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공인의 염치

● 칼럼 2015. 9. 12. 12:51 Posted by SisaHan

‘염치’(廉恥)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라고 국어사전이 정의한다. 한자의 뜻으로는 청렴(淸廉)하고 수치(羞恥)를 아는 마음이다. 따라서 파렴치(破廉恥), 혹은 몰염치(沒廉恥), 후안무치(厚顔無恥)등은 모두 그 반대의 뜻으로 잘못을 범하고도 도무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요사이 공인들, 특히 정치와 정치인들의 처신을 보면서 그 ‘염치’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한다. 정치란 원래 ‘염치 좋은’ 사람들의 영역이라고는 말하지만, 그래도 수준이나 양심은 가려야 할 텐데‥ 참 염치없는 인물, 염치없는 짓거리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몰염치 혹은 파렴치의 사례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선거 때 호언장담하던 공약들을 당선 되자마자 내팽개치는 것부터, 온갖 이권개입과 부정청탁, 품위와는 거리가 먼 구설수들, 심지어 성범죄에, 역사부정과 이념몰이, 나아가 오리발을 내밀고 억지와 변명으로 호도하는 안면 몰수까지, 국민은 안중에 없이 오직 이기(利己)와 권력추종 뿐이다.

가령 국토를 망가뜨리고 극심한 오염까지 초래한 4대강 사업을 여전히 잘했다고 주장하는 낯두꺼운 인물들, 자원외교랍시고 국가재정을 자기네 쌈짓돈처럼 헛뿌린 망나니들이 지금도 건재해 ‘염치도 없이’의 분통을 자아낸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라는 엄연한 불법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큰소리 치고 덮어씌우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는 딴청을 부리는 철면피, 국정원 댓글공작을 얼버무리고 되레 국가안보를 위해 한 일이라고 둘러대는 뻔뻔함, 당시 일선 경찰의 수사를 방해한 혐의가 짙은 전 경찰청장이 무죄를 선고받았다며 국회의원 출마 운운 나대는 반면, 수사의 정도를 걸으려던 하급 지휘자를 모해니 무고라며 법정에 세우는 희한한 반전 드라마도 참 ‘염치없는’ 목불인견의 모양새 들이다.


그런 몰염치의 반복이 장관이나 고위 권력수장들의 부도덕하고 후패한 흠결들을 오히려 필수품처럼 만들어 나라의 수준과 공직자들의 인품관·가치관을 오도하고 추락시킨 ‘불감증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그러더니 엊그제는 선거 주무장관이 “여당 필승”을 외치고도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버티는 당돌함을 보이기에 이른다. 정상대화록을 유세 공개하고선 ‘찌라시’에서 봤다고 둘러댔던 그 당의 대표라는 이는 “‘승리’라고는 했어도 ‘당 이름’은 말 안했다”고 다시 코미디 같은 해명을 내놔 후안무치 그룹 불변의 본성을 강조해 주었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빈말과 궤변을 입에 달고 산다고들 하되, 최소한의 ‘염치와 체통’은 지키고 보인 다음에야 소위 ‘국격’을 논하는 게 합당하지 않겠는가.


역사에서 염치의 원조를 찾으면 엿 중국 초나라 항우의 고사가 거론된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항우본기’에는 유방과 천하를 다툰 걸출한 인물인 항우의 최후를 그린 대목이 나온다. 항우는 한때 유방의 목숨을 손에 쥐기도 했으나, 악행으로 민심을 잃은 데다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처지가 역전돼 한나라 유방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전쟁 막바지 잇단 패퇴로 군사를 다 잃고 쫓기던 그가 겨우 20여 기병과 함께 오강에 다다랐을 때였다.
오강의 정장이 배를 강나루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권했다. “강동이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 천 리요, 백성이 수십만 명에 이르니 그곳 또한 족히 왕업을 이룰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빨리 건너십시오. 지금 저에게만 배가 있으니 한나라 군사가 이곳으로 온다 해도 강을 건너지는 못 할 것입니다.”


어쩌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호기였으나, 항우는 고개를 저으며 “이미 강동의 젊은이 8천 명과 함께 전쟁에 나가 그들 모두를 잃었는데 강동의 그들 부모형제들을 무슨 면목(염치)으로 대하겠는가”라고 사양한다. 이어 “설사 그들이 책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위인다운 면모를 되살린다. 그리고 그는 충직한 정장에게 “내 차마 이 말을 죽일 수 없어 후덕한 그대에게 주겠노라.”라며 자신의 천리마를 건네주고, 적장 가운데 자신의 부하였던 인물이 보이자 ”유방이 나에게 천금을 걸었다니 내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리라“라며 머리를 거둬가도록 하고는 자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항우는 원래 항복해 온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생매장하고 진의 황제 자영과 초나라 회왕을 죽이는 등 잔학했으며 충언과 지략으로 보필하던 책사 범증을 내치는 등 오만한 무장이었다. 그런데 생을 마감하는 죽음 앞에서 그는 비로소 면목(面目)을 토로한다. 면목은 글자 그대로 ‘낯짝과 눈’ 즉 얼굴의 생김새를 뜻하니, ‘면목이 없다’는 말은 스스로 얼굴 들기에 민망하여 잘못을 뉘우치는 양심과 회심(悔心·回心)의 모습인 것이다.
염치와 면목은 체통 혹은 체면, 나아가 예의나 명분과도 통하는 말이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명분일진대, 염치나 명분이 없는 정치와 정치인들이 횡행한다면 나라 꼴도, 수준도 당연 한심스러울 밖에 없다.


