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 이모저모 

‘비트코인 가격 하락·공매도 승리’ 점쳐 ... 멍거 “역겹고 문명의 이익에 반하는 것”
‘스페이스엑스 화성 여행자’ 보험 허용여부, 자인 보험부문 부회장 “고맙지만 사양”
버핏 “머스크 승선 여부 따라 보험료 달라져”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왼쪽)과 찰리 멍거 부회장이 2019년 5월 3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 주주 쇼핑의 날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마하/로이터 연합뉴스

 

해마다 5월의 첫 토요일이면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볼 수 있었던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가 올해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이유는 뭘까?

 

지난해 오마하 주총장에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워런 버핏 회장을 제외하곤 한 명의 주주도 입장할 수 없었다. 버핏의 오랜 벗이자 조력자인 찰리 멍거 부회장도 불참했다. 멍거는 건강 문제로 엘에이 자택에 머물렀다. 둘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97살 멍거와 90살 버핏의 재회를 위해 올해엔 주총 장소를 엘에이로 바꾼 것이다. 지난 1일 열린 주총을 생중계한 야후파이낸스에 따르면 둘은 늙은 부부인 양 무심한 듯 다정해 보였다. 버핏이 후계자로 지목한 그레그 아벨 부회장과 아지트 자인 부회장도 아들처럼 동석했다.

 

야후파이낸스가 소개한 온라인 주총 하이라이트를 보면, 버핏은 ‘쥐약’이라고 극언한 바 있는 비트코인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번엔 즉답을 피했다. 그는 “지금 주총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 수십만명은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고 공매도한 사람은 2명 있을 것”이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이어 “수십만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과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찾는 것은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향후 비트코인 가격 하락으로 공매도가 승리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비트코인 매도자를 딱히 2명이라고 한 것을 두고선 버핏 자신과 멍거를 지칭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반면 멍거는 비트코인이 “역겹고 문명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뚝딱 발명된 금융상품에 하루아침에 몇십억 달러를 퍼붓는 것은 ‘황소 앞에 붉은 깃발’을 흔드는 격”이라고도 했다.

워런 버핏(왼쪽)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지난 1일 열린 온라인 주총에서 비트코인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알듯모를듯 에둘러 답변하자 찰리 멍거 부회장이 웃고 있다. 야후파이낸스 영상 갈무리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도 도마에 올랐다. 머스크가 화성 탐사를 위한 스페이스X 비행에 대한 보험가입을 요청한다면 수락할 생각이 있느냐는 한 주주의 질문에, 버크셔의 보험부문 부회장 아지트 자인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버핏이 씩 웃으면서 “그 결정은 보험료에 달려있다. 머스크의 승선 여부에 따라 보험료가 크게 달라진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개미들의 투자 광풍에 대해 버핏은 “온라인 증권사 로빈후드가 도박을 충동질해 주식시장을 카지노판으로 만들어놨다”고 비판했다. 처음 여윳돈이 생긴 사람들에게 하루에 50번 거래를 해도 수수료가 공짜라며 데이 트레이딩(하루에 수차례 매수와 매도를 반복)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뒷문 상장’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스팩)의 합병 열풍에 대해서도 “좀 과장하면 도박판으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버핏은 “스팩은 2년 안에 합병해야 하는데, 만약 여러분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2년 내 어떤 기업을 사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해 애플 주식을 일부 판 것은 “아마도 실수였다”며 인정했다. 버크셔가 애플 주식을 사는데 들어간 원금은 310억 달러인데 보유 중인 애플 주식의 시가는 3월 말 기준 1110억 달러(약 125조원)에 달한다.

투자자들에게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식이 아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펀드를 추천했다. 버핏은 “개별종목을 고르기보다는 지수를 사는 게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내가 세상을 떠나면 아내에게 남긴 자금의 90%가 S&P500지수 펀드에 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대로 멍거는 “전체 주식시장보다 우리 회사를 선택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위험분산 명목으로 어떤 사업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종목들을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면 오히려 수익률이 떨어질 수 있으니 본인이 잘 아는 2~3개 종목을 찾는 게 훨씬 쉽다는 소신을 피력한 바 있다.

 

버핏은 “우리는 상당한 인플레이션을 보고 있다”며 최근의 물가상승을 우려했다. 그는 “버크셔도 가격을 인상하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가격을 올리고 있는데 이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제가 정말 달궈지고 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했다.

