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언론도 소통불능 상태

● 칼럼 2016. 5. 7. 20: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 504조원의 1%인 5조원만 고용 창출 투자에 사용해도 비정규직 50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지난해 8월에 나온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이다. 당시 정의당도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의 1% 투자로 청년 일자리 20만개 창출’을 내세웠다. 이후 야당들과 그 지지자들은 일자리와 비정규직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 투자를 해법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ㅈ신문 한 논설위원은 ‘부두교 주술 같은 야당의 일자리 처방’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런 주장이 ‘과학적 처방과 거리가 먼 엉터리 경제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사내 유보금은 공장과 기계 설비, 재고, 지식재산권 등에 이미 들어가 있어 현금성 자산은 전체 유보금의 17% 정도에 불과한데다, 그마저 임직원 급여 지급과 원자재 구입, 하도급 결제, 인수·합병(M&A) 자금, 불확실성에 대비한 비상금 등의 용도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보유 비중은 선진국 기업들의 40~60% 수준이어서 걸핏하면 자금난에 빠져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대기업들이 줄을 잇는데도 사내 유보금이 많다고 시비하는 것은 기업이 망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게 김 논설위원의 주장이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뤄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념이나 가치의 문제를 떠나 사실관계만 분명히 해주면, 즉 요즘 언론계 일각에서 유행하는 ‘팩트 체크’만 이뤄져도 독자들은 나름 판단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어떤 관련 기사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언론은 평소 정치혐오를 비판하면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풀뿌리 없는 정당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들은 모두 정치인들의 뒤만 쫓아다니기에 바쁘다.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자극적인 한마디를 끌어내 갈등을 빚는 세력이나 사람들과 싸움을 붙이는 게 정치 저널리즘의 기본이 되고 말았다. 선거 때만 되면 ‘민심 탐방’ 기사를 제법 싣지만, 그마저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이유를 들어보는 수준에 그친다. 왜 풀뿌리 민주주의가 안 되는가? 정당들은 풀뿌리의 당내 유입과 참여를 원하는가? 그들은 사실상 풀뿌리의 유입을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공작의 수법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걸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 아니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운 환상이므로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상을 근거로 해대는 정치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나는 이런 문제를 다룬 기사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언론은 각자의 당파성에 근거해 반대 정당이 압승을 거두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캠페인성 기사를 양산해내거나 각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의 유불리나 이해득실을 분석하는 일에만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가 그런 기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건 언론은 ‘싸움과 당파성을 판매하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걸 자인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이 두가지 사례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언론의 소통 문제다. 소통 불능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 역시 그렇다. 반대편과 소통은 포기한 채 ‘마이 웨이’로만 치닫고 있으며,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불온한 중도’로 보는 이념 편향성에 빠져 있다. 언론은 ‘당장 여기서’라는 목전의 사태에만 집착하느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공간적인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신문의 죽음’이 거론되는 상황은 이전에 지켜온 문법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으론 돌파할 수 없다.
모든 언론이 지난 총선 결과에 정녕 경악했다면,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상식과 관행을 의심해보는 발상의 전환은 왜 할 수 없단 말인가?


< 강준만 - 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과 >



[1500자 칼럼] 그랜드 벨리 통신 1

● 칼럼 2016. 4. 30. 19:4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쨍그랑 쨍그랑. 텃밭 일구는 쇠스랑 소리가 섣부른 봄을 재촉하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햇볕이 좋다며 잠깐 해 바라기 한다던 그이가 앞선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연장을 챙겨 뒤뜰로 향한지 며칠 만에 제법 틀을 갖춘 텃밭이 되어간다. 아마도 지루한 겨울동안 수없이 그려 둔 밑그림 효과이지 싶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나도 덩달아 미완성인 텃밭을 곁눈질 하며 고이 모셔둔 야채 봉지들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나름대로 자리 배치시키느라 열을 올린다.


텃밭의 지존인 상추와 쑥갓은 맨 앞자리에다 뿌리고, 쓰임새가 다양한 부추는 가능한 한 넓게 터를 잡아야겠다. 키 큰 깻잎 군단은 뒷자리로 돌리고 얼갈이배추와 열무도 두어 두둑 뿌려야지. 가장 햇볕 좋은 곳은 당연히 청양고추 몫이고 넝쿨쟁이 더덕도 탐은 나는데 손바닥 만한 저 텃밭이 다 받아 주기나 할까,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새파란 채소 잎이 나풀거리는 옆집 텃밭에서 시선이 멈췄다. 큼직한 케일에다 가녀린 팬지꽃까지, 며칠 째 모녀가 그이의 훈수를 받아가며 어쭙잖은 삽질을 하더니 어느 사이 모종까지 이식해 놓은 것이다.
씨 뿌리기도 망설여지는 시기에 봄 채비를 끝낸 이웃집을 보며 그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그런 날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처투성이 숲을 건너다본다.
우리 가족은 그랜드 리버(Grand river) 강물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그랜드 벨리(Grand valley) 라는 소도시에 터전을 잡은지 네 계절 째다. 이곳은 ‘그랜드’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붙은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 그리고 시냇물보다 규모가 조금 큰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이름이 주는 뉘앙스와 딴판인 마을길을 오갈 때마다 어느 작명가의 가장된 표현이라 여겼는데 겨울 꽁무니에서 그에 걸맞은 광경을 목도했다.


