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상황에서 결정 쉽지 않았을 것"…책임 방기 인정 안해

 방청객 거센 항의 속 재판장 "판단 지지하든 비판하든 감수"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초동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승객들을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해경 지휘부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양철한 부장판사)는 15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 전 청장과 함께 같은 혐의로 기소된 김수현 전 서해해양경찰청장과 이춘재 전 해양경찰청 경비안전국장 등 전·현직 관계자 9명에게도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다만 김문홍 전 목포해양경찰서장과 이재두 전 3009함 함장은 사건 보고 과정에서 허위문서를 작성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김 전 청장 등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에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303명이 숨지고 142명이 다치게 한 혐의로 작년 2월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은 김 전 청장 등이 세월호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통제해 즉각적인 퇴선 유도와 선체 진입 등으로 인명을 구조할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결심 공판에서 김 전 청장에게 금고 5년을 구형하는 등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반면 김 전 청장 등은 사고에 유감을 표하고 사과하면서도 법리적으로 죄가 될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업무상 과실에 대해 유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김 전 청장 등의 혐의를 모두 무죄로 봤다.

재판부는 "참사 당시 피고인들은 침몰이 임박해 선장을 통해 즉시 퇴선 조치를 해야 할 상황으로 인식하기 어려웠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당시 세월호와 직접 교신한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파악한 것 이상으로는 상황을 알 수 없었던 피고인들로서는 결정이 쉽지 않았고, 세월호 선원들이 승객들에게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 상황까지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김 청장 등이 사고 발생 초기 세월호와 교신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고 판단했다. 구조 인원이 세월호 인근에 도착한 뒤에도 김 전 청장 등이 책임을 방기해 승객들 사망과 상해 결과를 야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재판부는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승객들에게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만 여러 차례 했을 뿐 사고 상황이나 대피 방법·탈출 지시 등은 없이 퇴선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피고인들이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과 직접 교신해 퇴선 준비 등을 지시했더라도 이들은 그 지시를 묵살하거나 탈출 방송을 했다는 대답만 반복했을 가능성이 높아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어 "대형 인명사고에 대비해 체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관리 책임을 질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형사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1시간 30여분동안 진행된 이날 선고에서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을 놓고 방청객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재판장은 선고를 마치며 "세월호 사고는 모든 국민들께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고, 여러 측면을 살펴야 하고 법적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재판부 판단에 여러 평가가 있을 것이 당연하고, 그에 대해서는 판단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감수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세월호 유족들 "해경 수뇌부 무죄, 과거로 회귀한 판결"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초동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승객들을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지휘부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15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유경근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15일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해경 지휘부에 무죄가 선고된 것과 관련해 "2014년 이전으로 우리 사회를 회귀시키는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유경근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이날 판결 직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4년 이전으로 우리 사회를 돌려보내는 재판 결과에 대해 재판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 위원장은 "오늘 판결은 박근혜 정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난 재판 결과"라며 문 대통령을 향해 "오늘 재판을 어떻게 보셨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는 "수사 결과가 미흡하면 대통령께서 나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엉터리 수사와 재판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데 무엇으로 진상규명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냐? 어떻게 그 약속을 지킬 것인지 말씀하라"고 요구했다.

김종기 4·16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도 "피고인을 대변하는 듯한 재판 결과는 우리 가족분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용납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양철한 부장판사)는 이날 "피고인들의 업무상 과실에 대해 유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김 전 청장 등 전·현직 해경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주머니에 단돈 5천원…‘법정 안팎의 의인’ 백기완

 [ 한승헌 변호사의 추모 글 ]

 

21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삼우제에서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남양주/연합뉴스

 

고인이 되신 백기완 선생이 겪은 수난 내지 박해엔 법정이라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호인인 나는 증언자의 소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있다.

