였다. 대학들은 그 제도를 역이용했다. 무늬만 외국인인 한국계 교수들이 무더기로 임용되었다. 실제로 브레인 풀 제도 아래서 채용된 외국인 교수 중 한국계 외국인은 40%를 웃돈다.
이런 작태를 주도한 대학이 서울대라는 사실도 분개할 일이다. 그보다 앞서 서울대는 학문적 근친교배의 비참한 현실부터 혁신해야 할 것 같다. 서울대 출신 교수의 비율이 85%가 넘는 대학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교류란 불가능하다. 그런 위계로 가득한 곳에선, 절대로 자유로운 사상이 움틀 수 없다.
2016년, <네이처>에 한국파스퇴르연구소장 하킴 자바라의 글이 실렸다. 인터뷰는 폐부를 찌른다. 한국의 연구 환경이란,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논문을 내”기 어렵고, “유치원을 함께 나왔으니 너를 지원해줄게”라는 농담이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 영어로 쓴 연구비 계획서를 받아주지도 않는 곳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라는 경계는 사라졌다. 실리콘밸리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주류가 되었고, 미국은 H1B라는 비자로 이들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페이스북과 구글과 애플이 삼성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15년을 허비한 한국 교수들에게, 외국인이란 금발의 서양인이었을 게다. 검은 머리로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를 받은 자신도 실은 외국인었음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가르쳐 박사로 만든, 이주 노동자들과 같은 국가 출신의 제자들에게 절대 서울대 교수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미 과학기술 대학원 진학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고, 비대해진 대학원은 동남아 유학생들로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머릿속에 외국인 교수란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21세기의 한국은 20세기 중반 유학을 떠났던 미국과 닮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조선에 가 있다.
눈을 떠 현실을 보자.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다. 이 다문화 시대에,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학문에서조차, 우리는 외국인을 차별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한 논문을 내고 졸업한 이주 노동자의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동지애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는 외국인인가? 질문해봐야 한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


[한마당] 도라지, 백두산, 민주화 들

● 칼럼 2016. 10. 18. 18:58 Posted by SisaHan

‘우리가 백남기다’라는 구호가 목구멍에 걸려 차마 나오질 않는다.
나는 그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는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저 거대한 차벽을 누군가는 뚫어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인간이 버스와 줄다리기를 한다는 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체념했고, 실은 두려워서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 나는 백남기가 아니고, 백남기일 수도 없는 것이다.
경찰이 마지못해 내놓았다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 속에선 총 4번의 살수가 있었다. 세차례에 걸친 경찰의 공격에도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대포를 쏘아도 달아나지 않는 사람들, 겁을 주어도 겁을 먹지 않는 사람들, 백남기 농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네번째 살수는 정확하게 그를 조준했다.
이튿날 범상치 않은 그의 운동 이력보다 먼저 알려진 것은 그의 딸이 쓴 편지였다. 외국에 살아서 곧바로 달려올 수 없었던 그녀는 ‘사진 속 아버지의 피묻은 얼굴을 닦아주고 싶어 미칠 것 같다’고 썼다. 그녀의 이름은 ‘민주화’. 나는 심장이 폭 꺼지는 것처럼 슬펐다.


그리고 뒤이어 알려진 또다른 이름들. 민주화의 언니 ‘도라지’와 오빠 ‘백두산’. 민중(농민)과 통일을 뜻한다고 했다. 이 아름답고 장엄한 이름 짓기에 나는 목이 메었다. 분단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저 이름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경찰은 도라지와 백두산과 민주화의 아버지를 쏘았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은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전 국민의 조문을 받는 상주가 되었다.
“경찰의 손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경찰의 손에 넘길 수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버지를 지켜내겠다.”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생방송 뉴스 카메라 앞에 서야 하고, 수만명의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쳐야 하는 장례는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그들은 흔들림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며 이 암울한 시대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되 위엄을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백남기 농민의 삶을 본다. 그들은 살아있는 백남기다.
이것은 전쟁이다. 그 전선에 죽은 백남기의 몸과 그의 정신이 깃든 도라지, 백두산, 민주화가 있다. 우리가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 그것은 이 땅에 생명과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싸움으로 확장된다.


그 이름이 갖는 놀라운 위력에 똥물을 끼얹으려는 간악한 심리전이 시작되었다. 공격하면 할수록 공격하는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기묘한 진흙탕 싸움에도 저들은 기꺼이 몸을 던진다. 도라지를 짓밟고 백두산을 모욕하고 민주화를 조롱하여 저들이 지키려는 것이 결국 부패한 권력과 자본임을 그 이름들은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백남기 농민이 파종했다는 우리밀로 밥을 해 먹으며 저항하는 한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계엄군에게 붙들려 옥살이를 하면서도 불법적 정부에 애걸하지 않겠다며 항소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 ‘돈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라며 한해도 우리밀 농사를 거르지 않았던 사람, 해처럼 빛나던 여인과 함께 도라지, 백두산, 민주화를 키워낸 사람,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세’ 했던 그의 마지막 투쟁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장엄한 존재인가. 나는 백남기는 될 수 없으나 그가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도라지, 백두산, 민주화 들’의 곁에 한 자리는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떠나는 길, 이제 우리가 그의 울타리가 될 차례이다.


