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3대(代)가 인구 5~6천의 작은 타운으로 옮겨 앉은지 벌써 반 년 째 접어들었다. 조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전원생활을 꿈꾸며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귀농, 귀촌을 택한다는데 우리도 방법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연유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족사업체로 몇 군데 물망에 올랐던 장소들 중 특히 이곳이 마음에 끌렸던 것은 사업 전망이 밝다는 점은 물론이고, 조그만 강줄기가 마을을 끼고 흐르는 모습이 정겨웠고, 공원이나 하이킹 코스가 생활권 속에 있어 마음먹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자연을 한껏 안을 수 있음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우리 부부의 은퇴지로, 아이들의 생활근거지로 안성맞춤이라 여겨 결정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단조로운 시골생활에 잘 적응해 나갈지도 염려되었고 백인 토박이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마을에서 그들을 상대로 사업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지난 봄 우리는 원하는 이 사업체를 무사히 인수했고, 두 아들들이 앞장서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미 장년이 된 녀석들은 우리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듯 소프트웨어 영역과 하드웨어 영역으로 역할 분담하여 열성을 보였다.
마켓 운영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선 종업원들을 우리 식구로 만드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직원들 중엔 마켓 창설멤버가 있는가 하면 근속기간이 십여 년 이상 되는 직원도 여러 명이어서 이들의 애정어린 도움 없이는 독자 운영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우리는 전임자가 간과했던 직원 복지에 신경을 쓰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일일이 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전 직원을 한식구로 만들고 나니 엄청난 업무들이 한결 수월해졌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사발통문 역할까지 해주어 운신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아끼는 사업체를 백인이 아닌 동양인인 우리가 인수하고 나자 곱지 않은 시선들이 한동안 따라다녔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머니가 채워지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들이라 간주했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마음을 읽은 우리는 잠깐 머물다 가는 한이 있더라도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사업을 위해서라기보다 백인이던 동양인이던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으면 소통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아이들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먼저 발 벗고 나서주었다. 1.5세대의 빠지지 않는 언어 구사력에다 젊기까지 한 녀석들이 마을의 각종 행사며 문제점 해결에 동참하고 나서니 이방인에게 꽁꽁 묶여있던 마을 공동체가 빗장을 열어 화답해 주었다. 그들에게 이 땅에서 함께 살아 갈 동행자로 인식되기까지 진심어린 우리의 행동이 선행되었기 때문 아닌가 한다.


진심이란 마음을 나누는 양자 간 서로 통하면 그 진가가 배가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땐 오해의 소지를 낳기도 한다. 초기엔 고객과 종업원의 돈독한 사이를 보며 괜히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모두가 피붙이 같은 그들은 바쁜 시간임에도 서로 붙잡고 긴 하소연을 하는가 하면 때론 큰소리로 함께 킬킬거리며 웃기도 했다. 혹시 나의 꼬투리로 저렇게 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불편한 생각은 모두 자격지심이었고 업무 중 손님과의 너스레가 피로를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건 고객관리 차원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무리 힘든 일도 해내고야 마는 근성, 새내기 주인보다 더 일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직원 중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고 합심하는 그들을 보며 뒤늦게야 우리는 진심으로 통하는 사이임을 깨닫는다.


한 해가 다 기운 지금, 올해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이웃을 가졌다는 점이다.
한여름 시냇가에서 오한을 느꼈다면 눈바람 날리는 지금은 오히려 포근함을 느낀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체 속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동짓밤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송년단상

● 칼럼 2015. 12. 25. 11:05 Posted by SisaHan

어김없이 또 한해가 간다. 초속 30Km로 달려가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원점’을 지나는 것이다. 사실은 우주공간에 원점을 그어 놓았을 리도 없고 지구는 그저 창조의 섭리에 따라 궤도를 달려갈 뿐이니, 올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사람들에게 나이 한 살 더 먹고, 년도를 표시하는 네 자리 숫자와 달력이 바뀌는 것 말고 다른 변화란 얼마나 되나. 일부 제도와 정책들이 바뀌기도 하겠지만, 해는 변함없이 동쪽에서 떠오를 테고, 밥먹고 일하고 잠자고… 우리의 일상과 삶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삐걱대며 굴러갈 것이다.


