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아름다운 작별

● 칼럼 2016. 7. 30. 07:1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얼마 전 동갑내기 친구를 잃었다. 그녀는 투병생활을 시작한지 1년6개월 만에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비록 시한부 삶이긴 했지만 그리 빨리 가버릴 줄 몰랐기에 아직도 가슴 한 켠에서 싸한 바람이 인다. 떠나기 한 달 전쯤에도 그녀는 전혀 환자 같지 않았다. 넉넉한 미소와 우아한 모습으로 일상의 정담을 나눴기에 더욱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살아서보다 더 자주 마음에 밟히고 있는 그녀. 아마도 만날 기회가 또 있을 줄 알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안 나눈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서 그런가 보다.

미치 알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 ‘살아서의 장례식 (living funeral)’을 만났다. 모리 교수는 매사추세츠의 브랜다이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다. 그는 희귀병인 루게릭병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간다. 그가 애제자 미치 알봄을 다시 만나며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모리 교수가 경험한 인생의 의미를 강의한 것이다. 학생은 미치 알봄, 단 한 사람. 그러나 미치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펴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책으로 남긴다. 모리 교수는 자신의 장례식을 정작 주인공인 자신이 볼 수 없기에,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인생길에서 만난 소중했던 사람들과 의미 깊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살아서의 장례식’을 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 쌓여 자신에 관한 시(詩)도 듣고, 재미있는 추억보따리도 풀어 놓으며, 웃고 우는 감격의 시간을 즐긴다. 정작 그가 떠났을 때는 가족끼리만의 조용한 장례를 치른다.

우리 어느 누구도 자신의 떠나는 시점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시한부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상태로 어렴풋이 예감할 수는 있나 보다. 토론토에서 내과전문의로 유명했던 고 이재락 박사도 별세하기 5개월 전에 ‘생의 잔치(Celebration of Life)’를 열었다. 어쩜 의사이기에 대강 자신의 떠날 시점을 가늠하지 않았나 싶다. 그날 거의 300여명이 넘는 지인들이 초대를 받았다.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절대로 칙칙한 검정색 옷을 입지 말고 꽃무늬 있는 화려한 옷을 입으라고 요청했었다. 말 그대로 ‘생의 잔치’라는 의미였다. 아름다운 작별은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공식적인 이별잔치로 이뤄졌다. 그날의 분위기는 엄숙하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았고, 마치 여행길을 전송 나온 것 같이 술렁였다. 사회자의 격 있는 재담, 이 박사에 관한 시 낭송, 세 아들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이야기, 친구의 추억, 고인의 담담한 작별 인사… 등등으로 조용한 잔칫집 분위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큰 아들이 기타연주로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My Way’였다. 울고 싶은 심정을 참아내던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셔줬던 것이다. <My Way>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내 방식대로 아무 후회 없이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대로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아직도 그 노래의 여운으로 이 박사가 남아있다. 그는 ‘생의 잔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 맺은 모든 인연들에게 마지막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공식적으로 작별을 고한, 진정 사려깊고 용기 있는 분이었다.

이렇게 친지들과 함께 ‘생의 잔치’를 열었던 이재락 박사,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마지막 강의’의 주인공 랜디 포시 교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 모두 시한부 삶을 살았던 보통사람들이 아니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며, 각자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진하게 남긴 특별한 사람들이다. “고통 없는 경건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고 많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라는 조엘 드 로스네 MIT교수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며칠 전, 떠난 친구가 생전에 애지중지 아끼며 가꿨던 아름다운 꽃밭과 가지런한 텃밭을 둘러보았다. 방긋이 봉오리를 열은 각종 꽃들이 그녀의 미소로 반기며 손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집 안팎에는 온통 그녀가 남긴 삶의 열매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일깨웠다. 생(生)의 길이보다 어떻게 충만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함을.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

