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반기문, 뭘 하려는 것일까

● 칼럼 2016. 6. 7. 16:2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조선시대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32년간은 태평성대였고 국운이 융성했다. 반면에 11년여 동안 왕좌에 있었던 연산군의 시대에는 두 번의 사화를 비롯해 실정과 폭정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왕조시대에 나라와 백성의 운명은 ‘왕통’(王統)이 좌우했다. 왕의 ‘혈통’이 좋아 지혜롭고 총명한 왕이 태어나 대를 이으면 나라가 융성하고 백성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리석어 분별없는 왕이 등장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은 불안하며 고통스런 삶을 감내해야 했다. 백성에게 전혀 선택권이 없이 세습 지도자의 천부적인 역량에 전적으로 맡기고 운명으로 받아들여 삶을 영위해야 했던 것이다.


지도자를 국민의 의지로 뽑아 세울 수 있는 근대 민주 공화제는 국민이 자신의 삶의 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훌륭한 지도자를 뽑으면 안락한 삶을 기대할 수 있고, 잘못 뽑으면 그에 따른 팍팍한 삶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선택의 권리가 주어진 동시에,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걸머져야 하는 정치시스템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처음으로 지도자를 뽑은 자유당 정권 시절, 이승만의 ‘선거독재’로 인해 나라는 부정과 부패에 찌들었고 동족상잔의 비극도 맞닥뜨려야 했다.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업보였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대통령을 쫓아내는 의거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깊이 멍이 들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후과(後果)를 두고두고-지금까지도 뼛속 깊이 보고 겪고 있다. 친일청산을 무산시킨 과오와, 이념을 빌미로 동족을 학살한 사실은 아마 가장 큰 민족적 죄과로 평가될 것이다.


쿠데타로 헌정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박정희와 전두환은 국민 선택과는 무관하니 논외로 치자.
민주주의에 단련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기 그래도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나라는 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발전했고, 양적으로도 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건설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꾼 기질의 이명박을 택한 국민들은 얼마 안가 선택을 후회하게 됐다. 나라의 도덕수준을 땅에 떨어뜨리고, 국토를 망가뜨렸으며, 나랏 돈을 쌈지돈처럼 축냈다. 그래도 의회주의자로 15년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박근혜는 나으려니 기대했다. 더구나 최초의 여성에, ‘원칙과 신뢰’가 트레이드 마크라고 알려졌었으니까. 그래서 국민들은 표를 주어 그를 택했다. 그런데, 3년여가 지난 지금,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아둔했음을 회한으로 돌이키고 있다. 지난 4.13 선거결과가 그 걸 입증해 주었다. ‘원칙과 신뢰’가 허구였음이 드러났고, 오직 ‘박정희 신화’에만 기댄 소신도 철학도 없는 함량미달의 지도력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나라 경제가 흔들리고, 정치는 대결과 불통으로 뒤뚱거리고, 외교는 줏대없이 끌려다니기 바쁘며, 남북관계는 파탄이 났다.


연속 두 대에 걸쳐 무너져 내린 이런 국정의 난맥을 바로잡아 정상궤도에 올리려면 앞으로 다시 두 차례는 정권이 바뀌어야 할 것이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지난 정권 지도자들의 리더쉽과 그 부정적 영향력을 통해 국민들이 자신의 한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학습효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 스스로 깨어서 지도자를 바로보고 우수한 인물을 선택할 때 나라가 흥성하고 자신들의 삶도 나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관심이 고조되면서 지도자 품평이 나도는 것을 보면 다음에 선출될 인물은 이전보다는 나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 와중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고 갔다. 아직 임기도 남아있는 그의 최근 방한 행보는 다분히 계산된 정치적 제스추어로 보인다. 대권 후보난에 빠진 여당의 처지가 그의 속셈과 용케 맞아 떨어져 아마도 노욕이 꿈틀댄 것이라는 관측들이다. 여권인사들은 원군을 얻은 듯 반기는 분위기이고, 다수 국민들은 걱정과 관망의 눈초리들인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외교관의 말로가 과연 멋지게 마무리 될까 아니면 정치판에서 꼴불견이 되는 것은 아닌지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퇴임 이후를 규제한 유엔결의와는 별도로, 그가 대권판에 뛰어드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앞으로 철저하게 지도력과 자질 검증은 거쳐야 할 것이다. 외교관과 정치인은 전혀 다르다. 그가 혹시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국민 삶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국정소양과 정치철학을 심판받고 ‘무임승차’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가 이번에 의도적으로 꾸린 방한일정에서 돋보인 것은 겨우 구시대 흘러간 인물들을 줄줄이 만나고, 여당의 안방이라 할 TK 지역을 찾은 것 정도이니, 과연 ‘기름장어’라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누군가의 불행으로 얻은 평화