박정희의 폭주가 끝날 줄 모르자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3년 12월엔 마침내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 아래 ‘유신헌법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초법적인 엄벌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개헌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 위반 첫 사건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사상계> 주간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준하(58), 그리고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사상연구소장이던 백기완(42), 이 두 사람이 긴급조치 재판극의 첫 배역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긴조) 사건은 일반법원이 아닌 비상보통군법회의가 1심, 비상고등군법회의가 2심, 대법원이 최종심이었다. 이름부터 ‘비상’이 ‘보통’에 얹혀 있으니 피차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백기완 선생의 변호인이 되었다. 장준하, 백기완 두 사람은 긴조 1호가 나온 지 5일 만에 중앙정보부로 연행 구속되어 12일 만에 기소, 6일 뒤 첫 공판, 바로 다음날 판결 선고 식으로 초고속 질주로 1라운드가 끝났다.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근처 언덕바지에 있는 군용 퀀셋 안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정작 공소장에는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간 행위는 이른바 모두(冒頭)사실, 즉 처벌 대상인 ‘범죄사실’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의 경과사실로 기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가 발표된 1월8일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소급적용’을 하지 않았다는 몰골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막상 공소사실에는 긴급조치를 비난하는 말 몇 마디만 남게 되었다. 예컨대, “국민이 대통령에게 개헌청원도 못한단 말인가” “개헌이란 ‘개’ 자만 말해도 잡혀가게 되어 있으니,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는 등의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장준하), 또는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겠다는 이야기니 나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백기완 옹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백기완)…,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못 희극적이었다.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헌법 비방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 역시 긴조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인망식 표현에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변호인인 나와 백기완 선생 사이에는 이런 법정 문답도 오갔다.

변호인(변): 이번에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에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단돈 5000원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기완(백): 예, 딱 5000원밖에 없었습니다.

변: 그동안 전국민적인 개헌운동을 주도해오시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백: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열망하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들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질문을 한 데는 개헌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백 선생의 헌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당사자인 백 선생도 그때를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어찌해서 그 많은 변호사 반대신문과 변론 요지를 빼고 굳이 이 대목을 상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날카롭고 당당한 백기완 변론의 알짜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반박정희 기류와 온 민중의 염원이 객관화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역시 중정에 끌려온 장준하 선생의 호주머니에서는 단돈 180원이 나왔다. 담배 한 갑 값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월31일 첫 공판에서 군 검찰관은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2월1일) 재판부는 전날의 검찰관 구형과 똑같은 15년형을 두 사람에게 선고했다. 나는 두고두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대도시의 백화점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서울 삼각지의 군용 퀀셋 안에서 군법회의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러운 ‘판결’이었다.

이게 ‘개판’이지 무슨 재판이냐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군법회의니까, 다시 말해서 회의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리 알고 넘어갑시다.” 내 그런 말을 듣고 바뀐 것은 아니겠지만, 그 뒤 ‘군사법원’이라고 개명을 해서 지금은 ‘회의’ 소리는 면했는지 모르겠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끝났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법률로도 할 수 없는 짓을 대통령 명령 하나로 15년 징역을 먹이는 판이었으니, 황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공포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변호사인 제가 ‘정찰제’ 타령이나 하고 저 할 일 다 한 듯이 알고 살아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백 선생님! 

한승헌 변호사

 

‘손에 물 묻힌 투사’ 백기완, 막내딸 업고 저녁밥 짓던 일상

 ~ 작가 공지영, 어릴 적부터 지켜본 백기완 선생 영전에 부쳐 ~

 

창경궁, 늙고 마른 백기완, “이 발길로 고향 어머니 무덤에 한번 가보고 싶어...” 사진 채원희

 

고문당하고 81㎏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한 인간을 추억한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다 살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열 권의 책을 쓴다 한들 그의 인생을 다 묘사해내지는 못하리라. 혹자는 그를 통일운동가로, 혹자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정치가로 부르고, 혹자는 온갖 말로 그를 가리켜 폄하도 할 테지만, 나는 그를 말과 행함에 있어 아주 작은 괴리라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한 진실한 인간, ‘새내기’ ‘동아리’ 같은 말을 우리에게 새로 일깨워준 작가 혹은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던 그

 