● 칼럼 2016. 7. 25. 16:2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애완견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시키면 입원비가 수 백 만원에서 수 천 만원이 들기도 한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치료비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강아지가 전용미용실을 드나들며 모발 관리를 받고, 예쁜 리본도 모자라 고급 패션의 복장까지 맞춰 입히는 사람들도 있다. 먹고 살 것, 입을 것이 없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일진대, 그야말로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그런데 개가 얼마나 충직하고 순진한가. 주인을 지키고 뒷바라지 하면서, 때로는 사람을 위해 제 몸을 아낌없이 던지는 개도 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괜찮은 게 아닌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개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충견의 고장. 지금은 개 공원이 조성되고 날렵하게 잘 생긴 개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전설의 요지는 이렇다. 시골 영감님이 오일장을 맞아 장을 보러 읍내로 나가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따라 나섰다. 장터에서 막역지우들을 만나 한잔 두잔, 술이 거나해진 영감님은 집에 오는 길에 취기가 오른 나머지 냇가 잔디 언덕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영감님이 피우던 곰방대에서 불씨가 살아나 잔디에 옮겨 붙더니 불길이 점점 주인 영감에게로 번져가는 게 아닌가. 세상 모를 숙취의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주인 주변을 끙끙대며 맴돌던 개가 마침내 냇물에 뛰어든다. 그리곤 몸에 물을 흠뻑 적셔서는 주인을 위협하는 불잔디 위를 뒹군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수십 차례….


술김에 꿀단잠을 자고 뒤늦게 눈을 뜬 주인 영감님은 검게 타들어오다 멈춘 축축한 잔디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바둑이를 보고는 사태를 짐작한다. 개는 이미 큰 화상에 숨이 끊어진 뒤였고, 덕분에 자신이 목숨을 구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개를 잘 묻어주고 자기 지팡이를 ‘비목’으로 세웠다. 그런데 그 충견의 넋이 나무에 깃든 것일까. 이듬 해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무럭무럭 자라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 그래서 충견의 나무가 있는 고을이라는 뜻의 동네 이름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사람을 물어 뜯고 쓰레기나 뒤지는 개가 있는가 하면, 전설의 주인공처럼 지극히 영리하고 충성스런 개들도 많다. 그런 충견들은 사실 어지간한 망나니 저질 인간보다 낫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싸다고 할 만하다.
며칠 전 모국 교육부의 고위공직자가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는 말이 세간에 전해져 시끌벅적했다. 졸지에 개·돼지 신세로 전락해 버린 국민들의 분노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자기나라 국민이 개·돼지 같다고 자해하는 정신나간 정부 부처 직원이 과연 어느 후진국인들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백성을 개나 돼지로 본다는 말은 사실 귀에 익은 말이다. 일제 군국주의자들, 특히 메이지유신 초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인물들이 아시아와 조선을 깔보며 야만인, 나아가 가축이나 마찬가지라고 업신여긴 언동들과 너무도 판박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오이 겐타로라는 자다. 이타가키는 “아시아는 우민과 야만인들의 집합장”이라고 했다. 또 오이 겐타로는 “조선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다름없는 야만국이고, 중국은 고루하며, 민족성이 가축과 마찬가지”라면서 “무력으로 조선과 아시아를 제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과 다른 것은 정한론자들이 타국인 일본 제국주의 선동가들의 억지 논리였다면, 이번에는 한국의 국정을 설계하는 고위공직자라는 점에서 충격이며, 한편으로 이상한 연계성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국민을 받들고 섬겨야 할 부처의 고위직 인사가 자국민을 개나 돼지처럼 여기며 멸시하는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에 젖어있다는 것은 나라의 기강과 정신건강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자들 처럼 오만에 오염돼 있거나 무감각해져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주권 재민’을 깔아 뭉개는 공복들의 헌법을 경시하는 태도가 낱낱이 드러나 분노가 끓어오르는 현실이다.
자존심 강한 선비나라 한국인들의 면전에서 제 얼굴에 침을 뱉은 이번 해프닝은 세계 10위권 중진국이라는 나라의 권력과 민주적 수준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쥐고 가진 자들 가운데 개나 돼지같은 사람들이 흔해졌다는, 어쩌면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도 된다.
말을 안꺼내서 그렇지, 하는 행동들을 보면 민중을 개 돼지로 취급하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솔직하게 실토해버리고 몰매를 맞은 사람이 개처럼 순진하고 착해 보일 정도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뉴욕에서 날아온 쑥

