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겨울 추위의 매서움이 덜하고, 눈도 적게 온다. 살을 에듯 지독한 추위에 고생하던 때에 비하면 한결 지내기가 편하고 수월해졌으니 온난화의 역설이다. 그래서 따뜻한 겨울에 사람들이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표정들이다.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불안하고 찜찜하다. 온난화 여파로 기후가 이상해지면서 지구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표의 빙설이 줄어들면서 해수면이 계속 높아져 작은 섬들이 바다에 잠길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뇨 현상이 자주 발생하면서 기후와 강수량이 바뀌고, 농업에 악영향을 주어 농작물 생산에 차질을 빚어 값이 뛰고있다. 겨울 혹한이 사라지면 이듬해 병충해가 많아지는 등 농사에 나쁜 영향을 준다. 눈이 많이 내려야 다음해 비도 많이 오고 풍년이 들기에 우리 조상들은 소설·대설의 절기에는 글자그대로 큰 눈이 오기를 기원했다.
따뜻한 겨울의 안락~, 당장은 편하고 좋다. 그러나 머잖아 우리 삶에 닥칠 진짜 한파와 망가져 가는 지구의 온난화 악순환 역설은 종말의 불안 그 자체다. 지난해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서 21세기말까지 지구온도 상승폭을 섭씨 1.5도로 제한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지만, 강제성이 없으니 과연 지켜질 것인가.
요즘 매일이다시피 최저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국제유가의 역설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대형승용차가 다시 인기반열에 오른다는 소식이다. 난방비가 줄어 반갑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역시 불안한 안락이다. 기름값이 떨어질수록 경제가 어려워진다니, 국제유가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를 당황케 하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현상들은 주변에 의외로 많다. 자식이 많아야 가문이 번성한다 해서 다산을 복이라 했지만, 자식이 많으면 바람 잘날 없다며 고난이 뒤따름을 토로했다. 잘 살고 돈이 많으면 호사를 즐기겠지만, 씀씀이도 많을 뿐더러 재산분란에, 자녀 방탕까지 속앓이로 지새는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스펙이 특출나면 취직이 잘 될 것 같은데도, 그만한 인재를 쓸 필요가 없고, 보수를 더 줘야한다는 이유로 채용을 기피하는 현실에 직면하기도 한다. 미모의 처녀가 연애를 잘하고 애인도 많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런 선입견의 벽에 막혀 오히려 노처녀로 고민하는 사례도 많다.
비만이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라 했지만, 살찐 사람이 회복이 빠르고, 사망위험이 낮고, 오래 산다는 비만의 역설도 있다.
경제학 원론에서 배우는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은 유명하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설명한 이 논리는 물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것임에도 값은 턱없이 싸고, 다이아몬드는 일상생활에 별 소용이 없음에도 엄청 비싼 것을 말한다. 그는 ‘희소성’과 ‘교환가치’의 차이, 곧 ‘가치역설’로 이를 풀이했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값이 싸면 잘 팔릴 것 같은데도 실제로는 비싼 물건이 잘 팔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에서도 이런 역설은 쉽게 본다. 인물이 뛰어나고 소신과 실력도 있는 정치인이 의외로 유권자에게 외면당해 고전한다. 반대로 실속은 없는데 쇼맨쉽에 능하고 입만 살아있는 듯한 정치인이 승승장구하는 일도 많다. 유권자들이 진솔하고 성실한 정치인보다 허세와 허풍의 정치인에 눈길을 주는 것은 ‘정치의 역설’에 길들여진 폐습 때문일 것이다.
서민을 위한 정당,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정당에 사회 저소득층이 등을 돌리는 현상도 그렇다. 실제로 한국에서 여론조사 결과, 가진 자와 부유층·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여당에 월소득 250만원 이하의 저소득 서민들이 가장 호의적인 지지를 보내는 ‘계급배반“ 혹은 ’계층역설‘이 나타났다.
지도자가 무능해 국정과 외교를 망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경제를 파탄내고, 나랏 돈을 허비하고, 서민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좋다며 지지하고 표를 주는 것은 정말 이해 못할 정치의 역설이고 실망이다. 하지만 그 역설이 역설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그런 지도자를 지지하고 표를 줘 뽑았더니 나라와 국민 삶이 엉망이 되더라는 교훈과 학습효과를 불러오는 게 순리이고, 그래야 나라가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져 내린 뒤 건설과 감리 감독이 정밀해진다. 대형 참사가 난 뒤에야 안전대책이 세워진다. 그런 후진사회 발전의 ‘역설의 법칙’이 지금도 변함없이 작동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이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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