우주의 무한한 시공에서 올해와 새해의 구획이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은하계로 확대해 본다면 끝없는 한 해의 연속일 수도 있고, 우리 기준에 매일이 한 해씩인 천체도 있을 테니까. 태양계는 은하계를 2억2천만년 주기로 돌고, 우리 은하계는 다시 우주의 중심을 2억3천만년의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고 한다. 태양계 내에서는 수성이 공전주기 즉 1년이 88일에 불과하며, 화성은 687일, 목성은 약12년이고, 토성은 30년에 가깝다. 우리가 1년으로 삼은 365일이나 지난해·새해라는 것은 사실 광대한 우주의 눈으로 볼 때는 지구인들만의 ‘천동설’적인, 극히 인간 중심적인 아전인수의 인식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어차피 지구촌에 사는 우리들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설레임을 갖는다. 또 다짐도 한다. 그 것은 짐승이나 식물들과 달리 인간이 사유(思惟)의 영적 존재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성장과 성숙의 인식이 생겨났고, 또한 생명의 유한성에 생각이 미쳐 죽음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는 불안과 초초감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내일은 좀 더 성숙하자, 인생의 종말이 오기 전에… 라는 동력(動力)을 스스로 만들고, 또 거기에 떠밀려서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구획을 정해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하며 지난 세월을 성찰하고 새로운 날들을 기대와 소망가운데 맞이하는 인간의 지혜이기도 하다.

어김없이 영겁으로 사라져 가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기쁨과 흡족함 보다는 아쉬움과 후회스런 일들이 많음을 본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더 힘껏 노력했어야 하는데,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기력을 쏟아서…. 이런 저런 이유와 불만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새해에 더 기대를 품는 것이다. 올해 보다 달라질 뭐 특출난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새해에는 달라져야지, 달라지겠지 하고 결심과 여망 사이에서 자신을 추스린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인간 세상에 어디 만족이 있던가. 물론 완벽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늘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았고, 이뤄질 수 없는 100%와 완벽을 노렸던 것은 아닐까. 혹시 기대치를 낮추고, 50%만 이뤄도 잘 하는 것이라는 목표를 세웠더리면 지금쯤 어떤 자신의 성적표를 받아 보았을지 되돌아보면 어떨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빈둥대며 얼렁뚱땅 사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일부 철없는 유한족들도 그들 나름대로는 열심이었다. 그들의 가치와 그릇크기 만큼이었겠지만. 그렇게 우리들 대부분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남의 나라에 와서 마음고생하며 사는 이민가족들임에랴, 몸 고생 또한 충분히들 하고 잘도 지탱해왔다.


그러니 우리 이제 송구영신의 원점을 돌며,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보면 어떨까. 힘든 여건 속에서 이만큼 성장했으니 참 대견하다. 고생했다. 고난을 잘도 견디며 이겨냈구나, 고맙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오게 하고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러면 지난해의 고난이 축복의 담금질이 되어 새해는 더 성장하고 성숙하는 전진의 날들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지난 세월의 시름들을 훌훌 털고 흘려보내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지구촌을 뒤흔든 암울한 소식들과 고향 한국 땅에서 들려온 속상하는 세태들, ‘혼용무도’(昏庸無道)라며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탄식들이 그치도록, 그리고 여기서까지 우물안 개구리처럼 서로 질시하며 상처를 주는 이기적인 다툼들 등은 모두 다 가는 세월의 강물에 묻혀 제발 함께 떠나가기를 기도하자.
지혜의 왕 솔로몬이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헛되고 헛되도다…” 더불어 그는 “다 지나가리라” 는 삶의 철학을 주었다. 그렇게 너그러이 보듬고 마음을 추스려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소망과 평안이 밀려드는 새 날들을 맞이하면 정말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해체된 사회, 새 살이 돋으려면

● 칼럼 2015. 12. 25. 11:02 Posted by SisaHan

“죽는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하루에 38명이 자살하는 세계 최대의 자살 공화국 한국에서 서울대생이 자살했다고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유서에 남긴 이 한마디를 며칠째 자꾸 되씹는다. 개인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이론을 지지하는 나는 다른 청년들에 비해서는 장래가 덜 비관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자살 사건과 며칠 전 고시원에서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았을 한 청년의 사망 사건을 참으로 무겁게 받아들인다.


