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잘 믿는 목사를 보내주세요.”


한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라고 한다.
총회 임원회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나올 지경까지 왔나 싶다.
기술 좋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말은 전혀 거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기술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앞으로 배우면 된다. 그런데, 목사가 예수를 잘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예수를 잘 믿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목회를 할까? 자기의 힘이나 경험을 믿든지, 아니면 교회 안에 힘 있는 사람을 믿든지, 여하튼 무엇인가는 믿어야 목회를 할 것이다.
처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갈 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믿음이 아닌 세상 생각에 빠지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은 항상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사도바울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주의 종을 보면 정말 부럽다.

목회자만 변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를 섬겼던 성도가 지금은 뒷짐을 지고 있다. ‘교회의 궂은 일은 내가 한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봉사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관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가 그렇게 되었다면, 정신을 차리고 어디에서부터 나의 믿음이 변질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나의 순수함과 열정이 사라진 구체적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시험이, 어떤 유혹이 나를 무너뜨렸는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한다.

정상적인 주님의 제자라면 험한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어야 한다.
반대로, 쉽고 편한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자꾸 든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첫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다.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 잘 믿는 목사를 찾는다는 표현이 매우 불편하게 들렸지만, 생각해보니 크게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펑펑 울며 크게 회개했다. 그래도 회개한 베드로가 멋있는 사람이다.
회개하자. 다시금 복음 앞으로 나오고, 주님 만난 그때로 다시 돌아가자.

<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저 땅에 평화를

● 칼럼 2018. 5. 8. 19:30 Posted by SisaHan

4.27 판문점 선언에 부쳐

처음 이곳에 이민 와서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에 한국전쟁을 “Forgotten War”라고 말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한국전쟁이 싸운 명분이 없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어 잊혀진 전쟁인지, 아직도 전쟁상태인데 그걸 잊고 있어 그런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 포성이 멈춘 지 오래 돼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여기 학자들의 눈에는 실질적으로 아직도 전쟁 상태이고 지금은 휴전 중이었다. 언제 또 다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꼭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물었다. 그리고 “아직도 전쟁 중”이거나 “언제 다시 전쟁을” 하는 투로 물었다. 한국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이다. 게다가 비교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어 세계 평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세계 4대강국(미.중.러.일)의 이익이 맞물려 있어 한국의 평화는 세계평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통일을 원하느냐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주변 강국의 이익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느냐는 사실도 중요하다.

동족상잔의 전쟁 때문이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생각도 듣다. 4대 강국의 축의 하나인 구 소련이 붕괴되고 또 다른 축의 하나인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일본과도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도 북한과는 조금도 관계를 개선치 못했다. 우리가 서로 전쟁 중인 나라로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계가 개선되는가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의 보수정권이 지속되면서 북한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우리의 최대의 적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반드시 와야 한다고 믿는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생각한다. 돌연 개성공단의 문을 닫게 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랬다. 실제가 아님이 누차 강조됐으나, 개성공단을 통해 번 돈으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했다는 것이 보수측의 주장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남한이 도움을 주려 하는 경우에 반대측이 늘 내놓은 주장이다. 굶주린 백성들 먹여 살리라고 보낸 돈을 핵무기 개발에 쓴다는….

이번 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돋보인 이유가 우리가 그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전 보수정권에서 그를 너무 부정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어린 철부지 독재자, 친인척 마저 잔인하게 처형하고. 핵무기를 개발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광…그런 것들이 우리가 대강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모습을 보니 너무 달랐다. 그도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도자였다. 남북의 두 지도자들이 판문점 회담 끝에 내놓은 선언문이 한국의 내일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회담 장면만을 보도 한 것이 아니라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온 국민에게, 나아가 전세계에 보여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하루 만에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감동을 주고 기쁘게 했다.

물론 그들이 만나 대화를 하고 선언문을 하나 발표했다고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장 평화가 오고 통일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 정확한 현실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방향을 제시했다. 전쟁보다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이번 선언문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많은 동영상과 사진, 말들 중에 처음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넘고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고 그리고 둘이서 손잡고 넘은, 우리의 가슴에도 그어져 있었을 그 선… 누가 그 선을 그었는가? 그 선이 과연 넘어서는 안될, 넘지 못할 선이었던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지도자를 잘 만나면

