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응답하라 2016

● 칼럼 2016. 2. 6. 20:2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궁금해졌다. 28년 전을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끌었다. 28년 뒤인 2044년에 2016년을 그린 드라마가 나온다면 2016년의 젊음과 사랑과 일과 꿈과 가족을 어떻게 그릴까. 쌍문동쯤에서 이야기가 시작될까. 편의점에서 ‘혼밥’을 사 먹는 젊음들로 시작될까. <응팔>의 주인공들은 28년 뒤 어떤 모습일까. 그들도 70대가 될 터인데 어떻게 늙어갈까. 그들의 자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28년이면 강산이 세 번 변할 세월이다. 우리의 일상은 외형적으로 참 많이 변한 것이 틀림없지만 내면적으로는 28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 게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1988도 또 그 28년 전인 1960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란 영화를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4.19가 났다. ‘독립운동의 화신’ 85살의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이 이상한 한국어로 방송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1987년 6.29를 거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의 표가 나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선거를 통해 무엇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해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한판의 승부가 아니’라며 <한겨레신문>도 탄생했다. 정권교체와 또다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경험도 했다.


정작 가장 걱정되고 궁금한 28년 뒤, 2044년을 나는 볼 수 없다. <응팔>의 부모들처럼 나도 이미 죽었을 테니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2044년이다.
2044년. 그때도 분단체제일까. 분단 100년을 맞게 되는 것일까. 북은 핵을, 남은 사드를 장착하고 6자회담 4자회담을 놓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게 여전할까. 무겁고 무섭다. 답이 없다. 답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데도. 분단 고착이 북에 이익일까 남에 이익일까. 주변국들의 필요가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데도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기존 권력체제 유지를 일관되게 최고의 가치로 삼고만 있을까.
2044년. 2030년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해 2040년대 들어서면 우리 사회는 초고령사회가 되어 인구의 3분의 1이 노인인구다. 지금은 노동가능인구 6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하는 구조이지만 그때가 되면 두 명이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


그 두 명은 지금 3포세대 심지어 9포세대라 지칭되며 일자리 결혼 출산 주거가 막막한, 희망이 없는 세대들이다. 자기 앞가림도 어려운 그들이 초고령 노인들을 먹여살려야 한다. ‘응팔세대’들이 손자를 품에 안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들아 미안하다’ 하고 일찍일찍 세상을 떠나주는 게 희망 없는 세대를 키우고 손놓고 바라만 본 세대들이 아들 세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고 바람직한 노인상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총선을 앞두고 ‘의리와 뚝심의 경상도 사나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정말 쌍팔년도 구호가 난무한다. 쌍팔년이란 1988이 아니고 단기로 생년월일을 표기하던 시절에 나온 말로 단기 4288년, 그러니까 1955년도 이야기다. 조폭영화 찍는 것도 아닌데 그런 구호가 먹혔고,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증거다. 비박 친박 진박 영남 호남 대구 부산 목포 타령 하는 게 2016년에도 여전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새 생명은 태어나지 않은 채로 노인인구만 늘어나 그들이 선거에서 이익집단처럼 표를 행사하고 분단백년을 맞게 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2016년은 응답해야 한다. 28년 뒤, 2016년을 추억의 드라마로 불러내기 위해선. 1988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라고 말하고 싶은, 인생에서 추억의 드라마로 간직하고 싶은 해였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의 2016년이라면 28년 뒤인 2044년의 ‘응답하라 2016’은 괴기공포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해가 될지도 모른다.
< 김선주 - 언론인 >



[1500자 칼럼] 언제 철이 들까?

● 칼럼 2016. 1. 22. 17: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예전에 어른들은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철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행동을 나무랬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이 계절(철)을 모르고 행동하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한참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엄마가 사준 털장화가 좋다고 밖으로 신고 나가거나 추운 겨울에도 감기 들기에 딱 좋게 아무런 옷이나 입고 나가는 그런 행동을 향해 철을 모르고 행동한다는 지적이 아니겠는가?
핵무기가 무슨 장난감인 것처럼 함부로 휘둘러대는 사람이나 사람의 생명을 짐승의 것처럼 다루는 잔인한 인간들이 철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오늘의 세태이다.

