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구한말과 신 냉전의 부활

● 칼럼 2016. 2. 20. 20:37 Posted by SisaHan

청국과 러시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 조선말기 무기력하게 발가벗겨진 ‘동아시아의 목장’ 한반도를 둘러싸고 군침을 흘리며 치근대거나 각축을 벌인 나라들이다. 이들 가운데 최종적으로는 가까운 주변국인 청-러-일이 주도권을 다투다 마침내 일본이 양자를 제압하고 세력을 장악해 식민지로 만든 역사가 조선의 최후다.
그런데 당시의 청-러-일에 더해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이 강력하게 등장한 구도가 지금의 한반도 주변정세다. 흔히 이야기 하듯이 1백여 년이 지난 예나 지금이나 정말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형세가 역사의 반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한번 되돌아 보자. 주변 열강은 고종과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권력암투로 대립하며 국권이 비틀거린 틈새를 파고들어 마음껏 농락했다. 자력갱생의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무장해제 당한 상황과 망국을 자초한 것은 바로 무능한 권력자들이었다. 세계정세나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권력보신과 사대주의에 젖어있던 왕가의 지도자들. 그들은 외교라는 표현조차 민망한 강대국 줄잡기에 골몰하다 스스로 제물이 되고 말았다.
권력다툼과 부정부패로 촉발된 임오군란에 명성황후는 충주로 도망가고 대원군은 청국에 끌려간다. 또 갑신정변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였다가 일본의 반격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고종은 러시아공관에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민영환을 러시아에 보내 “조선을 보호령으로 삼아달라”고 니콜라이 황제에게 호소하기에 이른다.


참지못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다. 권력의 횡포에 피폐해진 민생고, 국권이 찬탈되는 망국의 한이 마침내 민란으로 번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1백여 년 만에 그와 비견할 반봉건 반외세의 세계적 민중혁명으로 평가받는다. 일제에 60만명이 학살 당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무참하게 싹이 잘렸지만 이후 독립운동과 공화정의 밀알이 됐다.
지배층 때문에 국권이 무력해진 나라의 죄없는 백성들은 외세에 시달리고 짓눌리다 총칼에 희생되며 식민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기류를 ‘신 냉전’의 재현이라고 말들 한다. 한-미-일에 북-중-러의 대립구조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전쟁의 위기마저 거론한다. 왜 이 지경까지 됐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같던 냉전이라는 단어가 되살아나고, 조선말기의 정세가 어른거리는 이 역사퇴행의 현상들 역시 무능과 무모함 때문이라면 틀린 말일까.


북한의 망나니식 벼랑 끝 도발에 냉정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구한말의 갈팡질팡 그 모습 그대로다. 북의 떼쓰기 전략이 한 두번 있었던 일은 아니다. 수없이 지켜보고 응대해왔던 경험이라면, 저들을 몽둥이로 쳐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엔이 2006년 이후 지난 10년의 북한제재를 평가한 기밀보고서는 한마디로 “국제사회 제재는 실패했다”고 했다. 핵도 미사일 개발도 포기시키지 못했고 북은 회피와 어기기만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짓밟을수록 더 꿈틀대며 독기만 오르게 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 상황이라면 한국은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양측의 중간자요 한반도의 주역으로 지혜롭게 갈등을 풀어갈 방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앞장서 조장하는 것만 같다.


국제적인 포위망에 갇힌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독안에 든 쥐의 단말마적 저항일 수도 있다. 포위망의 주도권을 쥔 미국을 향해 면도날을 휘두르는 것이고 같이 살게 해달라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남한에 누차 대화신호를 보낸 것은 동족이니 도와달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더 길길이 뛰며 개성공단을 전격 중단시키는가 하면 사드 요격미사일망을 설치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북한이 격앙하는 건 당연하다. 오로지 미국에 기대 호가호위하는 모양새니 북의 반발은 물론, 같은 편일까 기대했던 중국은 ‘사드’에 발끈해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최대무역국인 중국이 등을 돌리면 한국경제는 얼마나 추락할지 상상은 해봤을까.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일거양득,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게 뻔하다, 어서 군사대국을 재현하고 싶은 일본의 아베류 야욕에는 이런 호기가 없다.


그런데도 미국을 등에 업고 일본과도 군사정보를 주고받는 동맹을 견고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중-러와의 신 냉전 전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나라에 앞으로 어떤 손익이 올지, 전혀 계산이 없는 무개념 지도력에 국민들만 고달프고 답답한 현실이다.
개성공단 폐쇄로 북한보다 오히려 우리 업체와 경제에 훨씬 큰 손실을 안기고, 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다고 우겨 스스로 유엔 결의 위반의 굴레를 덮어쓰더니 이를 다시 부인하는 행태에서 무능과 무모의 지도력은 입증되고도 남는다.


