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발언 없고 기자질문도 안 받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수습대책 논의

우원식 국회의장(오른쪽)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오전 국회를 방문해 우원식 국회의장과 면담하고 정국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한 다음날인 이날 최 대행과 우 의장은 모두 왼쪽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만남을 가졌다.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과 쌍특검(내란특검, 김건희특검) 등 탄핵 정국 관련 현안과 관련한 논의 내용에 초미의 관심이 집중됐으나, 통상적인 공개 모두발언 없이 곧바로 비공개 면담으로 들어간 데다가 만남 후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태서 국회의장 공보수석은 만남 후 기자들에게 "최 대행과 우 의장이 제주항공 참사에 대해서 사고 수습과 유가족 지원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면서도 "궁금해하는 정국 현안에 대해선 확인해 드릴 게 없다"고 말했다.

이날 면담에 정부 측에서는 방기선 국무조정실장, 김진명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장, 강영규 기재부 대변인이, 국회 측에서는 조오섭 의장비서실장, 곽현 정무수석, 박태서 공보수석이 배석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오른쪽)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최 권한대행 "사고 조사과정 투명하게 공개하겠다"

한편 최상목 대행은 이날 오전 8시부터 정부서울청에서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4차 회의에서 "정부는 유가족과 부상자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여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사고수습을 지원하는 중"이라며 "관계기관 협력을 통해 유가족 지원, 부상자 치료 등에 대해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국토부 중심으로 통합지원센터 운영해 유가족이 궁금하거나 답답해하는 일을 조기에 설명드리고 해결하겠다"며 "사고 수습 절차와 과정에 대해서도 유가족분들께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특히 "어제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된 만큼 필요한 지원이 적기에 집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 대행은 "국토부와 경찰청에는 엄정한 사고원인 조사를 진행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며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사고조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유가족에게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항공기 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국토부는 항공기 운영체계와 관련해 안전점검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최 대행은 "항공안전체계를 전반적으로 혁신함으로써 더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번 조치의 본질"이라며 "제주항공 측에서도 유가족과 부상자들께 적극 협조해 엄정한 사고 원인분석 이뤄질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최 대행은 마지막으로 "최근 민생의 어려움 속에서 불의의 사고까지 발생해 권한대행으로서 마음이 아프다"며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국민 일상을 지키기 위해 국정을 차질없이 관리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오마이 김경년 기자 >

"합법적 탄핵 비판, 내란죄 우두머리 탄핵 반대 주장으로 12·3 내란을 지지·선전"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30일 오전 울산경찰청에 홍유준 울산시의원을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고발했다. 주성미 기자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한다는 펼침막을 도심 곳곳에 내건 울산시의원이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경찰에 고발됐다.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30일 오전 국민의힘 소속 홍유준 울산시의원을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수사해달라는 고발장을 울산경찰청에 접수했다.

앞서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홍 시의원은 비상계엄을 통해 헌정질서를 유린한 윤석열에 대한 합법적인 탄핵을 비난하고 내란죄 우두머리의 탄핵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12·3 내란을 지지·선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 시의원은 지난 25일 오후 자신의 지역구인 울산 동구 일산동과 전하동 일대 10곳에 ‘대통령 탄핵 절대 반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라고 쓴 펼침막을 걸었다.

홍유준 울산시의원이 지난 25일 오후 울산 동구지역에 내건 펼침막.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 제공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내란죄 우두머리를 지켜내자는 것은 이미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실행행위로 나아간 12·3 내란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내란죄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국민의힘 당원이나 지지자 등을 대상으로 이러한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내란 선전·선동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홍유준 시의원은 한겨레에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옹호할 의도는 없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통치행위고 대통령 고유권한으로 볼 수도 있는 만큼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수막을 건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줄탄핵하며 국정을 마비시키려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경고의 의미”라고 답했다.    < 주성미 기자 >

촛불행동, 국민의힘 국회의원 55명 ‘내란 공범’ 고발

계엄해제 불참, 탄핵안 반대 일관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앞에서 촛불행동 관계자 등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국민의힘 내란공범 국민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표결에 불참하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반대표를 던진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55명이 ‘내란죄 공범’으로 경찰에 고발됐다.

