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야스쿠니와 세월호 특별법

● 칼럼 2014. 8. 18. 16:21 Posted by SisaHan
8월9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이 열렸다. 2006년 8월15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이후 9년째 지속되고 있는 동아시아 시민연대이다. 일본의 패망을 앞당긴 소련 참전의 날(‘반소 데이’)과 겹쳐 전국의 우익들도 대거결집했고,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의 경찰차량이 이들을 저지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일본의 우익은 왜 야스쿠니 문제만 나오면 반발하는 것일까? 야스쿠니의 어둠에 촛불을 들이대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하지만 진실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전쟁 미화 시설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야스쿠니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한국의 국립현충원과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야스쿠니신사도 국가를 위해서 죽은 군인들을 추모하는 시설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일본 학생이 따지기도 한다.
 
먼저, 야스쿠니는 특정 시기 일본 천황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야스쿠니에는 1868년 일본 메이지유신 전후 천황제 탄생을 위해 죽은 군인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희생된 군인들 약 246만명이 합사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천황을 위해서 죽은 군인 및 군속을 위한 시설이다.
둘째, 야스쿠니는 추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추도 시설이라면 유족의 생각이 중요하다. 종교적인 또는 평화적인 이유로 야스쿠니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유족들이 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합사된 246만명은 하나의 신이며, 한번 신으로 등록된 사람은 그 누구도 취소할 수 없다고 한다. 웃지 못할 일은, 죽은 줄 알고 합사했는데 살아 돌아온 군인들이 있다. 물론 합사 취소는 안 된다. 한번 신은 영원한 신이다.
 
셋째, 야스쿠니신사의 식민지배는 영원하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한국 및 대만 출신의 군인 및 군속 등 약 5만명이 일본 이름으로 합사돼 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죽었기에 일본인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군인 및 군속처럼 원호금 지급을 요구하면, 1952년 이후 조선인의 일본 국적은 취소됐기에 자격이 없다고 한다. 합사는 일본인, 보상은 조선인으로 취급한다.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죽은 영혼에 대한 식민지배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문제는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패전한 국가의 병사들은 추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의 평화운동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기피하고 방치해왔다. 결국 전쟁에서 죽은 자의 위령 문제는 야스쿠니와 우익의 전유물이 됐다. 냉전 이후 확산된 일본인의 피해의식은 야스쿠니의 전쟁사관과 결합됨으로써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을 미화하고 영웅화하는 정치이데올로기로 재생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제로센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서 젊은 군인들의 슬프고 비참한 죽음에 눈떴다. 야스쿠니에서 그들의 죽음이 위로받고 실제 영면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그들이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가에 대해서 영화는 일체 말하지 않으며 보는 이들도 이에 눈뜨지 못한다.
 
야스쿠니신사는 가해자가 희생자를 영웅화함으로써 가해의 본질을 숨기는 시설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기쁨으로 인식하게 하고 가해자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표시하게 하는 연금술 장치이다. 유골이 돌아오지 않아도 야스쿠니에 신이 돼 있어서 내 아들은 개죽음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게 한다. 국가가 만든 모순 덩어리가 역으로 국가와 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특별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우리들의 추모 방식이다. 하지만 올바른 추모를 위해서는 그들이 왜 죽었는가라는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 진상규명 없는 세월호특별법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베트남전쟁 희생자 위령비처럼, 가해자의 진실이 없고 희생자만 미화되는, 우리 안에 또 하나의 야스쿠니 시설을 만드는 법이 될 것이다. 야스쿠니의 어둠에도 세월호 사건의 어둠에도 진실의 촛불이 밝혀지길 기대한다.

< 이영채 - 일본 케이센여학원대학국제사회학과 교수 >


‘28사단 윤아무개 일병 집단폭행 사망 사건’ 자체도 끔찍하지만, 군이 이 사건을 처리한 과정 또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비슷한 사건의 재발 가능성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허술한 보고다. 28사단은 윤 일병이 숨진 4월7일 곧바로 3군사령부와 육군본부, 국방부 등에 15쪽 분량의 첫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보고서에는 가래침을 핥게 하는 등의 엽기적인 가혹행위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이를 토대로 1쪽짜리 문서를 만들어 8일 아침 당시 국방장관이던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김 실장은 ‘상세한 보고를 받지 못해 사건의 세부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다면 조사본부가 핵심 내용을 빼고 보고한 게 된다. 이후 자세한 추가 보고가 국방장관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다.
 
헌병의 조사와 군검찰의 수사도 부실했다. 헌병은 ‘(가해자들이) 입안에 만두를 가득 집어넣고 때렸다’는 진술을 윤 일병 사망 직후 확보했으나 폭행 사실만을 확인하고 ‘미필적 고의’ 등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군검찰관도 이 조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검찰관은 법무 경력이 전혀 없는 초급 장교였다고 한다. 세 차례 진행된 공판도 이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 미리 설정한 결론에 맞춰 수사와 재판이 이뤄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재판에서 가해병사(공범) 변호사가 주범(이아무개 병장)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방부 검찰단은 지난 8일 뒤늦게 가해자들에게 상해치사죄보다 살인죄를 적용하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1심 재판장을 대령급에서 장성급으로 높이기로 한 것도 전형적인 뒷북치기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데는 인권 문제에 상투적으로 접근하는 군의 태도가 작용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몇 차례 병영문화 혁신이 추진됐으나 국방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법안이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제도로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상황이다. 여러 해 동안 논의됐지만 군의 반대 탓에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국방 옴부즈맨’ 제도 도입은 더 늦출 일이 아니다. 또 군 사법체계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상 군내 형사사건 처리를 일반 검찰과 법원이 맡도록 논의해야 한다. 국방부와 군이 자신의 불편함과 기득권 상실만을 걱정한다면 또다른 윤 일병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사설] 남북 관계를 잘 풀려면