대학 시절에 팝송을 즐겼던 나는 한 노래가 생각난다. 제목이 Turn! Turn! Turn! 이라는 노래로 1962년에 발매되면서 나중 버즈(The Byrds) 라는 팀이 부르며 대 히트를 했고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에 들어간 곡이다.
가사는 성경 전도서 3 장 1 절 이하의 말씀으로 모든 일은 정한 때가 있고 기한이 있다면서 여기에서 발전하여 모든 것은 돌고 돌아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전도서를 허무주의를 말씀한다고 보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전도서는 인생을 잘 보고 살아가라는 경고성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 인생을 아무렇게나 사니 문제다.
이 노래는 인생에게 때가 있고 그때는 항상 되풀이 되어 내 때가 아니면 아들 대에 또 손자손녀 대에 이루어지고 되풀이 되는 삶 속에서 뭔가 깨닫고 변화가 될 수는 없겠는가 하는 말이다. 결코 허무를 말하지 않고 그런 허무를 깨닫고 어리석은 행동, 때를 모르고 사는 철없는 삶을 버리고 살라는 경계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깨닫자 말할 때 과연 인생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인생을 보면서 깨닫고 있을까? 오늘의 세상은 부모와 자식 간에 마땅히 있어야 하고 부부 사이에도 함께 해야 할 기본적인 윤리가 사라지면서 가정도 깨어지고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간의 가치는 이미 사라졌다고 할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은 그렇다해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교회는 어떤가? 과연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사는가? 교회에는 금권 정치와 교권주의가 횡행하고… 누군가의 표현 그대로 오늘이 중세의 기독교회와 꼭 같다는 느낌을 가진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는 중세교회를 나무랬다. 그러니 욕하면서 욕을 배운다더니 오늘의 교회가 중세 교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를 보자. 창조와 심판의 때가 있는 것처럼 범죄한 인생들에 대한 형벌의 때가 있고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에 대한 징계와 심판 역시 있을 것이다. 중세교회가 오늘에 되살아났다면 역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고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것을 진지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진실되게 믿으려는 성도들은 교회를 버리고 숨기 시작했으니 그래서 중세에도 수도원들이 많이 생겼는가 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자꾸만 철없는 행동을 하면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회초리를 들지 않으실까? 현대에는 자녀들에게 회초리로 때리면 아동학대 죄에 걸리기에 하나님도 때리지 않으실 꺼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역설의 실망과 희망

● 칼럼 2016. 1. 22. 17:3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갈수록 겨울 추위의 매서움이 덜하고, 눈도 적게 온다. 살을 에듯 지독한 추위에 고생하던 때에 비하면 한결 지내기가 편하고 수월해졌으니 온난화의 역설이다. 그래서 따뜻한 겨울에 사람들이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표정들이다.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불안하고 찜찜하다. 온난화 여파로 기후가 이상해지면서 지구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표의 빙설이 줄어들면서 해수면이 계속 높아져 작은 섬들이 바다에 잠길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뇨 현상이 자주 발생하면서 기후와 강수량이 바뀌고, 농업에 악영향을 주어 농작물 생산에 차질을 빚어 값이 뛰고있다. 겨울 혹한이 사라지면 이듬해 병충해가 많아지는 등 농사에 나쁜 영향을 준다. 눈이 많이 내려야 다음해 비도 많이 오고 풍년이 들기에 우리 조상들은 소설·대설의 절기에는 글자그대로 큰 눈이 오기를 기원했다.


따뜻한 겨울의 안락~, 당장은 편하고 좋다. 그러나 머잖아 우리 삶에 닥칠 진짜 한파와 망가져 가는 지구의 온난화 악순환 역설은 종말의 불안 그 자체다. 지난해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서 21세기말까지 지구온도 상승폭을 섭씨 1.5도로 제한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지만, 강제성이 없으니 과연 지켜질 것인가.
요즘 매일이다시피 최저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국제유가의 역설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대형승용차가 다시 인기반열에 오른다는 소식이다. 난방비가 줄어 반갑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역시 불안한 안락이다. 기름값이 떨어질수록 경제가 어려워진다니, 국제유가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를 당황케 하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현상들은 주변에 의외로 많다. 자식이 많아야 가문이 번성한다 해서 다산을 복이라 했지만, 자식이 많으면 바람 잘날 없다며 고난이 뒤따름을 토로했다. 잘 살고 돈이 많으면 호사를 즐기겠지만, 씀씀이도 많을 뿐더러 재산분란에, 자녀 방탕까지 속앓이로 지새는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스펙이 특출나면 취직이 잘 될 것 같은데도, 그만한 인재를 쓸 필요가 없고, 보수를 더 줘야한다는 이유로 채용을 기피하는 현실에 직면하기도 한다. 미모의 처녀가 연애를 잘하고 애인도 많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런 선입견의 벽에 막혀 오히려 노처녀로 고민하는 사례도 많다.
비만이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라 했지만, 살찐 사람이 회복이 빠르고, 사망위험이 낮고, 오래 산다는 비만의 역설도 있다.
경제학 원론에서 배우는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은 유명하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설명한 이 논리는 물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것임에도 값은 턱없이 싸고, 다이아몬드는 일상생활에 별 소용이 없음에도 엄청 비싼 것을 말한다. 그는 ‘희소성’과 ‘교환가치’의 차이, 곧 ‘가치역설’로 이를 풀이했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값이 싸면 잘 팔릴 것 같은데도 실제로는 비싼 물건이 잘 팔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에서도 이런 역설은 쉽게 본다. 인물이 뛰어나고 소신과 실력도 있는 정치인이 의외로 유권자에게 외면당해 고전한다. 반대로 실속은 없는데 쇼맨쉽에 능하고 입만 살아있는 듯한 정치인이 승승장구하는 일도 많다. 유권자들이 진솔하고 성실한 정치인보다 허세와 허풍의 정치인에 눈길을 주는 것은 ‘정치의 역설’에 길들여진 폐습 때문일 것이다.
서민을 위한 정당,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정당에 사회 저소득층이 등을 돌리는 현상도 그렇다. 실제로 한국에서 여론조사 결과, 가진 자와 부유층·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여당에 월소득 250만원 이하의 저소득 서민들이 가장 호의적인 지지를 보내는 ‘계급배반“ 혹은 ’계층역설‘이 나타났다.


