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캐나다가 선진국이다”

● 칼럼 2015. 11. 6. 20:49 Posted by SisaHan

30~40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1~2년 만에 다시 찾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루가 다른 발전상을 토로한다. 널찍한 새 길들이 쪽쭉 뻗어 차량들로 넘쳐난다. 시속 300Km KTX가 씽씽 내달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다. 으리으리한 빌딩 숲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화려한 점포들, 백화점과 고급 음식점엔 잘 차려입은 고객들로 넘쳐난다. 생동하는 다이내믹한 세상, 한국이 이만큼 발전했구나! 대단하다. 경제력 세계 10위권이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거다. 집집마다 대형 LED로 통일한 듯한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이 또한 마냥 즐겁고 태평스럽기만 해서 부자나라 한국을 실감할 것 같다. 웃고 떠들고, 질펀한 오락 프로그램과 눈요기로 가득한 부유층 드라마들, 그리고 날마다 승부를 벌이는 프로 스포츠의 흥미진진 게임소식들,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요리와 맛집 프로들…. 잘 살게 된 나라 한국,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은 그렇게 휘황한 겉모습을 자랑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넘치는 차량행렬 속에서 이상한 낌새가 드러난다. 분명 정상시력을 점검하고 위법을 가르치는 시험도 거쳐 면허들을 줬을 텐데, 색깔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운전자가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빨간불 신호등인데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그냥 내달린다. 그게 돈벌이에 바쁜 택시는 물론이고, 일반 개인 차량들도 눈치껏 색맹이 되는 것이다. 끼어들기는 왜 그렇게 싫어하고 절대 불용하는지, 살벌하기 그지없다. 옆에서 끼어들려는 차를 손짓하여 허용해주니, 뒷 차가 빵빵대며 난리다. 네가 뭔데 괜시리 끼어들게 해서 자기까지 늦어지게 하느냐는 고약한 심보의 표현이다. 양보한 사람만 내가 잘못했나? 민망해지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다. 다들 그렇게 운전하고 살아가는데, 나만 신호 잘 지키고 양보운전하면 공연히 머저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세상이다.


하나 더 살펴보자. 언론은 왜 천편일률인가? 가까운 인터넷에서는 청년들의 3포시대-5포시대다 비명이 들리고, 노동개악이라는 외침이 넘쳐나고, 대통령이 독불장군이다 비판하고, 국정원이 못된 짓을 했다 바꿔라 등등 술렁대는데도, 모든 텔레비전과 주요 신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태평성대다. 밤낮 쉴 새없이 정치해설이랍시고 노골적인 정부여당 추켜세우기와 야당 흠집내기 경쟁으로 특히 노인들의 하루를 오직 자만심으로 채워주기 바쁜-, 낯뜨거움도 미안함도 내팽개친 종편 TV들…. 공영도 마찬가지여서, 90%의 직원이 반대하는 인물을 KBS사장 후보로 강추하는 일은 왜 벌어지는가.


그렇게 한 두 가지만 정상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에 하나님 말고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그런데, 따져보면 이상한 것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정상 보다 이상이 훨씬 많아서, 정상적인 것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는데 문제가 있다.
요즘의 교과서 국정화 논란만 둘춰 봐도 비정상의 심각한 병증은 쉽게 알 수 있다. 왜, 학생들도 교사들도, 역사학자들도, 국민들도 싫다는 데, 국정교과서는 밀어 부치는 것인가. 유엔서도 하지말라 하고, 몇몇 독재국가들만 고수한다는 데도,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게 사명‘이라던 대통령이 오히려 독단과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게 정상이고 선진일까. 여론을 수렴하는 행정예고 이전에 벌써 결론을 내놓고 예산을 몰래 배정하는가 하면 비밀 TF까지 가동하고는 거짓으로 둘러대는 국민무시의 눈속임은 도가 지나쳤다. 역사학자 90%가 좌파 빨갱이라며 반대 시민들을 무조건 쳐부술 적군으로 취급하는 전쟁불사의 외침은 그야말로 비정상의 극치요 독재의 폭거에 다름 아니다.


한 두 가지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비정상의 일상화, 보편화라고나 할까. 더구나 지도자, 고위직들이 자계와 근신은 커녕, 비정상을 밥 먹듯 도리어 ‘솔선’하니, 일반 국민들은 ‘나 하나 쯤’의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서 ‘다들 하는데 뭘 대수라고…’ 하는, 비정상에 대한 무감각의 동질화와 일반화가 나라 전체 곳곳에 번져버렸다. 알면서도 어기는 교통신호 위반도 그 사례요, 공무원은 공복일 뿐 국민이 주인이라는 헌법정신을 깔아뭉개는 정부고위직들의 뻔뻔한 행태가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정부 여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지지율로 받쳐주고, 선거 때면 승리를 안겨주는 국민들의 정치 안목과 수준이 그걸 입증해준다. 선진을 넘본다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겉은 화려하되, 그렇게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양복에 갓 쓰고 짚신을 신은 것처럼 기형적, 후진적 모양새를, 안타깝게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가 신호위반을 흔히 볼 수 있는가? 정부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다고 적군으로 때려잡으려 하던가? 스캔들 정치인이 떵떵거리며 연명하는가? 지난 10.19 연방총선은 이 나라가 선진국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보수당이 잘못하니 단번에 166석에서 99석으로 줄여버렸다. 34석이던 자유당은 무려 150석을 얹혀주어 일거에 정권을 맡겨버렸다.
정치인을 부릴 줄 알고 주인 노릇하는 깨어있는 국민과 그들에게 사심없이 헌신 봉사하는 정치인들의 나라, 그게 바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 김종천 편집인 >