< 김종천 편집인 >



교환학생 간 대학 1학년생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스웨덴 온 지 3주가 되었는데, 유모차를 끌며 아이를 달래는 아버지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누군가를 포용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볼 때면 저 스스로 얼마나 배제와 혐오에 익숙해졌는지 느끼게 됩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북유럽에 가보지 않았거나 그곳에 가서도 이런 광경을 눈여겨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1월29일 국회에서 열린 저출산 특위에서 “독일은 출산율이 1.34까지 내려가서 대거 이민을 받았는데 터키에서 400만명이 와서 문을 닫기도 했다”면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족 이민을 대거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 2015년 통계에 이미 외국인 취업자 100만여명 중 절반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고 이민자 가족의 26.5%가 결혼 이민이라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조선족이 있어서 문화 쇼크를 줄일 수 있다”는 식의 망언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저출산 현상은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가지 못하는 때부터 시작되었다. 농촌 총각들이 경제적으로 도시 직장인들에게 뒤지지 않아도 열악한 문화적 환경에서 힘든 노동에 시집살이까지 감내할 여성들은 사라지고 있었다. 2002년께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이 한창일 때 교육자들은 총각들을 모아놓고 “가부장적 사고를 버리고 적극적이고 예의 바른 자세로 교제에 임하라”고 가르쳤다. 동시에 농업정책과 농촌의 복지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농촌 남성들의 결혼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농촌 총각과 도시 여성 만남을 주선하는 ‘그린커플제’ 같은 행사도 마련했지만 이런 이벤트식 중매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신 결혼알선회사를 통해 조선족, 베트남, 필리핀 등 외국 처녀들을 ‘사오는’ 식으로 일을 해결하려 했다. 수많은 서류를 준비하고 현지를 방문해 의사소통도 어려운 상대와 맞선을 봐야 하는 수고에다 500만~1천여만원의 비용까지 들이고서도 위장·사기결혼 등 부작용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5년이 지나 같은 문제가 도시에서 반복되고 있다. 사실은 도시 총각들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집도 없는 경우가 많아 더욱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온라인상의 여성혐오 현상은 이런 도시 총각들의 수난과 직결된다. 그래서 여자들을 수입해 오겠다고? 저출산 해결은 배제가 아닌 포용의 사회를 만들 때 가능해진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 죽어가는 태아가 0.3%가 되는데 우선 이 아이들부터 살려내자고 말한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대의 인프라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땅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에게 전액 양육비와 부성휴가 등을 제공하면서 모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갔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1, 2차 세계대전의 참사를 겪은 후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근대화가 진행되면 가족 해체는 불가피하다는 것, 국가가 악마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시민들이 미래를 내다보며 ‘우리들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체제 전환을 했던 것이다. 독일이 400만 터키 이주민을 받아들인 것은 이런 환대의 인프라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문화주의는 한낱 단어에 불과하고 여전히 해외 입양을 보내는 사회, 집권층은 세습적 중산층 보호에 급급한 나라에서 출산 이민을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주 많은 이슬람국가(IS) 요원과 글로벌 테러리스트들을 양산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김 대표님은 적대와 혐오의 감정이 극대화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방안부터 찾으시라. 그리고 지금 ‘헬조선’을 말하며 이 나라를 빠져나가려는 청년들을 붙잡을 묘안을 찾아내기에 골몰하시라. 엄마 혼자 하는 독박 육아가 사라지고 ‘사회적 양육’이 가능해지면 결혼 파업, 출산 태업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저출산은 ‘사회’에 대한 감각의 실종에서 오는 현상이며 매매와 꼼수로 해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 조한혜정 - 연세대 명예교수, 문화인류학자 >



한국정부는 지난 10일 통일부 장관의 ‘정부 성명’을 통해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처를 발표했다. 이 조처는 법적 근거 없이 취해진 것으로 무효다.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한다는 정부의 성명은 우리 국민이 북한 지역을 방문할 때 필요한 통일부 장관의 방문 승인을 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집행될 것이다. 개성공단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입주기업 등 투자자한테 자기 소유 재산의 사용·수익을 전면 차단하는 것이므로 재산권을 수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헌법 제23조는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려면 국회가 입법한 근거 법률이 있어야 하고, 이 법률에는 헌법 제23조에 따라 정당한 보상이 규정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번 조처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우리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한 것이므로 헌법 제23조에 위반된다.