촛불행동은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의 직무가 정지됐지만 내란 수괴를 비호하는 공범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차고앉아 활개를 치고 있다”며 “내란 공범들로 인해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금까지도 사실상 법률상 내란이 지속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소속 의원 55명을 내란실행 방조, 직무유기 혐의로 국수본에 고발했다. 이들 국민의힘 의원 55명은 지난 4일 국회의 비상계엄해제 요구안 표결에 불참했고, 이후 내란 상설특검법, 윤 대통령 등 신속체포동의안, 내란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 표결에서 일관되게 반대표를 던진 이들이다. 촛불행동은 고발장에서 “권성동 등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은 윤석열 등의 ‘내란죄 성립’을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도록 해 탄핵 절차를 무기한 지연시키려는 꼼수를 쓰고 있다”며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촛불행동은 한 대행 역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는 직무유기 혐의로, 양곡관리법 등 6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한 대행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재의요구권은 행사하면서 국회 몫 헌법재판관 임명은 ‘여야 합의 때까지’ 보류하겠다고 밝혀 비판을 사고 있다.

피고발인에는 국민의힘 의원 55명과 한 대행 외에도 △비상계엄 당일 사전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9명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심우정 검찰총장 △박세현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장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행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고발인은 권오혁 촛불행동 공동대표를 포함한 시민 764명이다.    < 한겨레 이지혜 기자 >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
 퇴임 이후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벨평화상 상패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10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는 2023년 2월 이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온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고 그의 가족이 밝혔다.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 인권, 사심 없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4년 단임(1977~1981년)에 그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나온 이후 중동과 한반도 등의 평화 문제에 적극 나섰다.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퇴임 이후가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는 1924년 조지아주의 시골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뒤 당시 개발이 본격화된 핵잠수함 분야에 배치돼 촉망 받는 장교였다. 그러나 1953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군복을 벗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카터는 1960년대에 들어 조지아주 등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한 민권운동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흑백 통합을 주장하며 1962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어 전국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해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선거 상대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것도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닉슨이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는데, 이후 닉슨을 사면해준 게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카터는 재임기에 높은 물가와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등의 탓에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인 1980년에 발생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 사건이 결정적으로 재선 행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란 학생들은 1979년 11월에 미국대사관에서 직원들과 그 가족 등 90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1980년 4월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독수리 발톱 작전’ 과정에서 헬리콥터와 수송기가 충돌해 미군 특공대원 8명이 숨졌다.

카터는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외교에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카터는 재임 때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는 등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다.
 

카터는 퇴임 뒤 아내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봉사와 평화 정착 활동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와 김 주석은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했고,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이던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 이는 그해 10월 북·미가 제네바합의에 이르는 데도 기여했다. 또 카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2개 국가 해법’ 실현을 위해 나서는 등 중동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카터는 재임 때인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중재하고 퇴임 뒤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카터는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10월1일에 만 100살이 된 그는 8월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손자를 통해 밝혔다. 그는 생일 직후 사전투표를 했지만 해리스는 낙선했다.

카터의 동향인으로 그와 7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냉전 승리와 미국 혁신 기반 만들어

퇴임 뒤 빛을 발한 전직 대통령 롤 모델
‘유약해 보였으나 가장 강한 대통령’
진보적 가치와 독실한 기독교 신념이 대중에 호소
퇴임 뒤에는 평화봉사로 존경받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7월10일 결혼 75돌 축하연에서 아내 로잘린의 발언을 듣고 있다. AP 연합
 

‘재임 때보다는 퇴임 뒤에 빛을 발한 대통령’

29일 100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흔히 퇴임 대통령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가 퇴임 뒤 펼친 분쟁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 및 지역 봉사 때문만은 아니다. 혹평을 받았던 재임 시절의 정책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카터의 재임 동안 경제불황, 석유 위기,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등으로 미국의 위상과 지위는 바닥을 쳤다. 이런 ‘미국의 위기’시기에 카터는 인권 외교와 도덕 정치만을 앞세운 ‘유약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책과 대응은 미국을 혁신하고, 소련 붕괴의 씨를 뿌려 냉전에서 미국을 승자로 만든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뒤늦게 받고 있다. 이는 퇴임 뒤 그가 펼친 헌신적인 평화 및 봉사 활동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지아 플레인즈의 땅콩 농장 집안에서 1924년에 태어난 카터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복음교단인 남침례교의 독실한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부친이 숨지자 퇴역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빚과 형제 사이의 재산분할로 카터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지만 땅콩 농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고향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부에는 민권운동이 몰아쳤다. 보수적인 고향 분위기에도 그의 양심적인 기독교 신앙은 흑백분리 반대와 민권운동 찬성으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정계로 나가는 동기가 됐다.

