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통령 잘못 뽑은 대가 혹독하다

● 칼럼 2016. 5. 14. 17:5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997년 외환위기 때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었다. 부실기업만 도려내면 경제가 되살아날 거라는 기대를 하며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참아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그 성격부터 다를 뿐 아니라 훨씬 고질적이다.
가장 큰 차이는, 외환위기 당시는 한보나 대우 등 특정 ‘기업’의 부실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조선이나 해운 등 특정 ‘산업’의 경쟁력 약화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둘 사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외환위기 때 기아자동차는 부실에 빠졌지만 같은 업종인 현대자동차는 기아차를 인수해 경영할 정도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부실산업’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현재의 경제위기가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복합적이며, 정부나 채권단도 더 넓은 안목으로 구조조정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환위기 때 했던 대로 특정 부실기업의 재무 상태를 개선하고, 정부 주도의 ‘빅딜’ 등을 통해 위기를 해결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부실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본질을 외면한 채 ‘부실기업’의 재무 구조 개선에만 매달려선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사태의 심각성은 경쟁력 약화가 조선이나 해운 등 특정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철강이나 석유화학, 전자 등 그동안 우리 경제를 떠받쳐온 주요 업종이 모두 비슷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잘나가던 자동차산업도 중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등 어느 업종 하나 믿고 기댈 곳이 없다. 우리 경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국제 경제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해당 기업에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도 당시의 국제 경제환경에서 더는 통하지 않던 차입에 의한 투자 확대와 기업 확장 전략을 고수했던 국내 기업의 시대착오적인 경영 행태 때문이었다. 지금의 위기도 대외환경 변화에 적응 못한 결과라는 점에서는 외환위기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업들의 이런 행태를 제때 통제하지 못한 금융기관의 책임은 훨씬 크다. 그리고 궁극적인 책임은 사실상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관리해온 정부에 있다. 외환위기를 넘긴 2000년 3월 <금융·기업 구조조정 백서>를 발간한 금융감독위원회는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감독 소홀과 미숙한 정책 대응 등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외환위기에서 별로 배우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폭탄 돌리기 하듯 구조조정을 미뤄오면서 부실 규모만 더 키웠다. 반드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구조조정의 주체를 명확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가 정부와 한국은행 등으로 구성돼 있지만 이는 실무 협의체에 불과하다. 이번 위기는 우리 경제의 바탕을 이루는 주요 업종의 총체적인 경쟁력 약화에서 초래된 만큼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채권은행 등을 망라한 범국가적인 대응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부터 위기의 본질과 심각성을 깨닫고 직접 나서야 하는데, 뒷전에서 이런저런 훈수를 두면서 남 탓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산업 구조조정’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무너진데다 3당 체제로 갈라진 정치권이 한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고, 노조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서로 공방만 벌이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남북 관계까지 파탄 낸 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제 경제마저 거덜 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시대착오적이고 무능한 대통령을 뽑은 대가를 우리 국민이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중이다.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편집인 >



[사설] 검찰, ‘어버이 게이트’증거인멸 방조하나

● 칼럼 2016. 5. 14. 17:5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른바 ‘어버이연합 게이트’의 진상 규명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청와대 지시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분명히 보고받았다”고 공언한 뒤 검찰 수사도 별 진척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배후의 몸통에 대한 추적은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도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크게 우려치 않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진상규명 태스크포스의 지적대로 “증거인멸과 말맞추기 시간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번 사건은 국가정보원이 보수우익 단체들을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구실을 하고, 청와대가 권력의 힘으로 이를 뒷받침하면서 전경련 등 자금줄을 동원해온 은밀한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강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드러난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박아무개씨 사례는 국정원과 보수우익 단체의 관계가 어제오늘에 형성된 게 아님을 잘 보여준다. 박씨가 2011년부터 2년 동안 1인시위 및 신문광고 게재까지 지시하며 보수우익 단체 7곳을 지원·지도해온 사실이 재판기록 등을 통해 밝혀졌다. 한 단체는 개혁성향 판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원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어버이연합과 국정원의 밀접한 관계는 이미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공작에 동참한 탈북자에게 어버이연합이 경비 500만원을 전달한 사실이나 이른바 ‘박원순 문건’을 통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세월호 참사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위안부 합의 등 중요 사회 현안이 있을 때마다 시민단체의 탈을 쓰고 색깔론과 폭력으로 권력의 돌격대 역할을 하도록 보수우익 단체를 사주해온 것이 청와대와 국정원이었다면 민주주의의 기초를 허무는 심각한 일이다.