개성공단 전면 중단이 합법적이려면 적어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17조나 제18조에 따라 개성공단 기업한테 이미 승인한 협력사업을 취소하거나 조정을 명령해야 한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른 협력사업 취소나 조정명령은 발동 요건과 청문 등의 절차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이번 조처는 이러한 요건과 절차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헌법은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대통령한테 긴급한 조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헌법 제76조에서 규정한 긴급재정경제명령과 긴급명령이다. 대통령은 상황이 긴급하다 하더라도 헌법에 정해진 형식과 절차를 따라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법치주의의 요구이다. 헌법 제76조의 긴급재정경제명령과 긴급명령은 발동 뒤에 지체 없이 국회의 승인을 얻는 등의 절차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는 정부의 이번 조처는 대통령이 행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 즉 이른바 “통치행위”이므로 위법성을 따질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상 법치국가 원리에 비추어 볼 때 통치행위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직접 관련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확립된 판례다.
나는 2004년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관리위원회 법무팀장으로 일했다. 이 기간에 북한 사람들을 상대로 개성공단을 성공시키려면 투자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중요하며 그러려면 법치주의가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우리가 뚜렷한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면 북한한테 법치주의를 요구할 근거가 없게 된다.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더라도 우리 헌법의 법치주의가 요구하는 절차를 지켜야 한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에 맞서 11일 개성공업지구를 폐쇄하고 우리 기업의 재산을 전면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생산된 제품이라도 가지고 나와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입주기업한테는 설상가상이다. 다만 북한이 우리 기업의 재산을 동결한다고만 하고 몰수한다고 하지 않은 것은 이후 채권채무를 정산하기 위한 여지를 둔 것이어서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기대하고 싶다.
사이가 틀어져 별거하게 된 부부가 이혼을 위한 재산분할 협상 과정에서 서로 화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협상이 재개된다면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 남북 공동번영의 소중한 옥동자인 개성공단을 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 김광길 - 변호사, 전 개성공단관리위원회 법무팀장 >



[1500자 칼럼] 처음처럼

● 칼럼 2016. 2. 12. 21:22 Posted by SisaHan

얼마 전에 한국의 인터넷 상에는 한국의 한 교수의 죽음이 크게 떠돈 적이 있었다.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 생의 가치와 의미를 가르친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는 「신영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관련된 글을 올렸다. 마치 모두 그의 제자였고 독자인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7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캐나다로 떠나온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무리 떠나온지 오래 되었다 해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 부끄러웠다. 그의 유명한 책,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을 제목이라도 들었음직 한데…. 더우기 ‘처음처럼’이란 수필집을 썼고, 그 책 제목을 서민들이 주로 마시는 소주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준 사람이고, 글씨마저 직접 써준 분이라는 데 관심이 갔다. 나도 이곳 캐나다에서 몇 해 전에 한국식당에서 ‘처음처럼’을 마셨고 제목과 글씨체가 참 특이하면서 사람을 끈다고 생각했다. ‘처음처럼’이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이전에 ‘초심으로 돌아간다.’ 는 말이 있었지만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품었던 뜻이나 마음을 잃어버리고 현실과의 타협과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점점 퇴색해가고 타락해가는 느낌을 가지기 마련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처음에 가졌던 좋은 인상은 어디로 가고 알수록 두려워 질 때가 많다.


그의 약력을 보고 또 놀랐다.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년을 교도소에서 살다 나온 것이었다. 서울대 상대 졸업생으로 육사와 숙명여대에 재직 중이었다.
그 때가 유신정권 때였다. 참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데모도 심했고, 그리고 간첩단 사건 같은 엄청난 사건도 많이 터지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학에 진입할 때였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녔던 나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가끔 친구 중에 유신헌법과 ‘귀신헌법’을 말했지만 전혀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으로 빠진 친구 때문에, 정부(정보부)에서 발표하는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같은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신영복 선생님은 27살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으니,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무기징역이었으니 끝이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자신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하루 한번 들어오는 신문지 크기의 햇빛 때문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는 자신이 빼앗긴, 또는 잃어버린 20년에 대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감옥이 자신의 ‘인생대학’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처음에 구형 받은대로 사형을 당했더라면 얼마나 큰 비극이었고 우리에게 손실인가 생각해보았다. 88년에 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는 ‘감옥에서의 산책’이란 책은 물론 ‘처음처럼’이라는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소주는 이 세상에서 빛도 보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처음에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이 되었다 해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통혁당이었다. 그 차이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두 사건에는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이 연루되었고 고문으로 폐인이 되거나 나중에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 시인 천상병도 그중 하나다. 인혁당에 관해서는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지 하루도 안돼 사형을 당한 8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김형태 변호사의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읽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다. 50년 전에 사형당한 사람들에게 무죄선고가 무슨 소용있으며 그 지난 50년 동안 가족들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지, 진실을 밝히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혹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없는가? 신영복, 그는 재심을 신청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통일혁명당은 그가 체포된 후에 생겼다고 말했다. 이 모든 일이 남북이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되는 어두운 시대의 비극이라 생각한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이제는 있을 수도 없다. 삼가 신영복 선생님과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인들의 명복을 뒤늦게 빕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처음처럼….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