그의 부고를 듣고 수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내 인생의 많은 곳에도 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그의 책부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선거, 쌍용자동차 등 모든 해고자의 눈물 속까지.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장소, 어떤 순간 속에 그가 있었음이 스쳐 지나갔으리라. 그는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만일 거기 의로운 분노가 있고 가난한 눈물이 있었다면 말이다. 만일 거기 더러운 억압이 있고 최루탄과 짓밟힘이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조금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그의 큰딸인 백원담 교수(성공회대)와 학교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그의 집에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가 설거지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학교에 강사로 오면 구름떼같이 모인 학생들의 환호성에 휩싸인 주인공이던 그가, 거구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10만 명 넘게 운집한 광장의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하던 그가, 두레상에 앉아 겸손한 식사를 마치며 당연하다는 듯이 그릇을 들고 설거지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평생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노고를 돕기 위해, 그는 언제나 막내딸을 둘러업고 저녁밥을 하고 내일 가져갈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가 보고 싶은 딸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아빠였다. 그 집안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례 같았다.

이른바 ‘민주화 투사’라는 사람들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던 때, 나랏일은 남자의 것이고 집안일은 여자나 하던 것이라는 봉건이 아직도 짙었던 그때, 페미니즘에 겨우 눈뜨던 내게 그 모습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더구나 그는 이미 그 직전인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개들에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81㎏의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 던져지듯 집으로 돌아와 겨우 회복한 터였다. 모두 가망이 없다는 죽음의 세월에서 그는 다시 살아났으나 이후에도 투옥과 고문, 가택연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가 한 번도 그녀를 배반한 일이 없다는 당연한 일이 역사에서 얼마나 드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1992년 겨울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민중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 그의 대선 캠프에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1500㏄ 소형차를 그 캠프에 줬고 그는 그것을 전용차로 썼다. 당시 이름 없던 소설가가 가진 차를 차출해 전용차로 써야 할 만큼 가난한 대선 캠프. 몇 년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형차를 타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그랬듯, 당시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신선한 충격이 얼마나 많은 청년의 정수리에 희망을 들이부었던지. 변두리 집에서 나는 자동차를 빌려주고 발이 묶여 하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썼으니 그게 거의 30년 전 일이다. 세월은 덧없이 날아가고 우리네 인생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만큼 허망하게 스러지는 듯하다.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던 그

 

꽃이 질 때마다 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그 꽃 아래서 우리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이리라. 그 꽃 아래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하늘을 우러르던 빛나는 눈동자를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오, 신이시여 부디 고단했던 그의 영혼을 안아주소서. 축구화를 사고 싶어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던 어린 소년이 그날로 막힌 삼팔선 때문에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음을 기억하소서. 그 상처의 힘으로 다른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음을 헤아려주소서.

그는 가고, 남은 우리는 여기서 그가 남긴 노래를 천천히 부르겠나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공지영 소설가

 

*백기완 선생이 1980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 쓴 시 ‘묏비나리’에 나오는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의 구절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차용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금도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로 집회 현장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 

 

'민중과 노동자들의 벗'  백기완, 전태일 묘소 옆에 영면

시민들 마지막 가는 길 배웅 “민중의 친구로 산 삶 기억”

 

고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묘지에서 유가독들과 시민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관식 및 평토제를 하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상여꾼들이 천천히 ‘민중의 벗’이었던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관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장지에 내려놓았다. 백 선생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등 유족들은 “아빠”를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했다. 백 선생의 하관식에 참석한 200여명의 시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백 선생의 머리맡에는 ‘한반도기’와 함께 영정사진과 위패가 놓였다. 영정사진 속의 백 선생은 여전히 백발을 휘날리며 환히 웃고 있었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백 선생의 위패에는 ‘현고학생부군신위’가 적혔다.

백 선생의 큰아들 백일씨가 “아버지 흙 들어가오.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친 뒤 삽으로 흙을 떠 흩뿌렸다. 관을 흙으로 덮는 허토가 진행되는 동안 풍물패의 연주가 이어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활동가의 자녀들이 선생에게 쓴 편지도 관 위에 놓여 함께 묻혔다. 선생이 50년 전 노동해방을 외치며 먼저 떠난 전태일 열사와 나란히 누워 영면에 드는 순간이었다.

