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권 단일후보로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왼쪽)과 야권 단일후보로 국민의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맞붙게 됐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보수 야권 단일후보로 확정됐다. 이로써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오 후보 간 여야 맞대결이 완성됐다. 국민의힘은 이번 선거에 승리해 정권교체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다짐했고, 민주당은 오 후보의 서울시장 성과를 문제 삼으며 ‘낡고 실패한 시장’과의 한판 승부를 별렀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은 23일 두 후보의 경쟁력과 적합도를 묻는 단일화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오 후보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누르고 단일후보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오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나경원 전 의원 등을 누른 뒤 보수 지지층이 제1야당 후보에 결집한 흐름이 이번 승리의 요인으로 분석된다.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안 후보는 이번엔 단일화 문턱에 걸려 본선 출마를 접게 됐다.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두 후보의 구체적인 득표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오 후보는 이날 최종 야권 단일후보 발표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저는 단일화로 정권을 심판하고 정권교체의 길을 활짝 열라는 시민 여러분의 준엄한 명령을 반드시 받들겠다”고 밝혔다. 또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일을 떠올리며 “지난 10년을 무거운 심정으로 살았다. 가슴 한켠에 자리한 무거운 돌덩이를 이제 조금은 걷어내고 다시 뛰는 서울시로 보답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성원해달라”고 했다.

안철수 후보도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시민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며 “야권의 승리를 위해 힘껏 힘을 보태겠다. 국민께서 바라시는 정권교체의 교두보를 함께 놓아가겠다”고 밝혔다. 안 후보는 앞으로 오 후보 쪽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오 후보와 안 후보는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누가 이기든 승리한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후보 간 정책을 공유하는 등 공조를 이어가며 궁극적으로는 서울시 공동운영에 합의한 바 있다.

민주당은 ‘서울의 미래 박영선’과 ‘낡고 실패한 전직 시장’ 구도를 짰다. 박 후보는 이날 서울 양천구 한국방송회관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오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확정된 데 대해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의미 두진 않는다”며 “엠비(MB·이명박 전 대통령)와 똑 닮은 후보가 되어서 두손을 불끈 쥐게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상대 후보는 조건부 출마부터 시작해 계속해서 말을 바꾸고 있고, 콩밭에서 다른 일을 하려다가 그 일이 안 되니까 서울로 돌아온 재탕, 삼탕 후보”라며 “시대는 새로운 서울시장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재보선 선거운동은 25일부터 시작되며 사전투표는 다음달 2~3일 실시된다. 서영지 장나래 기자

 

민주, 오세훈에 날선 성명 8개…“미래와 과거의 대결” 공세

 "서울시 나눠먹기" 인물 구도 부각 · 지지층 결집 공들이기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왼쪽)가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서울시당 대회의실에서 열린 ‘박영선 캠프 2030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이낙연 상임선대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결정된 23일,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 쪽은 오 후보를 비난하는 논평 8개를 무더기로 쏟아냈다. 야권 단일화 과정 자체를 공격하는 “‘서울시 나눠먹기 단일화’의 커튼콜, 관객은 외면할 뿐이다”,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경력을 지적하는 “낡은 행정의 달인 오 후보는 보육공약을 낼 자격이 없다”, 내곡동 땅 보상과 관련한 “‘도돌이표 거짓말’을 멈춰라” 등 ‘네거티브 패키지’였다. 박 후보는 남편 명의로 도쿄에 아파트를 구매한 것을 놓고 ‘진정한 토착왜구’, ‘야스쿠니 뷰’ 등의 표현으로 비난했던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 등을 공직선거법 위반 및 모욕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이런 날 선 반응엔 위기감이 배어 있다. 정권심판론 확산으로 한층 불리해진 여론 지형 속에서 제1야당 소속인 오 후보와 일대일로 겨뤄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실제 민주당 내부에선 오 후보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보다 더 ‘벅찬 상대’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단 국민의힘은 소속 정당의 오 후보로 단일화가 이뤄짐으로써 거부감 없이 조직력을 총동원할 조건이 갖춰졌다. 102석을 갖춘 제1야당 국민의힘은 원내 3석인 국민의당보다 인적 네트워크와 물리적 기반이 단연 월등하다. 더욱이 오 후보는 출마 선언 이후 내내 여론조사에서 고전하다 이달 초 당내 경선에서 나경원 후보를 꺾으며 이변을 일으켰고, 이번에도 대선 주자급인 안 후보를 물리침으로써 상승 흐름을 굳혔다.