검찰은 국정원 댓글사건과 ‘좌익효수’ 사건에서도 국정원의 명백한 불법 사실을 축소·은폐하는 바람에 여론의 지탄을 받아왔다. 이번 어버이연합 사건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 경실련 등 여러 곳에서 고발했음에도 잠적한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에 대한 추적이나 압수수색 등 적극적인 수사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절대로 덮어서는 안 되는 사건일 뿐 아니라, 과반 의석이 된 야당들도 공조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덮을 수도 없다. 증거인멸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검찰은 즉각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기 바란다.



[한마당] 이 정부가 왜 그러나?

● 칼럼 2016. 5. 7. 20:0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도대체 이 정부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성노예로 짓밟힌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정부와 싸우고 있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윤미향 대표가 한 탄식이다.


길원옥 할머니 등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영화 시사회와 일제 성노예 만행 증언을 위해 길 할머니와 함께 토론토를 찾은 윤 대표는 ‘이 정부’의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목표로 달려 온 25년 가시밭길을 소개한 그녀가 지칭한 ‘이 정부’란 어디인가? 캐나다정부는 아닐테니, 일본정부일까?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를 말한다.
일제에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들을 해방 이후 50년 동안이나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드러난 자료들은 비밀유지에 급급했고, 피해자가 스스로 고백한 이후에도 일본에 책임 묻기를 주저했다. 헌법재판소가 65년 한일조약으로 해결된 게 아니라며 ‘정부가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경고를 발한 뒤에야 마지못해 일본에 대책을 촉구한다. 너무 강하게 나가면 한일관계에 좋지않다며 눈치보기식 요구에 머물더니, 급기야 할머니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부간 합의라는 ‘조약도 아니고 문서도 아닌 구두약속에, 보도자료 하나 뿐인’ 12.28 합의를 발표했다. 그것도 앞으로는 입도 벙끗 말라는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매듭을 지었노라고 자랑하며….


“20만명이 넘는 피해 여성들이 성노예로, 고문 도구로 짓밟혔고, 그 중에 남북한에서 겨우 5백명 정도만 확인 됐을 뿐 나머지는 생사도, 족적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 원혼들은 어떻게 하라고 감히 ‘최종적, 불가역적’이란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정부간 합의에 대한 규탄은 차라리 절규로 들린다. 그런데 그 후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말로 ‘입도 벙끗’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일본은 총리가 “다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호언하고, 유엔 무대에서는 “일본정부는 법적 책임이 없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고 큰소리 친다. 일본 국내에서는 “위안부는 창녀들이었다”고 대놓고 망언을 한다. 각료들은 한국정부가 소녀상을 옮기기로 약속했다고 에둘러 다그친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소극적 부인만을 하며 별다른 대응이 없다.


“할머니들의 해외방문 때 공항까지 영접하곤 했던 공관 직원들이 12.28 합의 이후에는 얼씬도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들을 만난 주재국 관리들을 곧바로 찾아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파고 다닌다.”는 ‘이 정부’는 열심히 추진해오던 ‘위안부 백서’ 작업도 나몰라라 외면해 버렸다고 했다.
가해국에 반인륜의 역사적 죄과를 따져묻지 않고, 짓밟힌 자국민의 자존심 회복을 외면하는 이 정부가 과연 우리들의 정부이냐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을 동원해 위안부 합의가 잘 된 것이라며 “그만 거론하라”고 관제데모를 시킨 이 정부가 한국민을 위한 한국정부인지, 일본을 위한 앞잡이 정부는 아닌지 헷갈린다는 이야기다.

다시 돌아보면 비단 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정부’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적국이 아닌 자국민을 상대로 거짓공작과 선동을 일삼고, 패가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감시하고 핍박하는 많은 사례들 말이다.
최근의 어버이 연합 커넥션은 ‘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근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어두운 커넥션은 오로지 대통령과 정권의 이익만 위해서 가동됐고, 비판적인 여론과 세력에는 가차없이 덤벼들어 욕설과 비방으로 방해하거나 물타기를 하고, ‘종북·빨갱이’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이 시대 자유 민주주의국가에서 어떻게 그런,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공작이 권부의 공직자에 의해, 백주에 기획되고 조종될 수가 있나, 기가 막힐 일이다.