<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


[1500자 칼럼] 보물 찾기

● 칼럼 2016. 10. 11. 18:16 Posted by SisaHan

요즘은 독서와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줄이고 있다.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화되어 금세 눈이 피곤해지고 머리가 아파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신록이 우거진 창 밖 경치를 바라보거나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관심을 끌었던 음식을 만들어 본다. 때로는 숲을 산책하며 호숫가에 나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지친 눈과 혼탁해진 마음에 휴식을 준다. 이렇듯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맑아오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행복감에 젖어 든다. 이토록 소소한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힌두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신들은 지구를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행복을 찾아내는 모험을 시키고 싶어서 지구상 어딘가에 행복을 숨겨두자고 한다. 그럼 그것을 어디에 숨겨 놓을지 논쟁이 벌어져 “산 정상에 숨기자. 그러면 못 찾을 거다.” 또 어떤 이는 “바닷속 가장 깊은 곳에 숨기자.”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행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숨기면 아마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결정지었다. 그래서 행복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것,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을 스스로 찾는 일, 바로 이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메시지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행복의 가치를 오로지 외적 요소인 물질, 성공, 권력에 둔다는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라 여겨진다.


내 주위에는 곁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지인들이 여럿 있다. 그들 중 S씨는 운전을 좋아해서 잠이 안 오는 밤이나 심심한 낮이면 아무 곳이나 슬며시 다녀오는 습관이 있다. 때로는 온타리오 작은 시골마을을 벗어나 퀘벡이나 뉴욕까지도 바람처럼 갔다가 돌아온다. 그만큼 떠나는 준비가 복잡하지 않다는 의미다.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간편하게 나서며, 구태여 비싼 호텔방도 필요치 않아 자동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기 일쑤다. 그래도 최고의 즐거움과 행복감에 빠져있다. 일상의 행복에 푹 젖어 살아가는 그는 푸른 잔디 깔린 공원에서 책을 읽는 여유로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달콤함, 말 없는 바다와 마주하는 정겨움, 한적한 시골길을 운전하는 호젓함, 차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아늑함.. 등등 행복으로 채워주는 소박한 요소들을 진정 좋아하고 맘껏 즐긴다.

헌데, 옆에서 그의 말을 듣는 우리까지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행복 바이러스는 농도가 다를지라도, 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 감염시킬 능력이 있다 한다. 내가 행복하면 내 옆 사람도 행복해지고, 내 옆 사람이 행복하면 그 옆의 옆 사람까지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서로간에 행복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밀접한 관계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가능하면 행복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할 이유와 내가 행복해야 할 명분도 바로 여기에 있지 싶다.
 
젊은 날의 나는 행복을 찾아 나설 때마다 깊은 수렁에 빠졌었다. 무조건 하고 싶은 일과 누리고 싶은 것을 움켜쥐려고만 했으니, 이민 삶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제 60대 후반에 들어서니 세상을 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졌다. 철이 들었나 보다. 행복의 조건을 더 이상 거창한 것에서 찾지 않는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를 누리는 감사, 창 밖에 펼쳐진 우거진 숲과 뭉게구름을 품은 가을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기쁨, 활기찬 창 밖 세상을 미소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언제든지 친지들과 마주할 수 있는 즐거움, 귀여운 손주들을 떠올리며 얻는 충만… 등등, 바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것들을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 얻어가고 있다. 또한 행복은 목적이 아닌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깨우침에 있다.
기실 우리는 불확실한 내일이란 명목 아래 적절한 때를 놓치며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이즘 내 소중한 일과의 하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위해 내 안 어딘가에 숨겨진 일상의 보물을 찾는 일이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3일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학 명예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일본은 3년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이력은 눈부시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기초과학 분야에서만 2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냈다. 문학상과 평화상을 합치면 25명에 이른다. 일본은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가 됐다. 노벨상에 관한 한 일본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앞섰다.


일본이 노벨상 강국이 된 것은 일차로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오랜 관심과 투자 덕분이다. 그 기원을 따지면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정부는 일찍부터 과학 선진국에 유학생을 파견했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1901년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로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오르기도 했다. 이어 1917년 이화학연구소를 세운 뒤로 30여년 만에 기초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 일본이 기초과학 선진국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100년 앞을 내다보는 국가의 지원과 노력이 있었다. 이와 함께 자기만의 분야를 진득하게 파고들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일본을 기초과학 강국으로 만든 또다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뽑힌 오스미 교수도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신념으로 ‘세포의 분해’라는 낯선 분야에 몰두한 것이 수상의 영예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사회가 만약 노벨상을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을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일은 국가가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기초과학 분야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단기 실적에만 매달리는 조급한 투자로는 노벨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노벨상 이전에 국력을 뒷받침하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다.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 가능성 있는 인재들이 기초학문 분야를 외면하고 지금처럼 의대로만, 그것도 성형외과 같은 돈벌이하기 좋은 곳으로만 몰리는 것은 커다란 낭비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깊고 돈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탓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분위기에서는 끈기 있는 노력을 요구하는 큰 업적이 나올 수 없다. 국가의 장기적인 관심과 함께 사회 분위기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