1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열리면서 참가자들이 무대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늘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섰던 백 선생은 마지막 길에도 그들과 함께였다. 백 선생과 함께 통일과 민주화를 외쳤던 동지들, 백 선생이 손잡고 격려해준 수많은 노동자와 ‘백기완 정신’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이 백 선생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백 선생의 노제와 영결식, 하관식이 예정된 이날 오전 8시께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1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렸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장례위)는 발인이 끝난 뒤 오전 8시 반께 백 선생이 생전에 몸담았던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 앞과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노제를 열었다.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은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제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의 일원으로 살았고 백발이 노인이 된 뒤에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살았다”며 “선생님은 투쟁의 최전선에서 한 걸음의 진전을 위한 싸움에도 자신의 목숨을 건 투사였다”고 회고했다.

노제가 끝난 뒤 운구행렬에는 백 선생을 형상화한 대형 한지 인형과 꽃상여가 백 선생의 영정을 뒤따랐다. 운구행렬에 동참한 시민 300여명은 왼쪽 가슴에 ‘남김없이’라고 쓰인 하얀 리본을 달았고, ‘노나메기 세상’(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이 적힌 하얀 마스크를 썼다. 노동자들은 백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검은 머리띠를 둘렀다.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울먹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등 생전 고인의 글귀를 적은 손팻말을 든 채 마지막 행진을 했다. 행렬에 참여한 이미연(51)씨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백 선생님은 옳은 말을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분이었다”며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반부터 서울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영결식에선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선생을 떠올리며 조사를 했다. “백 선생님이 걸음걸이도 힘든 상태에서 양쪽 부축을 받으며 겨우 (용균이) 빈소에 와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원통함과 북받치는 설움을 느꼈습니다. 저세상의 용균이를 만나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꼭 한번만 안아주세요.” 백 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도 조사를 낭독하는 내내 울먹이면서 “용산참사, 세월호 등 이 시대의 노동자와 농민, 빈민의 편에 서서 선생님이 보여준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말씀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구 기자

 

‘민중운동 큰 어른’ 백기완 88세로 별세

문 대통령, 빈소 조문하고 유족들 위로

 

백기완 선생 빈소 들어서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문 대통령은 빈소에서 고인을 추모한 뒤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

2019년 6월에는 북유럽 3개국 순방 도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귀국 직후 동교동 사저를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한 바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평생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 헌신

문인 활동도…임을 위한 행진곡 작사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1933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자락에서 태어난 백 소장은 1945년 해방 뒤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백 소장 가족도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됐고, 갈라진 집안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유년시절 그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혼자 공부했음에도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해외유학장려회’ 첫 수혜자로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지만 “조국을 두고 혼자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여든다섯 살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 소장. 정택용 작가 

1952년부터 10여년 동안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운영했고,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에 몸담았다. 1957년엔 평생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60년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섰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66년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반독재 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를 받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0년 옥중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들은 백 소장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1987년에는 학생·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1992년 다시 독자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낙선 뒤 그는 민중 운동에 매진했다.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노동자생존권을 요구하며 차려진 광화문캠핑촌에서 예술 노동자들과 함께한 백 소장.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2003년), 용산참사 투쟁(2009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 시국회의(2014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2015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2016∼2017년) 등 진보진영의 투쟁 현장의 맨 앞자리를 지켰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여러권의 수필집·시집을 낸 문인으로도 유명한 백 소장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1월부터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던 백 소장은 심장질환 등으로 수술과 병원 치료를 받아오다 15일 오전 4시께 영면에 들었다.  이재호 기자