4대강 사업 때도 꼭 이랬다. 반대 여론이 아무리 거세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성명을 내며 강력히 저지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4대강 사업 ‘확신범’이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한 박근혜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엊그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역사교과서 논란의 시작과 끝에는 ‘국정화 확신범’ 박 대통령이 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지와 오만, 그리고 비뚤어진 역사관 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하지만 공인의식의 결핍도 이들을 빗나간 ‘확신범’으로 만드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지도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역할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함에도 이들 두 대통령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했다. 그 결과 주요 국가기관의 공적 기능은 위축되고 사회 공동체는 파괴되는 등 나라의 기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구와 우리 국토를 자신의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다.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군 정보기관을 ‘정권 안보’ 기관으로 전락시킨 건 전형적인 권력의 사유화였다. 이들 국가기관을 이용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는 데 적잖은 공헌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우호적인 박근혜 정권을 출범시켰다. 결과적으로 주요 국가기관을 퇴임 뒤 자신의 사적인 안위를 위해 활용한 셈이다.
한반도의 젖줄인 4대강도 자기 앞마당을 지나는 개울물처럼 취급했다.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십조원의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 임기 안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한반도를 적시며 수만년을 유유히 흘러왔고 앞으로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줘야 할 4대강도 그의 눈에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충족시키는 토목사업의 대상일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자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역사관만이 정상이고, 자신과 다른 역사관은 비정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자신의 역사관에 어긋나는 지금의 역사교과서를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역시 구성원의 몫이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전국 대학교수들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이 이어지고, 야당이 길거리 반대 시위에 나서고, 중고생들이 촛불을 들어도 박 대통령의 ‘소신’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만 간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공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지 않은 채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그 사회는 각자도생의 전쟁터가 된다. 각 영역에서 공적 역할을 하며 사회를 지탱해줘야 할 공인들도 최고 지도자를 따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좇게 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생명 유지에만 몰두하고, 국정원과 군대,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은 정권 안보의 첨병이 되고, 국민의 공복인 관료들은 정권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고, 사회의 앞길을 밝혀줘야 할 언론과 학자들은 곡학아세하며 정권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나팔수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이런 아수라장이 돼 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마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려는 박 대통령의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극우보수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돼 버렸다. 구심력이 워낙 강해 이제는 물러나려야 물러날 수 없는 형국이 됐다.
결국 우리 사회를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파국에 이른 뒤에야 멈추게 될 것이다.
 공인의식이 결핍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8년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공동체는 갈래갈래 찢기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일로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할 만큼 한가한 때인가. 국가와 역사를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두 명의 ‘확신범’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대로 수호하고 있는가?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책무를 이행하고 있는가? 나아가 현 정부의 외교안보 행보가 한반도의 불안요인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는 반면 정치안보 갈등은 심화된다는 ‘아시아 패러독스’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바로 한국 아닌가?


헌법은 국가의 기본 법칙이다. 국가의 정치 조직 구성과 작용 원칙을 정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은 영토까지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는 대통령이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하고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그 책무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지난달 20일 한민구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자위대의 북한 진입시 한국의 동의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유효한 지배가 미치는 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라는 견해를 내세워 논란을 일으켰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3조를 침해하는 발언이다. 엄중한 도발적 발언이다.
그런데 회담에서 이 발언을 직접 접한 한민구 장관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박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회의 석상에서 적극 반박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직무 유기다. 국방장관은 군사력으로 영토를 방어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과의 외교협상에서도 영토와 헌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영토’ 문제가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청와대가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국가라면 이미 계획되었던 정상회담도 취소하거나 연기할 만한 사안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회담을 추진해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입장표명을 거부하는 아베 정부에 ‘그러면 오찬 없이 30분이라도 만나자’고 애원을 한 것은 헌법 수호의 책무를 진 대통령의 자세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왜 이렇게 하는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갈수록 태산이다. 한국 정부가 동의해주어야 일본 자위대가 북에서 군사활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동의를 받으면 자위대가 군사활동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 언제부터 대북 군사활동이 “한·미·일 협력” 사안이 되어 버젓이 한-일 국방장관회담 공동보도문에 들어가게 된 것인가? 시나브로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대북 군사작전을 논의하는 상황까지 갔고, 한·미·일 3국 국방장관회담뿐만 아니라 한·미·일 3자 안보토의(DTT)라는 기구까지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역사문제는 이제 그만두고 일본과 안보협력을 강화하라고 재촉하니 일사천리다.


