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경제 번영의 길

● 칼럼 2016. 1. 8. 20:57 Posted by SisaHan

곡절 겪었지만 한인사회 괄목할 성장
당분간 경제 어려워도 단결노력이 관건

한인들의 캐나다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이후 지난 50여년 동안 캐나다 한인 사회는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냈다. 문화, 예술, 학문을 포함한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비교적 발전이 저조한 분야는 정계 진출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민 초기의 한인 이민자들은 거의 맨손으로 캐나다에 도착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쯤에는 상당 수의 성공한 기업가들을 배출하게 되었고 일반 교민들의 생활수준도 많이 향상 되었다. 한인 경제의 주축을 이루고있는 편의점, 세탁업, 요식업, 식품점, 여행 숙박업, 부동산 중개업 등등에서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효과가 보이는 비교적 순탄한 비즈니스 환경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기치 못했던 부동산 시장의 붕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축적해 놓았던 자산을 하루 아침에 날려버리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부동산 경기는 중앙은행의 지속적인 저이자율 정책에 힘입어 아직까지도 호황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교민경제를 지탱해 주는 커다란 활력소 중의 하나였다. 이와 더불어 꾸준히 증가하는 이민자 수와 어학연수 붐으로 인한 유학생 수의 증가는 교민경제에 한동안 지속적인 성장요인을 제공해 주었다. 1980년대 초부터 캐나다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들은 한인 사업가들과 주택 구입자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함으로서 한인사회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인사회 경제발전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한인경제의 주축을 이루고있는 편의점 업계가 일요영업 허용, 대형 할인점 체인의 진출, 정부의 담배 판매에 대한 규제강화 등등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인 이민자 수의 지속적인 감소가 겹쳐 한인경제가 전반적으로 활력소를 잃게 되었다. 다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저이자율 정책으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붐은 부동산 중개업의 호황을 지탱해 주어왔다. 그러나, 최근 미 중앙은행의 기준 이자율 상승은 저이자율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어 부동산 시장의 호황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지 그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있다.


이 시점에서 한인동포 경제의 앞날을 내다볼 때 단기적인 전망은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다. 우선 캐나다 경제 자체의 단기적인 전망이 밝지 않다. 캐나다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산업 전체가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상태가 좀처럼 쉽게 호전될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다만 미국경제의 호황과 캐나다 달러 가치의 약세는 캐나다 수출업계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이 수출 증가 효과가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캐나다 서부지역 경제에 대한 충격을 상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다. 낮은 유가는 일반 소비자들의 실질소득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나 이로인한 캐나다 달러가치의 하락은 수입물가를 상승시켜 이 효과를 상쇄할 것이다. 새로 들어선 연방정부의 사회간접자본 투자 증가를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산성 향상을 통한 경제성장 효과를 가져올 것이 확실시 되지만 당장 피부에 와 닿는 단기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일년 전에 발효된 한캐 자유무역 협정도 장기적인 효과를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당장 그 효과를 기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경제의 지속적인 호황, 유럽경제의 서서한 회복, 그리고 중국경제의 연착륙, 이 세가지가 현실화 되는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캐나다 경제의 침체가 당분간 계속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낮은 루니 가치가 오랫동안 유지되면 한인 여행객들이나 유학생들이 캐나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 동포경제에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 연방정부로 부터 기대해 볼 수있는 보다 관대한 이민정책도 동포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인 동포경제 활성화를 위한, 그리고 한인들의 장기적인 생황 향상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경제적인 요소뿐 만은 아닌 것 같다. 한인사회 100년을 향한 경제번영의 길을 모색해 본다면 우리가 풀어야 할 몇가지 숙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동포사회의 단합이다. 캐나다 동포사회는 부끄럽게도 우리 모국의 분열된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이념적인 면에서, 정치적인 면에서, 아니 한인사회 전반에 걸쳐 너무 분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기 생각만이 옳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생각도 때로는 해볼만 하다. 둘째는, 한인들이 단결하여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하여 진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민족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캐나다 인구의 1.5%로서 10%가 넘는4명의 연방장관을 배출한 시크(Sikh)계 인도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인 동포경제 번영의 지름길은 단합과 노력이다.
끝으로, 시사 한겨레의 창간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 한인 동포사회와 함께하는 시사 한겨레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 유종수 - 경제학 박사, 공인은퇴-재정상담사 >