● 칼럼 2016. 7. 13. 08:2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외출에서 돌아오니 큼지막한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소지품 정도로 짐작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니 싱싱한 부추가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부재중 친구 L 부부가 다녀 간 것이다. 언제고 지나는 길에 들리겠다는 전언은 있었지만 막상 빈 걸음으로 돌려세우고 나니 서운한 마음 그지없었다.
L 부부의 정성 속에 자라난 부추들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부추김치, 부추 전, 부추 샐러드 등 건강이 뚝뚝 묻어나는 유기농 밥상을 상상하며 부추 반찬에 한껏 골몰 해 있을 즈음 조그만 비닐봉지가 딸려 나왔다.
무엇일까, 부드러운 감촉으론 생물이 아닌 듯 하여 콧잔등을 들이 미니 친근한 냄새가 후각을 간질인다. 나의 급한 마음 알기라도 하듯 살짝 여민 봉지를 풀어보니 데친 쑥 한 덩이가 얼굴을 쏙 내민다. 늘 이맘때면 더 그리운 고향 냄새를 풍기면서.
내 궁금증이 통했던지 L에게서 전화가 왔다. 뉴욕 아들네 갔다가 꺾어 온 쑥이라며 옛 생각하며 쑥버무리를 해 보란다.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에서 날아 온 쑥이라 생경함마저 들었지만 쑥은 나에게 그냥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두고 온 고향과 내 유년기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추억의 산물이다.
꽁꽁 뭉쳐진 쑥 덩이를 풀어헤치니 상념속의 그것과 거리가 좀 있는 모습이다. 냄새는 분명한데 생김새는 사촌 내지 육촌 정도에다 크기는 또 얼마나 월등한지, 넓은 미국 땅 덩어리를 그대로 닮은 듯 했다. 모국 토종 쑥이 이 정도 크기라면 말려서 약용으로나 쓰일 텐데 하는 맘으로 한 잎을 뜯어 씹어 보았다. 다행히 싱겁다고 느낄 정도의 여린 맛이 모든 음식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친구가 권유해 준 쑥버무리 보다 더 간절한 쑥 국과 쑥 개떡을 염두에 두고 일부는 냉동고에 그리고 나머지는 숭숭 썰어 국 끓일 준비를 했다.
식탁에 앉은 아이가 쑥 국을 보며 의아해 한다. 연유를 들려주었더니 ‘혹시 센트럴 파크에서 꺾으신 게 아닐까요? 하며 씩 웃는다. 학창 시절, 하계 강좌를 위해 뉴욕에 머물 무렵, 센트럴 파크에서 많이 본 식물이라며 그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얼굴이 상기되어 간다. 우리 시대의 전유물로만 여긴 쑥이 후세에도 쑥쑥 뻗어가고 있으니, 그래서 쑥인가 보다.


어린 시절 쑥 캐기는 우리 자매들에게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봄이 되면 할머니는 곧잘 바구니와 칼을 챙겨 선바람을 잡으시고 우린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의 엄호 아래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면 자매들은 앞 다투며 앞산으로 달렸다. 아버지의 엄한 훈육 탓에 집안에선 실컷 웃고 떠들 수 없었던 그 시절 쑥 캐기는 얼마나 달콤한 구실이었던가.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까마득히 잊어버린 한 기억을 끄집어 낸다.
형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었을 때, 엄마인 내가 떡 해준다며 쑥을 캐 오게 했단다. 형제를 포함한 또래 여섯 명이 산으로 몰려가서 쑥은 뒷전이고 칼싸움, 총싸움 하며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른단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행복하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아들들에게 쑥 캐러 보낸 젊은 엄마의 속내는 호연지기를 염두에 두었다기 보다 자신이 경험한 해방구를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떡은 해주더냐고 물었더니 사 주어서 먹은 기억이 어렴풋하다고 한다.
쑥 바구니가 오죽 신통찮았으면 사서 먹였겠냐 고 뒤늦게 한마디 했더니 아이는 ‘그러게요.’ 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추억 저편으로 이끌어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벤진의 추억’을 넘어

