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은퇴 여행

● 칼럼 2018. 2. 12. 20:09 Posted by SisaHan

하얀 모래사장이 야자수 숲 저편으로 끝없이 펼쳐져있다. 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언뜻언뜻 보이는 해변을 짜깁기 하듯 이어가며 심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2월의 플로리다는 계절의 흐름을 가늠하기 조차 쉽지 않은 듯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시작 된 듯 한데 이제 겨우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잎이 청청한 나무들도 즐비하고, 꽃이 피어 만발한 동백나무 옆엔 탐스런 레몬이 주렁주렁 매달려 결실의 계절을 알린다. 경계가 불분명한 이곳의 계절은 마치 요즘의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하여 유심히 그 속을 들여다본다.

지난해 늦가을 그토록 기다리던 은퇴를 했다. 예정된 시기보다 몇 년 앞당겨지긴 했지만 남은 생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욕심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긴 세월동안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은퇴라는 그 달콤한 시기가 언제쯤 일지 막연하게 기다리기도 했고, 때론 그때를 위해 갖가지 청사진을 그리며 꿈에 들뜨기도 했었다.
어느 날 드디어, 하루 스물 네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주어졌다. 양 어깨에 올려졌던 무거운 짐을 내리고 나니 홀가분함은 물론 황홀하기까지 했다. 곧 다가 올 은퇴를 대비하여 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였음에도 전과 후는 확연히 달랐다. 주어진 업무의 경중을 떠나 구속에서 자유로 회귀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제한시간 없이 늦잠에다 게으름도 부리고 자유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음 한쪽에선 새로운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아직 한창 일 할 나이에 이렇게 놀아도 괜찮을까.’ 하는 죄책감과 함께 열심히 돌아가는 사회라는 집단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듯한 소외감이 엄습해왔다. 거기다가 혹한과 폭설까지 겹쳐 고립 아닌 고립 신세가 되어 날로 우울함이 더했다.


나는 해변에 들어서자마자 샌들을 벗어들고 모래사장을 걷는다. 부드러운 감촉사이 바닷물이 들락거리며 발바닥을 간질인다. 그 느낌이 좋아 물속으로 한 발 두 발 들어갔다가 파도에 쫓겨 뛰쳐나오기도 하고, 갈매기 노니는 한가로운 해변 풍경을 음미하기도 한다. 겹겹이 이랑지은 거친 파도 너머의 물결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마치 혼돈의 시기를 지나면 평화가 오리라는 메시지를 주는 듯하여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불현듯 어느 팔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명언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령임에도 힘든 도전을 하며 행복해 했던 분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바이올린을 들고 우리 가게에 나오는 할머니가 계셨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손자를 대신하여 수고하시나보다 생각했다. 여든도 훨씬 넘어 보였기에 나의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할머니에게 “손자 돌보기 힘드시지요?”하며 인사를 건넸더니“아니, 재밌어요.”하며 다소 생뚱한 대답을 했다. 그리곤 잠깐 멈칫하더니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어 펼쳐보였다. 저승꽃이 널찍널찍하게 자리 잡은 손으로 짚어 보이는 악보 위엔 교사의 지침이 까맣게 얽혀있었다. 할머니는 바이올린을 배운지 일 년 남짓 되었다며 한 달째 같은 동요를 연습 중이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순간 나는 딱딱하고 거친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쥔 채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 유명한 바이올리스트의 멋들어진 연주보다 더 감동적인 할머니의 도전 정신이 눈부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의지의 할머니를 우러러 보며 새로운 불씨 하나를 내 안에 심고 있었다. 

어느 노학자는 은퇴 후의 시기를 ‘신이 내린 축복의 삼십년’ 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나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갈고 닦기에 가장 적합한 이 시점을 잘 활용하라고 강조 한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은퇴를 하고도 삼십년이란 세월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며 이때를 위하여 차곡차곡 저장해둔 나의 버킷 리스트를 열어본다. 행복한 인생 3막을 위해 가늘지만 긴 호흡으로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할 때다. 찰랑거리는 물결처럼 경쾌하게 앞으로, 앞으로.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인텔, 엘이디 조명 단 1218대 드론으로
오륜기·스노보더 등 다양한 형상 연출
야간 시상식장서도 300대 드론쇼 예정

1218대의 드론이 수놓은 오륜기. 인텔 제공

9일 밤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는 드론쇼였다.

인텔은 이날 전세계에 생중계된 개막식 방송에서 무인 소형항공기 `슈팅 스타' 1218대를 동원해 약 30초간 올림픽 스타디움 밤하늘에 올림픽 오륜기, 스노보더 등의 형상을 수놓는 장면을 보여줬다. 2015년부터 시작한 인텔 드론쇼 사상 최대 규모로, 이 부문 기네스기록을 경신했다. 이전 최고 기록이었던 2016년 독일에서의 500대 드론쇼를 2배 이상 웃도는 규모다.

다만 이날 드론쇼는 지난해 12월 사전 녹화한 것이었다. 인텔은 애초 관중들 앞에서 라이브쇼로 펼칠 계획이었지만, 막판에 취소했다고 밝혔다. 평창의 낮은 기온과 강한 바람을 고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텔은 핀란드에서 실시한 사전 테스트를 통해 드론들이 추운 날씨에서도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평창의 기상조건에도 잘 견뎌낼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그러나 앞으로 한 주간 동안 라이브쇼를 계속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올림픽 기간중 야간에 열리는 메달 시상식장에서는 드론 300대로 3~5분짜리 라이브 드론쇼를 펼칠 계획이다.

