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촛불시위’ 앞에 선 아베

● 칼럼 2018. 4. 11. 13:00 Posted by SisaHan

일본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 대한 국회 집중 심의가 열렸던 지난달 19일. 저녁 7시께가 되자 중의원회 회관 주변 인도를 시민들이 가득 메웠다. 인원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 1000명은 넘어 보이는 인파가 아베 신조 정부의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모리토모학원이 소학교를 설립한다며 국유지를 정부 감정가(9억5600만엔)의 14%에 불과한 1억3400만엔에 사들인 곳인 오사카 도요나카시의 기무라 마코토 시의원이 “아베 총리는 지금 당장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시민들은 “그렇다”, “바로 그거다”라며 호응했다. 기무라 시의원은 2015년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서 강행 처리한 안보법제 제·개정 이야기를 꺼내면서 “안보법제 통과 때도 헌법학자들이 (안보법제가) 모두 위헌이라고 했는데, 아베 총리는 ‘내가 괜찮다면 괜찮다’는 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무라 시의원의 발언에서 한때는 ‘아베 1강’이라 불릴 만큼 견고해 보였던 아베 정부가 위기를 맞은 이유는 공문서 조작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2일 재무성이 모리토모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매각했다는 의혹과 관련한 내부 공문서 14개에서 300곳 이상을 고쳤다고 보도하면서 아베 정권의 위기가 표면화됐지만,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아베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문서 조작을 계기로 분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공문서 조작 항의 시위에서는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한국의 촛불시위를 언급하는 발언도 자주 들린다. 19일 시위에서도 “한국에서 촛불시위로 부정부패에 휩싸였던 정부가 무너졌다”, “옆나라 한국에선 전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갔다. 아베 총리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이전부터 한국 촛불시위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심포지엄 등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신문사 소속이라고 소개하면 촛불시위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추진한 미-일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 30만명이 운집한 적이 있지만, 80년대 이후 일본에서 대규모 시위는 드문 일인데다 촛불시위가 정권 퇴진까지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에서도 한국의 촛불시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베 총리는 공문서 조작 스캔들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야당인 자유당의 야마모토 다로 의원이 2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총리 언제 그만둘 겁니까?”라고 묻자,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중의원) 선거에서 신임을 얻었다. 약속한 것을 추진하는 게 나의 책임이다”라며 사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자민당 파벌인 ‘누카가파’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다케시타 와타루 의원은 “솔직히 말해서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라는 존재가 정권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리토모학원 스캔들) 의혹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과 폐를 끼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아베 총리 본인과 정권 차원의 문제와는 선을 그으려는 발언이다.


아베 총리가 공문서 조작 스캔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각할지 아니면 돌파구를 찾아서 장기 정권을 이어갈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아베 정부가 국회 앞과 신주쿠역에서 모여 정권의 오만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시민의 힘이 아닐까.


< 조기원 - 한겨레신문 일본특파원 >


성도들에게 인사하는 임직자와 부인들.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 이뤄야”

밀알교회(담임 노승환 목사)는 부활절인 4월1일 주일 오전 2부 예배 시간에 장로 4명과 안수집사 3명을 항존직 새 직분자로 세웠다. 임직식에서는 신재광·엄정국·채훈·최영석 안수집사가 장로로, 공성욱·신정호·최호진 집사가 안수집사로 각각 장립했다.


이날 ‘죽음 포기’(막 16: 1~8)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노승환 목사는 “우리는 부활할 존재들인데 죽음 보다 못한 문제들에 왜 그렇게 걱정하는가”라며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삶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기대와 소망과 기쁨으로 살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의: 416-226-4190 >


전도대 특강 참석자들

토론토 전도대학(학장 서인구 소망교회 담임목사)은 4월3일 미국 재부흥운동 대표 실행위원인 김오성 목사를 초청해 특별 강의를 들었다. 미 동부성시화 운동 본부장과 뉴욕 총력전도운동 대표이기도 한 김 목사는 미국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재부흥운동에 대해 소개하고 캐나다지역에도 총력 전도부흥운동에 나서줄 것을 역설했다.

미국 동부의 재부흥운동은 한인 1천여명을 도시지역에 집중 투입해 대규모 전도운동에 나섬으로써 미국의 뉴욕과 동부지역을 복음화하고 성시화하여 다시 부흥을 일으키는데 한민족이 헌신해 나간다는 총력 전도운동이다. 김오성 목사는 국제 도시선교회(ICM) 대표도 맡고 있다.


< 문의: 416-391-3151, 647-207-0702, 416-910-8795 >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걸리고 막히는 데가 많아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겐 복잡한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다. 만일 지금 내 마음이 복잡하고, 내 속이 괴롭다고 한다면, 아직도 세상에 속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럼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바로 하늘에 속해야 한다. 하늘에 속해 살면 간단하고 쉽게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날개를 가졌는데,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신앙이다. 이 날개를 다른 식으로 말하면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고 말씀했다. 즉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자유(날개)가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삶의 문제는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들이다. 그 돌을 치우기 위해서 개미나 애벌레들은 얼마나 땀 흘리며 수고하는가? 그러나 근원적인 방법은 바로 그 애벌레가 나비로 성숙하면, 길가에 돌맹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믿음 안에서 자유(날개)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겐 돈도, 명예도, 인기도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들 속에 있는 갖가지 문제들! 시기, 미움, 질투, 싸움, 고민, 가책, 죽음…이런 문제들은 모두 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자유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를 초월해 살아가는 자유인, 더 쉽게 말하면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삶이 자유인이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죽음은 어찌할 수 없다. 죽음은 넘어가야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은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 바로 내 속에 부활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믿는 사람이요 자유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 가능성을 붙잡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내게 날개가 있다. 내게 있는 그 날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속에서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의 가능성을 어디서 붙잡나? 바로 십자가에서 붙잡아야 한다. 십자가는 고난이다. 부활한다는 말은 나를 고난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나비고, 십자가는 고치가 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의 실상은 나비이고, 보이지 않는 증거는 십자가다. 나를 고난 속에 집어넣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사람은 약한 것 같지만 고난 속에 집어넣어 보면 굉장히 강하다. 인간은 고난에 처해야 자기의 강인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죽음에 처하면 자기의 불멸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원래 인간은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이성을 넘어서는 영성(靈性)이 있다. 이 영성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가 없다. 인간은 또다시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는 것이 십자가요, 나비가 되는 것이 부활이다. 나비가 되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온전히 영원한 생을 살게 된다. 부활은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장25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하늘에 속한 내가 부활이다. 자유가 부활이요, 나비가 부활이다. 나비에게는 죽음도 삶도 문제 되지 않는다. 이런 삶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것이지, 이런 삶이 못되면 죽어도 못 살고, 살아도 못 죽는 것이다. 이런 삶이 대아(大我)의 삶이다. 이제 기독교의 명절 부활절을 지나면서 나의 신앙의 모습을 진솔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땅에 속한 소아(小我)의 삶이 아닌, 하늘에 속한 부활의 삶! 대아(大我)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