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란 제재 해제, 중동·세계 평화 기여를

● 칼럼 2016. 1. 22. 17:3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수십년 동안 이란에 가해졌던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1월16일 풀렸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대이란 경제·금융 제재를 해제한다고 밝히면서 “이란은 핵 합의 프로그램의 이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중동의 대국인 이란은 본격적인 개발과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가 앞으로 중동 정세의 안정에 기여하고 세계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한다.


경제제재 해제는 지난해 7월 미국 등 주요 6개국(P5+1)과 이란이 핵 협상을 최종 타결한 데 따른 예정된 수순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란이 적극적으로 핵 합의 이행에 협조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제재 해제를 이끌어낸 점은 평가할 만하다. 이란은 핵 합의 이후, 핵연료의 98%를 러시아로 선적하고 1만2천개 이상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를 해체했으며 플루토늄용 원자로를 봉인했다고 한다.
핵프로그램 폐기에 합의하고 그 이후 국제기구와 협력해서 이 과정을 투명하게 진행한 건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우리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물론 핵물질을 농축하는 수준이던 이란과 이미 4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끈질긴 협상을 통해 핵과 경제를 맞바꾼 이란 사례는 북핵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금융 제재의 해제로 이란 정부는 미국 등 서방 국가에 묶여 있던 1천억달러의 자산을 당장 손에 쥘 거라고 <뉴욕 타임스>는 추산했다. 그뿐만 아니다. 이란은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각각 세계 4위, 2위인 자원 대국이다. 8천만명을 넘는 인구는 중동에서 가장 큰 내수시장을 형성한다. 이렇게 잠재력 큰 나라가 수십년 동안 제대로 개발을 하지 못했으니, 앞으로 성장과 발전 열기가 크게 분출할 게 분명하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이란의 개방과 개발에 대응하는 체제를 선제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 증시의 급등락으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란 진출은 시장 다변화 측면에서도 긴요하다.


강호 이란의 기지개는 한편으론 중동에 또 다른 불안 요인을 잉태한다. 중동의 또 다른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3일 이란과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한 배경엔,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에 대한 강한 우려가 깔려 있다. 이란이 석유 수출을 본격화하면 두 나라 사이는 더욱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아랍 대립과 이슬람국가(IS) 문제에 더해 두 나라 간 갈등은 중동뿐 아니라 세계정세에도 암운을 드리울 수 있다. 중동 정세를 평화롭게 관리하는 데 국제사회가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설] 한국노총 탈퇴와 ‘9.15 노사정 합의’ 파탄

● 칼럼 2016. 1. 22. 17:3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19일 노사정 합의 파기와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9·15 노사정 합의’는 넉 달 만에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갈라선 정부와 노동계는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겠노라 공언하고 있어 앞으로 노정 갈등의 골은 한층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대화의 뿌리가 얕은 우리 사회에서 어렵사리 이룬 노사정 합의의 자산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노사정 합의 파탄의 씨앗은 원칙과 목적이 불분명한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태생적 한계에서 이미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편과 일자리 대책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뒤섞어 놨으나, 이는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2014년 말부터 정부가 군불을 땐 ‘정규직 과보호론’은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 안정이라는 핵심과제를 노동계 내부의 제로섬 게임으로 몰고가 버렸다. 특히 임금피크제를 청년실업의 주된 해법인 양 내세운 건 거듭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실에선 법정 정년을 다 채우는 경우가 많지 않을뿐더러, 일자리 창출의 근간인 민간부문의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제할 마땅한 수단도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별도의 해법으로 풀어야 할 청년실업을 임금피크제 도입과 패키지로 밀어붙이다 보니 혼란과 불신이 따른 건 당연지사다.


합의 정신을 거듭 짓밟은 정부의 행태도 문제다. 박 대통령은 13일 새해 대국민담화를 통해 쟁점 현안인 노동 5법 가운데 기간제법 처리는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사자 간 이견이 워낙 커 추후 논의과제로 남겨뒀음에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다가 마지못해 한 발짝 ‘양보’하는 듯한 태도는 결코 온당치 못하다. 노사간 충분한 협의를 거치기로 한 약속을 깨고 정부가 양대 지침 정부안을 지난 연말 전격 공개한 것도, 자신들을 들러리 세웠다는 노동계의 불신을 정부 스스로 확인해준 꼴이다.