● 칼럼 2018. 5. 8. 19:27 Posted by SisaHan

공자는 “한 지도자의 생사가 국가의 흥망에 직결된다”고 했고, 순자는 “군주가 재능이 없으면 국가가 문란해진다.”고 설파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지도자 한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도 전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을 전쟁의 불길로 끌고 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참화로 내몰았다. 그는 유대인 학살로 세계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악명의 독재자로 남았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라는 괴물같은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죄로 전쟁의 고통을 겪다가 나라가 분해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고대 로마가 다섯 현군(賢君)으로 인해 찬란한 제국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 세계사에서 영특한 지도자로 인해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는가 하면, 어리석고 무모한 혼군(昏君)이나 폭군(暴君) 또는 암군(暗君)으로 인해 나라가 기울고 망하여 백성이 험난한 고통을 겪은 사례는 부지기수요, 어쩌면 인류사 그 자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의 역사라고 다르지 않다. 고려 태조 왕건은 어질고 총명한 군주의 성정이 소문나 백제와 신라를 평정하고 통일 왕국을 이뤘다. 반면에 신라의 유약한 경순왕은 1천년 역사의 영화를 재건하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는 왕건의 신하가 되는 굴욕을 자초했다. 인자와 덕망을 겸비한 어진 임금 세종시대에 나라가 흥성하고 문화가 발전한 것과 달리, 유약하고 우매한 군주들이 나라가 기우는 것도 모른 채 당쟁과 주색에 한눈을 팔았던 조선말기는 어떤가. 잠시 반짝했던 영조와 정조 이후 헌종과 철종, 그리고 고종 등으로 이어지는 쇠락기 자도자들은 열강의 패권주의가 기세를 올리던 나라 밖 조류에는 무관심하고 무력해 거센 외세의 도전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로 최근에도 우리는 경험했다. 이명박-박근혜의 장사치 기질과 혼군적 리더쉽은 “나라를 망쳤다”는 혹평까지 나올 정도다. 두 사람은 국민을 편가르기 하여 생각이 다른 쪽을 적으로 여기고 배제하며 핍박을 일삼는 국정을 고집했다. 나라는 멍이 들고 민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남북간에는 단절의 골이 넓고 깊게 패였다. 결국 한 사람은 탄핵으로 끌려 내려오고, 또 한 사람은 비리와 국민을 속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둘 다 철창에 갇히는 신세로까지 전락했다. 그들의 자업자득 허욕과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국민들의 착시에도 원인이 있었다. 역시 지도자를 잘못 뽑은 탓을 자책해야 했다.
이어 등장한 문재인은 한국인들에게 “역시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는 정말 평범한 상식을 중요한 화두로 새삼 상기시켜 준다. 근래 요즘처럼 나라에 활력이 넘치는 때가 있었던가 싶다고들 한다.


한국인의 90% 안팎이 환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KBS, MBC)와 전세계적으로 대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4.27 남북정상회담 결과도, 어떻게 보면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겸손하고 진실된 캐릭터에 힘입은 바 크다는 생각이 든다. 회담성공을 축하하며 “노벨상을 타라”고 덕담을 건넨데 대해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타시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니, ‘다시 보기 힘들 착한 정치인’이라는 그의 그런 성품이 상대방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것은 틀림없다. 아마 북한 사람들도 문재인이 취임한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의 그가 걸어온 삶에 대한 정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터여서 “저 사람이 하는 일은 진실되고 믿을 만해” 라는 믿음과 끌림이 있지 않았을지 추론해 본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맹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고 군주의 자질을 들었는데, 순하고 용해 보이는 그가 앞으로도 잘 헤쳐 나갈지 궁금해진다.
김정은은 이번에 폭군으로 여겨지던 독재자의 반열에서 일거에 젊고 담대한 친근형 지도자로 등장해 한반도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그는 앞으로 과연 민족사에 유의미하게 기록될 인물이 될까. 북녘의 동포들에게는 절망을 벗어날 희망을 안겨주게 될까. 마키아벨리는 “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는 국가는 명이 짧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그 사람이 없어지면 모든 게 끝장나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독재국 통치자의 역량과 성향은 더 더욱 나라와 국민의 안위에 직결된다. 이제 그와 또 다른 비슷한 특성의 지도자 트럼프와의 담판이 초미의 관심사다.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와 동북아, 전 지구적인 여파를 불러올 그들 만남의 호쾌한 결말을 기대해 본다.
율곡 이이는 “군주의 뜻이 국가의 치란(治亂)과 직결되므로 군주가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중재자요 ‘운전자’격인 문재인과 김정은과 트럼프, 현대판 군주들인 세 주인공의 지혜와 ‘바른 뜻’을 위해 기도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