며칠 전 2학기 마지막 강의 시간에 나는 오늘의 청년 문제에 대해 조별로 토론을 하게 했다. 그들 대다수는 오늘의 청년 문제를 세대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삶이 덧없다…, 무한한 고통의 연속, 더 살아봤자 희망이 있을까, 허무하다, 일상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 원래는 세상이 빨리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 사회가 더 좋아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이 앞의 자살 학생의 유서에서도 나왔지만, 태어날 때 물고 나온 수저가 운명을 좌우한다면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고 이 세상은 ‘비합리’의 극치인 지옥인 셈이다. 나는 “왜 청년들은 분노하지 않느냐”고 기성세대 특유의 질문도 던졌는데, 그들은 “분노감은 있지만 분노할 방법을 모른다”고 응답했다. 세습자본주의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고립된 개인들의 군상을 보는 것 같았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독일 히틀러 체제의 등장은 사회의 원자화, 사회 해체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즉 전체주의 세력은 대중의 불안에 편승하여 사회적 유대를 먼저 파괴한 다음 손쉬운 방법으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국민 그 누구도 권력을 신뢰하지 않지만 아무도 권력의 일탈과 억지, 거짓과 폭력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표시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서로에 대한 감시자가 되고, 불안과 위기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느끼면서 적나라한 사적 욕망 외에는 드러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탐욕과 범법으로 살아온 장관 후보들이 정부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에 역겨워한 사람들이 샌델의 ‘정의론’에 비상한 관심도 가진 적이 있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 이제는 정의를 말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황당한 일이라도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리고, 심각한 거짓말도 대형 확성기의 우격다짐의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유포되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반박할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며칠 전의 세월호 청문회처럼 모든 언론이 완벽하게 외면하여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중요하고 심각한 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이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권력의 총체적 무책임, 즉 모든 것은 개인 책임인 세상이다, 뻔뻔함, 우격다짐, 욕망 부추기기, 그리고 겁박으로 체제가 유지된다. 지치고 힘든 대중들이 분노를 표현할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면, 국가의 겉은 화려하고 멀쩡해도 속은 다 썩어서 텅 비어 있다. 오직 한 사람만 말한다. 관료, 기자들은 받아쓰기만 하고 그 어떤 의견도 제출하지 않는다. 아마 더 심각한 위기가 와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는 시키는 대로만 했기 때문이다.


선거가 다가온다. 출마자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표를 달라고 악수를 청한다. 무슨 염치로 정치를 한다고 그러느냐고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은 나만의 것일까? 해체된 사회를 그냥 두고 정치가 바로 설 수 있나? 고립 파편화된 ‘을’들을 모아서 소리치게 해야 희망이 보일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살아나고 논쟁이 시작되어야 정치가 바로 설 수 있고, 그래야 이 껍데기 아래에서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캐나다에서 오래 살아온 이민 선배들이 “이 나라는 좋은 나라야!”하고 자랑할 때마다 시큰둥했던 게 사실이다. G7인 선진 부국에, 이민 선호도 최고의 나라다. 그렇다지만 그게 어디 내 삶에 얼마나 직결이 되나? 요사인 한국 사람들이 더 부유하게들 역동적으로 사는 것 같은데…. 솔직히 시간이 가도 자연스런 언어소통이 힘들 뿐더러, ‘부담이 없다’는 의료체계도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지쳐서 짜증이 나기만 하고, 뭐 하나 ‘빨리 빨리’ 되는 게 있어야지….
그렇게 10여년이 흐른 캐나다 이민의 삶에서 ‘’아, 이 나라가 과연 좋은 나라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 일들이 최근 잇달아 벌어졌다. 그리고선 ‘이 좋은 나라에 산다’는 희열이 솟구칠 찰나, 얄궂게도 그놈의 떨쳐버릴 수 없는 ‘애국심’이 달갑지 않은 듯 재를 뿌리고 만다. ‘내 사랑하는 조국’과의 대비에 그만 훈훈해지던 가슴에 소슬바람이 일고 입맛이 씁쓸해진 것이다.