노사정 합의와 파탄 과정에서 드러난 노동계의 책임과 한계도 부인하긴 힘들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올라선 한국노총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대기업 사무직 중심의 상급단체가 비정규직, 청년세대 등 조직되지 않은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뚜렷했다. 애초 노사정 합의가 진정한 사회적 해법의 공감대를 얻는 데 실패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당] 뻐꾸기 둥지와 뭉크

● 칼럼 2016. 1. 15. 17:5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희망의 새해가 왔는데, 왜 뭉크의 ‘절규’가 생각나는지, 영화 ‘뻐꾸기 둥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쁨의 외침이 이어져야 할 텐데, 경제는 어둡고, 주변의 삶들은 팍팍하고, 세상은 갈등의 소용돌이입니다. 북한의 철없는 핵 실험 뉴스까지,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 암울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없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답답한 심경들 때문일 겁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영혼없는 삶’에 대한 저항입니다. 주인공은 감옥보다 자유롭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병원에 도피하지만, 그 곳의 자유는 실상은 자유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간호장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은 자유가 아니라 짓눌린 죽음의 삶이었고, 자유를 향한 그의 외침이 아무런 동조로 반향도 없음에 낙담합니다. 주인공이 절망한 것은 권력의 벽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응하는데 지칩니다. 영혼없는 무뇌(無腦) 인간들 때문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발버둥치던 그의 삶은 끝내 죽음으로 끝납니다.
흑자를 낸 회사에서 억울한 해고와 끈질긴 복직투쟁이 핍박에 짓눌리며 벼랑에서 죽음을 택한 많은 노동조합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절박한 처지에서 아무리 외쳐봐도 들어주는 사람 손내미는 사람 없이 냉대하고 되레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기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최근의 그런 답답한 소식 가운데 한-일 정부가 합의했다는 일제 군대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타결’ 발표는 또 하나의 어이없는 절망감을 안겼습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분노의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무려 24년 동안 1천2백회를 훌쩍 넘긴 수요집회마다 노구의 저무는 생명들이 힘겹게 외쳐왔습니다. 법적책임과 배상, 명확한 사죄와 역사교훈적 후속조치…귀에 박힌 ‘해결원칙’은 얼마 전까지 대통령도 일본에 요구했던 것들인데, ‘합의’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명예를 더럽힌 굴욕적 외교참사’라는 비판이 그래서 들끓습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최선을 다한 대승적 결과이니 그 정도로 됐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다신 입에 올리지 말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아베는 제 입으론 직접 사죄할 수 없다고 대놓고 큰소리에 소녀상은 옮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단죄’가 아닌, 오히려 ‘최종 입막음’을 안겨준 현 한국정부의 대응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유신회귀적 국정운영과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지 않은지‥ 태생적으로, 또한 일관된 친일과 독재의 후예들이며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뿌리가 그런데, 그들의 역사의식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나요?. 일제하 성노예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반인권적·몰역사적 합의에 응해줄 리가 없을 겁니다.


유엔헌장에도 나와 있는 피해자 중심 협상이어야 함에도 피해자 의견을 전혀 듣지 않은 것에서 보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나 배려 혹은 책임의식이 갖춰지지 않았고, 협상외교의 기본과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채 일본과 미국의 위세에 끌려간 외교력 결핍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살펴 받들고 섬긴다는 위민(爲民)헌신의 자세보다 군림하는 제왕적 리더쉽이 몸에 배었으니, ‘까짓 귀찮은 위안부 논란 그만 끝내라’고 서둘러 얼버무리고 틀어막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성경(마 12:35)도 말씀하고 있지요.
다수 국민이 반발하고 당사자가 용납지 않는 역사적 상처를 그냥 덮으려 하는데, 할머니들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60대 이상에서 긍정적 반응이 높다니, 참 무정한 세상입니다. 이미 편향에 길들여진 많은 언론은 정부편을 들기 시작합니다. 신문방송에서 반대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며 슬그머니 사라져 갑니다. 외교무대에서 정부는 ‘위안부’라는 말은 입도 벙끗하지 못할 판이니, 할머니들의, 아니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암덩이가 되고 말 처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리치다 지치고, 아예 외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함께 외쳐주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외면하고 심지어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 때문입니다. 권력과 재력 등 힘있는 자들과 그들에 한통속이 된 언론마저 정권과 사익에 몰두해 작지만 정의로운 신음들을 못들은 척 깔아뭉개는 직무유기에 젖어든 탓도 큽니다.
그런데 그런 정치와 권력의 난폭운전과 역주행에 제동장치가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합니다. 주눅들고 각자도생인 야당도, 국민도, 또한 다수 시민의 각성이나 결기(決起)도 자꾸만 ‘뻐꾸기 둥지의 무골인간들’처럼 되어가는 듯 하니까요. 더 기막힌 것은 그런 후진적 ‘헬조선’의 폐습이 밖으로 수출돼 해외에서까지 기세를 부리려하니,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 김종천 편집인 >



창간 10주년에 드리는 발행인 인사말씀

● 칼럼 2016. 1. 8. 21: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빠짐없이 다 읽는다” “명쾌하다”는 분들 덕분에…

