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서 60 대 59로 반네나탸후 연정 승인

네타냐후 12년 연속 · 15년 집권 종지부

 

이스라엘에서 새 연정 구성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15년 장기집권이 끝날 것이 거의 확실해진 12일(현지시각), 예루살렘 네타냐후의 거처 앞에서 시위대가 축하의 건배를 하고 있다. 예루살렘/AFP 연합뉴스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장기 집권을 끝내는 연정이 드디어 출범했다.

이스라엘 의회는 13일 야미나당의 나프탈리 베네트 대표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연립정부안을 승인했다. 120명의 의원 중 60명이 찬성했고, 5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연정에 동참한 아랍계 정당 라암에서 의원 한 명이 지지를 철회했으나 반대표가 아닌 기권을 행사함으로써 연정이 승인됐다.

 

이로써 최근 12년 동안 연속 집권 등 모두 15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한 네타냐후가 총리직에 물러나게 됐다. 이스라엘은 최근 2년 동안 모두 4차례의 총선을 치른 끝에 새로운 정부를 출범할 수 있게 됐다.

 

네타냐후는 장기집권 기간 동안 강경우파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과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자, 지난 2019년 4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다. 하지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의회 과반 세력 확보에 잇따라 실패하며, 이스라엘은 3차례나 더 총선을 치렀다.

 

지난 3월 치러진 총선 뒤 극우 야미나당이 반네타냐후에 가담함으로써, 60석 이상을 확보해 이번에 연정이 성사됐다. 이번 연정을 성사시킨 야미나당(6석) 베네트 대표는 정부 임기의 전반부인 2023년 9월까지 총리를 맡는다. 이번 연정을 주도한 제2당인 예시아티드당(17석)의 야이르 라피드 대표는 임기 후반부 총리가 된다.

 

이번 연정은 중도인 예시아티드를 중심으로 좌파 성향의 노동당에서부터 극우인 야미나에다, 이스라엘 정부 사상 처음으로 아랍계 이슬람주의 정당인 라암까지 8개 정당이 참여했다. 이념적 공통성보다는 ‘반네타냐후’만이 공통분모인데다, 단 1석 차이로 의회 과반 의석을 넘겨, 도중에 붕괴될 가능성도 상존하고 있다.

 

네타냐후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제1당인 리투드당(30석)의 대표로서 야권을 이끄는 지도자로 여전히 남는다. 그는 이번 연정에 참여하는 우파 성향 의원들을 대상으로 빼내기 작업을 집요하게 벌여왔고, 정부 출범 뒤에도 연정 붕괴 노력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네타냐후가 총리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그의 뇌물 수수 혐의 등에 대한 재판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스라엘 의회 의사당과 총리 관저 밖 등 텔아비브 시내 곳곳에서는 전날부터 반네타냐후 시위대들이 모여, 네타냐후의 퇴임을 요구하는 집회를 이어갔다. 이날 오후 네타냐후의 퇴진이 확정되자, 시위대들은 대대적인 축하 집회를 열었다.

 

이스라엘 새 총리 “이란 핵 안돼”…강경기조 불변 재확인

 중도·아랍계도 참여한 ‘연정’ 출범

‘극우’ 베네트 총리, 먼저 2년 재임

“이란 핵 협상 재개는 실수” 포문

 

        팔레스타인 공세는 수위 조절

        연정 손잡은 아랍계 의식한듯

        미국·아랍국 관계 개선 의지도

 

13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의회에서 새 연정의 총리 나프탈리 베네트(오른쪽)가 12년 만에 물러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총리(왼쪽)와 악수를 하고 있다. 예루살렘/UPI 연합뉴스

 

이스라엘에서 연속 12년, 총 15년에 걸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장기 집권을 끝내는 연정이 드디어 출범했다. 그러나 새 연립정부의 총리인 나프탈리 베네트가 “이란의 핵무기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네타냐후표’ 대외정책 기조를 이어갈 전망이다.

 

이스라엘 의회는 13일 극우 성향 야미나당의 나프탈리 베네트 대표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연립정부안을 승인했다. 120명의 의원 중 60명이 찬성했고, 5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연정에 동참한 아랍계 정당 라암에서 의원 한명이 지지를 철회했으나, 반대표가 아닌 기권을 행사함으로써 연정이 승인됐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최근 2년 동안 모두 4차례의 총선을 치른 끝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베네트가 2023년 8월까지 먼저 총리를 맡고, 이후 2년은 중도 성향 예시 아티드당의 야이르 라피드 대표가 총리직을 수행한다.

