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합집회 1백여명 참석 성료

성결교회 캐나다 지방회 (회장 허천회 말씀의 교회 담임목사)가  미주지역 최초로 마련한 청년 연합수련회인 ‘성청 연합집회’가 지난 7월31일부터 8월2일까지 대한기도원에서 열려, 지방회 소속 10여 교회 KM  60명과 EM35명을 포함, 성도와 목회자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큰 은혜를 나눴다.
‘성청이여, 일어나라! -열정,기도,비전,교제’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이번 연합집회는 찬양, 예배, 기도와 함께 박명수 초청강사(서울신학대학 교수:교회사)의 말씀을 통해 성청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찾고 소명을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박 교수는 이번 집회 열기에 놀라움과 격려를 보내면서 첫날 성결교회의 역사, 둘째날 성결교회의 교리를 쉽고도 은혜스럽게 설교했다.  또 평신도 사역자로 수고하는 암 전문의 한승희 집사 (MIT 의학박사:말씀의 교회)와 이주성 집사 (치과의사:벧엘교회) 등 두 전문인이 특강을 통해 선배의 조언과 도전의 용기를 주었다.  
이번 집회는 KM과 EM이 연합해 모든 프로그램을 함께 했고, 저녁 설교와 특강만 영어 또는 한국어에 편히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영어권 은 한혜경 목사 (말씀의 교회), 특강은 Joseph Chae 및 Nathaniel Chae 전도사가 강사로 수고했다.  이밖에 모든 진행은 최유민 목사(생활교회 담임)를 중심으로 캐나다 지방회 소속 젊은 목회자들이 분담하는 등 소속 교회들이 합심, 첫 성청집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차회 더욱 발전적인 집회를 기약 했다.
 
한편 박명수 교수는 2일 낮 차영지센터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성결교회사 및 신학특강’을 통해 한국기독교에서 성결교회가 차지하는 큰 위상을 전했다.
<문의: 416-494-5752, 647-388-4520 >


교회의 바른 언어 생활

● 교회소식 2011. 8. 14. 14:13 Posted by Zig
[평신도 글 마당]

우리는 음악적인 전문성과 함께 훈련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는 교회의 조직을 ‘성가대’ 또는 ‘찬양대’라고 부른다. 
정확한 통계를 내 보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찬양대’라는 말 보다는 ‘성가대’라는 말에 더 익숙해져 있지않은가 싶다.  
그러나 간혹 ‘성가대’라는 말은 아예 잘못된 표현이니 ‘찬양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 주장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성가대’라는 말은 일제시대 사용되던 일본식(?) 용어일 뿐만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이니 ‘찬양대’라는 용어가 보다 적절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 외에도 “우리 말은 외국말과는 달리 존대어(尊待語)라고 하는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그냥 여늬 아이들 이름 부르듯 ‘예수’라고만 호칭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란 존대어을 사용해야 한다.”는둥,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꽤 많은 연구과제가 나올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중 ‘성전’ 이라는 낱말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구약시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성전’이라는 용어가 교회 안에서 너무 남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성소’, 그리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수 있는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던 곳인데 그런 ‘성전’이란 용어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마구 혼용해서 쓰고있다는 주장이다. 
예를들면 ‘성전 건축’이란 말을 쓰는데 그것이 어떻게 ‘성전 건축’이냐는 말이다. ‘예배당 건축’ 또는 ‘교회당 건축’이라면 몰라도 ‘성전 건축’이란 말은 도무지 합당한 용어가 아니란다. 구약시대의 ‘성전’의 개념과 신약시대의 ‘교회’의 의미를 확연히 구분하여 사용하라고 그들은 주문한다.
이 주장들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찮다. 우선 그런 문제들은 본질적이 아닌 ‘비본질적(非本質的)’인 문제들이므로 그런 것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 이들의 주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우선 ‘성가대’라는 말부터 생각해 보자. “이 단어를 풀어 보려면 ‘성가’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 의미를 국어사전에서는 ‘예수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성부(천주), 성자, 성령(천신)을 찬송하는 노래’이고 이런 ‘성가’를 부르기 위하여 조직된 합창대’를 ‘성가대’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성가대’라는 말을 ‘찬양대’라는 말과 동의어(同意語)로 취급함을 볼 수 있다. 
‘성가대’라는 말이 단지 일본에서 온 용어이기 때문에 부적격한 용어라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명칭에 대해서는 “단순히 ‘예수’라고 부르는 것 보다는 ‘예수님’이란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어도 사도 ‘바울’을 ‘바울님’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리고 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두 ‘예수’ 라고만 씌어있지 ‘예수님’이라고 씌어있는 곳은 없다. 
찬송가에서도 ‘예수’와 ‘예수님’이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지 ‘예수가…’라고 하는 등의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이런 경우엔 ‘께서…’라는 높임말 토씨를 써야한다...”
“‘성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예배당’과 동일하다. ‘성스러운 전당’이란 의미이며, 영어로는 ‘church’라고 표기한다.
 