● 칼럼 2016. 7. 13. 08: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람은 누구나 평소의 언행을 통해 보편적인 평가를 받는다. 선거 때 표의 심판도 물론 그렇다. 특히 공직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이기가 아닌 이타(利他)정신이 투철한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된다. 봉사와 헌신의 섬김의식과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 아니면 유권자를 속이는 표의 구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인사회에 있어서도 평소 동포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하며 덕을 쌓은 인물이라면 자연스럽게 추앙을 받고, 원한다면 주류정치의 문턱도 쉬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의 후원 열정이 저절로 달아오를 테니까.
하나의 추억을 꺼내보자. 캐나다 한인사회의 주류정치 도전사에서 2006년 3월30일 치러진 온주의원 보궐선거는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극적이고 뿌듯한 선거전일 것이다. 선거에서 한인후보는 분패했지만, 한인의 단결과 저력을 보여준 사례로는 오늘 현재까지 단연 일등감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후보 벤진, 42살의 이 젊은 후보는 혜성처럼 정계에 나타난 한국명 진병규였다. 그는 한인사회에 얼굴을 내민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측면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다만 그는 주류방송사의 기자와 앵커로 16년간 명성을 쌓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부친이 캐나다 대사를 지낸 연고가 있었다. 주수상의 보좌관 자리에 보임됐다가 수상의 천거로 보선에 나선 그는 그래서 한인사회에 친근하게 다가왔다. 「유명 방송인 출신 한인을 주의원으로 만들어 큰 정치인으로 키우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작동되면서 그의 선거전은 마침내 한인들의 ‘원풀이 대상’으로 부상해 동포사회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 후원회장을 맡은 원로 이상철 목사는 이렇게 호소했다. 『~벤진은 동포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어서 정계에 등단하면 한인 동포사회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낼 것도 분명하다. 동포사회는 벤진을 도와 그를 큰 인물로 키워 캐나다 전체를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해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로 선거활동을 적극 돕는 일과 선거 자금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 목사의 호소와 설득이 아니어도 한인사회에서는 주의원과 연방의원을 내야 한다는 한인 정치인 대망의 목마름이 강했던 터라, 좀 과장해서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다시피 캠페인을 도왔다.
하지만 선거구는 NDP거물 고 잭 레이튼의 아성이었던 토론토 댄포스였다. 자유당 사상 가장 높은 39.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아깝게 2천4백여 표 차로 분루를 삼켰다. 그럼에도 한인사회는 큰 아쉬움 못지않게 서로 박수를 치며 자부심을 주고 받았다. 선거운동 불과 25일만에 후원금을 15만 달러나 모으는 저력으로 자유당과 온주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벤진은 졌지만 동포사회는 이겼다」는 말이 시사 한겨레 지면에 등장하고 한인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선거 열흘 후 한인회관에서는 이례적으로 ‘후원 감사의 밤’이 열려 주정부 인사들과 한인동포 등으로 붐빈 행사장은 마치 당선감사의 밤 같은 분위기를 보였다.
이날 벤진은 이렇게 말했다. 『한인사회의 힘을 이제는 자유당과 주정부 등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후원금을 보내주고 희망을 보내준, 동포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으며 정계에 많은 후배들이 진출할 길을 여는 정치적 경력을 쌓아 나가겠다…』 당시 살아있던 부친 진필식 전 대사는 『뜨거운 성원에 감사하며 가족의 영광…우리 민족혼이 바람을 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누렸던 벤진은 선거 후 한인사회에서 잊혀졌다. 그의 당시 약속은 빈말이 됐고, 한인동포들은 한 때 그런 젊은이가 있었다는 아련하고 허탈한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 ‘벤진의 추억’의 전말에서 느끼듯 한인사회와 정치인의 여망과 보응(報應) 사이에 거리감이 없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토로한다.
벤진에 이어 2012년에는 실협 전무를 지냈던 김근래 씨가 주의원에, 그리고 2014년에는 연방 총선에 조성용 씨와 주총선에 조성준 시의원이 잇달아 도전했다. 그 때마다 한인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인 정치인을 만들자!”며 힘을 모아 도왔다. 특히 조성용 후보는 불과 9표 차이로 후보경선에서 분패하는 아슬아슬한 고지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다시 조성준(Raymond Cho:80) 시의원이 온주의원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나섰다. 그런데 왠지 조 후보를 후원하는 열기가 종전처럼 뜨겁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시의원 8선에 이르기까지 돕는데 동포들이 지친 것일까?
온주 보수당이 당수까지 나서 전력 지원하고, 선거구가 시의원 선거구와 겹친데다 사퇴한 당선 의원과 한번 겨룬 적이 있는 지역이어서 승리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조 시의원은 8선을 거치며 선거에는 경험도 많고 노련하다. 나이가 많은 것이 걱정이지만, 꼭 당선돼 이번만은 한인사회의 ‘원한’을 꼭 풀어줬으면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