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49명이 숨지는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은 어떤 이유에서든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용납될 수 없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가 범인과 조직적 연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여러 건의 무기를 준비한 범인이 평소 이슬람 과격세력에 동조해온 사실에 비춰볼 때 자생적 테러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2월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에서도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진 파키스탄계 부부의 자생적 테러로 14명이 숨진 바 있다. 이런 테러는 미리 대비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가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해 미국 안팎에서 거센 반발을 산 바 있다.


또 하나 지적돼야 할 것은 총기 규제 문제다. 지금 미국 안에는 인구 규모와 비슷한 3억정 안팎의 무기가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려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최근 시도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의 총기 범죄자들은 여러 건을 사용해 대형 사건을 일으키는 경향을 보인다. 한 조사를 보면, 미국 인구는 세계의 5% 정도이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대형 총기사건(일반인을 4명 이상 살해한 사건)의 31%가 미국에서 일어났다.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이번 범행의 동기로 작용했는지도 논란이 된다. 그런 점이 있더라도 범인의 개인적 잘못이지 이슬람이라는 종교 또는 특정 이슬람권 국가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 차별은 보편적 인권에 대한 도전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범인(30)은 아프간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으며 보안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에는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주민이 많이 있다. 미국 사회나 정치권이 제대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한다면 좌절 상태에서 과격한 행동을 할 젊은이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도 타산지석이 된다. 테러 거부, 테러가 발생할 수 있는 토양에 대한 경각심, 소수자에 대한 편견·차별과 싸우기, 사회 통합 노력의 중요성 등이 그것이다.



[1500자 칼럼] 교회의 위기 VI

● 칼럼 2016. 6. 7. 16:28 Posted by SisaHan

다시금 교회의 위기를 한번 더 말씀하고 맺으려 한다. 교회의 위기는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세상이 변했고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할 허약한 체질의 교회로의 변모를 안타까워 하면서 결국에 그 모든 책임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만인제사장설을 말하는 평신도라면 목회자와 평신도들 모두 대오각성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과 목회의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을 어찌 세상만 탓할 수 있겠는가. 이미 말씀한대로 교회에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문제는 그 위기를 알고 그 위기에 대처하고자 노력하는 지도자에게서 변화가 있고 새로운 방향과 부흥이 있지 않았던가. 중세의 교회가 무너질 때 루터나 칼빈이 일어난 것은 그런 위기 속에서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한 것인데 오늘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그런 감각도 없고 있다 해도 무디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열 마리의 사자를 이끄는 지도자 양과 열 마리의 양을 이끄는 사자와의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서슴없이 지도자 사자가 이끄는 양들이 이길 것이라 말한다. 그런 것을 설교로도 나타내는 목회자 자신은 그런 의식이 도무지 없다. 그것이 바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한다고 되느냐 하는 생각에 그냥 포기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 속에서 설교를 해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가 때로는 설교를 하면 뭘 하는가 하는 회의를 느낀다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런 질문을 되뇌이면서도 설교를 해야 하고 그것도 뜨거운 가슴을 안고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를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면 왜 다른 면에서는 그런 의식을 갖지 않을까? 그리 자주 나가는 부흥회는 아니지만 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다. 부흥회? 부흥회하면 뭐 합니까? 나오지도 않고 예산도 따라주지 않는데. 부흥회? 하지요.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밤에만 하지요. 부흥회? 강사 모시면 경비가 많이 나가니 그냥 세 분의 강사를 모시고 세 번의 설교를 듣고 말지요. 그러면 식사 접대 숙소 비용도 안들고 좋지요.
참으로 아쉽다. 예전에는 부흥회를 했다 하면 월요일 저녁에서 월요일 새벽기도회로 끝났는데 점점 줄어들고 부흥회는 아예 사라지고 있다. 부흥회가 교회 부흥에 최대의 처방이란 말이 아니다. 단지 부흥회에 관한 인식이 이 정도니 모든 교회의 사역들이 하나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에서 예를 들어 하는 말씀이다.

