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이 정부가 왜 그러나?

● 칼럼 2016. 5. 7. 20:03 Posted by SisaHan

“도대체 이 정부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성노예로 짓밟힌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와 싸우고 있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윤미향 대표가 한 탄식이다.


길원옥 할머니 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영화 시사회와 일제 성노예 만행 증언을 위해 길 할머니와 함께 토론토를 찾은 윤 대표는 ‘이 정부’의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목표로 달려 온 25년 가시밭길을 소개한 그녀가 지칭한 ‘이 정부’란 어디인가? 캐나다정부는 아닐테니, 일본정부일까?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를 말한다.
일제에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들을 해방 이후 50년 동안이나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드러난 자료들은 비밀유지에 급급했고, 피해자가 스스로 고백한 이후에도 일본에 책임 묻기를 주저했다. 헌법재판소가 65년 한일조약으로 해결된 게 아니라며 ‘정부가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경고를 발한 뒤에야 마지못해 일본에 대책을 촉구한다. 너무 강하게 나가면 한일관계에 좋지않다며 눈치보기식 요구에 머물더니, 급기야 할머니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부간 합의라는 ‘조약도 아니고 문서도 아닌 구두약속에, 보도자료 하나 뿐인’ 12.28 합의를 발표했다. 그것도 앞으로는 입도 벙끗 말라는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매듭을 지었노라고 자랑하며….


“20만명이 넘는 피해 여성들이 성노예로, 고문 도구로 짓밟혔고, 그 중에 남북한에서 겨우 5백명 정도만 확인 됐을 뿐 나머지는 생사도, 족적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 원혼들은 어떻게 하라고 감히 ‘최종적, 불가역적’이란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정부간 합의에 대한 규탄은 차라리 절규로 들린다. 그런데 그 후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말로 ‘입도 벙끗’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일본은 총리가 “다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호언하고, 유엔 무대에서는 “일본정부는 법적 책임이 없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고 큰소리 친다. 일본 국내에서는 “위안부는 창녀들이었다”고 대놓고 망언을 한다. 각료들은 한국정부가 소녀상을 옮기기로 약속했다고 에둘러 다그친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소극적 부인만을 하며 별다른 대응이 없다.


“할머니들의 해외방문 때 공항까지 영접하곤 했던 공관 직원들이 12.28 합의 이후에는 얼씬도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들을 만난 주재국 관리들을 곧바로 찾아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파고 다닌다.”는 ‘이 정부’는 열심히 추진해오던 ‘위안부 백서’ 작업도 나몰라라 외면해 버렸다고 했다.
가해국에 반인륜의 역사적 죄과를 따져묻지 않고, 짓밟힌 자국민의 자존심 회복을 외면하는 이 정부가 과연 우리들의 정부이냐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을 동원해 위안부 합의가 잘 된 것이라며 “그만 거론하라”고 관제데모를 시킨 이 정부가 한국민을 위한 한국정부인지, 일본을 위한 앞잡이 정부는 아닌지 헷갈린다는 이야기다.

다시 돌아보면 비단 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정부’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적국이 아닌 자국민을 상대로 거짓공작과 선동을 일삼고, 패가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감시하고 핍박하는 많은 사례들 말이다.
최근의 어버이 연합 커넥션은 ‘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근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어두운 커넥션은 오로지 대통령과 정권의 이익만 위해서 가동됐고, 비판적인 여론과 세력에는 가차없이 덤벼들어 욕설과 비방으로 방해하거나 물타기를 하고, ‘종북·빨갱이’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이 시대 자유 민주주의국가에서 어떻게 그런,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공작이 권부의 공직자에 의해, 백주에 기획되고 조종될 수가 있나, 기가 막힐 일이다.


하긴 선거 때 적군인 북한에 총격사건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을 했던 권력이다. 대통령선거에 군까지 망라한 정보기관이 총동원돼 댓글로 여론과 당락에 영향을 주려했고, 남북 정상회담 비밀까지 까발려 대선에 활용했던 습벽이다. 최근 총선 직전에는 북한의 식당종업원들을 탈북시켜 신속 발표하는 이른바 ‘창조 북풍’도 선보였다. 그러고는 선거 끝나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는 흑색공작의 달인들.
고발을 접수했거나 인지 수사로도 진상을 밝혀내 공작기술자들과 배후의 권력을 발본색원함이 마땅하련만, 그 게 또, 수사·사법기관은 차일피일 어영부영으로 면죄부를 안겨주는 커넥션의 종결자임을 마다않으니, 과연 어느 세월에 검은 커넥션과 공작의 뿌리가 뽑힐 것인가.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칼럼 2016. 5. 7. 20:02 Posted by SisaHan

지난밤 젊은 친구들과 만난 자리의 끝 무렵, 한 친구가 기타를 치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노래했던 탓일 게다.
총선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쿠바와 40년 만에 국교를 재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퇴임 전에 북핵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타결하려 하지 않을까. 오바마가 5월 말 일본의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해 참배한다는데 그게 올바른 일인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취임 초 남북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후퇴했고 힐러리, 트럼프, 샌더스 중 누가 실질적으로 남북관계 호전에 도움이 될까. 달랑 소녀상 하나 세워놓고 그것조차 지키기 어려운데 진작에 위안부 기념공원이라도 지어서 일본 총리 아베가 참배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 이야기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았던 일행은 모든 의문과 걱정을 뒤로한 채 친구를 따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를 목청껏 불렀다.