컨벤션 효과를 고스란히 거둘 수 있는 상황이다. 박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오 후보의 확장성을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오 후보는 그동안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힘 다른 후보보다 중도층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안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그 효과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재선 경력이 있는 오 후보를 경쟁자로 맞이한 민주당은 ‘과거와 미래의 대결’을 내세우며 ‘인물 구도’를 부각시켰다. 박 후보는 이날 오 후보로 야권 단일화가 이뤄진 데 대해 입장을 묻자 “구도 자체가 서울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박영선 시장이냐, 낡고 실패한 시장이냐의 싸움”이라며 “특히 오 후보는 무상급식으로 아이들 차별하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낡은 사고를 계속한다”고 말했다. 또 “광화문광장, 세빛둥둥섬 이런 것은 서울시민과 공감대를 형성해서 한 것이 아니고 전시행정을 한 것”이라며 “서울시민들이 원하는 혁신과 개혁을 이룰 후보가 누구겠냐”고 했다.

서울 지역의 한 민주당 의원은 “지금까지는 보수 야권 단일화 이슈가 박 후보를 덮고 있었는데, 이게 정리되면서 인물 구도가 설정됐다. 오 후보는 2011년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10년간 정치권 외곽에서 떠돌았고, 박 후보는 최근까지 국회의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을 하면서 달려왔다. 박 후보의 성공과 오 후보의 실패를 부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 지지층 결집에도 더욱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 캠프는 이해찬 전 대표 및 문재인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사들을 더 많이 포진시킬 계획이다. 박 후보 선대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박 후보가 오늘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를 방문했던 이유도 범여권 응집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 진영이 총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영지 기자


안철수 ‘제3세력 한계’ 절감…야권 재편과정 재기 노릴듯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가 23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2017년 대선 패배 뒤 줄곧 내리막이다. 체급을 낮춰 재도전한 서울시장의 꿈마저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렸다. 2~3주 전만 해도 당선이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였기에 단일화 레이스 막판에 허용한 역전극은 더 쓰라리다. 이제 동지는 얼마 없고, 그의 곁엔 해지고 빛바랜 ‘새정치’의 깃발만 나부낀다. 정치인 안철수에게, 4·7 재보선 이후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동지는 얼마 없고, ‘새정치’ 낡은 깃발만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는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단일후보로 확정된 뒤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많은 분이 야권의 서울시장 단일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 정치가 바뀔 수 있단 희망 보셨을 거라 확신한다. 서울시장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만, 저의 꿈과 각오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성의 낡은 정치를 이겨내고, 새로운 정치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는 저 안철수의 전진은 외롭고 힘들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20일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한 안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으며 당선권에 근접했다. 지난 1일 금태섭 전 의원과의 ‘제3지대’ 단일화에서 승리한 뒤 서울시장이란 최종 목적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갔지만, 제1야당 국민의힘과의 ‘두 번째 단일화’에선 패배했다. ‘윤석열 파동’과 ‘엘에이치 투기 스캔들’을 거치며 격화된 정권심판론이 그에겐 도리어 악재가 됐다.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해선 힘있는 제1야당 후보를 서울시장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심리가 야권 지지층에 확산된 결과였다.

국민의당과 안 후보로선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오 후보가 상승세를 타는 동안, 단일화 협상에 시간을 허비하며 ‘골든 크로스’(지지율 역전)를 허용한 게 뼈아픈 패착이었다. 티브이(TV) 토론과 정책 발표 등에서도 제1야당의 조직력을 넘어설 개인기를 보이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다.

오세훈 당선 땐 제3지대 입지 급격히 축소

안 후보의 서울시장 도전은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두번째다. 앞서 그는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사퇴로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박원순 변호사에게 양보하고 출마하지 않았다. 2018년에는 바른미래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와 완주했지만, 박원순 시장과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에 밀려 3위에 그쳤다. 그 사이 그는 유력 대선주자이자 한국 정치를 혁신할 ‘새정치의 아이콘’에서 중도와 보수에 양다리를 걸친 ‘이만저만한’ 차기 주자로 위상이 하락했다.