● 칼럼 2016. 6. 7. 16:2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내 나라 대통령도 기가 찬데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자를 비판하려니 찝찝하다. 필리핀의 대통령 당선자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전력과 선거공약, 당선 뒤 내뿜는 호기로운 발언을 들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만이 아니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실제로 필리핀 여행은 절대로 안 간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그는 다바오라는 시의 시장을 20년 넘게 했다. 세 번 연임이 불가능하자 중간중간 아들과 딸을 시장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시장 자리에 앉았다. 물론 선거를 통해서다. 부정선거라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총기 사용이 자유롭고 얼마든지 사병을 거느릴 수 있고 몇백달러면 청부살인을 맡길 수 있다. 범인이 경찰인지 살인자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는, 치안이 엉망인 나라가 필리핀이다. 그는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하며 마약과 총기와 범죄로 들끓던 도시를 세계에서 5번째로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무슨 전지전능인가.


자경단이란 이름의 즉결처분자들을 통해 범죄가 의심되는 사람을 1700여명 죽였다는 보도가 있다. 재판 없이 죽인 즉결처분, 그러니까 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깨끗한 시가 되고 관광객이 몰려들고 투자도 늘었다고 한다. 얼마나 불안에 떠는 삶이었으면 38%의 국민이 두테르테를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그러나 필리핀 국민에게 앞으로 무서운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대통령으로 확정되자 그는 앞으로 장의사를 하면 좋을 거다, 범죄자 10만명을 몰살시킬 테니까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온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코미디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세계는 자국우선주의, 소위 강한 정부, 난마처럼 얽혀 있는 국제정세와 삶의 불안요소들을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으로라도 해결해주는 정부를 원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위험하고 그것의 악순환이 가져올 미래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트럼프는 언젠가 난민과 이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담을 쌓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난 그 담이 어떤 것인지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고 있는 ‘아랍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거기에 진짜 무서운 담이 있었다.
영화 <스피드 시스터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사는 여성 레이싱팀의 이야기다. 난민촌에서 자유롭게 카레이싱을 펼칠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생활, 여성 카레이싱팀에 보내는 팔레스타인 남성들의 환호에서 아랍 여성의 지위에 대한 선입관도 덜어졌다. 난민촌이라 해도 얼핏 자유스러운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서운 담이 있었다.
거대하게 높은 담으로 양쪽을 막아놓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동물의 우리나 감옥 같은 곳의 요소요소에는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철저하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느닷없이 교통을 막고 방어막을 치고 언제든지 검문검색을 하고 두겹 세겹의 철책을 친 외곽에서 아이들은 가끔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른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몸을 겨냥해 총을 쏜다. 아무런 항의도 못한다. ‘움직이면 쏜다’이다.


누군가의, 어떤 민족인가의 감옥생활이나 죽음으로 세계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필리핀 국민은 그나마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불행한 선택’을 했다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불행조차 선택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세계의 최대 악인가. 이 세계의 진정한 악은 무엇이고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민족의 불행으로 세계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들이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환상이다. 그 누군가가 내가,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바오시에서 죽은 1700명과 앞으로 필리핀에서 죽을 10만명이 과연 필리핀 최대의 악일까.
총선 때 어떤 후보의 포스터에서 본 ‘좌익 척결’ ‘세월호 척결’이라는 공약과, 철책은 없지만 고립된 삶을 사는 북한의 모습까지 섬뜩하게 오버랩된다.
< 김선주 - 언론인 >