‘강물이 일어섰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포개진 거대한 얼음덩이가 솟구치거나 강변에 쌓여진 광경을 보며 번뜩 들어온 생각이다. 언제나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어느 날 갑자기 폭도처럼 일어나 남하하고 있는 광경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강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후폭풍 격인 얼음비(freezing rain)는 온 마을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연 이틀 얼음비가 내리더니 온 동네를 얼음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마을이며 숲이 얼음에 깔려 낮게 엎드린 광경은 소설 ‘더 로드’(The road) 에서 묘사한 지구의 종말을 연상하게 했다. 뒤이어 단전, 단수,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사이렌 소리가 온종일 끊이질 않았음은 물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뿌리째 뽑히거나 찢어져 주민들의 재산에 막대한 손상을 입혔다.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100 km 남짓 떨어진 곳인데 상상 외의 모습으로 돌변한 자연 현상은 그 나름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붙여졌음직한 그랜드 리버, 그랜드 벨리는 결코 가장된 작명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직도 그날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가슴 아프게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는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더 단단히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음을 인지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봄이 성큼 왔으면 좋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북한 미사일 미스터리

● 칼럼 2016. 4. 30. 19:4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최근 한·미 군사연습인 키리졸브·독수리훈련 때 북한의 대응을 보며 피식 웃은 적이 있다. 한·미가 대규모 상륙훈련인 ‘쌍룡훈련’을 하자, 얼마 안 있다 북한은 대규모 상륙과 반상륙방어 연습을 했다. 또 남한이 F-15K, F-16 등의 정밀타격 훈련을 하자, 이번에는 장거리 포병대 타격 연습과 KN-06 지대공미사일 발사로 응대했다. 적의 군사행동에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장군’ ‘멍군’ 하는 게 너무 즉흥적이어서 치기처럼 느껴졌다.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 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 한·미의 양보를 노린 무력시위라는 분석도 있고, 당대회를 앞둔 대내 결집용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키리졸브·독수리훈련 때 북한의 행동을 보며 어쩌면 항공우주 전문가 마르쿠스 실러의 2012년 랜드연구소 보고서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다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실러는 당시 ‘북한 핵 미사일 위협의 특징’이란 보고서에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북한 미사일이 군사 수단이라기보다 외교협상력 강화 등 전략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 근거로 실러가 제시한 것 중에는 ‘발사 횟수 부족’이 들어 있다. 실러에 따르면, 스커드와 노동, KN-02 등 미사일 대부분이 실전배치 전 1~3번 시험발사를 했고 배치 후 3~8차례 발사했다. 중거리미사일(IRBM) 무수단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은 한 번도 발사한 적이 없다. 미국과 소련 등이 10여차례 시험발사를 거쳐 신뢰성을 확보한 뒤 실전배치하며 매년 1차례 정도 발사훈련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치다. 혹 김정은 제1비서 집권 이후 부쩍 늘어난 미사일 발사는 북한 미사일에 대한 이런 의구심에 “그렇지 않다. 잘 보라”는 항변이 아닐까.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2014년부터 급격히 늘었다. 매년 10차례 이상 스커드와 노동미사일 등을 쐈고, 올해 들어서도 벌써 5차례나 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한 방송에서 “집권 5년차인 김정은이 김정일 시대 18년보다 더 많이 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이런 행동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라면-사실 신뢰성이 확보돼야 상대에 위협이 될 수 있고 그래야 전략적 목적도 달성할 것이다- 성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지난 15일 처음 발사한 무수단은 발사 직후 공중 폭발해 중거리 이상의 미사일 능력에 흠집을 남겼다. 그러나 23일 발사한 잠수함발사미사일(SLBM)은 30㎞를 날아 몇 년 안에 실전배치될 가능성을 높였다. 또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개한 대기권 재진입 실험, 고체연료 로켓 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용 엔진 분출실험 등은 향후 북한의 미사일이 훨씬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도 일깨웠다.


그래도 실러가 던진 의문은 유효하다. 북한의 국내총생산량(GDP)은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수준인데, 이런 나라가 10여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있을까. 또 북한 미사일 프로그램은 80년대 스커드 B를 3년 만에 역설계하면서 시작됐다고들 하는데, 그런 뛰어난 역설계 능력이 왜 다른 분야, 예컨대 차량이나 산업기계, 농기계 등에는 발휘되지 않았을까. 북한의 역설계 능력, 즉 미사일 개발 능력이 과대포장된 건 아닐까.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과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북한을 “정보기관이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실패한 사례”로 꼽았다. 미사일은 어떨까. 북한이 보여주는 대로 다 믿어야 할까.
< 박병수 -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



[한마당] 착각 자유여행기

● 칼럼 2016. 4. 22. 20: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다. 제 잘난 멋으로 산다는 비아냥이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는 있을지 몰라도 착각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기 눈에 보이는대로 분별하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며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는 게 사람이다. 그 게 인간의 특성이고 다양성이다.


