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노예 민주주의가 문제다

● 칼럼 2016. 11. 8. 20:28 Posted by SisaHan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최순실 공화국’,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속에 ‘탄핵’, ‘하야’라는 말이 어린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시국선언과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가히 ‘혁명 전야’의 분위기다.
최순실의 파렴치한 행각은 분명 엽기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지난 4년 동안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여당, 대기업은 물론 학교와 대학에서도 그의 불법-탈법-초법적 행태가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요즘 최순실은 공민왕 시대의 신돈이나 제정 러시아의 라스푸틴에 곧잘 비유된다. 그러나 신돈과 라스푸틴은 ‘왕이 곧 국가’였던 봉건시대의 인물이다. 최순실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순실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봉건시대 군주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함을 폭로한다.


토론은커녕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장관들, 대통령의 수족에 불과한 청와대 인사들, 대통령의 ‘상머슴’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있는 여당 정치인들, 권력자의 한마디에 즉각 수십억원을 갖다 바치는 재벌들, 부당한 압력에 무릎 꿇고 이득을 취하는 교수들-이들의 행태는 주인 앞에서 설설 기는 노예의 모습 그 자체다. 민주공화국에서 ‘지도층 인사’란 자들이 사실은 하나같이 권력의 노예였던 것이다.
장관, 재벌, 정치인, 교수 등 ‘지도층 노예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조직에선 절대권력자들이다. 그들은 윗사람에게 노예로 행세하듯, 아랫사람에게는 잔인한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들의 지배를 받는 공무원, 노동자, 당원, 학생들은 노예처럼 행동하기를 강요받는다. 권력에 굴종하는 노예근성은 다시 굴종을 강요하는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간형이다. 물론 이들은 앞에선 노예인 척하면서 뒤에선 담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궁리만 하는 노회한 무리들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선거를 치르고, 법치를 외친다 해도, 그건 허울뿐이다. 권위주의와 노예근성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는 ‘노예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이 나라의 지배자들이 펼치는 철면피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그들이 국민을 노예로 얕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거짓말은 노예를 대하는 주인의 전형적인 버릇이다. 국민을 노예, 심지어 ‘개돼지’로 보는 그들에게 거짓말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노예에게 하는 거짓말은 양심의 가책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노예 민주주의’ 사회에선 선거도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 그건 기실 노예들이 4년 혹은 5년에 한번씩 투표를 통해 새 주인을 뽑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문제는 최순실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이번 사태를 한국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체적 민주주의로, ‘노예 민주주의’에서 ‘주권자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최순실 사태로 개헌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제 국민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오로지 대통령 뽑는 절차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민의 권리 신장은 도외시한다면, 이는 국민의 노예 상태를 영속시키려는 기득권의 책략으로밖에 볼 수 없다. 모든 개헌 논의의 초점은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


[한마당] 하야도 무리가 아니다

● 칼럼 2016. 11. 1. 19:22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됐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공직자가 아니라 ‘자연인’일 뿐인 ‘40년 지기’ 최순실에게 연설문 수정을 맡기는가 하면 안보와 직결된 국가 기밀을 알려주고 청와대나 정부 주요 부처의 인사에 개입하도록 한 한국 헌정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건이 폭로되며 대다수 국민들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세계적인 나라망신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래 박대통령은 ‘독선, 무능, 불통, 아집’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녔다. 게다가 편집증이라고 해야 마땅할 정도로 ‘비선 측근’과만 교류와 대화를 하는 생활 ‘관습’은 야당이나 그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생산적 논의와 협의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집단이나 개인이면 국회든 시민단체든 민주•진보 진영 인사들이든 누구든 간에 적대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최순실 파일’을 보면 박 대통령이 최순실을 단순히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아예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고 볼 정도로, 그 어떤 나라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탈이 드러난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청와대 제1부속실장 정호성(‘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이 거의 날마다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강남구 논현동 최순실의 개인 사무실로 ‘배달’했다고 한다.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이성한은 “자료는 주로 청와대 수석들이 대통령한테 보고한 것들”이었다며 “최씨의 말을 듣고 우리가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올리면 그게 나중에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청와대 문건이 돼 거꾸로 우리한테 전달됐다”고 증언했다. 전 대통령 노무현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은 인터뷰에서 “국정 운영은 말로 하는 것이고 대통령 연설문은 그 정점”이라며 최순실이 연설문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직을 스스로 최순실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국민들은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최순실 대통령’이라고 불러야겠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 파일’ 보도 뒤 20시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25일 오후에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회견장에 나와 90여초 동안 사과문을 읽고 나서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떠난 장면을 녹화로 내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최순실 파일’에 입력된 2백여 가지 항목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다. 그리고 초대 비서실장 허태열을 김기춘으로 교체한 것이 취임 6개월 뒤인데 ‘보좌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시기에 최순실의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그 어떤 국민이 이 말에 진정성이 있다고 받아들일까.