10년 권세를 누리며 우리 눈에는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보수당 정권을 일거에 몰락시킨 이 나라는 좋은 나라, 역시 선진국이었다. 아무리 하퍼가 미남에 립서비스 좋고 자녀보육료를 듬뿍 얹어줘도, 국민들 눈은 예리했고 가슴은 차가웠다. 의회 스캔들에 경제도 난맥, 국제사회와 테러전쟁에서 미국 추종의 외교색채가 짙어지는 등 비위가 틀리자 단칼에 목을 쳐버렸다. 냉정하게 표로 심판하여 정권을 바꿀 줄 아는 현명한 시민들, 그리고 추잡한 댓글이나 폭로공작 같은 아무런 불미스런 일이나 잡음없이 순탄하고 안정되게 정권이 옮겨가는 행정과 관료시스템-, 좋은 나라였다.
그렇게 택한 자유당 정권은 국제사회가 보란 듯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며 유권자들의 표에 보답해 나가고 있다. 각국 전투기들이 중동으로 몰려드는 시국인데도 철수를 확고히 하고, 시리아 난민을 대범하게 받아들인 것은 그 시작이다.


유럽이 테러로 뒤숭숭하고 미국은 트럼프라는 돈키호테 대통령후보가 ‘이슬람 입국을 막자!’고 큰소리를 칠 만큼 반 이슬람 정서가 비등한 이 즈음, 토론토의 피어슨 국제공항에서는 성대한 환영행사가 벌어져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서로 받느니 못받느니 실랑이 하며 마지못해 수용하는 전쟁난민들을 이 나라는 반색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일국의 총리와 장관들, 주수상과 시장 등 정계거물들이 한 밤중 피란민들이 도착하는 공항심사대까지 총출동해서는 끌어안고 함께 셀카를 찍고, 선물을 안겨주면서 국빈 모시듯 했다. 많은 시민들도 피켓과 선물을 들고 공항에 나가 그들을 격려했다.
거기서 트뤼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고향에 잘 오셨다. 우리는 피부색이나 언어, 지역, 종교 등을 배경으로 캐나디언 임을 정의하지 않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열망, 그리고 희망과 꿈으로 정의한다” 호남형 총리가 지구촌을 향해 호쾌하고 당당하게 밝힌 ‘자유와 평등’의 선언이었다.


자동차를 몰고가며 라디오로 트뤼도의 발언을 듣다가 눈물을 마구 쏟고 말았다는 어느 이민 선배의 실토가 코끝이 찡하도록 가슴에 와닿았다. 테러 위험 속에서도 고난에 빠진 이들을 따뜻하게 품을 줄 아는 나라, 피부 색깔과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차별이 없는 이민자들의 나라, 이 나라는 참 좋은 나라였다.
그런데 이 즈음 대한민국에선 조합원 70만명의 거대 노조대표 한 사람을 체포하겠다며 6천명이 넘는 경찰이 종교사찰을 겹겹 둘러싸고 멋대로 들락거리며 겁박하기까지 했다. 그가 나라를 뒤엎을 반역죄를 진 것도 아니고 극악한 테러리스트도 아닌 교통방해죄였다니, 참으로 허퉁할 뿐이다.


정부 잘못을 외치는 집회를 무조건 불온시하고, 헌법재판소가 불법이라는 차벽을 산성처럼 쌓아 대로를 차단하고는 물대포를 시민에게 정면으로 쏘아대는 경찰에, 시위대를 IS 테러범들로 비유하는 대통령까지, 정말 슬픈 현실이다. 그런 엄중함에도 야당은 정신 못차리고 자중지란에 분열까지 하는 나라.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찌 거기에만 머물고 있는가, 아니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것인가.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