● 칼럼 2014. 8. 18. 16:19 Posted by SisaHan
정부가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한계가 있다. 북한 또한 진정으로 남북관계 진전을 바란다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부의 11일 2차 남북 고위급 접촉 제안은 갑작스럽고 내용이 빈약하다. 정부가 밝힌 내용은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비롯해 쌍방의 관심 사항을 논의하기를 희망한다”는 게 거의 전부다. 북쪽이 바라는 5.24 조치 완화·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도 깊게 논의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북한이 입장을 얘기하면 경청할 것’이라고 할 뿐이다. 14~18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8일 시작되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9월 인천아시안게임 등을 앞두고 급히 결정한 흔적이 짙다. 정부가 제시한 19일은 북쪽이 기피하는 을지훈련 날짜와 겹치기도 한다. 이래선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지난 2월 1차 고위급 접촉 때와 다를 게 없다.
 
남북관계의 기본은 활발한 교류·협력이다. 그래야 공통분모가 커지고 신뢰가 쌓인다. 5.24 조치 완화·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가 중요한 까닭이다. 이들 사안은 피해 갈 수 없다.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더라도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이들 사안에서 진전된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그에 더해 10.4 정상선언과 6.15 공동선언 등 과거 합의를 존중하고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북쪽은 남북관계 교착 책임을 남쪽에 떠넘기려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이제 일상화한 미사일·방사포 발사와 거친 대남 비난 등은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5.24 조치 완화·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와 관련한 남쪽의 우려를 해소할 방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풀지 못한 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드레스덴선언만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다. 남북관계가 순항하려면 남북이 함께 노력해야 하지만 지금 더 요구되는 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희생자 가족 모임 5월광장 할머니회를 26년째 이끌고 있는 에스텔라 카를로토(오른쪽) 회장이 실종됐던 손자의 신원과 소재를 확인한 뒤 기자회견을 하던 중 다른 회원 할머니와 서로 기대어 기뻐하고 있다.

아르헨 군사정권, 민주인사 학살-자녀 강탈 만행

“손주를 안아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애는 자기 사촌들처럼 예술가, 음악가가 됐대요. 내 딸 라우라가 하늘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하얗게 센 머리, 주름 진 얼굴의 할머니 투사 에스텔라 카를로토(84)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빼앗긴 손자를 36년 만에 되찾게 됐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그는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군사정권에 가족을 잃은 피해자 단체인 ‘5월 광장 할머니회’ 회장으로 민주화·인권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카를로토의 딸 라우라는 역사를 전공하던 대학생으로 학내 좌파 페론주의 정치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가 1977년 비밀 수용소로 끌려간 뒤 살해됐다. 카를로토는 뒤늦게 딸이 끌려갈 당시에 임신 석달째였으며 처형 두달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대학생, 노동조합 간부, 좌파 활동가 등 반독재 인사를 대거 잡아들여 고문·살해를 저질렀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이들은 납치되듯 끌려간 뒤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성인들만이 아니었다. 반정부 운동을 하던 여성들의 어린 자녀들도 함께 실종자가 됐다. 젊은 운동가들이 구금 중 아이를 낳거나 10살 미만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수감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이 살해된 뒤 아이들마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어린 자녀들을 빼돌려 주로 군인·경찰 가정에 강제 입양시켜,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버렸다. 차세대 반정부 세력의 불씨를 원천 차단한다는 목적 아래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 독재에 희생된 실종자는 민주화 이후 정부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만 1만3000여명이고, 3만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희생자의 실종된 아이들도 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카를로토의 기나긴 싸움은 딸의 처참한 죽음을 확인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얼굴과 복부에 총상을 입은 딸의 주검을 1978년 넘겨받은 직후 초등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비슷한 처지의 여성 12명이 만든 ‘실종 손주를 찾는 아르헨티나 할머니회’ 모임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1980년에 ‘5월 광장 할머니회’로 이름을 바꿨다. 1977년 5월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인 5월 광장에서 아기 천기저귀를 스카프처럼 머리에 두르고 “내 아이를 산 채로 돌려달라”고 외치던 실종자 어머니 단체 ‘5월 광장 어머니회’와 함께 해온 이력 때문이다. 독재자였던 호르헤 비델라는 2012년에 집권 당시 카를로토의 손자 등 반체제 인사의 아이들을 납치한 혐의에 대해 징역 50년형을 추가로 선고받고 지난해 숨졌다. 카를로토의 손자는 가족을 되찾게 된 114번째 실종 아이다. 못찾은 400여명은 성인이 됐겠지만 어딘가에서 뿌리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티나 키르히너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투사 할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하고 트위트를 올렸다. “오늘, 아르헨티나는 어제보다 좀더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 정세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