최순실은 대북 관련 기밀들도 입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 인사에 개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식 축하행사 기획사 선정을 주도하는 등 실질적으로 취임식을 총괄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순실 파일’이 공개된 이후 SNS의 실시간검색어에서는 ‘탄핵’과 ‘하야’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야당은 물론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에서도 박근혜 책임론과 특검 요구가 거세다. 그가 24일 국회에서 거창하게 제안한 ‘임기 내 개헌 주도론’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여소야대 체제의 세 야당은 탄핵소추안을 협의해야 할 것이다. ‘최순실 파일’ 말고도 탄핵 사유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의문의 ‘7시간 행방불명’, 국회에서 논의나 의결을 거치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한 일, 당사자들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를 일화 10억엔을 받고 없던 일로 해버린 사실, 성능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드를 배치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재벌들에게 출자를 강요하다시피 해 설립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최순실이 실질적으로 사유화한 데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비호한 사실 등등….


여기서 결론적으로 강조하려는 점은 나라와 국민,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국정마비를 끝내고 박 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사퇴를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나라가 들끓고 우레처럼 울리는 ‘탄핵’과 ‘하야’의 함성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다수의 주권자들이 강하게 요구하면 떠날 때를 바로 알고 떠나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북풍’ 같은 데 의지하거나 어떤 사건을 터뜨려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기에 미몽(迷夢)으로 끝나고 말리라.
<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1500자 칼럼] 결혼 주례사

● 칼럼 2016. 10. 25. 19:35 Posted by SisaHan

내년으로 은퇴를 선언한 목사가 지나간 이야기를 어찌 한 두 마디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 이 칼럼을 통해 나는 한 주례사를 소개한다.
지난 목요일 밤 나는 한 커플의 켤혼식을 주례했으니 그 의미가 남달랐다. 남다르다고 한 것은 그 날의 결혼식은 내가 목사로서 2대에 걸친 결혼식이었다는 점이다. 신랑의 아버지 장로님의 결혼식을 주례했는데 그 아들의 결혼식까지 결혼을 주례했으니 진짜 감개가 무량했다. 한 교회에 오래 있으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생각할 때 나는 오늘의 주례사는 그냥 설교로서 할 것이 아니라 두 내외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하고 그것을 새길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주례사를 Word Play 하면서 1 2 3 으로 나누어 기억하기 좋게 받아들이기 쉽게 의미를 담으면서 설명해주었다.
여기 그 문장들을 소개하는데 제목은 ‘하나에서 열까지’ 였다. 영어로는 10 Marriage Commandments로 만들었다.

1. 한 분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라. The One and only God you will serve and obey.
2. 두 사람이 하나 되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라. The Two of you will become one family.
3. 세 개의 가정은 모두 하나의 가정임을 기억하라. The Three families, yours, hers, his wil become one.
4. 사랑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함께 극복하는 열쇄가 된다. The Four-most(Foremost) answer to all problem is love.
5. 오해와 갈등은 언제나 그 날로 해결하고 잠자리로 들라. The Five million misunderstandings in relationship should be resolved before you sleep.
6.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을 피하라 The Sixth sense is not a trustworthy guide.
7.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하게 나타남을 기억하라. The Seven colours of the rainbow is just as vibrant and as God’s love for you.
8. 팔 명의 노아의 가족을 살린 방주가 바로 이 가정이 되라. The Eight people were saved from the flood by the ark. Obey God and build your home like He told Noah to build ark, and it will shield you and protect you from the “floods” of this world.
9.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살자. The Nine lives are for cats, you have one. Live honestly, fairly and good.
10. 열 가지의 말보다 하나라도 실천하고 살자. The Ten excuse is you have nothing compared to one act of service.