다시 중국의 고전을 인용한다.
친구간의 깊은 우정을 비유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자(管子)의 목민(牧民)편에는 나라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덕목이 나온다. ‘예 의 염 치’(禮義廉恥)가 바로 그것으로, ‘사유(四維)’라고도 했다.

그런데 사유중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게 되고, 둘이 없으면 위태롭게 되며,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모두 없으면 파멸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곧 ‘예의염치’는 나라를 존재케 하는 매우 중요한 기본 덕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파렴치’가 판을 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말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 공인들은 최소한의 염치는 간직하고 봉직해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아찔했던 순간들

사례) 몇년전 리치몬드 힐 지역에 주택구입을 원하는 바이어와 함께 여러 채의 집을 showing 하던 중이였다. Buyer의 자금 규모와 여러가지 사정으로 맞추어 볼 때 집의 구조와 위치 등이 매우 괜찮은 주택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었고 전혀 관리가 되어있지 않았으나 돈을 좀 들여 단장하면 상당한 가치상승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Buyer와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오퍼를 만들기에 앞서 리치몬드 힐 지역 경찰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하던중, 그 집의 마리화나 재배 전력을 발견하게 된다. 2009년 1월14일 388주의 마리화나 재배가 적발되어 그 집의 세입자가 입건돼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주택에 대한 매매 History를 살펴보니,
그 해 4월에 그 집은 매물로 나온 후 2개월 만인 6월 현 주인에게로 팔리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가격과 자료로 판단해 보건대 현 주인은 아무런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마리화나를 재배했던 집을 구입하였던 것이다.
리스팅 중개인에게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현재의 중개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기를 “환경검사에 대한 증명서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서 아마 조금 싼 가격이라도 거래가 가능할 것이니 시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파격적인 헐값으로 오퍼를 내보았으나 괜한 헛수고였다. 얼마 후 우연히 그 주택에 대한 상태를 체크해 보게 되었다. 정상적인 리스팅 가격에서 단 몇 천불 만을 깍은 채 꽤 높은 가격으로 팔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자료에 나와 있는 Buyer측 중개인의 이름이 한인이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마리화나 재배 주택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문답식으로 정리를 해보겠다.

Q1) 마리화나를 재배했던 집의 위험성이란 무엇을 말하나?
A1) 첫째가 Toxic Mouid이다. 즉, 독소를 생산하는 곰팡이의 번식이다. 과도한 수분과 빛을 공급해 주어야 하는 마리화나 재배의 특성상, 벽의 드라이월로 가리워진 인슐레이션 안쪽 부분을 포함해 집안 구석구석에 독소를 생산하는 곰팡이의 서식 염려가 매우크다. 다시 말해, 천식(Asthma), 기관지염(Bronchitis), 비염(Rhinitis), 눈병(Eye irritation), 피부질환(Skin irritation), 폐염, 폐암 등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둘째, 건물구조의 변형(Modification)이다. 이는 건물 주요구조(Structure),수도관(Plumbing),전기시스템(Electric),굴뚝(Chimnry) 등이 전기와 물을 훔쳐 쓰기 위해, 혹은 열과 수증기에 노출돼 심각할 정도로 변형됐을 가능성이 크다.

Q2) 홈 인스펙션을 하면 마리화나 재배전력을 알 수 있지 않을까?
A2)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기계량기 부근의 땅이 파헤쳐 있던 흔적이 있거나 많은 습기가 감지된다거나, 문이 빌딩코드에 맞지 않게 변형되었다던가, Fioor Joint 등에 무엇을 매달아 놓았던 흔적들이 있을 수 있으나, 집을 팔려고 내어놓은 셀러의 입장으로는 이를 모두 수리하고 은폐한 뒤에 리스팅하는 것이 상식이리라. 또, 주인이 한번 바뀐 뒤 다시 시장에 나오는 집은 인스펙션 만으로 마리화나의 흔적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벽과 천정을 모두 뜯어내고 하는 인스펙션 이라면 모를까….

Q3) 나의 중개인은 오퍼를 작성할 때 「셀러는 그 집에서 마리화나 등 불법물질을 재배한 적이 없다는 것을 워런티 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데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A3) 아니다, 위의 워런티는 현재의 주인이 살고 있을 동안의 기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이전의 기간은 언급되지 않는다.