지도자가 무능해 국정과 외교를 망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경제를 파탄내고, 나랏 돈을 허비하고, 서민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도, 좋다며 지지하고 표를 주는 것은 정말 이해 못할 정치의 역설이고 실망이다. 하지만 그 역설이 역설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그런 지도자를 지지하고 표를 줘 뽑았더니 나라와 국민 삶이 엉망이 되더라는 교훈과 학습효과를 불러오는 게 순리이고, 그래야 나라가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져 내린 뒤 건설과 감리 감독이 정밀해진다. 대형 참사가 난 뒤에야 안전대책이 세워진다. 그런 후진사회 발전의 ‘역설의 법칙’이 지금도 변함없이 작동된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100만 난민을 받는 나라의 교육

● 칼럼 2016. 1. 22. 17:3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독일에서 가장 부러운 것을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시위하는 초등학생’을 꼽겠다. 잘 달리는 메르세데스 벤츠나, 볼 잘 차는 축구대표팀도 부럽긴 하다. 하지만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진 못한다.
유학 시절, “아마존을 살려내라”, “아웅산 수치를 석방하라”고 외쳐대는 초딩들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재작년 베를린에서 그런 초딩 데모대와 마주쳤다. 훔볼트 대학과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차선 두 개를 차지하고 이삼백명쯤 되는 초딩들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고 있었다. 모두 10살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고 적힌 현수막이 나부꼈다. 한창 아프리카 난민의 불법체류 문제로 떠들썩하던 시절이었다. 낮은 구름이 잔뜩 낀 10월의 오후, 자못 심각한 표정의 어린이들이 세상을 향해 ‘정치적’ 의사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작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유럽 대륙을 뒤흔들던 무렵, 100만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영국에서 수만명 난민의 수용 문제로 여론이 들끓던 시점에 독일에서 100만 난민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지난해 1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느 나라 국민이 100만 난민을 받겠다는 정부를 용인할 수 있을까? 물론 독일에서도 메르켈의 결정에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페기다 등 극우집단의 선동이 격화되었고, 기사당 등 보수정당의 비판도 들끓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결정이 몰고 오리라던 정치적 후폭풍은 의외로 잔잔했다.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메르켈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메르켈의 결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를 받아들인 독일 국민의 정치의식이다.
이 ‘독일의 기적’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교육과 이를 통해 형성된 높은 정치의식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를린의 어린 시위대는 ‘100만 난민의 기적’을 낳은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한다.


실로 독일의 교육은 나치 시대에 인류사적 죄악을 저지른 독일인을 인도적인 세계시민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성공의 바탕엔 정치교육이 있다.
독일의 경우 16살(고1)부터 지방의회 선거와 교육감 선거, 18살부터 연방의회 선거에서 투표권을 갖는다. 선거철이면 학교 강당에서 정치 유세가 열리며, 최소 2시간의 선거 유세 참가를 의무로 규정해놓은 학교도 많다. 학생들의 정치활동도 폭넓게 보장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학교법에 따르면, “학생은 정당이나 노동조합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등에 참여하기 위해 최대 일주일간의 결석을 신청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나 14살부터는 정당에 소속된 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고, 16살부터는 정식으로 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처럼 독일은 학생들을 민주시민, 세계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장려한다. 바로 이런 정치교육 덕분에 독일은 가장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낼 수 있었고, 이런 성숙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세계 최고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4월이면 총선이다. 올바른 정치교육이 부재한 사회, 정치혐오를 더 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부추기는 사회에서 성장한 우리는 절반쯤은 투표장에 가지 않을 것이고, 또 투표자의 절반쯤은 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이제 우리도 체계적인 정치교육을 통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