 

앞서 버핏은 주총 개회사에서 “미국 경제가 지난해 3월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와 의회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 덕분”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법인세 인상 계획에 대해선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며 “증세의 부담이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주장은 기업들이 지어낸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한광덕 기자

 

”정의 · 인권 승리할 것”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두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패소한 4월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가 법원을 나서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93) 할머니가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각하한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기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 추진위원회’(추진위)는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4월 일본의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 등 국제법 위반 책임에 면죄부를 부여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항소하기로 결정했다”며 “할머니께서 항소심에서는 정의와 인권이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고 5일 밝혔다. 추진위는 또한 “이 할머니께서 일본 정부가 소송에 불참하는 등 한국 법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을 비판했다”고 덧붙였다.

 

추진위는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고 전했다. ‘위안부’ 제도 범죄사실 인정, 진정한 사죄, 역사교육, ‘위안부’ 왜곡 또는 반박 등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사법적 판단을 받자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지난달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지난 4월21일 이 할머니와 고 곽예남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과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현시점에서 유효한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과 이에 관한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주권적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재판을 끝내는 결정이다. 이는 지난 1월8일 또 다른 피해자 12명이 낸 손해배상 ‘1차 소송’ 1심 판결과 달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피고 일본이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해 피해자 12명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장필수 기자

고 김택용 <부산일보> 기자가 1979년 10월18~21일 취재
언론통제에 싣지 못했지만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해 눈길
18일 오전 경남대 도서관에서 50여명이 구호 외치며 시작
파출소 등은 파손했지만 시민 피해 줄이려고 질서 유지

 

1979년 10월 마산시내에 출동한 군인들이 거리행진을 하며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박정희 유신독재의 몰락에 불을 댕겼던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마산시위 현장을 취재한 기자의 원고가 42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부산일보> 마산 담당 기자였던 고 김택용씨가 서슬 퍼렇던 당국의 언론통제를 뚫고 1979년 10월18~21일 시위 현장과 경찰서, 기자회견장 등을 오가며 기록한 원고지 100장 분량 기록물이다. 하지만 이 취재 내용은 당시 당국의 삼엄한 언론통제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고, 군·경찰이 제공한 자료만 신문과 방송 등을 탔을 뿐이다.

 

김택용씨는 1983년 태풍 현장 취재를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고인이 됐다. 김씨의 아들 김재준(53)씨는 최근 이 원고를 발견해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에 기증했다. 재단 학술·기념사업팀 조영숙 담당은 “김씨 원고에는 나흘 동안의 마산 시위 상황이 시간대별로 잘 적혀 있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지명 등이 있어서 마산 시위 참가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씨 원고 속에 담긴 나흘 동안의 기록을 소개한다.

 

1979년 10월18일 경남대 시위 학생들의 시내 진출로.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18일 목요일

 

마산 시위가 처음 시작된 곳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경남대다. 오전 10시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생들이 한창 공부 중이던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 학생이 “부산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의혈 마산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자”고 외쳤다. 이에 50여명의 학생이 일어나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자 어용 학생회라 불리던 학도호국단 간부 1명이 열람실로 뛰어들어와 “오늘 아침부터 학생들의 동요를 느낀 학교 당국이 휴교에 들어갈 것 같다. 그러니 학생들은 자숙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학생들이 “우리가 중간고사가 싫어서 이러느냐”며 학도호국단 간부를 두들겨 내쫓았다.

학생들의 움직임에 놀란 학교 당국은 긴급 교수회의를 열어 휴강 문제를 논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도서관 앞에 모여들었다.

 

오후 2시. 2천여명 학생이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해 총궐기하자”라고 외치며 교문을 나서려고 했다. 오전 11시께부터 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100여명이 학생들을 저지했고, 학교 당국은 20일까지 휴교를 결정하고 학생들의 귀가를 재촉했다.

 

경찰의 저지로 교문을 나서지 못한 학생들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마산 시민들이 궐기했던 3·15의거를 기념한 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학교 담을 넘어 시내 쪽으로 빠져나갔다.

경남대 근처 창원군청 앞에 모인 학생 100여명은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3·15의거탑 주변을 에워싼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밀린 학생들은 남성동파출소 등 관공서에도 돌을 던졌다. 시위대 400여명이 오후 6시51분 남성동파출소를 공격하자 경찰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흩어졌던 학생들은 저녁부터 번화가인 불종거리·오동동·창동 쪽으로 이동하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길가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고, 퇴근길의 공단 노동자와 회사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오동다리 위에 세워진 경찰 트럭 1대를 밀어 하천에 빠뜨렸고 민주공화당 사무실에 들어가 기물을 부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오후 6시30분과 8시40분께 불종거리 희다방 앞 네거리에서 경찰과 시위대는 100m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학생들은 ‘나의 조국’을, 경찰은 ‘무찌르자 오랑캐’를 불렀다. 시위대가 돌팔매질하면 경찰은 최루탄으로 응사했다.