나이가 사십이 훨씬 넘었지만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이순신을 삼국지 그리고 제갈량 오자 손자 등 중국의 여러 지혜자들과 비교하면서 글을 썼는데 오자의 글 가운데 나온 말을 인용하여 이순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하는 말만 아니었다. 그의 신념이었다.
이것이 바로 열 마리 양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사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이런 의식이 없고, 안된다 한다고 되느냐 하는 자세로 서있으니 어찌 교회가 위기가 아니겠는가?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반기문, 뭘 하려는 것일까

● 칼럼 2016. 6. 7. 16:26 Posted by SisaHan

조선시대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32년간은 태평성대였고 국운이 융성했다. 반면에 11년여 동안 왕좌에 있었던 연산군의 시대에는 두 번의 사화를 비롯해 실정과 폭정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왕조시대에 나라와 백성의 운명은 ‘왕통’(王統)이 좌우했다. 왕의 ‘혈통’이 좋아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 태어나 대를 이으면 나라가 융성하고 백성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리석어 분별없는 왕이 등장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은 불안하며 고통스런 삶을 감내해야 했다. 백성에게 전혀 선택권이 없이 세습 지도자의 천부적인 역량에 전적으로 맡기고 운명으로 받아들여 삶을 영위해야 했던 것이다.


지도자를 국민의 의지로 뽑아 세울 수 있는 근대 민주 공화제는 국민이 자신의 삶의 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훌륭한 지도자를 뽑으면 안락한 삶을 기대할 수 있고, 잘못 뽑으면 그에 따른 팍팍한 삶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선택의 권리가 주어진 동시에,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걸머져야 하는 정치시스템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처음으로 지도자를 뽑은 자유당 정권 시절, 이승만의 ‘선거독재’로 인해 나라는 부정과 부패에 찌들었고 동족상잔의 비극도 맞닥뜨려야 했다.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업보였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대통령을 쫓아내는 의거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깊이 멍이 들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후과(後果)를 두고두고-지금까지도 뼛속 깊이 보고 겪고 있다. 친일청산을 무산시킨 과오와, 이념을 빌미로 동족을 학살한 사실은 아마 가장 큰 민족적 죄과로 평가될 것이다.


쿠데타로 헌정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박정희와 전두환은 국민 선택과는 무관하니 논외로 치자.
민주주의에 단련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기 그래도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나라는 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발전했고, 양적으로도 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건설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꾼 기질의 이명박을 택한 국민들은 얼마 안가 선택을 후회하게 됐다. 나라의 도덕수준을 땅에 떨어뜨리고, 국토를 망가뜨렸으며, 나랏 돈을 쌈지돈처럼 축냈다. 그래도 의회주의자로 15년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박근혜는 나으려니 기대했다. 더구나 최초의 여성에, ‘원칙과 신뢰’가 트레이드 마크라고 알려졌었으니까. 그래서 국민들은 표를 주어 그를 택했다. 그런데, 3년여가 지난 지금,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아둔했음을 회한으로 돌이키고 있다. 지난 4.13 선거결과가 그 걸 입증해 주었다. ‘원칙과 신뢰’가 허구였음이 드러났고, 오직 ‘박정희 신화’에만 기댄 소신도 철학도 없는 함량미달의 지도력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나라 경제가 흔들리고, 정치는 대결과 불통으로 뒤뚱거리고, 외교는 줏대없이 끌려다니기 바쁘며, 남북관계는 파탄이 났다.


연속 두 대에 걸쳐 무너져 내린 이런 국정의 난맥을 바로잡아 정상궤도에 올리려면 앞으로 다시 두 차례는 정권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지난 정권 지도자들의 리더쉽과 그 부정적 영향력을 통해 국민들이 자신의 한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학습효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 스스로 깨어서 지도자를 바로보고 우수한 인물을 선택할 때 나라가 흥성하고 자신들의 삶도 나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관심이 고조되면서 지도자 품평이 나도는 것을 보면 다음에 선출될 인물은 이전보다는 나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 와중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고 갔다. 아직 임기도 남아있는 그의 최근 방한 행보는 다분히 계산된 정치적 제스추어로 보인다. 대권 후보난에 빠진 여당의 처지가 그의 속셈과 용케 맞아 떨어져 아마도 노욕이 꿈틀댄 것이라는 관측들이다. 여권인사들은 원군을 얻은 듯 반기는 분위기이고, 다수 국민들은 걱정과 관망의 눈초리들인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외교관의 말로가 과연 멋지게 마무리 될까 아니면 정치판에서 꼴불견이 되는 것은 아닌지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퇴임 이후를 규제한 유엔결의와는 별도로, 그가 대권판에 뛰어드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앞으로 철저하게 지도력과 자질 검증은 거쳐야 할 것이다. 외교관과 정치인은 전혀 다르다. 그가 혹시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국민 삶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국정소양과 정치철학을 심판받고 ‘무임승차’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가 이번에 의도적으로 꾸린 방한일정에서 돋보인 것은 겨우 구시대 흘러간 인물들을 줄줄이 만나고, 여당의 안방이라 할 TK 지역을 찾은 것 정도이니, 과연 ‘기름장어’라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누군가의 불행으로 얻은 평화