< 김종욱 - 부동산 리얼터, Golden Ridge Realty Inc. >
문의: 416-409-9039



[평신도 글마당] 인간과 종교

● 교회소식 2015. 9. 11. 13:05 Posted by SisaHan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을 지으신 이가 반드시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창:1:1, 2:1). 하나님께서는 특히 인간에게만 자신의 영을 호흡으로 불어 넣어 주셔서 창조하셨다. 따라서 식물은 육만 있고 동물은 육과 혼을 지녔고 인간만이 육과 영혼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하고 영적 동물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을 만든 창조주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능력과 이념 및 사상을 믿고 삶의 근간으로 삼아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종교는 무엇인가 살펴보면 각 종교는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종교마다 인간이 주님으로 되어 있다. 단지 기독교만이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본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최초 인간 아담 하와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됨으로써 영생에서 사망에 이르자 그때부터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하였다. 생로병사로 죽어가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초인간적인 능력의 신관(神觀)을 추구하며 마침내 사후에 내세의 구원의 소망까지도 갖게 됨으로써 종교의 발생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발생 과정을 보면 그 당시의 문화, 생활여건, 발생지역 각 종족에 따른 훌륭한 지도자의 탄생 등으로 종교가 발생되었기 때문에 종교마다 신관과 구원관 심지어 이념과 사상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현재 주요 종교 일람표를 보면 18개의 종교가 제한된 지역에서 각각 발생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전파가 생명인데 18개 중 모르는 종교가 대부분이다. 단 기독교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그 존재론적 면에서 초월적인 실재론에 입각한 신관을 갖는 신앙과 체험에서 그 중심 내용의 특징과 본성은 사랑의 체험으로 이는 초월적 절대자인 실재자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므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사명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권선징악, 또한 인간을 사랑하는 이념과 사상이 있어 근본 진리는 동일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마다 이념과 사상, 교리와 의식, 구원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발생하고 또
한 근본 진리에서 벗어나는 등 종교간 교파간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분쟁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 갔는가? 오늘날에도 기독교와 마호메트교 사이의 투쟁, 마호메트교 안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교파간의 싸움으로 인간 서로가 죽이고 죽어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에게 피조물들은 절대 순종해야 할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 상에서 죽게 하시고 3일만에 부활로 승천하게 하셨다. 또한 다시 보내시어 백보좌 심판에서 모든 인간에 대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백보좌 심판대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죽은 자들이 이 땅에서 행하였던 행실이 낱낱이 기록된 책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책이다. 이 책들의 내용과 심판의 기준은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만이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상의 어느 종교의 교주(敎主)가 천지만물을 만들었으며 또한 주검에서 부활한 적이 있었는가?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사후의 영의 나라를 창조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았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몬트리올에서 자주 보는 사인 중의 하나가 ’Detour’라는 사인입니다. 몬트리올엔 겨울철과 공사철 두 철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길이 막혔으니 돌아가라는 사인이지요.
바쁜 중에 만날 때면 괜히 애꿎은 공사장 근로자들과 시청 직원들을 욕하기도 합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요.
그러나 그 사인이 없어서 그 길로 바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을 겁니다. 제가 아는 분은 이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가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 답니다. 그리고 보니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한 길이고 사는 길이었네요.좀 불편하기는 해도요.


하나님도 때론 길을 돌리십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 앞의 길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7,1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detour 사인을 두셨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땅을 경유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빠른 길로 가면 좋겠지만 그 길에는 길목마다 그 지역 나라의 주둔군이 배치되어 있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겁먹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갈 수 있기에 하나님은 돌아가는 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늦기는 해도, 돌아가는 수고가 있기는 해도 돌아갔기에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빠른 길을 찾습니다. 빠른 응답을 기다립니다. 빠른 복을 사모합니다. 그것이 형통함이고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그러면 의심하고 실망하고 불신하고 원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가는 길도, 더디더라도, 그 길 또한 주님의 계획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알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빠른 길은 오히려 해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혹 하나님의 도움으로 빠른 길도 통과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오늘도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기도 응답이 빨리왔으면 하지요? 그러나 늦어져도, 더뎌도, 너무 초조해 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앞길도, 필요도 잘 아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지요?
그러면 응답뿐만이 아니라 응답의 때도 맡기세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더딘 길도 주님이 동행하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출애굽기 13:21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걸음을 인도하시고 계시네요.
몬트리올과 토론토의 detour는 우리가 알아서 갈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생명의 길 가다 만나는Detour는 주님이 친히 인도하십니다. 참으로 감사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혹 가던 갈 한복판에 크게 자리잡은 Detour 사인 보고 계신가요? 아니면 투덜대며 벌써 돌아가는 길로 접어 들었나요? 서로 원망하기 보단 크게 감사하면서, 목청 높여 찬양하며 드라이브 하면 어떨까요?
그 길도 하나님이 열어주신 은혜의 길이거든요.
오늘도 막다른 길 앞에서 씩씩 대고 있을 주님의 자녀 모두에게 평안을 기원합니다.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