 

13일 현지 <하레츠> 등 보도를 보면, 의회 신임투표를 통과한 새 연정의 총리가 된 베네트는 이란에 대한 강경 기조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중동 유일의 비공식 핵 보유국인 이스라엘은 이란을 ‘최대 적’으로 규정하고 이란의 핵 보유를 막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베네트 총리는 이날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유지할 것”이라며 “이란과의 핵 협상 재개는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권 중 하나를 합법화하는 실수”라고 말했다. 그동안 영토 병합 등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강경책을 주장했던 베네트는 이날 연설에서 수위를 낮췄다. 베네트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소유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기억하고 세계에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며 “남쪽(가자지구)의 휴전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의 길을 다시 택한다면 (하마스는) 강철 벽에 부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수위 조절은 연정에 참여한 아랍계 정당 라암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베네트가 팔레스타인 병합 등을 앞세울 경우 아랍계 정당 라암의 반발을 사, 연정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다. 아울러 최근 하마스와의 무력 충돌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베네트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이후 미국 민주당과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네타냐후 전 총리와 달리 미국의 민주당, 공화당 모두와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새 연정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도 계속 진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베네트는 “새 연정은 이스라엘의 아랍계 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네타냐후 전 총리가 한 역할에 대해 감사한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9월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과 수교를 맺었다. 최현준 기자, 정의길 기자

 

밀려난 네타냐후…‘팔레스타인 초강경 압박’ 15년 최장수 총리

이스라엘 ‘무지개연정’에 밀려나

 

이임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앞쪽)가 13일 이스라엘 의회에서 개의를 기다리며, 후임 총리로 지명된 나프탈리 베네트(뒤쪽) 앞줄에 앉아 마스크를 고쳐 매고 있다. 예루살렘/AP 연합뉴스

 

13일 물러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네차례 선거에서 승리하고 다섯 차례 총리직을 수행하는 등 모두 15년 동안(12년 연속 포함) 집권한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은 스스로 아랍계 적대세력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안보를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인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비비시>(BBC)가 분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한 보수 정치인이다. 이란 핵 개발과 관련해서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해, 협상을 추진한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네타냐후는 194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63년 역사학자이자 시온주의 활동가인 아버지 벤지온이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자 미국으로 이주했다. 18살 때 이스라엘로 돌아가 5년간 특수부대 장교로 복무하며 1968년 베이루트 공항 공습과 1973년 중동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형 요나탄은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팔레스타인 조직에 피납된 항공기 구출 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졌다.

 

네타냐후는 1982년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으며, 1984년엔 유엔 주재 대사가 됐다. 1988년 리쿠드당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1993년 당대표가 됐다. 그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추진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극우파에 암살당하자 1996년 43살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됐다.

 

그는 애초 팔레스타인의 자치와 이스라엘군의 추가 철수 등을 담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반대했으나, 막상 총리가 된 뒤엔 미국의 압력에 따라 협정을 받아들였다.

 

1999년 선거 패배로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준 뒤엔 정계를 은퇴했다. 그러나 2001년 리쿠드당의 선거 승리로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집권하자, 정계에 복귀해 외교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2005년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수에 항의하며 사임한 뒤 리쿠드당의 대표가 되어 치른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해 두번째 총리가 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13일 이스라엘 의회에서 후임 총리로 지명된 나프탈리 베네트와 악수하고 있다. 예루살렘/UPI 연합뉴스

 

네타냐후는 총리 취임 직후 평화협상 재개 의사를 밝혔다. 그는 팔레스타인이 비무장 상태로 남고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공식 인정하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팔레스타인의 거부로 협상은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의 재임 기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2012년, 2014년, 2021년 대규모 무력 충돌을 벌였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였지만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트럼프가 팔레스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2016년 이후엔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기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아오다 2019년 11월 기소됐고, 지난해 5월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법정에 출두했다. 그럼에도 2년 동안 잇따라 열린 네차례 총선에서 살아남는 ‘불굴의 생존력’을 보였지만, ‘무지개 연정’ 출범으로 결국 장기집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병수 기자

이제훈의 남북관계 조망

 

1991년 7월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테니스를 치고 있다. 6개월 뒤인 1992년 1월6일 부시 대통령은 서울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한테 ‘북한이 핵무기 개발 포기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보일 때까지 한국은 북한과 협상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조용히 경고”했다고 당시 외무장관 이상옥은 증언했다.