[한마당] 카인의 제사와 토론토의 5.18

● 칼럼 2016. 5. 31. 19:3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으로 무거운 분위기 속에 열린 광주 망월동 민주묘지의 5.18민주화운동 제36주년 기념식은 예상대로 ‘카인의 제사’였다. 제창을 무산시킨 ‘고집불통’ 보훈처장은 희생자 유족들에게 떠밀려 행사장에서 쫓겨났다. 그가 빈정대는 듯 웃음을 띠며 현장을 떠난 뒤, 국무총리는 미사여구로 가득찬 기념사를 읽었다. 나라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꿈 같은 이야기들을 ‘5.18정신의 승화’라는 말로 포장해 의미없이 읽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로봇 같았다고나 할까.
광주 현지의 보훈지청장이 읽은 경과보고라는 것도 5.18 실상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사건묘사에 불과했다. 계엄군의 살상과 발포는 간 곳 없이 군과 민간인이 공연히 대치하다 벌어진 불상사처럼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공연’으로 소개된 식순에서 합창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희극-, 참석자들이 일어나 따라 부를 때, 국무총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무표정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합창이 끝나자 마자 “이상으로~” 식을 마친다는 사회자의 선언으로, 그렇게 정부 주관 5.18기념식은 단 20분만에 지극히 간단하고 허망하게 마무리 됐다. 사람들이 “이게 무슨 기념식을 이야” 라고 외쳤으니 역시 ‘카인의 제사’였는데, 총리와 정부인사들은 못들은 체 총총 걸음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법적으로도 이미 결론이 난 민주항쟁이고 국가기념일이다, 불의한 쿠데타 무리들이 권력찬탈과 학살범죄가 명백히 입증돼 단죄를 받았는데도, 극우보수가 설치자 그에 편승해 슬금슬금 되살아났다. 5.18을 부정하고 인정하기 싫은데서 나아가 아예 깔아 뭉개려는 작태까지 보인다. “나는 광주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온 쿠데타 주역은 이제 기억상실의 치매경지에 접어들었다고 치자. 그들과 같은 뿌리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현 정부도 5.18에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 국가기념일 행사는 어쩔 수 없이 주관하지만, 적당히 지워버리고 싶은 그들의 숨은 뜻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저 핑계요 곁가지일 뿐이다. 노래하나 부르냐 못부르냐는 차원이 아닌, 바로 5.18 자체를 수용하기 싫다는 가해 세력의 정면 도전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보수정권 10년에,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는 친일 희석과 이승만·박정희 찬양, 국정교과서 강행, 그리고 군위안부 졸속 합의 등에 이어 5.18 물타기 라는 ‘거꾸로 시리즈’의 종결편으로 내닫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워싱턴 주재 대사관 등 일부를 제외한) 해외 한국공관들의 5.18 기념식 외면까지…. 참 비겁하고 저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토론토의 5.18은 우리에게 위안과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일찍이 유신독재 당시부터 조국의 민주화를 외치며 성원했던 원로들이 올해 ‘5,18 민주화운동기념회’의 얼굴로 등장해 기념식 주관단체로 무게감을 갖춰 주었다.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을 지낸 이상철 목사가 고문을 맡아 기념식장에 좌정했고, 윤택순 21대 한인회장과 김병권 전 민주평통 회장이 이기석 한인회장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나섰다. 특히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전하며 감격과 회한으로 목이 메인 윤택순 전 회장은 가슴에 간직해왔던 토론토와 캐나다 동포들의 조국 민주화 투쟁사를 생생히 전해 기념식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윤 전 회장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학살장면을 당시 TV에서 보고 동포들이 분기탱천해 규탄시위를 하고 기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전했던 일과 추도식을 가졌던 일 등 활동상을 모두 기억해 들려주었다. 당시 조직된 광주의거 추도회와 뒤이은 기념사업회 회장을 자신이 맡았었기에 더욱 뇌리에 선명히 남았을 기록들이다. 눈물을 훔치며 몇차례 말을 잇지 못한 그는 당시 참여했던 단체들 이름과 동지들을 한명 한명 거명하다 끝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분들이 정말 애석하다”며 오열해, 숙연히 듣고있던 참석자들이 박수로 위로하는 감동적 장면이 이어졌다. 정봉희 시인의 가슴 뜨거운 창작 추모시 낭송과 금국향 무용가의 살풀이 춤, 그리고 의기충천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까지. “한국에서 열린 정부 주최 기념식보다 훨씬 뜻깊고 감명깊은 기념행사였다” 어느 참석자가 밝힌 소감 그대로, 정말 그랬다. 선배 한인들의 자랑스런 발자취를 되새기며 캐나다 한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부풀린 토론토의 5.18 기념식. 그래서 자리를 같이한 보수단체 임원들도 “행사가 좋았다”고 입을 모았던 것일 게다.
올해 모처럼 ‘임석’했던 총영사관 영사는 어떤 보고서를 올렸을까?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어머니날에 부쳐… 슬픈 이름