안 후보는 일단 단일후보가 된 오 후보의 선거 운동을 돕는 데 주력한 뒤 야권 재편과 2022년 대선 준비 과정에서 존재감 회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선 이번 단일화 과정에서 제3지대의 한계를 절감한 안 후보가 결국엔 약속했던 합당을 통해 제1야당에 편입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다수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단일 후보가 되는지와 상관없이 국민의힘과 합당을 추진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를 피한다면 더 옹색해질 것”이라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과 제3지대를 도모하는 경로도 있겠지만 결국 자의적인 결정보단 환경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물론 단일화 과정에서 오 후보와 박빙 승부를 벌였고,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적지 않은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의 대선주자로서의 가치가 죽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안 후보는 이날 결과 발표 전 <시비에스>(C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제가 정말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이 내년 대선에서의 정권교체다. 그래서 저는 어떤 역할을 하든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데 모든 역할을 다할 생각”이라고 했다. 서울시장이 안 된 만큼, 그가 생각하는 ‘역할’에서 ‘대선 후보’는 상수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그의 구상에서 ‘대선후보’는 여전히 상수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국민의힘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해 ‘탄핵정당’의 꼬리표를 떼어내면, 가뜩이나 좁았던 제3지대의 입지는 더 축소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안철수 대표는 국민의힘 안으로 들어가 대선을 준비하며 재기를 노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스스로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 방해 등 중대한 범행”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018년 9월1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들이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의혹 관련 사건 가운데 첫 유죄 판결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는 23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에게는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8년 8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민걸 전 실장과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양 전 대법원장 등과 함께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지위 확인 소송에 개입하고, 상고법원 도입 등 사법정책에 비판적인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대법원의 위상을 강화하고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양 전 대법원장 등과 함께 헌재 파견 법관을 이용해 헌법재판소 내부의 사건 정보와 동향을 수집한 혐의도 받고 있다.

심 전 법원장은 옛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사건 항소심이 법원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될 수 있게 특정 재판부에 배당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방 전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요구를 받고 자신이 담당하던 옛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사건의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를 누설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이민걸 전 실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법원행정처가 추진하는 사법정책에 다른 의견을 밝힌다는 이유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주도하던 소모임을 해소시키려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의견에 동의해 (소모임) 중복가입 해소 조치 공지를 게시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규진 전 상임위원에 대해서도 “헌재 파견 법관에게 직무 범위에서 벗어나 헌재 사건 정보와 자료를 전달하게 했고, 사법정책실 심의관에게 정당한 직무 범위에서 벗어나 재판독립에 반하는 위법부당한 보고서를 3차례나 작성·보고하게 했다”며 “이 전 상임위원이 스스로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를 2차례나 방해하는 등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짚었다.

이번 1심 판결은 공소사실 중 상당 부분이 겹치는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임 전 차장 등의 사법농단 관련 남은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부장판사와 유해용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각각 무죄를,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과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1심에서 각각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윤영 신민정 기자

 

‘사법농단’ 이민걸 · 이규진 유죄…양승태 · 임종헌 재판 영향 줄까

1심, 재판개입 혐의 등 인정, 양승태 재판에도 영향 줄 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기소된 전직 판사들이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의혹 관련 사건 가운데 첫 유죄 판결이다.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 의혹 핵심 피고인들과 공모 관계도 상당 부분 인정돼 향후 이들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는 23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에게는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기록 검토와 판결서 작성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애초 지난달 18일 예정이었던 1심 선고를 두 차례 연기한 뒤 내놓은 첫 유죄 판결이다.

