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칭업 미니스트리 자원봉사팀이 초청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어린이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파티
Reaching Up Ministry 봉사자·교회들 섬김

우범지대로 알려진 토론토 제인-핀치의 80여개 다민족 거주지역에 있는 유니버시티교회(담임 김진혁 목사: 1830 Finch Ave W.)를 중심으로 어린이와 주민들을 위해 ‘Reaching Up Ministry’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교회들이 지난 12월19일 저녁 아름답고 뜻깊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Reaching Up Ministry는 방과 후 숙제 및 학과 공부를 도와주는 Homework Program과 음악 레슨을 하는 Music School 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섬기는 사역으로, 김애령, 김혁 씨 등 6명의 피아니스트로 구성된 ‘피아르모니아’멤버들을 비롯, 다수의 한인 자원 봉사자와 많은 교회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날 파티에는 120 여명의 어린이가 참석해 성황을 이룬 가운데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게 꾸며진 테이블에서 스파게티, 미트볼, 치킨, 샐러드, 빵 등 맛있는 식사와 다양한 음료가 어린이들을 즐겁게 했다. 또 페이스 페인팅과 스토리 타임, 싱 어롱 시간 등으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날 특히 밀알교회 어린이들이 준비한 뮤지컬 ‘A play in a manger’ 공연이 눈길을 모으며 마지막 곡은 유니버스티 교회 어린이들과 함께 한 합창으로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어린이들은 가든 교회와 밀알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을 한아름 안고 귀가, 모처럼 흥겹고 기쁜 크리스마스를 맞이 했다.


Reaching Up Ministry 자원봉사팀은 평소 음악교실 등 프로그램 외에 여름캠프와 기금모음 음악회 등 다양한 사역으로 어린이와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뜻을 함께 하며 자원봉사에 나설 헌신자들이 많이 필요하며 언제든 환영한다고 RUM팀은 밝혔다.


< 문의: 647-746-7380 >



지금 내 곁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너무 기뻐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내 곁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박수를 쳐 준다고 해서 어깨에 너무 힘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 크게 낙심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것 하나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 주변의 상황은 분명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입니다.
내 곁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담을 주지 않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박수를 쳐 준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면 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면 나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사람이 많거나, 적다는 사실보다, 때로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며,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선 자리가 바르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 아니라면 오늘 나를 바라보며 환호하던 그 사람들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는 내일이 곧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른 분별력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것을 분별해 내는데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여 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바른 자리에 서 있다고 착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고,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이 바른 길을 바르게 걷고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른 자리에 서 있지 않아도 사람이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때로 그에게서 무엇인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별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몰려 들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때로 불편함을 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일 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할 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분별력은 참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만하지도 않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듦을 깨닫습니다.
얼마전 새벽 예배에서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시지만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 왔다”(막1:45)는 말씀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한적한 곳에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 나오는 분,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지만 사람들이 그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한 소리를 듣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 장성환 목사 - 런던 한인교회 담임목사 >



Merry Christmas Toronto!

● CANADA 2014. 12. 26. 18:20 Posted by SisaHan



토론토 시청 앞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성탄절인 25일은 영상의 기온에 ‘Rainy Christmas’가 예고된 가운데 각 교회는 사랑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을 나누며 다양한 축하행사와 찬양으로 평화를 기원했다.



갑의 못된 횡포를 ‘갑질’이라고 한다.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에 있다기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미리 연습을 하려는 걸까?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가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대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 근거한 애정 어린 고발인지라 분노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오 박사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200개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단지 재미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다. 서열이 한두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흥분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대학생들의 이런 정신상태는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와 비정규직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 박사 말마따나, 오늘날 이십대는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편한 시절을 살았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미국에서 벌어진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바로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하는 능력주의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런 한국형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제1의 개혁의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수능점수 몇점이나 정규직•비정규직의 능력 차이는 사소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런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따른 차별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한 능력주의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중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의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 체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50년 전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우리가 사소한 차이에만 집착하고 그 차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 강준만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