 

‘북핵 문제’란 비대칭 탈냉전기 북한의 위험천만한 생존전략 탓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소련이 사라진 동북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며 ‘잠재적 지역 패권국’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북한 악마화’와 더불어 남북관계를 제어할 목적으로 동북아 국제정치에 깊이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이기도 하다.

 

1991년 9월27일 오후 8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세계 각지에 배치된 미국의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의 상응 조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은, 패권국 미국의 전례 없는 일방적 행동 계획이었다. 놀란 건 저녁 식탁을 물리고 나른한 행복감에 빠져들던 미국 사람들만이 아니다.

 

북한은 바로 다음날 “미국이 실지로 남조선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게 되면 우리의 핵담보협정(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조처협정) 체결의 길도 열리게 될 것”이라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화답했다.

 

부시의 이 발표는 1990년대 초 비대칭 탈냉전 시기 남-북, 한-미, 북-미 양자관계에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미 삼각관계’를 성립·작동시킨 역사적 원점 구실을 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몰고 온다는 카오스 이론의 비유처럼.

 

발표의 직접적 원인은 한달 전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다. 그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겸 공산당 서기장을 흑해 연안 크림반도 포로스 별장에 50시간 동안 감금했다. ‘사흘 천하’로 막을 내린 이 쿠데타는 휘청이던 소련을 연방 해체의 낭떠러지로 떠민 결정타가 됐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소련의 핵무기가 ‘불량국가’ 등에 흘러드는 악몽의 현실화를 막으려 ‘전술핵무기 일방 철수’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부시 회견 여드레 뒤인 10월5일 고르바초프는 “전술핵무기 폐기를 포함한 광범위한 감축 조처를 취하겠다”고 화답했다.

 

30년 전 일을 새삼스레 꺼낸 까닭은, 부시가 ‘세계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와 별도로 지시한 한반도 관련 ‘극비 명령’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40개 남짓한 포병용 더블유(W)-33 포탄과 함정용 전술핵무기는 물론, 군산 공군기지의 에프(F)-16기에 장착한 60여기의 비(B)-61 핵탄두를 제거·철수시키라는 명령이다. 공군의 전술핵무기는 당시 주한미군 핵전력의 알짬인데다, 애초 부시가 철수 지시를 한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가 아니다. ‘북의 우호적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유인책이었다.

 

북은 부시 회견 얼마 뒤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4차 남북고위급회담(1991년 10월22~25일)에서 ‘긴급제안’이라며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에 관한 선언(초안)’을 내놨다. 북쪽 단장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1·2차 회담에서 “미군과 그의 핵무기 철수”를 언급했으나 정작 3차 회담 때 내놓은 ‘북남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초안)’에선 주한미군 핵무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은 터다. 1~3차 회담에서 핵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던 북의 이 ‘긴급제안’은 이례적이었다. “남조선 배치 핵무기가 완전 철수되면 핵사찰에 응하겠다”는 연형묵의 4차 회담 발언은,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회담 전략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남쪽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는 4차 회담에서 “귀측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모든 핵물질과 시설에 대한 국제기구의 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짚었다. 하지만 정원식의 A4용지 11쪽 분량 기조연설문에서 ‘북한 핵문제’ 관련 언급은 세 문장 아홉 줄이 전부다. 핵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언급한 정도에 그친 셈이다. 남이 ‘한반도 비핵화 등에 관한 공동선언(초안)’을 ‘긴급제안’으로 제시해 북의 핵문제 회담 의제화 전략에 적극 호응한 시점은 1991년 12월10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회담 첫날 전체회의였다.

 

남은 4차 회담 이전엔 ‘핵문제’의 의제화를 애써 피했다. 1~3차 회담 수석대표인 강영훈 총리의 기조연설문엔 “핵”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 남이 1~3차 회담에서 ‘핵문제’의 의제화를 회피한 데에는, 긴급현안이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이를 전면에 내세우면 남북관계 진전이 어려우리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은 회고록(<전환기의 한국외교>, 420쪽)에 적었다.