재판부는 이민걸 전 실장과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임 전 차장 등과 함께 상고법원 도입 등 사법정책에 비판적인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자 탈퇴 조처’를 공지하게 한 혐의 등을 인정했다. 또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박 전 처장 등과 함께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높아질 수 있는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직권 취소하고 단순위헌 취지로 다시 결정하게 하고, 옛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1심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도 유죄로 판단했다.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헌재 파견 법관에게 헌법재판소 내부의 사건 정보와 동향을 수집하게 한 혐의에 대해선 양 전 대법원장, 고영한·박병대 전 처장, 임 전 차장과의 공모 관계를 일부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민걸 전 실장에 대해 “법원행정처가 추진하는 사법정책에 공개적으로 다른 의견을 밝힌다는 이유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주도하던 소모임을 해소시키려는 임 전 차장의 의견에 동의해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 공지를 게시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이규진 전 상임위원에 대해서도 “헌재 파견 법관에게 직무 범위에서 벗어나 헌재 사건 정보와 자료를 전달하게 했고, 사법정책실 심의관에게 정당한 직무 범위에서 벗어나 재판독립에 반하는 위법부당한 보고서를 3차례나 작성·보고하게 했다”며 “이 전 상임위원이 스스로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를 2차례나 방해하는 등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짚었다.

반면 재판부는 심상철 전 법원장의 무죄를 선고하며 “옛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사건 항소심 배당이 이례적으로 이뤄졌다”면서도 “심 전 법원장이 법원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될 수 있게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는 데 관여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방 전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의 요구를 받고 자신이 담당하던 옛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사건의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를 누설한 혐의에 대해서도 “방 전 부장판사의 의견에 불과해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두 전직 법관에 대한 이번 1심 유죄 판결은 공소사실 중 상당 부분이 겹치는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처장, 임 전 차장 등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처장의 재판을 맡은 재판부는 지난달 법원 정기 인사에서 부장판사 3명으로 구성된 대등재판부로 재편됐다. 재판은 다음달 7일 재개될 예정이다. 이날 선고한 재판부가 심리 중인 임 전 차장의 재판은 오는 29일 열린다. 같은 재판부가 헌재 파견 법관에게 헌재 내부 사건 정보와 동향을 수집하게 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견제하기 위해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시행하는 등 임 전 차장의 공모 혐의를 인정한 만큼 임 전 차장의 재판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을 기소한 검찰 수사팀은 이날 입장문을 내어 “사법행정권자의 위헌적인 재판 개입 행위에 대해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유죄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수사팀은 다만 “재판독립을 침해한 사법행정권 남용 등 다수의 범죄사실에 대해 다양한 법리적·사실적 쟁점이 심리됐고, 그 판단 결과에 따라 유무죄가 갈렸다”며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부장판사와 유해용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각각 무죄를,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과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1심에서 각각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조윤영 신민정 기자


[사설] ‘사법농단’ 판사들 첫 유죄 판결, 사필귀정이다

  잇따른 ‘제 식구 감싸기’ 속 단죄 의미
  집행유예 형량은 국민 눈높이 못 미쳐
  향후 재판에선 더 엄격한 잣대 세워야

 

‘사법농단'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전직 판사들에게 첫 유죄 판결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는 23일 이민걸(왼쪽)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오른쪽)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했다. 연합뉴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벌어진 ‘사법 농단’으로 기소된 고위 법관들에 대한 재판에서 처음으로 유죄 선고가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23일 재판 개입 등 혐의를 받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2017년 초 불거진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4년 만에야 처음 이뤄진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은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의 부적절한 유착과 재판 거래 등 사법부의 일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고위 법관 14명이 기소됐다. 그러나 이제까지 선고가 이뤄진 6명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심지어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개입한 행위조차 “헌법 위반이지만 직권남용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받았다. 급기야 국회가 나서 임 부장판사를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소추했다.

이처럼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로 재판을 통한 사법농단 단죄는 불가능한 게 아니냐는 절망감마저 느껴지던 터라 이날 유죄 선고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재판부는 이민걸 전 실장이 국회의원 재판과 관련해 담당 법관의 심증을 파악하거나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옛 통합진보당 지방의회 의원들의 지위 확인 소송 재판에 개입한 행위 등이 재판권 방해로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 사무의 공정성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범행”이라고 지적했다.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판결과는 다른 태도다. 또 법원행정처가 법원 수뇌부에 비판적인 법관들의 모임을 와해시키려 한 행위도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범행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은 여전히 국민 눈높이에 못 미친다. 이날 함께 재판을 받은 2명의 법관에게는 또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집행유예 이유로 해당 행위를 주도한 게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과 임종헌 전 차장이라는 점 등을 들었다. 이들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최고위층 연루자들은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들의 재판은 물론 이미 1·2심에서 무죄가 나온 법관들의 향후 재판에서 법원은 더욱 엄격한 잣대를 세워야 한다.