불끈 쥔 주먹…‘백기완 정신’ 담은 사진 놓인 빈소

딸 백원담 교수 추모 글…고인 정신 따라 조화사양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15일 오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선생님이 생전에 외쳤던 정신을 기억하자는 취지입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는 영정 사진 외에도 대형 흑백 사진 2장이 함께 놓였다. 민중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백 소장은 지난해 1월부터 폐렴 증상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다 15일 오전 4시께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사진을 놓은 노승택 사진작가는 “추모의 의미도 있지만 장례의 엄숙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백기완 선생이 살아생전 무엇을 외쳤는지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 불끈 쥔 주먹과 양팔을 펼친 모습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날 빈소에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근조기와 근조 화환도 놓이지 않았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정치권 인사들과 노동계·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근조기나 근조 화환을 보내왔지만, 장례준비위원회는 논의 끝에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장례준비위원회 관계자는 “근조기나 근조화환이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을 고인이 바라진 않았을 것”이라며 “배달하시는 분들을 배려해 사진 촬영만 허가한 뒤 모두 돌려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 소장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역사적 긴장을 살라시던 당신의 담금질과 깊은 사랑 잊지 않겠다. 늘 든든한 진보운동의 지향을 몸소 실천으로 열어주셔서 고맙다”며 아버지를 추모했다.

장례준비위원회는 오후 1시부터 조문객을 받는다. 백 소장의 유족, 통일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이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장필수 기자

 

 

예술가이기도 했던 백 선생, 시집·영화극본 출간에 직접 무대
김지하·김민기부터 전인권·송경동까지 문화예술인 따르며 영감

 

2016년 2월 백기완 선생(왼쪽)과 송경동 시인이 영화 <동주>를 관람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5·18 광주항쟁 이듬해인 1981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동료였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극 <넋풀이>에 삽입된 합창곡으로, 김종률이 작곡했고 소설가 황석영이 백 선생의 장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일부를 변형해서 가사로 썼다. 원작은 백 선생이 1982년에 비매품으로 냈던 첫 시집 <젊은 날>에 실려 있다.

백기완 선생은 <젊은 날> 말고도 <이제 때는 왔다>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의 시집과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부심이의 엄마 생각> 같은 산문집, <장산곶매 이야기> <따끔한 한모금> <버선발 이야기> 같은 옛이야기책 등을 펴냈고, 2009년에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자전 산문집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어려서는 축구선수가 꿈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그는 <단돈 만원> <대륙> <쾌진아 칭칭 나네> 같은 영화극본 역시 책으로 내놓았다.

생전 백기완 선생 주변에는 통일·노동운동가들과 함께 문화예술인과 문화 분야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1960~70년대 서울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김지하와 미술사학자 유홍준,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가수 김민기를 비롯해 화가 신학철, 가수 정태춘·전인권 등에서부터 최근에는 영화인 양기환과 시인 송경동 같은 예술인들이 그를 따랐다. 문학을 비롯해 문화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있는 이 예술가들은 백 선생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과 자극을 얻었다. 그의 주변에 이처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든 까닭은 그가 설파하는 특유의 민족미학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학 일반에 관해서든 예술의 각 장르에 관해서든 나름의 미학을 지니고 있었고 그 핵심은 ‘조선 고유’의 양식으로 사회 변혁을 이끄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선생의 <장산곶매 이야기>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 서두를 장식하며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징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4년 한국작가회의 창립 40주년 기념식 때 그가 ‘작가의 벗’으로 꼽혀 감사패를 받은 배경에는 문학과 문화 전반에 관한 그의 이런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

사석에서도 이야기와 노래, 호통과 눈물을 곁들이며 공연에 가까운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는 했던 백기완 선생은 시와 노래, 이야기 등으로 몇 차례 정식 무대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모금>을 소극장에서 온몸으로 구연하는 ‘말림’(2007년), 흘러간 유행가를 직접 부르며 그에 얽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공연(2009년), 그리고 2013년에 있었던 ‘백기완의 시 낭송의 밤’ 등이 대표적이다.

‘문화인 백기완’의 성취와 기여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이다. 그는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을 처음 만들어 쓴 것이 선생이었다. 그가 쓴 책들에는 이와 함께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같은 어여쁜 순우리말들이 가득한데, 그중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들한테서 들어 익힌 것도 있지만 그 스스로 애써 궁리해서 만든 것들이 적지 않다.