 

노태우 정부가 4차 회담부터 ‘핵문제’를 의제로 다룬 데에는 “요청”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미국의 집요한 압박이 있었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1991년 5월10~12일), 로널드 리먼 국무부 군축처장(1991년 6월4~6일) 등이 잇따라 방한해 ‘재처리시설 포기 확약’ 등 핵문제를 남북고위급회담 의제로 다루라고 압박한 것이다.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명령과 4~5차 고위급회담 때 남북의 회담 전략 전환을 동력으로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 뒤 30년째 한반도의 평화와 8천만 시민·인민의 삶을 인질로 잡을 ‘핵문제’가 그렇게 한반도의 자궁에 똬리를 틀었다.

 

남북은 5차 고위급회담 직후 ‘핵문제 협의 대표접촉’(1991년 12월26·28·31일, 판문점)을 벌였고, 12월31일 3차 접촉 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유엔 동시·분리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이어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1991년을 희망차게 마무리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은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국제비확산체제가 요구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자기 포박’을 확약했다.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1항)에 더해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3항)고 선언한 것이다. 핵재처리·우라늄농축시설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목적 이용”(2항)에도 필요한 것이라,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조처협정’도 금지하지 않은 시설이다. 당시 남북이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중대 난관을 초래할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를 공개 선언한 게 ‘비핵평화’라는 숭고한 가치 때문은 아니다. ‘미국의 압력’이 가장 큰 요인이고, 이를 뿌리치지 못한 노태우 정부, ‘워싱턴(북-미 관계 정상화)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든 뚫으려 한 북의 양보가 두루 뒤엉킨 전략적 선택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가 재처리시설을 갖겠다고 하면 한-미 동맹 관계가 깨지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고 회고록(<노태우 회고록> 하권, 371쪽)에 적어,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가 미국의 압력 때문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앞서 노 대통령이 1991년 7월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한테 밝힌 ‘한국 단독 비핵화 선언 구상’엔 재처리·농축 시설 포기가 없었다. 다만 1991년 5월 방한한 울포위츠 국방차관이 ‘남북이 핵재처리시설을 포기하는 방안을 남북대화에서 협의해달라’고 하는 등 미국의 압박은 집요했다. 요컨대 미국의 한반도 비확산 정책의 표적은 ‘북핵’을 넘어 ‘남북한 모두의 핵능력 제거’였다.

 

미국은 ‘핵’을 빌미로 남북관계에 깊이 개입했다. “상호 상대방이 선정하는 자기측 지역의 군사 및 민간 시설에 대한 동시사찰 실시”를 5차 고위급회담 남쪽 수석대표 기조연설문에 담게 하더니, 부시는 1992년 1월6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 포기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보일 때까지 한국은 북한과 협상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노 대통령한테 “조용히 경고”했다고 당시 외무장관 이상옥은 증언했다(<전환기의 한국외교>, 494~495쪽). 1992년 2월23일 더글러스 팔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서울에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압박해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돼야만 본격적인 남북 간의 경제협력을 추진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핵문제 해결 병행 추진 기조’를 꺾고 ‘핵 포기 먼저 전략’을 관철한 것이다.

 

이렇듯 ‘북핵 문제’란 비대칭 탈냉전기 북한의 위험천만한 생존전략 탓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소련이 사라진 동북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며 ‘잠재적 지역 패권국’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북한 악마화’와 더불어 남북관계를 제어할 목적으로 동북아 국제정치에 깊이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이기도 하다.

 

이게 ‘편견에 찬 반미적 분석’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부시 행정부가 1990년 4월 발표한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 Ⅰ)을 되짚어보는 게 좋겠다. 이 구상의 “동북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 8개항”엔 “역내 헤게모니 국가의 출현을 막을 힘의 균형 유지” “미국의 정치경제적 접근성 유지” “핵확산 억지” 따위가 목표로 적시돼 있는데, 이후 순서대로 △중국 견제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거부·차단 △‘1차 북핵위기’로 현실화했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통일외교팀 기자

▲이제훈 기자는=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전직 전염병연구소장 “치명적 실수”

세계 최고 방역 모범국 지위 잃어

차이잉원 총통 “통절한 아쉬움” 사과

 

    지난 8일 대만 타이페이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장을 보고 있다. 타이페이/로이터 연합뉴스

 

“백신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중대한 실수다.”

 

연일 수백 여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세계 최고 방역 모범국 지위를 잃은 대만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13일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쑤이런 전 대만 국가위생연구원 전염병연구소 소장이 “올해 초까지 대만의 코로나19 통제는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백신이 필요 없거나 더 나은 백신을 기다릴 시간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며 “이는 중대한 실수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대만은 지난달 중순까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가 1500여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폭증하기 시작해 이날 존스홉킨스 대학 통계 기준 1만2900여명에 이른다.