● 칼럼 2016. 6. 7. 16:25 Posted by SisaHan

내 나라 대통령도 기가 찬데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자를 비판하려니 찝찝하다. 필리핀의 대통령 당선자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전력과 선거공약, 당선 뒤 내뿜는 호기로운 발언을 들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만이 아니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실제로 필리핀 여행은 절대로 안 간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그는 다바오라는 시의 시장을 20년 넘게 했다. 세 번 연임이 불가능하자 중간중간 아들과 딸을 시장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시장 자리에 앉았다. 물론 선거를 통해서다. 부정선거라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총기 사용이 자유롭고 얼마든지 사병을 거느릴 수 있고 몇백달러면 청부살인을 맡길 수 있다. 범인이 경찰인지 살인자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는, 치안이 엉망인 나라가 필리핀이다. 그는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하며 마약과 총기와 범죄로 들끓던 도시를 세계에서 5번째로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무슨 전지전능인가.


자경단이란 이름의 즉결처분자들을 통해 범죄가 의심되는 사람을 1700여명 죽였다는 보도가 있다. 재판 없이 죽인 즉결처분, 그러니까 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깨끗한 시가 되고 관광객이 몰려들고 투자도 늘었다고 한다. 얼마나 불안에 떠는 삶이었으면 38%의 국민이 두테르테를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그러나 필리핀 국민에게 앞으로 무서운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대통령으로 확정되자 그는 앞으로 장의사를 하면 좋을 거다, 범죄자 10만명을 몰살시킬 테니까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온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코미디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세계는 자국우선주의, 소위 강한 정부, 난마처럼 얽혀 있는 국제정세와 삶의 불안요소들을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으로라도 해결해주는 정부를 원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위험하고 그것의 악순환이 가져올 미래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트럼프는 언젠가 난민과 이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담을 쌓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난 그 담이 어떤 것인지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고 있는 ‘아랍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거기에 진짜 무서운 담이 있었다.
영화 <스피드 시스터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사는 여성 레이싱팀의 이야기다. 난민촌에서 자유롭게 카레이싱을 펼칠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생활, 여성 카레이싱팀에 보내는 팔레스타인 남성들의 환호에서 아랍 여성의 지위에 대한 선입관도 덜어졌다. 난민촌이라 해도 얼핏 자유스러운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서운 담이 있었다.
거대하게 높은 담으로 양쪽을 막아놓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동물의 우리나 감옥 같은 곳의 요소요소에는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철저하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느닷없이 교통을 막고 방어막을 치고 언제든지 검문검색을 하고 두겹 세겹의 철책을 친 외곽에서 아이들은 가끔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른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몸을 겨냥해 총을 쏜다. 아무런 항의도 못한다. ‘움직이면 쏜다’이다.


누군가의, 어떤 민족인가의 감옥생활이나 죽음으로 세계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필리핀 국민은 그나마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불행한 선택’을 했다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불행조차 선택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세계의 최대 악인가. 이 세계의 진정한 악은 무엇이고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민족의 불행으로 세계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들이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환상이다. 그 누군가가 내가,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바오시에서 죽은 1700명과 앞으로 필리핀에서 죽을 10만명이 과연 필리핀 최대의 악일까.
총선 때 어떤 후보의 포스터에서 본 ‘좌익 척결’ ‘세월호 척결’이라는 공약과, 철책은 없지만 고립된 삶을 사는 북한의 모습까지 섬뜩하게 오버랩된다.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