백기완 선생은 2016년 2월22일 사랑하는 후배 송경동 시인과 함께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영화감독이 된다면 가장 먼저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에게 송경동 시인이 말했다. “영화 끝부분에서 윤동주가 창살 밖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특히 마음에 남았어요. 선생님과 함께 본 그 별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선생님을 그 별처럼 그리워할 때도 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지고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로부터 5년 뒤, 백기완 선생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고 남은 이들은 별을 보며 생전의 선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재봉 기자


정치권 “백기완 선생의 치열했던 삶, 영원히 기억될 것”

 

정치권은 15일 별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삶과 불의에 맞섰던 용기를 떠올리며 그의 영면을 기원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화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께서 오늘 새벽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치열했던 삶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도 백 소장을 “평생 통일 운동에 헌신한 분”이라고 기렸다.

 

1994년 당시 백기완 선생이 대학 집회 연설을 갔을 때의 모습.

박용진 민주당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선생께서는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힘이 있으셨다. 독재와 불의에 맞서던 그분의 용기와 시대를 가르는 사자후로 청년들을 움직이게 하셨다. 그분의 연설을 들을 때면 용기가 솟았고, 나태함이 부끄러워졌다”고 적었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도 이날 구두논평에서 “고인은 모진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 평생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등한 세상 또한 고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며 “진정한 진보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지금도 ‘어영차 지고 일어나는 대지의 싹’처럼 생명의 존엄,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일깨워주실 듯하다”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송호진 기자

자금출처 · 경영진 · 기업문화…쿠팡 미국 증시행은 ‘예정된 절차’

지난해 매출 1년새 90% 증가 경영진 보상체계도 철저히 미국식

 

설연휴 마지막날인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건물 앞에 쿠팡배송 차량이 세워져 있다.

‘한국의 아마존’이라 알려진 쿠팡의 미국 증시행은 ‘예정된 절차’였다. 한국의 쿠팡은 미국 델라웨어주에 있는 기업(쿠팡LLC)의 ‘한국 지점’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잇단 쿠팡 물류·택배 노동자의 과로사에도 경영진 대응이 굼뜬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한국에서 기업하기 힘들어 미국에서 상장한다”는 얘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자금 조달 방식과 경영진, 기업 문화 등이 모두 ‘미국식’인 이 회사가 한국 소비자를 상대로 영업활동을 하고 한국인을 대규모로 고용하는 점에서 과거 국내 대기업들의 미국 증시행 및 그 시도와 결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쿠팡 베일을 벗다

14일 쿠팡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S-1)에는 베일에 싸여 있던 쿠팡의 진면목이 담겨 있다. 우선 영업 현황이다. 지난해 매출은 119억6734만달러(약 13조2500억원)로 한 해 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코로나19 특수를 누린 사실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영업손실도 한 해 전보다 22% 감소한 5억2773만달러(5842억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경영진 면면이다. 쿠팡 한국지점은 비상장사라는 이유로 경영진 구성이 담긴 정기보고서를 지금까지 금융감독원에 내지 않았다. 그 탓에 쿠팡을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 누구인지 명확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쿠팡 한국지점은 일부 임원의 영입 사실만 뒤늦게 언론에 전하는 데 그쳤다.

신고서엔 이사진과 핵심 임원 명단과 프로필이 담겨 있다.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CEO) 김범석(43)씨 외에도 공유택시 우버 시스템을 만든 투안 팸(52)이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미 아마존 출신 고라브 아난드(45)다. 집행 임원 중 비교적 이른 2017년부터 쿠팡에 몸담았다. 비상임이사로는 미국에서 벤처캐피털을 운영 중인 닐 메타(36)가 2010년부터 맡고 있고, 지난 1월에 정보기술 기업을 운영 중인 해리 유(61)가 최근 결합했다.

이들을 포함해 핵심 임원들이 모두 미국을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거나 미국 현지 경험이 많은 이들이다. 경영진 중 드문 한국 국적 인사도 마찬가지다. 한국지점 대표(경영총괄)인 강한승씨는 한국에서 법관과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냈으나 주미대사관(사법협력관)에서 근무했다. 김범석 의장도 일찌감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 미 하버드대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미국 관행 뼛속 깊이