젊은 친구들이라지만 모두 50을 막 넘은 나이들이다. 직장에선 앞자리에 나서서 현장 중심의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가정에선 20대에 접어든 자녀들과 왜 소통이 안되는지,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각자 인생에서 잃었던 것과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길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회한 비슷한 것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나 나이 들면 안 한 일, 안 갔던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일상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혀놓고 살았기 때문일 거다.
간밤의 여운이 남았는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가슴 밑바닥에서 과거의 숱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밖에 내놓은 화분이 비를 흠뻑 맞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이 생명의 환희에 몸을 떠는 듯 여겨지고, 담 너머로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연한 가지들에 달린 작은 이파리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봄비를 자신의 몸뚱이 전부를 바쳐 받아들이는 것처럼 힘차고 기쁜 듯 보였다.


문득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껴야 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죽음을 숙고할 게 아니라 삶을 숙고해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올랐다. 죽음과 죽음 저편의 신과 종교… 그보다는 현재의 내 삶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 봄비 속의 나무들을 보면서 환하게 또렷해졌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하나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남긴 스피노자. 그가 한 말이 아니라 그 뒤에 마르틴 루터가 일기에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 죽음보다 삶 쪽에 무게를 두었던 ‘철학계의 그리스도’로 불린 스피노자가 충분히 했을 말이기도 하다.
어제저녁 한 친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독했다고 했다. 1600년대에 살았던, 종교계로부터 배척당했던 그의 철학이 왜 21세기에 힘을 갖는가를 설명해주었다.
책장 구석에서 스피노자를 꺼낸다.


…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이 분노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크다. 진정한 사랑과 소유욕은 별개이다. 소유욕은 자기애일 뿐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 용서한다는 것….
기뻤던 일보다는 분노했던 기억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행복했던 순간보다 괴로웠던 일들이 현재를 발목잡을 뿐 아니라 그것에 따른 욕망이 일상을 추동하기 쉬운 우리들의 삶.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했던 일이 언제였던가.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후회들이 몰려온다.
사람은 죽음 저 너머 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삶의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선한 것, 아름다운 것, 행복 사랑 기쁨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 오는 창밖을 온종일 내다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다. 내 인생에서의 마지막 사과나무는 무엇일까. 봄비 속에 하염없는 생각에 깊이 침잠한 하루, 이런 하루, 나쁘지 않다. 자연이 신이라고 한 스피노자, 봄비는 자연, 신인 듯하다.
< 김선주 - 언론인 >



[칼럼] 언론도 소통불능 상태

● 칼럼 2016. 5. 7. 20:01 Posted by SisaHan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 504조원의 1%인 5조원만 고용 창출 투자에 사용해도 비정규직 50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지난해 8월에 나온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이다. 당시 정의당도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의 1% 투자로 청년 일자리 20만개 창출’을 내세웠다. 이후 야당들과 그 지지자들은 일자리와 비정규직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 투자를 해법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ㅈ신문 한 논설위원은 ‘부두교 주술 같은 야당의 일자리 처방’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런 주장이 ‘과학적 처방과 거리가 먼 엉터리 경제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사내 유보금은 공장과 기계 설비, 재고, 지식재산권 등에 이미 들어가 있어 현금성 자산은 전체 유보금의 17% 정도에 불과한데다, 그마저 임직원 급여 지급과 원자재 구입, 하도급 결제, 인수·합병(M&A) 자금, 불확실성에 대비한 비상금 등의 용도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보유 비중은 선진국 기업들의 40~60% 수준이어서 걸핏하면 자금난에 빠져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대기업들이 줄을 잇는데도 사내 유보금이 많다고 시비하는 것은 기업이 망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게 김 논설위원의 주장이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뤄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념이나 가치의 문제를 떠나 사실관계만 분명히 해주면, 즉 요즘 언론계 일각에서 유행하는 ‘팩트 체크’만 이뤄져도 독자들은 나름 판단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어떤 관련 기사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언론은 평소 정치혐오를 비판하면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풀뿌리 없는 정당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들은 모두 정치인들의 뒤만 쫓아다니기에 바쁘다.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자극적인 한마디를 끌어내 갈등을 빚는 세력이나 사람들과 싸움을 붙이는 게 정치 저널리즘의 기본이 되고 말았다. 선거 때만 되면 ‘민심 탐방’ 기사를 제법 싣지만, 그마저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이유를 들어보는 수준에 그친다. 왜 풀뿌리 민주주의가 안 되는가? 정당들은 풀뿌리의 당내 유입과 참여를 원하는가? 그들은 사실상 풀뿌리의 유입을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공작의 수법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걸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 아니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운 환상이므로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상을 근거로 해대는 정치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나는 이런 문제를 다룬 기사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언론은 각자의 당파성에 근거해 반대 정당이 압승을 거두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캠페인성 기사를 양산해내거나 각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의 유불리나 이해득실을 분석하는 일에만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가 그런 기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건 언론은 ‘싸움과 당파성을 판매하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걸 자인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이 두가지 사례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언론의 소통 문제다. 소통 불능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 역시 그렇다. 반대편과 소통은 포기한 채 ‘마이 웨이’로만 치닫고 있으며,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불온한 중도’로 보는 이념 편향성에 빠져 있다. 언론은 ‘당장 여기서’라는 목전의 사태에만 집착하느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공간적인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신문의 죽음’이 거론되는 상황은 이전에 지켜온 문법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으론 돌파할 수 없다.
모든 언론이 지난 총선 결과에 정녕 경악했다면,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상식과 관행을 의심해보는 발상의 전환은 왜 할 수 없단 말인가?