 

현재 정부에 자문하는 싱크탱크인 국민건강연구소포럼을 이끄는 쑤 전 소장은 “중앙전염병 지휘센터가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치명적 실수였다”며 대만의 백신 주문이 다른 나라보다 4~5개월 늦었다고 말했다.

 

대만은 이달 초 일본과 미국이 백신 200만 회분을 지원하기 전까지 확보한 백신이 87만 회분에 불과했다. 이는 대만 인구(2385만명)의 3.6%가 접종할 수 있는 양이다.

 

대만 지도자인 차이잉원 총통도 지난 11일 생중계 담화를 통해 “코로나19에 감염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대만이라는 대가정의 일원”이라며 “가장 통절한 아쉬움과 사과를 표한다”고 말했다. 대만 <중앙통신>은 백신 확보와 백신 접종 지연, 코로나19 확산 초기 대규모 검사 미시행 등으로 비판 여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 사과 담화가 나왔다고 전했다.

 

차이 총통은 “정부는 일체의 노력을 다해 코로나19를 통제하고, 모두가 건강하고 평안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만은 뒤늦게 백신 확보와 자체 백신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대만 매체는 대만 의약업체 메디겐바이오로직스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이 임상 2상에서 당국의 안전 및 효능 기준을 충족했다며 이르면 7월 긴급사용승인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차이 총통도 “오는 7월부터 국산 백신의 배포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현준 기자

아시아 최초…내년 카라얀 아카데미 50주 기념 공연서 첼로협주곡 초연

베를린필 상임지휘자 "신동훈과 다시 조우…동시대 작곡가 작품에 중점을"

 

작곡가 신동훈이 아시아 출신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산하 재단이 수여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작곡상을 받았다.

그가 위촉받은 첼로협주곡은 내년 베를린필의 카라얀아카데미 50주년 기념공연에서 베를린필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의 지휘로 초연된다.

 

                                                    작곡가 신동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4일(현지시간) 한국인 작곡가 신동훈(37)에게 클라우디오 아바도 작곡상이 수여됐다고 밝혔다.

엘리자베트 힐스도르프 베를린필 대변인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인 작곡가 신동훈에게 아시아인 최초로 여섯 번째 클라우디오 아바도 작곡상이 수여됐다"면서 "그가 작곡한 첼로협주곡은 내년 카라얀 아카데미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초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이어 1989∼2002년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상은 베를린필 산하 카라얀 아카데미 후원재단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작곡자에게 비정기적으로 수여한다. 신동훈은 이 상의 여섯 번째 수상자이자 첫 아시아 출신 수상자로 선정됐다.

 

신동훈은 수상과 함께 첼로 협주곡을 위촉받았다. 이 곡은 내년 5월 카라얀 아카데미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베를린필 상임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의 지휘로 카라얀 아카데미에 의해 초연된다. 카라얀 아카데미 출신이자 베를린필 수석 첼리스트인 브루노 델러펠레어가 협연자로 나선다.

 

기자회견하는 키릴 페트렌코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베를린필 기자회견 중계 갈무리=연합뉴스]

 

키릴 페트렌코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는 이날 2021∼2022년 연간 프로그램 발표 기자회견에서 "카라얀 아카데미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지휘할 수 있게 돼 큰 영광"이라며 "한국 출신 젊은 작곡가 신동훈의 첼로협주곡도 초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곡가 신동훈의 작품을 초연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 다시 조우하게 됐다"면서 "베를린필은 동시대에 사는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해 중점을 두는 것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카라얀 아카데미는 앞서 2019년 신동훈의 체임버 오케스트라곡 '쥐와 사람에 관해(Of Rats and Men)'를 위촉해 페터 외트뵈시의 지휘로 초연한 바 있다.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 박사학위 과정에 재학 중인 신동훈은 세계적인 작곡가 조지 벤자민, 페터 외트뵈쉬, 진은숙 등에 사사했다. 그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스페인 국립 오케스트라와 작업했고, 통영국제음악제에도 참가했다.

서울시향은 오는 10월 신동훈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2019년 위촉곡인 '카프카의 꿈'을 아시아권 최초로 연주할 예정이다.

 

[베를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