쿠팡 주요 주주 중 한국 국적의 벤처캐피털리스트는 알려진 바 없다. 미국에서 모은 자금으로 한국에서 사업을 한 구조다. 김 의장이 이런 기업 지배·사업 구조를 짠 이유를 놓고 그간 여러 해석이 무성했다. 본사를 미국에 둔 이유가 자본 조달이 더 유리해서라는 분석이 그 예다. 하지만 이번 신고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증권신고서에 담긴 쿠팡의 보상 체계는 전형적인 미국 관행을 따른다. 정액 급여(salary)보다 조건이 붙은(vesting) 스톡옵션·그랜트(장려금) 등 다양한 형태의 주식보상(스톡 어워드)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경영자에게 가장 파격적인 보상을 하는 국가로, ‘경영자 천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예로 지난해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임원인 투안 팸 최고기술책임자는 지난해 9월 영입 후 두달 만에 2700만달러(약 300억원) 상당의 주식보상을 받았다. 그의 정액 급여(약 9억원)의 30배를 웃돈다. 쿠팡이 산정한 주식보상의 가치는 공정가액 기준인 터라 실제 상장에 성공해 쿠팡 주가가 오르게 되면 더 불어난다. 주식보상을 매개로 공격적으로 쿠팡이 인재를 영입한 흔적이다. 강한승씨도 입사 보름 만에 50억원 상당의 주식보상을 받았다.

창업주 김범석 의장에게만 부여된 차등의결권도 국내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김 의장은 자신이 보유한 주식(클래스B)의 1주당 의결권을 일반 주식(클래스A)의 29배 보장받았다. 가령 1% 지분만으로도 29%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김 의장의 정확한 지분은 알려진 바 없다. 김 의장으로선 미국에 본사를 둬, 경영권 방어와 1천억원 상당의 주식보상 혜택을 모두 거머쥐게 됐다. 한편 신고서에는 김범석 대표 남동생 내외가 쿠팡에서 근무 중인 사실도 나타났다. 부부가 각각 최대 연봉을 47만5천달러(약 5억2500만원), 24만7천달러(약 2억7300만원) 받은 것으로 기재됐다. 박수지 기자

최근 3년간 120곳에서 학술조사 목적 발굴 진행
토목공사 도중 발굴되는 것 포함하면 훨씬 많아
내년 7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여부 결정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가야고분군’에 포함된 경남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2018년 국도5호선 거제-마산 구간 건설공사 도중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공사현장에서 3~5세기 조성된 무덤 840여기 등 대규모 가야 유적이 나왔다. 가야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아라가야 계통의 통모양굽다리접시, 불꽃무늬토기 등 다양한 토기와 망치, 덩이쇠, 둥근고리큰칼, 비늘갑옷, 투구 등 2500여점의 유물도 출토됐다. 특히 가야고분에서는 처음으로 고대 항해용 선박을 형상화한 배모양토기가 나와 학계를 흥분시켰다. 국도5호선 거제-마산 구간 건설공사의 창원 지역 공사는 4일 끝났는데, 창원시는 현동고분군 일부를 복원하고 현장에 유물전시관을 세울 계획이다.

그런데 가야 최대 고분군이라는 현동고분군 기록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서 깨졌다.

지난해 경남 창원시 제2안민터널 건설 도중 터널 진출입로 예정지에서 무덤 1000여기 등 대규모 가야 유적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이 유적 발굴작업은 내년 4월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아직 생활유적 부분은 발굴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토기·철기·장신구 등 유물 5500여점이 출토됐다.

유적을 발굴하는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4세기 전반부터 300년가량 이어진 유적인데, 전혀 도굴되지 않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발굴되고 있다. 특히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집게·도끼·화살촉·큰칼 등 철기 유물이 1800여점이나 나왔다”고 밝혔다.

 

경남 창원시 제2안민터널 건설공사 도중 발굴된 가야유적지에서 지난해 11월11일 열린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옛 가야의 중심지역인 경남에선 최근 “파면 나온다”고 할 만큼 곳곳에서 가야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게다가 발굴할 때마다 ‘최고’ ‘최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큼 문화재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 유물이 쏟아져나온다.