법원 수뇌부가 정치권력과 유착해 재판을 의도대로 주무르고 일선 법관들을 사찰한 사법농단은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법원의 신뢰 기반을 허물어버린 중차대한 사건이다. 법원 스스로 뼈를 깎는 자세로 엄단해야만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아울러 헌법재판소도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심판을 엄정하고 신속하게 진행해 헌법적 단죄를 내려야 할 것이다.

 

  미테구의회,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 다수결로 의결

"영구설치 실행까지 그자리에 머물도록 설치허가 내달라" 청원

 

베를린 소녀상 앞 세계여성의 날 집회 : 6일(현지시간)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세계여성의 날 기념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현지 여성단체 코라지 여성연합과 코리아협의회가 공동주최했으며, 참가자들은 베를린시청 티어가르텐 지역사무소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지금 자리에 당분간 계속 머물게 됐다.

앞서 지역의회가 결의한 소녀상의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를 끝낼 때까지다.

  

베를린시 미테구의회는 18일(현지시간) 전체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의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을 의결했다.

프랑크 베르테르만 의장(녹색당)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평화의 소녀상 안전보장 결의안이 다수결로 의결됐다"고 선언했다.

표결에는 구의원 52명이 참여해 39명이 찬성했고, 13명이 반대했다. 베를린 연립정부 참여정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좌파당 등 진보3당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는 기독민주당(CDU)과 자유민주당(FDP)에서 나왔다.

좌파당이 제출한 결의안은 평화의 소녀상을 미테구에 영구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해 실행할 때까지 소녀상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금 자리에 설치 허가를 계속 연장하라고 미테구에 청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미테구의회는 지난해 12월 1일 평화의 소녀상이 미테구에 계속 머물 방안을 구의회 참여하에 마련하기로 하는 내용의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결의안'을 의결한 바 있다.

영구설치 길 열린 베를린 미테구 모아비트 소재 평화의 소녀상

결의안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철거명령을 철회하고 당초 올해 8월 14일이었던 설치기한을 올해 9월 말까지로 6주 연장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좌파당 틸로 우르흐스 구의원은 "지난해 12월 1일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설치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로 결의했고, 오는 5월 10일까지가 처리 기한인데 거듭된 요청에도 구청에서 미온적이어서 아직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해 우리는 코로나19로 봉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곧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고, 그 이후에는 선거가 있다"면서 "이런 과정에서 소녀상이 설치허가가 종료됐다는 이유로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안전보장 차원에서 마련한 결의안"이라고 설명했다.