하긴 선거 때 적군인 북한에 총격사건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을 했던 권력이다. 대통령선거에 군까지 망라한 정보기관이 총동원돼 댓글로 여론과 당락에 영향을 주려했고, 남북 정상회담 비밀까지 까발려 대선에 활용했던 습벽이다. 최근 총선 직전에는 북한의 식당종업원들을 탈북시켜 신속 발표하는 이른바 ‘창조 북풍’도 선보였다. 그러고는 선거 끝나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는 흑색공작의 달인들.
고발을 접수했거나 인지 수사로도 진상을 밝혀내 공작기술자들과 배후의 권력을 발본색원함이 마땅하련만, 그 게 또, 수사·사법기관은 차일피일 어영부영으로 면죄부를 안겨주는 커넥션의 종결자임을 마다않으니, 과연 어느 세월에 검은 커넥션과 공작의 뿌리가 뽑힐 것인가.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칼럼 2016. 5. 7. 20:0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밤 젊은 친구들과 만난 자리의 끝 무렵, 한 친구가 기타를 치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노래했던 탓일 게다.
총선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쿠바와 40년 만에 국교를 재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퇴임 전에 북핵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타결하려 하지 않을까. 오바마가 5월 말 일본의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해 참배한다는데 그게 올바른 일인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취임 초 남북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후퇴했고 힐러리, 트럼프, 샌더스 중 누가 실질적으로 남북관계 호전에 도움이 될까. 달랑 소녀상 하나 세워놓고 그것조차 지키기 어려운데 진작에 위안부 기념공원이라도 지어서 일본 총리 아베가 참배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 이야기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았던 일행은 모든 의문과 걱정을 뒤로한 채 친구를 따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를 목청껏 불렀다.


젊은 친구들이라지만 모두 50을 막 넘은 나이들이다. 직장에선 앞자리에 나서서 현장 중심의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가정에선 20대에 접어든 자녀들과 왜 소통이 안되는지,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각자 인생에서 잃었던 것과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길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회한 비슷한 것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나 나이 들면 안 한 일, 안 갔던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일상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혀놓고 살았기 때문일 거다.
간밤의 여운이 남았는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가슴 밑바닥에서 과거의 숱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밖에 내놓은 화분이 비를 흠뻑 맞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이 생명의 환희에 몸을 떠는 듯 여겨지고, 담 너머로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연한 가지들에 달린 작은 이파리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봄비를 자신의 몸뚱이 전부를 바쳐 받아들이는 것처럼 힘차고 기쁜 듯 보였다.


문득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껴야 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죽음을 숙고할 게 아니라 삶을 숙고해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올랐다. 죽음과 죽음 저편의 신과 종교… 그보다는 현재의 내 삶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 봄비 속의 나무들을 보면서 환하게 또렷해졌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하나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남긴 스피노자. 그가 한 말이 아니라 그 뒤에 마르틴 루터가 일기에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 죽음보다 삶 쪽에 무게를 두었던 ‘철학계의 그리스도’로 불린 스피노자가 충분히 했을 말이기도 하다.
어제저녁 한 친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독했다고 했다. 1600년대에 살았던, 종교계로부터 배척당했던 그의 철학이 왜 21세기에 힘을 갖는가를 설명해주었다.
책장 구석에서 스피노자를 꺼낸다.


…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이 분노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크다. 진정한 사랑과 소유욕은 별개이다. 소유욕은 자기애일 뿐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 용서한다는 것….
기뻤던 일보다는 분노했던 기억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행복했던 순간보다 괴로웠던 일들이 현재를 발목잡을 뿐 아니라 그것에 따른 욕망이 일상을 추동하기 쉬운 우리들의 삶.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했던 일이 언제였던가.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후회들이 몰려온다.
사람은 죽음 저 너머 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삶의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선한 것, 아름다운 것, 행복 사랑 기쁨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 오는 창밖을 온종일 내다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다. 내 인생에서의 마지막 사과나무는 무엇일까. 봄비 속에 하염없는 생각에 깊이 침잠한 하루, 이런 하루, 나쁘지 않다. 자연이 신이라고 한 스피노자, 봄비는 자연, 신인 듯하다.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