가족 3대(代)가 인구 5~6천의 작은 타운으로 옮겨 앉은지 벌써 반 년 째 접어들었다. 조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전원생활을 꿈꾸며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귀농, 귀촌을 택한다는데 우리도 방법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연유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족사업체로 몇 군데 물망에 올랐던 장소들 중 특히 이곳이 마음에 끌렸던 것은 사업 전망이 밝다는 점은 물론이고, 조그만 강줄기가 마을을 끼고 흐르는 모습이 정겨웠고, 공원이나 하이킹 코스가 생활권 속에 있어 마음먹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자연을 한껏 안을 수 있음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우리 부부의 은퇴지로, 아이들의 생활근거지로 안성맞춤이라 여겨 결정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단조로운 시골생활에 잘 적응해 나갈지도 염려되었고 백인 토박이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마을에서 그들을 상대로 사업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지난 봄 우리는 원하는 이 사업체를 무사히 인수했고, 두 아들들이 앞장서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미 장년이 된 녀석들은 우리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듯 소프트웨어 영역과 하드웨어 영역으로 역할 분담하여 열성을 보였다.
마켓 운영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선 종업원들을 우리 식구로 만드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직원들 중엔 마켓 창설멤버가 있는가 하면 근속기간이 십여 년 이상 되는 직원도 여러 명이어서 이들의 애정어린 도움 없이는 독자 운영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우리는 전임자가 간과했던 직원 복지에 신경을 쓰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일일이 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전 직원을 한식구로 만들고 나니 엄청난 업무들이 한결 수월해졌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사발통문 역할까지 해주어 운신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아끼는 사업체를 백인이 아닌 동양인인 우리가 인수하고 나자 곱지 않은 시선들이 한동안 따라다녔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머니가 채워지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들이라 간주했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마음을 읽은 우리는 잠깐 머물다 가는 한이 있더라도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사업을 위해서라기보다 백인이던 동양인이던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으면 소통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아이들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먼저 발 벗고 나서주었다. 1.5세대의 빠지지 않는 언어 구사력에다 젊기까지 한 녀석들이 마을의 각종 행사며 문제점 해결에 동참하고 나서니 이방인에게 꽁꽁 묶여있던 마을 공동체가 빗장을 열어 화답해 주었다. 그들에게 이 땅에서 함께 살아 갈 동행자로 인식되기까지 진심어린 우리의 행동이 선행되었기 때문 아닌가 한다.


진심이란 마음을 나누는 양자 간 서로 통하면 그 진가가 배가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땐 오해의 소지를 낳기도 한다. 초기엔 고객과 종업원의 돈독한 사이를 보며 괜히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모두가 피붙이 같은 그들은 바쁜 시간임에도 서로 붙잡고 긴 하소연을 하는가 하면 때론 큰소리로 함께 킬킬거리며 웃기도 했다. 혹시 나의 꼬투리로 저렇게 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불편한 생각은 모두 자격지심이었고 업무 중 손님과의 너스레가 피로를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건 고객관리 차원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무리 힘든 일도 해내고야 마는 근성, 새내기 주인보다 더 일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직원 중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고 합심하는 그들을 보며 뒤늦게야 우리는 진심으로 통하는 사이임을 깨닫는다.