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는 9일 “경남 도내에서 학술조사 목적의 가야유적 발굴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나, 2016년까지는 연간 10건 안팎에 머물렀다. 하지만 2017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최근 3년 동안은 2018년 30곳 36건, 2019년 48곳 57건, 2020년 42곳 48건 등 120곳 141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대규모 토목공사 도중 발굴돼 조사하는 구제조사까지 포함하면, 현재 경남에서 조사 중인 가야유적은 훨씬 늘어난다.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지역은 경남 18개 시·군 전체에 고루 퍼져있다. 경남 전역이 옛 가야의 영역이었으나, 가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뜻이다.

경남에서 가야유적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3년 ‘가야고분군’(Gaya Tumuli)의 세계유산 등재추진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가야고분군’은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고성군 송학동 고분군(사적 제119호), 합천군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 등 경남 5곳과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전북 남원시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사적 제542호) 등 7개 고분군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이들 7개 고분군은 가야 정치체제의 각 중심지에 위치하고, 가야 문명을 대표적으로 증명하며, 가야 문명의 사회구조를 반영한 묘제와 부장유물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야고분군’은 지난해 9월10일 국내 심의 최종단계를 통과해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됐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최종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오는 9월 현지실사를 하고, 이후 토론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내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판가름난다.

우리 정부는 2017년 7월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를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2018년부터 관련 예산을 집행해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하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가야고분군’이 경남·경북·전북에 걸쳐있어 지난해 6월엔 ‘초광역협력 가야문화권 조성’ 기본계획도 마련됐다. 이 작업은 단순히 ‘가야고분군’ 정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야사 규명과 확립, 가야유산의 합리적 보존과 관리, 가야 역사자원 활용과 가치창출 등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덕택에 가야유적 발굴조사가 2017년부터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역사적 가치규명이 시급한 가야유적 조사를 지원하는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이 2019년 시작되면서 경남 도내 가야유적 조사건수가 부쩍 늘어났다. 최근 3년 동안 학술조사 목적으로 발굴한 120곳 가운데 77곳이 비지정 유적이다.

경남 고성군의 대표적 고대 성곽인 만림산 토성이 5세기 소가야 전성기에 축조된 토성이라는 사실이 지난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됐는데, 이 조사는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 덕택에 이뤄졌다. 경남 통영시 팔천곡 고분군은 통영지역의 유일한 높다란 모양의 고분인데, 이 역시 지난해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 덕택에 발굴조사를 해서 소가야 고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곳에선 금으로 만든 가는고리귀걸이, 굽은옥·대롱옥·유리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철제 큰칼,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경남 김해 유하리 유적에선 지난해 건물지 7동이 발굴됐다. 역시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으로 발굴조사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 건물지 중앙의 넓은 나무판재 흔적 위에서 금관가야 토기의 대표격인 아가리가 밖으로 꺾인 굽다리접시 15점이 5점씩 세줄로 나란히 눕혀진 채 출토됐다. 무덤이 아닌 생활유적에선 처음 확인된 것으로, 관련 학계는 이를 통해 제사 행위 등 특수용도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는 “경남의 가야유적 가운데 95% 이상이 비지정 유적이다. 비지정 유적이라고 해서 문화재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중요성을 규명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비지정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가야의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도5호선 건설공사 도중 발굴된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가야유적지(사진 가운데 빈터). 창원시는 유적 일부를 복원하고 현장에 유물전시관을 세울 계획이다. 경남도 제공

가야유적 발굴조사가 활발해지면서 가야유물의 가치도 뒤늦게나마 인정받기 시작했다.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 등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3점은 지난해 10월8일 보물 제2081~2083호로 지정됐다. 김해 대성동 8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허리띠는 지난해 11월19일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예고됐다. 창원시는 현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수습해 지난해 10월 창원시립 마산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 ‘가야의 또 다른 항구, 현동’을 열기도 했다.

김수환 경남도 학예연구사는 “가야유적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의해 시작됐는데, 당시엔 왕릉 등 최고지배층 유적 중심으로 조사했다. 해방 이후에도 사실상 일본학자들의 연구 방식과 결과를 그대로 이어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에만 주목했다”며 “가야유적은 신라·백제에 견줘 가치를 규명할 기회가 적었는데, 비지정 가야유적은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제야 가야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기초조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상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