우르흐스 의원은 "소녀상은 단순히 한일문제 차원에서가 아니라 군사분쟁과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라는 근원적 문제 차원에서 봐야 한다"면서 "이번 결의안은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의 속도를 내기 위한 표지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미테구청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이 국제적인 전쟁 피해 여성의 인권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 지난해 7월 설치를 허가했고, 소녀상은 지난해 9월 말 미테 지역 거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치 이후 일본 측이 독일 정부와 베를린 주정부에 항의하자 미테구청은 지난해 10월 7일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베를린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소녀상 설치를 주관한 현지 시민단체인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가 행정법원에 철거 명령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자 미테구가 철거 명령을 보류하며 한발 물러섰다. 이후 미테구의회는 지난 11월 7일 철거명령 철회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베를린 소녀상 설치' 추진한 코리아협의회 대표: 독일의 수도 베를린시에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코리아협의회(KoreaVerband) 한정화 대표.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는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결의안인 만큼, 베를린 소녀상이 영구거주증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앞으로 영구설치를 위한 논의가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7년 한반도 평화 위협 받았을 때
남북미 대화 통한 국면전환 상기시켜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왼쪽)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만나 접견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안보라인을 처음으로 만난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18일 오후 청와대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을 만나 “대통령에 취임한 2017년도의 한반도 상황은 전쟁의 먹구름이 가득 덮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며 “다행히 양국이 잘 협력해서 지금까지 평화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전쟁의 먹구름’과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 등은 취임 첫해였던 2017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에 갈등이 격화되며 한반도 평화가 위태로웠던 상황을 가리킨다. 문 대통령이 4년 전 상황을 언급한 것은 한-미 간 협력 속에 위기를 수습하고 싱가포르 선언 등을 이끌어낸 점을 상기시키려는 뜻으로 보인다. 이에 블링컨 장관은 “미국 쪽은 대북정책 검토 과정에서 열린 자세로 동맹국인 한국과 계속해서 긴밀히 소통해나가겠다고 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또 바이든 대통령은 4월 화상으로 개최될 예정인 기후정상회의에 문 대통령의 참여를 고대한다고 블링컨 장관은 전했다. 블링컨, 오스틴 두 장관은 이번 방한이 “바이든 대통령의 직접적인 결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접견에서 미얀마 사태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문 대통령은 “40년 전 광주 민주화운동 등 군부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이룩한 경험이 있는 우리 국민들로서는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더욱 절실히 공감하고 있다”며 “미얀마 국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과 자유에 대한 억압을 강력히 규탄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블링컨 장관 등 미국 쪽은 한국 정부의 관여에 대해 감사하다고 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또 문 대통령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총격 사건에 대해 안타까움과 피해자 가족에 대한 깊은 위로의 뜻을 전했고, 한국계 희생자에 대한 미국 쪽의 애도 메시지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완 기자

 

블링컨 ‘싱가포르 정상회담’ 언급 않아…한-미, 대북·대중 시각차

   정의용 “북미협상 재개 희망”에도 블링컨 “북 핵위협 감축” 더 강조
  ‘중국 역할론’ 꺼내 다자접근 선호...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반대 분명히

 

로버트 랩슨 주한 미국대사 대리와 정은보 외교부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대사가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가서명식을 진행한 가운데 함께 참석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바이든 신행정부의 대북 접촉 노력을 지지한다. 북-미 간에 비핵화 협상이 조속히 재개되길 희망한다.”(정의용 외교부 장관)

“미국과 동맹에 대한 북의 미사일·핵 위협을 감축시키고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의는 향후 미국 정부의 대북·대중 정책 방향을 확인해볼 수 있는 중요 시험대였다. 미국의 외교·국방 정책을 좌우하는 블링컨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어떤 대북·대중 메시지를 쏟아내는지에 따라 내년 5월 임기를 마치는 문재인 정부는 물론 차기 정권의 대외정책이 큰 제약을 받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7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 18일 2+2 회의 뒤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나온 미국 쪽 발언을 모아보면 한국 정부의 지향과 ‘적잖은 괴리’가 확인된다.

 2+2 회의 뒤 회견에 나선 두 나라 장관들은 다 같이 ‘철통같은 한-미 동맹’의 의미를 강조했지만 적잖은 부분에서 이견이 드러났다. 블링컨 장관은 한-미 동맹에 대해 “동북아, 인도·태평양 및 세계의 평화 안보 및 번영의 핵심축”이라는 입장을 다시 강조하며 “우린 동맹을 재확인할 뿐 아니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왔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두 핵심 관료가 첫 순방지로 한국을 택할 만큼 미국이 한-미 동맹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일깨우며, ‘중국 견제’로 요약되는 미국의 외교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다만, 정 장관은 미국 등 4개국 안보 협력체인 쿼드에 대해선 “직접적 논의가 없었다”고 확인했다.

초미의 관심사인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국 정부는 2018년 6월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기초해 조속히 북-미 대화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뜻을 거듭 밝혀왔다. 미국의 두 장관은 “북핵 문제는 시급한 사안이며 양국 간 긴밀한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유산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대해선 방한 기간 내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블링컨 장관은 싱가포르 공동선언에 포함된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한 비핵화’란 용어를 고수했다.