한 해가 다 기운 지금, 올해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이웃을 가졌다는 점이다.
한여름 시냇가에서 오한을 느꼈다면 눈바람 날리는 지금은 오히려 포근함을 느낀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체 속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동짓밤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송년단상

● 칼럼 2015. 12. 25. 11:05 Posted by SisaHan

어김없이 또 한해가 간다. 초속 30Km로 달려가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원점’을 지나는 것이다. 사실은 우주공간에 원점을 그어 놓았을 리도 없고 지구는 그저 창조의 섭리에 따라 궤도를 달려갈 뿐이니, 올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사람들에게 나이 한 살 더 먹고, 년도를 표시하는 네 자리 숫자와 달력이 바뀌는 것 말고 다른 변화란 얼마나 되나. 일부 제도와 정책들이 바뀌기도 하겠지만, 해는 변함없이 동쪽에서 떠오를 테고, 밥먹고 일하고 잠자고… 우리의 일상과 삶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삐걱대며 굴러갈 것이다.


우주의 무한한 시공에서 올해와 새해의 구획이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은하계로 확대해 본다면 끝없는 한 해의 연속일 수도 있고, 우리 기준에 매일이 한 해씩인 천체도 있을 테니까. 태양계는 은하계를 2억2천만년 주기로 돌고, 우리 은하계는 다시 우주의 중심을 2억3천만년의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고 한다. 태양계 내에서는 수성이 공전주기 즉 1년이 88일에 불과하며, 화성은 687일, 목성은 약12년이고, 토성은 30년에 가깝다. 우리가 1년으로 삼은 365일이나 지난해·새해라는 것은 사실 광대한 우주의 눈으로 볼 때는 지구인들만의 ‘천동설’적인, 극히 인간 중심적인 아전인수의 인식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어차피 지구촌에 사는 우리들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설레임을 갖는다. 또 다짐도 한다. 그 것은 짐승이나 식물들과 달리 인간이 사유(思惟)의 영적 존재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성장과 성숙의 인식이 생겨났고, 또한 생명의 유한성에 생각이 미쳐 죽음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는 불안과 초초감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내일은 좀 더 성숙하자, 인생의 종말이 오기 전에… 라는 동력(動力)을 스스로 만들고, 또 거기에 떠밀려서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구획을 정해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하며 지난 세월을 성찰하고 새로운 날들을 기대와 소망가운데 맞이하는 인간의 지혜이기도 하다.

어김없이 영겁으로 사라져 가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기쁨과 흡족함 보다는 아쉬움과 후회스런 일들이 많음을 본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더 힘껏 노력했어야 하는데,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기력을 쏟아서…. 이런 저런 이유와 불만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새해에 더 기대를 품는 것이다. 올해 보다 달라질 뭐 특출난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새해에는 달라져야지, 달라지겠지 하고 결심과 여망 사이에서 자신을 추스린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인간 세상에 어디 만족이 있던가. 물론 완벽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늘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았고, 이뤄질 수 없는 100%와 완벽을 노렸던 것은 아닐까. 혹시 기대치를 낮추고, 50%만 이뤄도 잘 하는 것이라는 목표를 세웠더리면 지금쯤 어떤 자신의 성적표를 받아 보았을지 되돌아보면 어떨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빈둥대며 얼렁뚱땅 사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일부 철없는 유한족들도 그들 나름대로는 열심이었다. 그들의 가치와 그릇크기 만큼이었겠지만. 그렇게 우리들 대부분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남의 나라에 와서 마음고생하며 사는 이민가족들임에랴, 몸 고생 또한 충분히들 하고 잘도 지탱해왔다.