이날 화려한 쇼를 펼친 `슈팅스타'는 몸체가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쿼드콥터(날개가 4개 달린 드론)로 무게는 330g에 불과하다. 1200여대의 드론에 장착된 엘이디 조명들은 40억가지가 넘는 색 조합을 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인텔은 특히 이번 드론쇼는 컴퓨터 한 대와 조종사 한 명만으로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인텔이 자체 개발한 3D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통해 각 드론들이 입체화면의 한 픽셀처럼 질서정연하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인텔이 개발한 드론 '슈팅 스타'. 인텔 제공

리튬이온 배터리로 작동하는 드론의 비행시간은 최대 20분이다. 그러나 사전 준비와 마무리에 필요한 비행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정 드론쇼 시간은 5~8분이다.

드론쇼는 대규모 국제 스포츠대회 개, 폐막식에서 단골 이벤트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도 대규모 드론쇼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 드론그룹을 이끌고 있는 아닐 난두리 부사장은 보도자료를 통해 "인텔 드론이 올림픽경기에서 역할을 하게 돼 영광스럽다"며 "경기장에서 경쟁하는 운동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드론 기술을 계속해서 혁신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기쁨과 소망] 순교자 손양원

● 교회소식 2018. 2. 6. 20:56 Posted by SisaHan

손양원 목사는 <옥중서신> 1943년 9월 4일자에 누이 손양선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누이야!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해 보이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나중에 죄악에 빠지는 매개물이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행복이 되었단다. 사람의 행복이란 최후에 어찌 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참다운 지혜란 죄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순교자의 삶의 모델은 솔로몬이 아니라 욥이었습니다. 여기서 순교자 손양원 목사는 바로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죽어도 감사, 유학의 길이 막혀도 감사, 옥중에 들어가도 감사, 식당 종업원에게 물 한 잔을 달라고 할 때에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물건을 팔아준 사람에게, 주차를 안내해 준 사람에게,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왜 그런 사소한 일들에 감사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결론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기에 모든 일이 감사합니다.”
순교자가 천국에서 받을 흰옷과 면류관의 상급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죽고 끝난 인생인데 순교자의 죽음은 제단 앞에서 영원히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으로 새 생명을 덧입게 됩니다.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해준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오늘 내가 아직 살아 있어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그가 받은 면류관의 상급까지 주님께 벗어드립니다. 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감사는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아픈 것이 감사하고, 고난 받는 것이 감사하고, 참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 등 모두가 감사할 뿐입니다. 충북 음성에 세워진 걸식자들을 위한 ‘꽃동네 마을’에 선 비석에는,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한 때 나는 감사기도가 어색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 주권만 인정할 때입니다. 모든 일을 제가 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나는 당연히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더 가져야 하고 더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나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깨닫는 순간 평범한 왕이 아니라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영원한 왕이 되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우리 민족에게 준 가장 큰 위대한 유산은 바로 최고의 고난 중에 드린 감사의 기도입니다.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J. Eckhart)는 “태양은 하늘의 눈이고 꽃은 땅 위의 태양이다. 꽃이 태양을 볼 때 사실은 태양이 태양을 보는 것이고 눈이 눈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참 재미있는 말이다. 공자 같은 분도 사람을 나무에 핀 꽃이라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조금 짐작이 간다.
세상의 모든 초목은 태양을 향해 줄기를 뻗어 간다. 그것을 향일성(向日性)이라 하는데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해 주셨으므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 보고싶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건 ‘나’라고 하는 풀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풀에 꽃을 피울 때만 꽃과 하늘의 태양이 마주보게 된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라고 하는 풀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예수라는 풀에 그리스도라는 꽃이 피었다. ‘내가 내가 된다’라는 뜻은 무슨 말인가? 나라고 하는 풀에 그리스도라는 꽃을 피우는 것이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풀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히브리서11장1절에 “믿음이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다”라고 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 태양이라면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는 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라고 하는 풀에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옛날부터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어떤 사람이 성 프란시스에게 가서 물었다. “선생님, 암만해도 내 속에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깁니까?” 그랬더니 성 프란스시는 옆에 있는 도끼로 나무를 절반 딱 쪼개더니 “이 나무 속에 꽃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나무 속에는 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성 프란시스는 그에게 “꽃을 나무 속에서 찾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칫 내 속에서 믿음을 찾으려고 한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 속에는 믿음이 없다. 저 사람은 교회에 잘 다니고 봉사 잘하니까 믿음이 있겠지? 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 속에도 저 사람 속에도 믿음은 없다. 꽃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봄이 오면 꽂이 핀다. 즉 태양을 만나면 꽃이 핀다. 내 속에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봄이 되어야 꽃이 피는 것이다. 봄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태양을 만난다는 뜻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거기에 믿음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믿음의 꽃이 피어나게 된다.


기독교의 죽음은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내가 이제 곧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그 말씀은 내가 이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릴 때 위대한 꽃을 피울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삶 속에 그리스도란 꽃을 피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