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맺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 평화조약 체결식 때 미국 백악관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당시 대통령(왼쪽부터)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카터 센터
 

그는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70년에는 주지사로도 선출됐다. 카터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소수인종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배려 정책)에 기반한 흑백분리 반대를 내걸고, 현직 주지사를 물리쳤다. 그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전반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절정에 오를 때였다.

무명의 시골 주지사였던 카터는 1975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며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그는 참신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고 그가 내세운 ‘인권과 도덕’은 좌우를 넘어 호소력을 발휘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해군 장교, 땅콩 농장 경영주, 민권운동 정치인이란 경력을 가진 카터는 도덕성이 실추한 기존 정치권을 질타하는 ‘도덕과 인권’ 가치를 내세워,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카터는 기독교 우파 세력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카터는 닉슨 사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1976년 당선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애틀랜타주 조지아에 있는 카터센터에서 자신의 암 투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카터 센터
 

취임 뒤 그는 대외정책에서 인권 외교 및 분쟁 해소를 내세웠다. 친미 동맹국들의 인권탄압에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압력을 가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 공약까지 내걸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 군부 내의 강경한 반대로 백지화됐으나, 카터의 압박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동에서 최대 친미 동맹국이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체제에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 세력이 활성화됐다. 이는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과격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로 이어져 카터의 재선을 무산시킨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1994년 6월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일성(오른쪽) 북한 주석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임 시절 카터는 대외정책에서 굴직한 치적들을 남겼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인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인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2)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에 이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다가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1979년 이란이슬람혁명으로 2차 오일쇼크가 엄습했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 겹치며 지지율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와 구출작전의 실패는 재선을 앞둔 카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강한 미국을 주장한 공화당의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해,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차로 참패했다. 공화당과 보수파들은 인권과 도덕이라는 이상주의만 내세운 카터가 소련 등 경쟁국에 무른 대응을 해서 미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공격했고, 이런 평가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국내외 정책은 미국을 혁신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게 한 원동력으로 재평가받는다.

우선, 그는 소련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반체제 세력을 후원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여 1980년대 후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고, 소련을 아프간 수렁에 빠뜨린 무자헤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보수파 및 군비확산론자들이 반대하던 전략무기제한협상2를 타결해, 방만한 미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군비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소련을 압도하는 군사력 우위를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196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며 중앙정보국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한 공화당 계열의 로버트 게이츠는 가장 유약하다고 평가받은 카터가 사실은 소련 붕괴의 씨앗을 뿌린 가장 강경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터 행정부의 선전과 비밀공작이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를 가져온 체제 균열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게이츠는 카터 시절에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국방 현대화와 전략무기 세대교체가 본격적 결실을 맺었다고 강조했다.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연비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도 카터 때 시작됐다. 이 모든 정책은 소련을 압도하는 미국의 경쟁력으로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례없는 참패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대중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력적인 사회활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카터센터를 세워 인권 신장에 나섰고, 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협상, 선거감시, 질병퇴치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현재 활발한 국제적인 선거감시 활동도 그에 힘입었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폭격을 을러대던 1차 한반도 북핵위기 때 대담하게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북-미 협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한 것도 퇴임 뒤 그의 대표적인 평화협상 행보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파기를 일관되게 비난해, 미국 보수파들의 공적이 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숙인들과 무주택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은 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80살이 넘은 그가 망치를 잡고 집을 짓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그는 집짓기 노동으로 몇번이나 낙상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 한겨레 정의길 기자 >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 착륙 여객기 랜딩기어 이상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멈춰 선 캐나다 PAL항공 여객기 [핼리팩스 AP=연합]
 

캐나다에서도 랜딩기어 이상으로 여객기가 착륙 도중 위험한 상황을 맞았으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AP통신과 CNN 방송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캐나다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에서 7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한 PAL 항공 AC2259편 여객기가 전날 밤 9시30분께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랜딩기어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체 결함으로 기체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을 맞았다.

사고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멈춰 섰으며 73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곧바로 버스를 이용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 사고로 인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PAL 항공 제휴사인 에어 캐나다는 사고 기종이 쌍발기인 드 해빌랜드 DHC-8-402(봉바르디에 Q400)이며 착륙 도중 랜딩기어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스탠필드 국제공항은 사고 직후 일시적으로 항공기 이착륙을 중단시켰으나 90여분 만에 1개 활주로의 운영을 재개했다.

캐나다 교통안전위원회(TSB)는 이번 사건을 조사할 예정이다.

사고기 승객인 니키 발렌타인은 착륙 도중 비행기가 상당히 흔들렸다면서 기체 왼쪽에서 불이 났으며 창문으로 연기가 들어왔다고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연합 김계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