< 강준만 - 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과 >



[1500자 칼럼] 그랜드 벨리 통신 1

● 칼럼 2016. 4. 30. 19:49 Posted by SisaHan

쨍그랑 쨍그랑. 텃밭 일구는 쇠스랑 소리가 섣부른 봄을 재촉하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햇볕이 좋다며 잠깐 해 바라기 한다던 그이가 앞선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연장을 챙겨 뒤뜰로 향한지 며칠 만에 제법 틀을 갖춘 텃밭이 되어간다. 아마도 지루한 겨울동안 수없이 그려 둔 밑그림 효과이지 싶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나도 덩달아 미완성인 텃밭을 곁눈질 하며 고이 모셔둔 야채 봉지들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나름대로 자리 배치시키느라 열을 올린다.


텃밭의 지존인 상추와 쑥갓은 맨 앞자리에다 뿌리고, 쓰임새가 다양한 부추는 가능한 한 넓게 터를 잡아야겠다. 키 큰 깻잎 군단은 뒷자리로 돌리고 얼갈이배추와 열무도 두어 두둑 뿌려야지. 가장 햇볕 좋은 곳은 당연히 청양고추 몫이고 넝쿨쟁이 더덕도 탐은 나는데 손바닥 만한 저 텃밭이 다 받아 주기나 할까,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새파란 채소 잎이 나풀거리는 옆집 텃밭에서 시선이 멈췄다. 큼직한 케일에다 가녀린 팬지꽃까지, 며칠 째 모녀가 그이의 훈수를 받아가며 어쭙잖은 삽질을 하더니 어느 사이 모종까지 이식해 놓은 것이다.
씨 뿌리기도 망설여지는 시기에 봄 채비를 끝낸 이웃집을 보며 그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그런 날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처투성이 숲을 건너다본다.
우리 가족은 그랜드 리버(Grand river) 강물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그랜드 벨리(Grand valley) 라는 소도시에 터전을 잡은지 네 계절 째다. 이곳은 ‘그랜드’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붙은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 그리고 시냇물보다 규모가 조금 큰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이름이 주는 뉘앙스와 딴판인 마을길을 오갈 때마다 어느 작명가의 가장된 표현이라 여겼는데 겨울 꽁무니에서 그에 걸맞은 광경을 목도했다.


‘강물이 일어섰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포개진 거대한 얼음덩이가 솟구치거나 강변에 쌓여진 광경을 보며 번뜩 들어온 생각이다. 언제나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어느 날 갑자기 폭도처럼 일어나 남하하고 있는 광경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강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후폭풍 격인 얼음비(freezing rain)는 온 마을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연 이틀 얼음비가 내리더니 온 동네를 얼음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마을이며 숲이 얼음에 깔려 낮게 엎드린 광경은 소설 ‘더 로드’(The road) 에서 묘사한 지구의 종말을 연상하게 했다. 뒤이어 단전, 단수,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사이렌 소리가 온종일 끊이질 않았음은 물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뿌리째 뽑히거나 찢어져 주민들의 재산에 막대한 손상을 입혔다.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100 km 남짓 떨어진 곳인데 상상 외의 모습으로 돌변한 자연 현상은 그 나름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붙여졌음직한 그랜드 리버, 그랜드 벨리는 결코 가장된 작명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직도 그날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가슴 아프게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는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더 단단히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음을 인지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봄이 성큼 왔으면 좋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