 

밤 9시5분.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다시 습격해 경찰에 붙잡혀 있던 시위대 20여명을 구출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찰 저지선이 무너졌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흥분한 시위 참가자들이 통행하는 차량과 상점에 돌을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하자 학생 대표들은 “시민보호”, “질서유지” 등 구호를 외쳤다.

 

밤 9시40분. 시위대가 중앙동 마산시청으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철문으로 굳게 닫힌 시청 정문을 밀고 들어갔고, 박정수 부시장 등 마산시 간부 4명은 옥상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시청 뒷마당에까지 들어갔으나 누군가 “마산시청은 우리 시민들의 호적·주민·재산관계 서류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시위대는 조용히 물러나 마산경찰서로 향했다.

 

밤 10시. 탱크 3대를 동원한 1개 대대가 진압에 나섰다.

첫날 경찰이 검거한 인원은 296명이었다. 공무원 3명, 대학생 57명, 고교생 3명, 노동자 등 시민 226명, 구두닦이 10명이다. 마산이 지역구인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 민주공화당 의원이 이튿날 새벽 2시 서울에서 내려왔다.

 

1979년 10월18일 마산 시내 시위 상황.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19일 금요일

 

아침부터 낮까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오후 6시부터 불종거리·오동동·창동·부림시장 주변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저녁 8시. “어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엿샤, 엿샤” 하며 300여명이 모였다. 시위대는 불종거리를 지나 마산호텔에 도착했다. 누군가 “오동동파출소로 가자”고 외쳤다. 5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150m가량 떨어진 오동동파출소로 몰려갔다. 누군가 종이에 휘발유를 뿌려 리어카에 담아 싣고 불을 지펴 파출소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경하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질렀다. 오동동파출소에서 남경다방까지 150m 거리가 시위대 1500여명으로 가득 찼다.

 

8시57분. 시위대가 문화방송 앞에 도착하자 육군 1개 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청년 1명이 착검을 하고 경비하는 군인 앞에 다가가서는 “죽이고 싶으면 죽여봐라”며 윗도리 단추를 풀고 가슴을 내밀었지만 군인은 손으로 청년을 밀어냈다.

 

산호동 가야백화점 앞에서는 시위대와 군인들 사이 충돌이 아주 심했는데 간선도로 바닥에는 유리병과 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양쪽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군인 1명이 돌에 맞아 이가 부러지자 지휘관이 소탕을 지시했다. 산으로 도망한 시위대를 향해서도 경찰이 최루탄을 쏴 주민들까지 눈이 따가워 밤잠을 설쳤다. 시위대는 새벽 1시가 넘도록 산에서 시위했다. 또 다른 시위대 200~300여명은 밤 10시께 국제주유소 앞에서 ‘언론자유’를 외치며 투석전을 벌이다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애꿎게 군인과 경찰관들에게 마구 끌려가거나 폭행을 당했다. 저녁 8시께 목공소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대포 한잔씩 나누고 창동 쪽으로 가던 김아무개(30)씨는 시위대로 오인당하여 경찰서에 연행됐다. 그는 구둣발에 왼쪽 눈을 심하게 다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다음날 집에 돌아갔다. 신포동 골목 주점에서 청년 4명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순찰하던 군인 3명이 들어와서는 술상을 뒤집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청년들은 쫓겨나고 술집 아주머니는 술값을 받지 못해 울상이 되었다.

 

밤 9시께 불종거리 앞에 있던 청년 4명이 순찰하는 군인 9명에게 붙잡혀 가면서 항의하자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허리 쪽을 갈겨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9시50분께는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 3명이 경찰에 쫓겨 달아나다 회원동 이아무개씨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씨가 대문을 열어 2층 옥상에 숨겨주었는데 10분 뒤 경찰이 찾아와서는 이씨와 술을 마시던 친구 4명, 2층 방에서 잠옷을 입고 공부하던 이씨 아들까지 경찰서로 끌고 갔다.

 

둘째 날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187명이다. 고교생 11명, 대학생 12명, 공단 노동자 25명, 회사원 15명, 상업 26명 등이었다.

 

1979년 10월19일 마산 시내 시위 상황.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20일 토요일

 

낮 12시15분께 지역방송국에서 위수령(군대가 한 지역에 주둔해 그 지역의 경비와 시설물 보호를 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이 발령됐다고 보도했다. 국방부는 위수령을 부인했다. 오후 6시. 마산지역작전사령부 39사단 소령이 기자실을 찾아와 “지방 라디오에만 위수령 발령을 살짝 보도하려고 했는데 전국에 알려져 상부로부터 심한 기합을 받았다”고 했다.