● 칼럼 2016. 5. 14. 17: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엄마, 엄마~, 엄마~아” 한 번으로 부족하여 두서너 번 연거푸 불러야만 속이 후련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신비하게도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가슴이 채워지던 이름이 ‘엄마’였다. 동심의 세계를 마술사와 행복의 여신이 되어 가득 채워 주셨던 분. 내 서러움과 아픔을 한꺼번에 도맡아 주실 수 있었던 유일한 분.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내 것이란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엄마만큼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엄마를 어느 날 ‘어머니’로 부르게 되면서 딸은 슬픔을 배운다.
 
분주했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야 한 남자의 아내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터득되었고, 신혼여행지로 가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둥지를 떠나야 함이 실감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철없던 시절에 대한 깊은 회한에 빠져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잘 도착했어요.” 처음으로 ‘어머니’라 어색하게 불렀던 것이다. 첫 아이를 분만한 후, 아들을 낳은 기쁨과 함께 깊은 슬픔에 빠졌었다. 내 생명에 숨겨진 어머니의 육신적 고통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로부터 나와 아들로 이어진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신비를 깨달으며 되돌아가 보상해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서러웠었다. 이렇게 늘 기쁨과 슬픔은 함께 있었다.

결혼 생활의 연륜이 길어가며 어머니 삶을 반복하는 닮은 꼴이 되면서부터 나는 어머니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아들을 기숙사로 떠나 보내며 이민 간 자식들을 그리며 눈물 짓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말대꾸하며 거부하는 아이들을 통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 육신이 아파 누워서야 어머니 병환에 무심했던 그때가 죄스러워지고, 맛있는 반찬은 자식들에게만 주고 자신은 잡술 줄 모른다고 시침을 떼시던 진심도 이해되었다. 또한 부부 싸움에 익숙해지고, 내 잔소리가 심해지며, 가끔 두 아이들조차도 귀찮아질 정도로 삶에 지치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어머님’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이 메어지고 시려지는 ‘슬픔의 이름’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생전 처음 학부형 회의에 참석하셨던 엄마가 자랑스러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서성거렸다. 얼마 후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창문 틈으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던 나는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는지 모른다. 멋을 부린 다른 젊은 엄마들 틈에 끼어 앉으셨던 할머니 같은 내 엄마는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그런데 그 일이 내 일생을 통하여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내 어머니에게 학부형 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얼마나 삶에 지쳐 시달리고 힘들었으면 딱딱하고 낮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생 의자 위에서 잠이 다 드셨을까. 과학 문명의 혜택을 최대로 누리며 세상 편하게 살면서도 힘에 겨워 쩔쩔매며 짜증내는 내 삶이 부끄럽기만 하다.

1995년, 그해 여름 모국방문길에 어머님과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 작별을 하고 왔었다. 어린 시절에 ‘약손’이었던, 이제는 핏기 없는 바짝 마른 어머님의 손을 마주 잡고 두 육신은 하나가 되어 오랫동안 침묵하였다. 바람결에 날아갈 듯 빈약해진 여든넷 어머님의 초라한 가슴에 안긴 채 서러움의 강물에 빠졌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막내딸을 다시 떠나 보낼 생각에 밤마다 슬픔을 참아 내느라고 돌아누운 뒷등이 들먹이시던 것과 잠결에 깨어보면 내 손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키고 계시던 어머님. 얄궂은 시간 때문에 보행이 불편한 어머님을 집문 밖에서 작별했었다. 어쩔 수없이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며 점처럼 작아지는 어머님을 가슴에 소중하게 품으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이 불과 2개월 전의 일이었는데도, 당시 나는 벌써 내 가족들에 파묻혀 어머님을 무심하게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며, 내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이 어머님에 대한 효도라며 잘도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생각날 때마다 우는 슬픈 이름이여!
꿈 속에서도 나를 울리는 슬픈 이름이여! 어머님 !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