그냥 “좋은 신문”이라는 평가 듣고싶은 소망
한 눈 아닌 두 눈으로 보는, 시대의 거울이기를


2006년 1월5일 태어났습니다. 어느 덧 열 살의 인사를 드립니다.
눈 비를 걸으며 굽이굽이 산과 강을 건넌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큰 능선에 올라선 감이 드는군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지나 온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걸음마 때부터 지켜보며 감싸주신 의리의 동반자들이 있습니다. 힘에 부칠 때 일으켜 세워 다독여 주신 인정이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목을 축여주시고 정겹게 땀과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 고맙고 따스한 손길과 마음들이 오늘의 시사 한겨레를 있게 하신 공로의 주인공들입니다.
가끔 “신문을 한 자도 빠짐없이 다 읽는다”는 분을 만납니다. “신문이 벌써 바닥났더라” 혹은 휴간일 때 “신문이 안 나와 갑갑하다”는 전화도 주십니다. 어떤 분은 “칼럼이 정말 시원하고 명쾌하다”고 공감을 표해 가슴이 훈훈해지곤 합니다. 그런 분들의 애정어린 ‘감시’ 덕분에, 예고없는 휴간과 배달사고 한번 없이 10년의 세월을 감사히 달려 온 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의 분투를 달갑잖게 보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들은 한국정부에 비판적인 ‘진보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국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자부하는 분들의 주장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여전히 없지 않습니다.

새삼 언론의 기능을 떠올립니다. 언론의 역할과 존재가치는 정부와 공적기관에 대한 감시이며 공의(公義)와 공익을 위한 비판에서 출발합니다. 신문은 또한 시대의 자화상이며 거울이라고들 합니다. 그동안 시사 한겨레에 비친 모습들이 밝고 긍정적인 측면보다 비판적·부정적이 많았다면, 그만큼 시민의 위임을 받은 권력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시대가 어두웠다는 뜻일 겁니다. 어두움에 빛을 들이대지 않고 계속 덮기만 하면 그 안에서 썩고 냄새 날 것입니다. 눈이 부셔 고통스러워도 불을 밝혀야 밝고 맑은 세상이 옵니다.
지난 10년, 저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진보-보수의 진영논리에 빠져 신문을 만든 적은 한번도 없었음을 단언합니다. 정부를 비판하면 진보요, 정권을 감싸고 돌면 보수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독 한국에 그렇게 착각하는 분들이 많고, 일부 정치권에서 그런 이분법으로 여론을 갈라 이득을 보려는 전략에 휩쓸린 탓도 있습니다. 정부를 추켜세우는 것이 언론과 동포의 도리라는 낡은 관념에, 독재시대 통제와 여론조작에 길들여진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라는 선진사회에 살면서도 민주적 다양성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 비판적 신문은 이단아로 여겨질 것이라는 짐작을 합니다.

저희 시사한겨레와 자매지인 한겨레신문은 해마다 한국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된 정직·정확한 신문 1위이며, 전국의 대학생 상대 의견조사로도 부동의 1위 입니다. 민주국가에서 상상도 못할 국가기관의 선거공작이나, 간첩조작 사건 같은 대형특종과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용기있는 신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정론직필을 말하면서도 공공연히 정권과 가진 자들과 사익을 우선하는 거대 족벌신문들과, 정부에 장악된 방송까지 포함해 압도적인 권력쪽 언론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고 있음은 세계적으로도 소문이 나 있습니다.

저희 시사 한겨레는 출범하면서 ‘성실한 보도 따뜻한 신문, 동포의 번영 겨레의 미래’를 사시로 정했습니다. 담긴 뜻은 글자 그대로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동포와 겨레의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는 창간정신입니다. 그 창간의 비전에서 올곧은 신문, 바른 언론의 길을 다짐했습니다. ‘정론직필’ 혹은 ‘파사현정’(破邪顯正) 등의 거창한 문구보다, 그냥 ‘좋은 신문’, ‘선한 신문’, ‘의로운 신문’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 저희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혁의 편가르기와는 무관한 공동선(共同善)의 제작방침이며, 열악하고 미약하지만 그 일념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다고 감히 고백합니다.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세상이 평온과 정상적이지 않을 때 그 길은 풍파를 견뎌야 하는 행로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10년을 지나오며 많이 변하고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한쪽 눈의 반쪽 세상보다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넓고 입체적임은 상식이지요. 한가지 목청만 감돌던 한인사회에 색다른 빛깔과 소리도 전해줄 수 있었음은 저희의 보람이며 의미있는 행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작아도 의로운 외침들, 한번쯤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선한 논리의 제시 등이 시사 한겨레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저희는 이제 10년의 능선을 넘어 다시 험곡을 향해 나아갑니다. 지난 곡절을 초심으로 견뎌왔듯이, 앞으로도 기대와 사랑을 주시는 많은 분들의 성원을 무기삼아 묵묵히 걸어가려 합니다. 온 세상이, 무엇보다 우리 조국이, 그리고 동포사회가 선하고 의로워져 더 이상 선하고 의로움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그 날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경(갈 6:9)의 가르침입니다.
좋은 글과 광고로 도와주시는 분들, 애독자와 한인 동포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지난 10년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김종천(金鍾天)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