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복은 주 하나님의 은총에 있는 것이지 이세상의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영적인 축복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죄(허물)의 사함을 얻은 자는 복이 있다”(시편32:1) 라고 말씀하셨기에 죄의 사함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이들에게(마11:28) 안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죄는 양심이 소생할 때는 우리 자신에게도 역시 미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기 아들을 보고 ‘아직 그가 멀리’ 있는 데도 달려가 자기의 용서를 보증하는 입맞춤으로 그를 맞이 하였다. 불쌍한 회개자에게는 이와 같은 사실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 것인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 해야한다. 마음을 잘 돌이키는 모든 신자들은 주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며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수있는 가장 즐겁고 안락한 생활이란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의로운 자요, 구원 받은 성도들만이 누릴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부여받은, 현세와 미래적인 축복과 행복이 되는 것이다. 진지하고 풍부하게 기도드리는 자들은 그들이 고난 중에 처할 때에 그 혜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기도 속에 수치감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 두려움과 성스러운 떨림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짧은 인생의 헛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종말이고, 내 삶의 종말이며, 인생이 가지는 모든 직업과 향락의 끝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들의 종결이다. 죽음은 우리의 집행 유예와 예비 상태에 대한 마지막 종지부인 동시에 보상과 응보의 상태에로 들어가는 두터운 관문이 되는 것이다. 악인에게는 죽음이 모든 기쁨의 종말이 된다. 그러나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슬픔에 대한 종말이 된다. 인생은 계속 등불을 불타도록 유지시켜 주는 기름같은 우리의 영혼도 얼마나 희미한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살펴 알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우리의 살아온 일상적인 경험에 의하여, 이 땅 위의 장막집(육신)이 퇴락하며 쇠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된다.

인간의 지상 생활은 짧으며, 연속성이 없으며, 덧 없음을 늘 상고하고, 우리들의 희락과 명예의 헛됨을 지각하고 살아야 된다. 인간은 ‘재물을 쌓기’위하여 무한한 고심을 하지만, 재물은 뿌려지지 않으면 아무 쓸 데가 없는 밭 이랑에 쌓인 퇴비 더미와 같다. 우리는 또한 재물이 쌓이게 되고 일들이 잘 되어갈때 그 상황이 항상 그러할 것이며, 결코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공상을 갖기 쉽다.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그것은 날씨가 일단 화창해지면 계속 청명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날씨같이 변하기 쉬운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때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의 어리석은 방심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 하여야 마땅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주 하나님의 여러가지 섭리에, 즉 궁핍함과 풍부함, <긍휼>과 <심판>에 대해 노래(찬양, 찬미)해야 하며, 이 두가지를 위해 주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간구)> 하여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공정한 규례를 무시하고 부정한 편법으로 사생활이나 교회의 문제를 다스린 자가 <가야바> (안나스의 사위-대제사장) 이었던 것임(마26:57-68)”을 알자! <가야바>의 비열한 외식과 편견성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조급한 결정을 내렸음을 성경을 통하여 배웠다. 우리는 이러한 불법을 행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진지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리자! 진지하고 풍부하게 기도드리는 신자들은 그들이 고난 중에 처할 때에 그 혜택과 복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악한 세상의 환난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항상 우리 성도들은 기도없는 졸속보다 경건한 기도속에 교지(巧遲)의 지혜를 알고 살아가자! <복음>에 심오하게 파묻힌 <사역>안에서는 <기도>의 응답을 줄줄히 받으리라….!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단풍이 아름답게 물드는 캐나다에서의 추수감사절은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길게 쉬는 휴일이다. 이 연휴를 끝으로 많은 캠프장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이 날은 가족들과 캠핑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엊그제 우리 교회에는 추수감사주일에 많은 성도들이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날 우리 교회에 전혀 예수님을 몰랐던 새 신자가 어린 자녀와 함께 교회에 등록했다.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그분이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감동이 있는 예배였고, 좋은 말씀이었고, 따뜻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잠시 잊혀졌던 나의 추수감사절 다짐을 떠오르게 했다.

캐나다에 오기 전, 미국 버지니아 어떤 권사님의 가정에는 우리 가족과 두 명의 청년들, 그리고 권사님 남편 교회의 소그룹 멤버들 (권사님 남편분은 백인이시라 권사님은 두 개의 교회를 섬기셨다), 그리고 권사님의 아들 커플이 함께 추수감사절 만찬을 가졌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큰 명절 분위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인들은 한국의 추석처럼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서 동부와 서부를 막론하고 고향의 가족들을 찾아 이동한다. 오랜만에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서 가족들만의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데 권사님은 그 해 추수감사절 몇 주 전부터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번 추수감사절 목요일 만찬에 꼭 참석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청년들과 꼭 같이 와 주세요.” 솔직히 그 권사님의 부탁은 부담스러웠다. ‘요즘처럼 바쁜 청년들이 과연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오려고 할까?’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몇몇 청년들이 참석해 주었다. 그날 우리는 인종과 국경을 넘어 한 자리에 모였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과 찬양을 드렸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아니 잠시나마 모두가 한 가족이 되는 시간이었다.

평소 개인주의적이고 그래서 자기 가족만 챙기는 것이 서구의 문화라는 편견을 가졌었는데 (물론 권사님에게서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몇 번 경험한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감사함과 하나 됨, 사랑의 나눔을 전통 삼아, 외로운 사람들과 가족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시간이었다. 이들은 평소에 자신들의 가족들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까? 가족들만의 시간도 소중하지만, 자녀들에게 사랑과 나눔의 가치가 소중함을 전해주고 싶은 것일까? 그날 우리 가족은 권사님의 가족들을 통해서 느낀 추수감사절의 따뜻함과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다짐을 했었다.