그러나 그 개성의 다양성 속에서도 ‘보편’ 이라는 평균선은 존재한다. 그 보편을 무시하고 너무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에 매몰될 때 그 사람은 어리석게도 ‘착각의 자유 여행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가령 추운 겨울에도 햇살 좋고 히터가 작동하는 자동차 내부는 훈훈하다. 차안의 더운 공기에 몸이 녹아있다 보면 바깥쪽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방심하고 밖에 나오면 매서운 찬공기에 재채기와 감기가 달려든다. 바로 잠깐의 착각이요 착시다. 잠깐이면 괜찮은데, 아예 몸에 밴 경우가 문제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회사라 해도 사장은 의례적인 존대를 받는다. 콧대가 높아진 사장님은 직원이 우습게 보여 멋대로 부리려 한다. 그러니 거대 회사야 오죽할까. 오너들이 운전기사와 직원을 종 부리듯 욕설에 주먹질까지 하는 것은 그런 착각의 자만이 습성화한 때문이다.


온 나라가 ‘엔(N)포 시대’니 ‘헬(Hell) 조선’이니 아우성을 치고 경제가 위험하다고 빨간불이 깜박여도, 주변을 에워싼 충성파들이 “잘 돼 갑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아부의 장막을 둘러친 권력자는 어찌될까. 당연히 눈과 귀가 무지개 빛 환상과 환청에만 매몰돼 자아도취가 심화될 뿐이다. 지난 20대 총선은 그런 착각과 착시의 실상을 웅변해 주었다. 비단 최고 권력자만 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을 부르는 수많은 요소들의 우물에 갇혀 ‘착시여행’에 몰입했다가 실상이 드러나자 충격에 휩싸였다. 야당이 갈라지고, 여론조사가 큰 차를 보이고, 대형 신문들과 방송, 종편들이 불어대고, 북풍이 거세게 몰아부치고, 그래서 결과는 뻔하니 멋대로 해보자는 오만의 객기로 칼질을 해대고, 대통령은 법을 무시하며 선거구를 누비고…, 그런데 위대한 국민들은, 그리고 하늘의 오묘한 섭리는 그 착각의 꺼풀을 사정없이 벗겨내고 마치 천지개벽처럼 적나라한 실체를 보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실체가 드러나다 보니 착각의 중병에 걸려 거만스러웠던 객체들도 수없이 밝혀졌다. 홍수가 휩쓸고 간 논바닥에 자갈이 쌓이고, 미꾸라지들이 흙탕물에서 팔딱이는 것 같이. 하루 아침에 여당이 자갈밭처럼 지리멸렬해졌다. 권력 호위무사로 설치던 거물들은 풀이 죽거나 미꾸라지 신세가 됐다. 정권 나팔수 같던 언론들이 갑자기 주인을 향해 짖는 미친 개처럼 표변했다. 권력의 충견노릇을 하던 기관과 인물들은 선거 망치고 나라망친 주적들로 지탄대상이 돼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권력자의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비단 권력과 집권 쪽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승리가 나 때문이니, 내 전략이 먹혔느니 서로 공신반열을 주장한다. 패권이니 거부감이니 정체성이니 ‘프레임 언어’가 난무해 헷갈리게 한다. 셀프공천에서 이제는 셀프 추대론까지 나온다. 작은 지역당 신세에 말끝마다 정권교체를 장담하더니 자신들이 사실상 1당이라고 어거지를 쓴다. 정말 ‘착각은 자유’다. 이제 그들의 착각병이 심해지고 바야흐로 착시여행에 몰입해 가는 것만 같다.
하나님을 믿는 목회자가 주일에 예배당을 닫고 성도들에게는 기독정당 선거운동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어느 유명 목사는 예배시간에 그 정당 선거홍보 영상을 상영하며 꼭 찍어야 한다고 설교를 했다. 그런데 전국 득표율 3%도 안돼 헛발질만 한 꼴이 됐다. 명철한 영안(靈眼)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기는 커녕 성도들의 할렐루야 환호에만 도취해 정치야망에 빠진 종교권력자들의 착각이다.


마침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폭력시위 운운하며 강압하던 엄청난 경찰병력이 선거 참패 때문인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폭력이 난무했는가. 평화집회가 축제와도 같이 열려 경찰의 착각을 입증했다. 돈을 받고 동원된다는 어버이부대도 감쪽 같이 모습을 감췄다. 모국에서는 그렇게 사라졌는데, 어인일인지 토론토에는 그런 족속이 나타나 얼쩡거렸다. 그리곤 뭐가 부끄러운지 사진찍지 말라고 욕설을 퍼부어댄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반박하려 공공장소에 공적집회로 나온 애국적 영웅심리는 어디로 갔나. 기자에게 사진찍지 말라고 악쓰는 그들의 수준에도 아마 창피를 아는 일말의 감각은 있음이다. 혼란스런 착각이다. 착각은 정말 도처에 난무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