그런데 그 협력의 지향점이 위태롭다. 박 대통령은 방미 중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강연에서 한-미 동맹이 한반도 남녘에서 많은 기적을 이끌어낸 것처럼 “이제 그 기적의 역사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에 화답하듯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비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부시 정부에서 들고나왔다가 폐기처분한,- “한반도 비핵화”를 명시한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과도 맞지 않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 공약의 “평화적 달성”이 어떠한 내용인지는 성 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의 평화협정 제안을 냉정히 거부한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을 남중국해까지 끌어들였다.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남중국해에서 미군의 무력행사를 자위대가 후방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일본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구한말 일본군을 끌어들인 정도가 아니다. 한반도와 아시아 역사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좌지우지하려 할 것이 아니다. 오늘이 후세에 어떤 역사로 기록될지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



[1500자 칼럼] 가고 싶은 길

● 칼럼 2015. 10. 30. 19:31 Posted by SisaHan

어려운 결단을 했다. 마침내 포트 호프(Port Hope)를 떠나고자 한다. 이곳은 내 생애에 가장 오래 살아온 곳이자, 내 자식들이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라 고향인 셈이다. 정작 은퇴를 하고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명분이 있었다. 생업에 매여 즐기지 못한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심과 아들네가 사는 오타와를 왕복하기 쉽다는 편리함이 주요인이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수시로 갈등하며 망설여왔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는지 더 이상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눈에 밟히던 귀여운 손주들도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더 늦기 전에 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뿐이다.
 
우연히 이곳에 코너 스토어를 사게 되었을 때만 해도, 1년만 살고 다시 토론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그 긴 세월을 이곳에서 지내게 될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사올 때만해도 도시와 시골의 교육제도에 대한 선입견으로 염려가 앞섰었다.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정작 문제는 아이들이 아닌 나 자신에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에 마음 붙이기가 힘이 들었다. 당시 30대 중반인 나는 양 날개를 힘껏 펴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때였다. 헌데 마치 또 다시 이민을 온 셈이라 몹시 절망에 빠져들며 외로웠던 것이다. 미지의 섬으로 귀양을 온 듯 마음이 휘청댔다. 결국 시골아줌마로 적응하는데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내가 희망 포구(Port Hope)라고 부르는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역사 깊은 작은 마을이다. 백여 년의 역사를 담은 건물들이 마을을 고풍스럽게 만들어 준다. 온타리오 호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가나라스카 강둑에서 무지개송어와 연어를 낚을 수 있고, 보랏빛 라일락 꽃이 만발한 멋있는 마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파른 언덕길이 여러 곳에 나있다. 남빛의 푸른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살랑대고, 어둠을 밝히는 한여름 밤의 밝은 달빛과 빛나는 별들을 머리 위에서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 마음이 답답할 땐 호수길을 벗삼기도 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산책을 나설 수도 있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때문에 아침잠을 설쳐야 하는 호젓한 곳이기도 하다.

모처럼 나를 찾아온 지인들은 이구동성 이곳의 조용함과 평화스러움에 감탄하며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을 표한다. 짓궂은 친구는 도(道)를 얼마나 닦았느냐고 물으며 놀려대기도 한다. 만약에 인간이 안이함과 적막함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억지로 내키지 않는 모임에 갈 필요도 없고, 귀찮은 전화도 반갑지 않은 손님도 없다. 나와 나의 가족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충만하게 살아가기엔 고독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마음을 나눌 벗들이 모두 도시에 있어 자주 만날 수가 없었기에 정작 내겐 우리라는 둥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곳은 은퇴 후 도회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사온 주민들이 많다. 허나 나는 그 반대다. 젊은 날의 열정과 꿈을 접고 살아온 곳이라 이제라도 그간에 잃어버린 삶을 다시 찾으려면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훈훈한 사람냄새와 다양한 삶을 접하여 생기를 되찾으며 비록 인간공해로 잠 못 드는 밤이 생길지언정 나 홀로보다는 우리 속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추억의 나래를 펴며 오후 산책을 나선다. 4월이면 무지개송어가, 9월이면 연어가 산란기를 맞아 알을 낳으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댐에 이르렀다. 근래에는 이곳이 관광코스의 하나가 되어 방문객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한창 연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댐을 넘으려 높이뛰기를 하고 있다. 이게 웬일인가. 수산청에서 마련한 통로를 찾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높이뛰기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길인데도 길게 줄까지 서있다. 마치 사기꾼에게 걸려든 어리석은 사람들 같다. 그 모습은 기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이 길 역시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는 이 길을 선택하련다. 더 늦기 전에 떠나리라.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