영어성경에는 ‘temple’로 되어있는데 이 의미에는 ‘신전’ ‘사원’이라는 뜻 외에 ‘(그리스도교의) 교회당, (프랑스 기타의) 신교도의 예배소’ 등도 있다. 물론 구약시대의 제단과 성소. 지성소가 있던 ‘성전’과는 구별이 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예배당’의 의미로 쓰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등등.
글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바른 언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복합문화 사회에서 그리고 시간을 아껴가며 살아야하는 바쁜 현대생활에서 바른말만 꼭 집어서 사용하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송필호 - 본 한인교회 장로>


[1500자 칼럼] 아바(ABBA)의 존재

● 칼럼 2011. 8. 14. 14:11 Posted by Zig
책꽂이에서 몇 년 동안 잠자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영 낯설어 선듯 읽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책이다. 홍성사란 출판사와 믿음의 글들 130 131편으로 나왔다는 소개로 사두었던 책이다.  
정진호 교수는 토론토에도 다녀간 분이다. 연변과기대교수요 평양과기대 부총장 되고 난 후인가 설립 모금 차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뵙던 분이다. 나와 친분이 전혀 없는 그가 작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문영을 2권 저자로 쓴 수수께끼 같은 의구가 문영이 곧 그분의 아들 이름인 것을 알게 되자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2권 끝말에 문영이 정진호라 밝혔다.  한번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 강형수의 처절한 삶과 그의 고뇌와 저항의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형틀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2권 합하여 600쪽 가까이 되는 이 소설을 일주일 동안 씹어가며 읽었다. 이제나 저제나 믿음의 글로 올라와있는 진의를 파악하기 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답답하리 만치 강형수의 방황과 욕망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감은 지독했다. 강형수가 완전히 파멸되고 더 밑바닥까지 내려 갈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이르자 비로소 ‘아바’의 존재를 찾는다.
 
‘아바’란 보화를 만나기 위해 소설의 3/2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 과정을 거쳐가야 했던가. 완전한 실패자, 모든 것을 상실한 그가 아바를 만나는 그 길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처절한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실낱같은 빛 미세한 아바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다. 
주인공 강형수는 서울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며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 정진호 역시 서울공대 재료공학과 출신이며 MIT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자전적 구도소설이라 밝혔지만 어디까지가 실화요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 최문선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이 소설에선 다만 첫 번 결혼한 아내 민희와 아들 윤석이 이야기가 극적인 효과를 내며 펼쳐지고 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아내와의 이별이 강형수로 하여금 영적인 wake up call에 결정적인 역활을 해주고 있다.
주인공을 의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설정은 처음부터 없는 듯 싶었다. 아니 고백적인 이야기가 철저하게 진솔하다. 강형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예수쟁이’에 대한 거부감이 내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다는 자각에 나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위선과 교만이 묘하게 크리스천이란 명패로 포장되었다는 자신을 보며 아연해지는 것이다. 믿음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요 떠드는 것이 아니라는 이 간단한 이치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서울 대학교 입학식 날 만났던 이 구절이 강형수를 황홀하게 해주었지만 그 참 뜻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가 완전히 부서지고 난 다음이었다.

친구 박병훈의 입을 빌어 고백하고 있는 저자의 말에 눈이 고정되었다. 
“세상은 수많은 지혜서와 철학서와 종교의 경전들이 있어 왔지만 ,성경은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지혜서들이 모두 한결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서만 열려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닫혀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절대 무능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그 놀라운 신비의 문을 조금씩 열어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2권 236쪽)
강형수씨가 만난 예수라는 그 생명의 강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가 비록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참 진리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신비가 이 책 속에 있다는 거다.   저자 정진호와 나는 20년 차이다. 38년생인 나와 58년생인 그와 이 소설 속에서 만남이 신기로울 만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다. 
평양과기대가 도마 위에 올라와 있다. 철저하게 북한의 정치꾼의 이용물로 전락되었다는 위기에 달하고 있다했다. 잘나가는 공학도가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그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이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이 소설은 간접적으로 저자를 대변해 주고 있다.
(필자 주: 아바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며 이 작품에서는 ‘아빠’로의 의미도 있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별 개정 교육과정 각론을 제시했다. 2009년의 총론에 따라 교과서별 개편 지침을 내놓은 것이다. 
각론 개발이 지난 3월부터였으니 불과 4개월 만이다. 출판사에는 내년 3월까지 교과서를 만들라고 하니 새 교과서는 1년 만에 만들어진다. 이건 과욕도 오만도 아니다.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직전 교육과정 개정은 2007년 이뤄졌다. 그에 따라 각론이 제시되고, 교과서 제작이 이뤄져 이제야 일선 학교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정권은 임기 안에 이명박표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애꿎게도 출판사들은 2007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교과서를 제작하자마자 폐기하게 됐으니, 참으로 나쁜 정권이다. 
교과서 개정은 5년 단위로 이루어진다. 교과서는 지식 전달과 함께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평가하는 틀을 제시한다. 따라서 오로지 사실만을,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치우침이 없이 전달해야 한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총론 마련에 1년, 총론에 따른 각론(교과목별 개편 지침) 개발에 2년, 그리고 출판사들의 교과서 제작에 2년 등 5년의 기간을 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런 최소한의 준칙마저 짓밟는 이유는 정치적 고려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 정권과 정권을 떠받치는 족벌언론, 재벌, 기득권 세력 등은 집권하자마자 친일·냉전·신자유주의 시각에 따른 교과서 개편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들의 의도는 이미 제시된 사회과정 개편 시안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 지배와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간을 상품화하고, 국가를 시장에 예속시키는 등 자신의 치부는 합리화하고, 권력과 부의 유지·확대를 제도화하는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도덕 교과서 지침은 충효와 복종을 강조하던 유신 시절로 돌아갔다. 학생을 정권 이념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