이에 반해 정 장관은 17·18일 이틀 연속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이라며 꼬박꼬박 ‘한반도 비핵화’란 용어를 사용했다. 결국 공동선언에 한반도 비핵화란 용어는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한반도 비핵화라 하면 주한 미군기지와 한국에 들여오는 전략 자산도 확인해야 하니 (미국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 “연합훈련·연습을 통해 모든 공동 위협에 맞서는 연합준비태세를 유지”한다고 선언하며, 트럼프 행정부 때 북-미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연기 또는 축소했던 연합훈련을 원래대로 시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 대신 강조한 것은 북한의 ‘인권 문제’와 북핵 문제 대응을 위한 ‘다자적 접근’이었다. 블링컨 장관은 17일은 물론 18일에도 “북 주민들이 압제적인 정권 아래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 때와 달리 인권을 문제 삼으며 고강도 압박을 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블링컨 장관은 이어 북핵 문제 해결에 한·일 등 동맹국뿐 아니라 “중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북-미 간 양자 협상이 추진되며 모습을 감췄던 ‘중국 역할론’을 재차 끄집어낸 것이다.

또 다른 갈등 지점은 중국 문제였다. 블링컨 장관은 17일 “우리는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위험한 침식을 목격하고 있다”며 중국이 홍콩·대만·신장·티베트·남중국해 등에서 벌이고 있는 ‘강압적 태도’를 강도 높은 어조로 언급했고, 18일에도 “우리는 중국의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논의했다. 세계적인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반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18일 오후 <연합뉴스티브이(TV)>에 출연해 “미-중 간 하나를 택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접근법은 불가능하다. 미·중이 우리한테 그런 요구를 해 온 적 없다”고 말했다. 길윤형 김지은 기자


중 관영매체 “한국, 미국의 중국 봉쇄전략에서 약한 고리”

   “중국 위협론 한국에 안먹힐 것” 경제·정치적으로 긴밀히 연계
    경기회복·남북관계 등 중국 도움 필요 “중 봉쇄 거리두기 가능”

 

동맹국을 앞세워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의 봉쇄 전략에서 한국이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중국 쪽에서 나왔다. 한-미 외교 국방장관(2+2) 회담 뒤 발표된 공동성명 내용과 맞물려 눈길을 끈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18일 “미국이 부풀리고 있는 ‘중국 위협론’이 일본과 달리 한국에겐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며 “경제·정치적으로 중국과 긴밀히 연계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봉쇄를 위한 아시아 동맹과 거리 두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어 신문은 “한국의 이같은 움직임은 반중국 봉쇄 전략에 적극 가담할 뜻을 드러낸 일본과 대조된다”며 “한국은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에서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즈용 푸단대 조선한국연구센터 주임은 신문에 “한국 입장에서 볼 때, 바이든 행정부의 아시아 전략은 여전히 ‘미국 우선주의’를 중심에 두고 있다”며 “동북아에서 미국의 이익만 추구할 뿐, 한국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한국은 여러 구조적 딜레마에 직면해 있으며, 침체된 경기 회복과 남북관계 복원 등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쪽 전문가들이 한-미 2+2 회담에서 중국 관련 문제가 아닌 한-미 군사동맹 강화와 북핵 등 한반도 문제가 핵심의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실제 이날 회담 뒤 발표된 공동성명을 보면, “역내 안보환경에 대한 점증하는 도전”,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불안정하게 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 등의 언급만 있을 뿐 중국은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다즈강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동북아연구소장은 <글로벌 타임스>에 “바이든 정부가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면서 한-미 연합훈련을 부각시킨 것이 한국을 수세적 위치로 내몰았다”며 “이로 인해 한국은 일본과 달리 미국의 대중 포위 전략에서 더욱 거리를 두면서, 한반도 문제 대응과 관련해 중국 쪽으로 좀 더 기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앞서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에 적극 가담할 뜻을 밝힌 일본을 맹비난했다. 자오 대변인은 “중국의 굴기부흥을 억제하겠다는 이기적 사익을 얻기위해, 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속국을 자처했다”며 “주저없이 신의를 저버렸고, 중-일관계를 파탄시켰으며, 지역 전체의 이익을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미-일은 냉전적 사고에 사로잡혀 의도적으로 집단대결을 부추기고 있다”며 “반중국 ‘포위권’을 구축하려는 것은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처사이며, 지역 내 혼란과 충돌만 불러올 뿐”이라고 덧붙였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