위의 열 가지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하든 교훈을 주고 두 사람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다. 2대에 걸친 귀한 가정인데. 이미 아버지 되는 장로님 내외분은 우리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시는데 어찌 이 두 신랑 신부에게 축복하지 않으랴?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나 내가 결혼생활에 있어 팁으로 드린 말씀이나 중심된 이야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자는 이야기다. 시편 127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셔야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셔야 파숫꾼의 경성함이 헛되지 않겠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가정, 신앙의 가정”.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사화가 그리운 사람들

● 칼럼 2016. 10. 25. 19:31 Posted by SisaHan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지 4년째, 조선은 왕권의 기반이 다져진 반면, 당파싸움이 심화되면서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을 향하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치열한 권력공방이 공존이 아닌 사생결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사림파 김종직과 김일손 등이 요직을 꿰차며 득세하자 큰 위기를 느낀다. 김종직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옛 중국의 초나라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서초패왕이 된 것을 빗대어 비판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을 쓴 기개있는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은 세상을 떠난 스승의 글을 자신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옮겨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이 훗날 자파를 몰락시키는 피바람의 단초가 될 줄이야.


사림(士林)들을 아니꼽게 보던 훈구파는 자파 이극돈이 마침 성종실록을 만드는 당상관으로 임명되자 대반격의 꼬투리를 잡아낸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에 동조하며 사초에 올린 김일손의 글들을 발굴해낸 유자광 등 훈구파는, 때마침 사림의 훈계를 귀찮아 하던 연산군에게 이를 고해바치며 역모를 품은 것이라고 덮어 씌운다. 사림파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연산은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처형한다.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또 수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렇게 어이없이 모반죄로 몰린 사림 사단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세조의 왕위찬탈 40여년이 지난 뒤 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의 스토리이다.
그 뒤에 벌어진 1504년의 갑자사화, 이어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1545) 등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史禍) 모두가 하찮은 트집을 잡아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살시킨 비극적 앙갚음의 참화였다.

그로부터 500년이 흐른 현대 한국 땅,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이 시절에 정치권의 수준낮은 대립상을 보며 조선의 사화가 떠오른 것은 과도한 비약일까?
전직 장관이 무슨 의도로 썼는지는 모르나, 회고록에서 까발린 10년 전의 정부 외교시책 결정 내용을 두고 느닷없는 소동에 탄식이 나온다. 북한과 내통했느니, 북의 종이 되었느니 하며 원색적인 색깔론으로 호들갑을 떠는 여당, 그들은 야당은 물론 유력 대선 예비 주자를 깎아내리고 상처를 주기위해,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떨고 있다.
유엔에서 의사표시를 하는 북한인권에 대한 정부결정을 대통령을 제쳐놓고 청와대 비서실장이 최종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중에서도 상식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절벽인 것과는 달리 당시는 남북간 지극히 우호적으로 공식왕래가 잦았던 때였기에, 대통령의 기권 결정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기에는 무리임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그때의 비서실장을 애먼 표적으로 삼아 ‘국기문란’이니 ‘주권포기’요 ‘반역행위’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형국은 참으로 가관이고 저질이다.


근래 정권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거지를 쓰는 말이 곧 ‘국기문란’인데,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어떤 게 진짜 국기문란일까. 수사를 받는 피의자인 민정수석이 수사감독을 하고 수사보고를 받는 검찰의 수사야 말로 변명할 수 없는 국기문란 아닌가? 대통령 비선실세라는 한 여인이 공무원을 동원해 이상한 재단들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고, 전경련을 시켜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을 긁어모으더니, 자신의 딸 해외 승마훈련에 쏟아붓는 정황, 그리고 명문 여대 입학과 학점비리를 압박해 학사관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학교망신은 물론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 것들이야 말로 국가와 대학을 사유화한 국기문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부패 흑막은 극력 덮으면서 엉뚱한 트집으로 극한 정쟁과 국론분열을 꾀하고 있으니, 도저히 국정을 책임진 세력의 수준과 양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저급하고 비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유력 대선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그렇게 적과 내통하고 반역행위를 했다고 믿는다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대공 수사당국이 왜 당장 잡아들여 치도곤을 가하지 않는가? 속이 빤히 보이는 정치공세요, 북풍공작이며 추잡한 색깔론의 재탕이다. 정치적 매장까지를 노리는 현대판 사화 획책의 술수라고나 하면 맞을 수준이다.
그러니 이 답답한 뉴스들 속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나라를 이 꼴로 만드는 지도자를 둔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시대가 수백년 변해도, 내우외환의 격랑이 이는데도 한치 변함없는 파당과 적대의 정치악습에 골병드는 나라가 정말 걱정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