 

오후 3시. 부산에 배치돼 있던 공수특전부대 5천여명 가운데 1700여명(5공수특전여단)이 군용 트럭 47대에 나눠 타고 마산에 들어와 뱀 꼬리처럼 기다랗게 줄을 이으며 시가행진을 했다. 오후 3시40분엔 해병대 400여명도 군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진입했다. 5공수여단은 경남대에 본부를 설치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캠퍼스는 하룻밤 사이 군화에 짓밟히고 말았다.

 

오후 4시40분께 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 내외신 기자 20여명 앞에 만년필만 한 것을 놓고 “이게 시위대 속에서 발견한 사제 총기다. 사정거리가 30~50m로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군과 경찰이 철통 경계를 서고 통행금지 시간이 자정에서 밤 10시로 앞당겨져서 그런지 저녁 오동동·창동 거리에는 인적이 뜸했고 시위는 없었다. 이아무개 월영초등학교 교사는 집으로 가다가 군인들이 한 남성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넘어진 어린 아들을 일으켜 세웠는데 돌을 줍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시민들은 “이날 시위가 벌어졌다면 피비린내 나는 험한 꼴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셋째 날 시위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한명도 검거하지 못했고 야간통행금지 위반자 324명만 붙잡았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제공

1979년 10월18일 경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21일 일요일

 

군인들이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다. 번화가인 오동동·창동·부림동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갑자기 기온도 떨어져서 그런지 행인들도 뜸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시민들은 폭력시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붙잡혀 간 청년들이 경찰한테 살인적인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경찰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다.

 

중앙동의 약국 주인 구아무개(당시 39살)씨는 “학생시위 진압 방법이 아주 잘못됐다. 총칼 앞에 청년들이 지금은 후퇴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언론자유’, ‘유신철폐’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시위 방법이) 도시 게릴라 방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했다. 검거된 이들의 얼굴을 보려는 가족들이 마산경찰서 옆 마당에 모여들었으나 경찰이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 마당에서 발을 구르며 애태웠다.

 

그 이후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불과 닷새 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다.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강경대응이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의 아들 재준씨는 “평소 강골이신 아버지께서는 당시 보도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억척같이 현장 취재를 해서 기록을 남겼다. 늦었지만 아버지의 원고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마민주항쟁의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핼리팩스 국제안보포럼 “중국 압박 맞서” 차이 총통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 지킬 것”

홍콩 송환법 반대 시민들도 받은 상... 중국, “하나의 중국 원칙 저버린 처사” 비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4일 트위터에 존 매케인 전 미국 상원의원과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수상 소감을 담은 글을 올렸다. 누리집 갈무리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미국 핼리팩스 국제안보포럼(HXF)이 주는 제3회 ‘존 매케인 공공 부문 지도자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앞선 제2회 수상자는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를 벌였던 홍콩 시민들이었다.

 

5일 <대만중앙통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포럼 쪽은 차이 총통에 대해 “중국어권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 지도자”라며 “그는 대만이 중국의 군사적 압박과 국제적 고립에 맞설 수 있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차이 총통 집권 기간에 대만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며 “코로나19 방역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덧붙였다.

 

핼리팩스 국제안보포럼은 “민주국가 간 다자 안보 협력”을 내걸고 지난 2009년 미국 워싱턴에서 창설된 비정부 기구로, 11월 중순께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에서 연례 포럼을 연다. 주로 북미와 유럽 각국을 중심으로 ‘1.5트랙’(반관반민) 형식으로 열리는데,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캐나다 주재 각국 외교관들도 초청 대상이다.

 

포럼 쪽은 지난 2018년 8월 숨진 존 매케인 전 미국 상원의원을 기리기 위해 상을 제정했으며, 부인인 신디 매케인이 포럼에 참석해 직접 상을 수여한다. 제1회 수상자는 중동 지역 난민 지원활동을 한 그리스 레스보스 주민들이었으며, 2회 때는 홍콩 시민을 대표해 민주파 입법의원 에밀리 라우와 민간인권전선 부의장이던 피고 찬이 상을 받았다.

 

앞서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 4월12일 “핼리팩스 포럼 쪽은 이미 지난해 말 차이 총통을 제3회 수상자로 선정했다”며 “하지만 연례 포럼 행사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캐나다 정부가 중국의 반발을 우려해 차이 총통을 수상자로 선정하면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캐나다 정부 쪽은 이를 즉각 부인했으며, 포럼에 대한 재정 지원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차이 총통은 전날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소셜미디어 트위터에 지난 2016년 6월 대만을 방문한 매케인 전 의원과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모든 대만인이 함께 받는 상”이라며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반면 캐나다 주재 중국 대사관 쪽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올린 성명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엄중히 위반하고, 대만 독립 분열 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