추수감사주일, 우리 교회의 새 신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예전 추수감사절의 다짐을 다시 새겨보았다. 다음 추수감사절에는 개인적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또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외로운 사람들을 초청하고, 한 해의 감사를 고백하며, 한 가족이 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전상규 목사 - 열린한마음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북의 도발을 원하는가

● 칼럼 2016. 10. 18. 19:01 Posted by SisaHan

북한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정치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주요 사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핵심 변수다.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인,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대북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 인식과 대응 방식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때로는 위험하다. 지난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대한민국으로 오라”고 노골적으로 탈북을 부추긴 데 이어 어제는 “결국 북한은 자멸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의중을 가감 없이 드러낸 셈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건 북한이 핵실험을 계속하는 등 대화보다는 대결 자세로 나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왜 죽기 살기로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은 미국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가 만나 합의한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 이런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게 9·19 성명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북핵 진실’을 외면하고,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 남한을 위협한다는 일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북핵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물론 북한의 핵무기가 우리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적으로 핵 폐기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심각한 단계에 와 있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가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엉뚱한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 사드 배치 결정을 둘러싸고 ‘미국을 겨냥하는 북한 핵무기를 막기 위해 왜 남한에 사드를 배치해 국내 갈등을 야기하고, 동북아의 안정을 해치느냐’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돼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만 해도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사실상 북핵 문제를 방치하면서 붕괴를 기다렸다면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북한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다. 북한을 무너뜨려야 할 정권으로 상정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모양새다.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반발을 불러오면서 남북 사이의 대치 국면이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서로 ‘말폭탄’만 주고받고 있지만 그 강도가 심해지면 언젠가는 실제 폭탄이 오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이런 호전적인 대북관은 국내 정치를 옥죈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도 큰 문제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국론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입 다물고 있으라는 얘기다. 이승만 정권 이후 수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다. 하지만 북한과 극한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목소리가 일정 정도 먹혀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휴전선이나 서해안에서 국지적인 군사 충돌이 일어나면 모든 현안이 다 덮이게 돼 있다. 박 대통령이 식상할 법도 한 북한 위협론을 계속해 강조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박근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극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벌어졌던 이른바 ‘북풍 사건’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이 엊그제 공개한 예비역 장성의 문자메시지는 이런 우려를 깊게 한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북한이 한미연합군에 의한 보복 빌미를 줄 수 있는 도발을 해오도록 계속 자극할 것”이라는 예비역 장성의 전망은 섬뜩하다. 정권 유지를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 것이라는 분석인데 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아무리 호전적이라도 제발 그런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


[칼럼] 이주 노동자 교수

● 칼럼 2016. 10. 18. 19:00 Posted by SisaHan

캐나다 대학에 임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중국인 교수임용후보자와 저녁 식사가 있었다. 대학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협상의 자리였다. 5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식사 도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캐나다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서 교수를 뽑는 자리에, 정작 캐나다인은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미국인, 필자는 한국인, 임용결정권을 가진 연구소장은 오스트리아, 후보자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동아시아 국가에서 외국인 교수를 보는 일도 이제 어렵지 않다. 중국은 엄청난 자본을 무기로 선진국의 외국인 교수를 유혹 중이고, 3년 연속 노벨상에 빛나는 일본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찾아가는 나라다. 한국도 2002년부터 외국인 전임교원을 늘리려는 자구책으로 브레인 풀 제도를 도입했고, 꾸준히 외국인 전임교원을 확보해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그 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참담한 일이다. 서울대를 떠나는 외국인 교수들에 대한 인터뷰가 신문을 도배 중이고, 외국인 전임교원의 수는 3년 연속 하락 중이다. 한국 대학은 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전시행정의 결과란 참혹하다. 취지는 좋았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평가에 외국인 교원의 가중치를 높였다. 대학들은 그 제도를 역이용했다. 무늬만 외국인인 한국계 교수들이 무더기로 임용되었다. 실제로 브레인 풀 제도 아래서 채용된 외국인 교수 중 한국계 외국인은 40%를 웃돈다.
이런 작태를 주도한 대학이 서울대라는 사실도 분개할 일이다. 그보다 앞서 서울대는 학문적 근친교배의 비참한 현실부터 혁신해야 할 것 같다. 서울대 출신 교수의 비율이 85%가 넘는 대학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교류란 불가능하다. 그런 위계로 가득한 곳에선, 절대로 자유로운 사상이 움틀 수 없다.
2016년, <네이처>에 한국파스퇴르연구소장 하킴 자바라의 글이 실렸다. 인터뷰는 폐부를 찌른다. 한국의 연구 환경이란,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논문을 내”기 어렵고, “유치원을 함께 나왔으니 너를 지원해줄게”라는 농담이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 영어로 쓴 연구비 계획서를 받아주지도 않는 곳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라는 경계는 사라졌다. 실리콘밸리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주류가 되었고, 미국은 H1B라는 비자로 이들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페이스북과 구글과 애플이 삼성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15년을 허비한 한국 교수들에게, 외국인이란 금발의 서양인이었을 게다. 검은 머리로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를 받은 자신도 실은 외국인었음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가르쳐 박사로 만든, 이주 노동자들과 같은 국가 출신의 제자들에게 절대 서울대 교수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미 과학기술 대학원 진학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고, 비대해진 대학원은 동남아 유학생들로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머릿속에 외국인 교수란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21세기의 한국은 20세기 중반 유학을 떠났던 미국과 닮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조선에 가 있다.
눈을 떠 현실을 보자.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다. 이 다문화 시대에,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학문에서조차, 우리는 외국인을 차별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한 논문을 내고 졸업한 이주 노동자의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동지애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는 외국인인가? 질문해봐야 한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