그러니 우리 이제 송구영신의 원점을 돌며,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보면 어떨까. 힘든 여건 속에서 이만큼 성장했으니 참 대견하다. 고생했다. 고난을 잘도 견디며 이겨냈구나, 고맙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오게 하고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러면 지난해의 고난이 축복의 담금질이 되어 새해는 더 성장하고 성숙하는 전진의 날들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지난 세월의 시름들을 훌훌 털고 흘려보내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지구촌을 뒤흔든 암울한 소식들과 고향 한국 땅에서 들려온 속상하는 세태들, ‘혼용무도’(昏庸無道)라며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탄식들이 그치도록, 그리고 여기서까지 우물안 개구리처럼 서로 질시하며 상처를 주는 이기적인 다툼들 등은 모두 다 가는 세월의 강물에 묻혀 제발 함께 떠나가기를 기도하자.
지혜의 왕 솔로몬이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헛되고 헛되도다…” 더불어 그는 “다 지나가리라” 는 삶의 철학을 주었다. 그렇게 너그러이 보듬고 마음을 추스려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소망과 평안이 밀려드는 새 날들을 맞이하면 정말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해체된 사회, 새 살이 돋으려면

● 칼럼 2015. 12. 25. 11:02 Posted by SisaHan

“죽는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하루에 38명이 자살하는 세계 최대의 자살 공화국 한국에서 서울대생이 자살했다고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유서에 남긴 이 한마디를 며칠째 자꾸 되씹는다. 개인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이론을 지지하는 나는 다른 청년들에 비해서는 장래가 덜 비관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자살 사건과 며칠 전 고시원에서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았을 한 청년의 사망 사건을 참으로 무겁게 받아들인다.


며칠 전 2학기 마지막 강의 시간에 나는 오늘의 청년 문제에 대해 조별로 토론을 하게 했다. 그들 대다수는 오늘의 청년 문제를 세대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삶이 덧없다…, 무한한 고통의 연속, 더 살아봤자 희망이 있을까, 허무하다, 일상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 원래는 세상이 빨리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 사회가 더 좋아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이 앞의 자살 학생의 유서에서도 나왔지만, 태어날 때 물고 나온 수저가 운명을 좌우한다면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고 이 세상은 ‘비합리’의 극치인 지옥인 셈이다. 나는 “왜 청년들은 분노하지 않느냐”고 기성세대 특유의 질문도 던졌는데, 그들은 “분노감은 있지만 분노할 방법을 모른다”고 응답했다. 세습자본주의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고립된 개인들의 군상을 보는 것 같았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독일 히틀러 체제의 등장은 사회의 원자화, 사회 해체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즉 전체주의 세력은 대중의 불안에 편승하여 사회적 유대를 먼저 파괴한 다음 손쉬운 방법으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국민 그 누구도 권력을 신뢰하지 않지만 아무도 권력의 일탈과 억지, 거짓과 폭력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표시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서로에 대한 감시자가 되고, 불안과 위기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느끼면서 적나라한 사적 욕망 외에는 드러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탐욕과 범법으로 살아온 장관 후보들이 정부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에 역겨워한 사람들이 샌델의 ‘정의론’에 비상한 관심도 가진 적이 있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 이제는 정의를 말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황당한 일이라도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리고, 심각한 거짓말도 대형 확성기의 우격다짐의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유포되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반박할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며칠 전의 세월호 청문회처럼 모든 언론이 완벽하게 외면하여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중요하고 심각한 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이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권력의 총체적 무책임, 즉 모든 것은 개인 책임인 세상이다, 뻔뻔함, 우격다짐, 욕망 부추기기, 그리고 겁박으로 체제가 유지된다. 지치고 힘든 대중들이 분노를 표현할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면, 국가의 겉은 화려하고 멀쩡해도 속은 다 썩어서 텅 비어 있다. 오직 한 사람만 말한다. 관료, 기자들은 받아쓰기만 하고 그 어떤 의견도 제출하지 않는다. 아마 더 심각한 위기가 와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는 시키는 대로만 했기 때문이다.


선거가 다가온다. 출마자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표를 달라고 악수를 청한다. 무슨 염치로 정치를 한다고 그러느냐고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은 나만의 것일까? 해체된 사회를 그냥 두고 정치가 바로 설 수 있나? 고립 파편화된 ‘을’들을 모아서 소리치게 해야 희망이 보일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살아나고 논쟁이 시작되어야 정치가 바로 설 수 있고, 그래야 이 껍데기 아래에서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