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갑질과 섬김의 철학

● 칼럼 2017. 8. 16. 14:06 Posted by SisaHan

흔히 착각하며 습성처럼 되어 버린 게 높은 자리에 앉으면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권한이 주어지고, 일을 지휘하다 보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아랫 것들로 보여서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들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정말 빠져들기 쉬운 어리석은 함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나 총리는 국민의 위임을 받아서 받들고 섬기라는 자리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의 크기 만큼이나 더 많이 더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국민이 뽑아준 직책이고, 총리는 또 그 자리에 걸맞게 국민을 위해 헌신하라는 자리이지 국민위에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라고 씌워 준 감투가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든 총리든 장관이든 공직자들을 모두 국민의 공복(公僕), 즉 공공사회의 심부름꾼이라고 일컫는다.


그렇게 공복인 사람들이 그 본분을 잊으면 문제가 생긴다. 탄핵 당한 대통령은 그 좋은 사례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세상이 다 제 것인 듯 하고 사람들도 모두 부하나 종들로 보이는 착각에 빠져 전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전사에게 욕설과 막말을 한 회사대표 등 고위직들이 잇달아 여론과 사법에 고발당하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착각의 댓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회사의 사장은 직원들을 뒷바라지 하여 함께 고객을 섬기라는 자리이지 직원들의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인 부리듯이 갑질을 하다보니 망신을 당하고 회사가 타격을 입는 것이다. 가맹점주들로 인해 회사가 흥성할 터인데, 그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도 부족할 판에 ‘착취’를 일삼은 프랜차이저들도 착각의 중증환자들이다.
해외에서 국민를 섬기라는 특별한 사명을 걸머진 공무원들이 외교관이다. 그런데 이민 땅에서 기댈 곳 없는 재외국민들에게 국가예산으로 재정적 도움을 주고 모국 관련 단체의 위원으로 위촉한다거나 때로는 훈포장을 추천하는 등의 쥐꼬리 권한을 행사한다고 해서 임지의 동포들 머리 위에 앉아있듯 상전노릇을 하려다 보니 말썽이 생기고 국격이 추락한다. 공관장이 마치 ‘점령군 사령관 같다’는 둥, ‘총독’ 이라는 비아냥으로 신뢰를 잃어가는 것도 그런 연유다. 그런 착각 속에 거드름을 피우면서 관저행사에 부하직원들을 종업원처럼 동원해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민세금을 축내고,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망신살도 뻗치는 것이다.


육군대장 부부가 공관에서 거드는 장병들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갑질을 해오다가 폭로당해 치도곤을 당하고 있다. 그 장병들은 국토방위를 위해 부모와 고향의 안락한 품을 벗어나 잠시 나라에 차출당한 귀한 아들들이다. 그들이 복무 중 한때 공관병으로 배정되었을 뿐인데도 마치 자기들의 노비인 양 착각한 어리석음이 결국 화를 부른 셈이다. 그런데 장병들은 마구 부려먹어도 되는 머슴이 아닌 귀한 자제들이고 나라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하는 장군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공관병 뿐이 아니다. 전투는 없고 평범한 일상에 관료적인 업무만 반복되다보니, 지휘관들은 부하 사병들을 온갖 잡일에 동원하고 그들을 상대로 한 무수한 가학적 갑질로 계급 우위를 즐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군 기강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탈영하거나 목숨을 끊는 장병들이 속출하는 것이고, 국방은 부실해져 가는 것이다.
군대에서 치열한 승진경쟁을 뚫고 장군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무수한 선배들의 전철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선배들도 그랬으니 손쉽게 따라 하는 것일 게다. 안타까운 일이다. 공자와 증자의 가르침을 담은 중국의 고전 대학(大學)에는 ‘소악어상, 무이사하(所惡於上, 毋以使下)’라는 구절이 나온다. 윗사람의 나쁜 점을 봤으면 자신의 아랫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그에 합당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그리고 그 성구의 바로 앞 두 절에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라고 했다.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갑과 을의 철학에 대한 명쾌하고도 심오한 훈계가 아닐 수 없다.
갑과 을 간의 차별이나 박해가 아니라, 갑과 을이 평등한 세상, 모두가 갑처럼 서로 섬길 때가 바로 태평성대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일 터이지만, 그건 한낱 이상향일 뿐일까. 현실은 어떤가. 그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들 마저도 마치 성도들 위에 올라앉은 듯 주인노릇, 혹은 군왕의식을 발휘하며 어리석은 행실에 젖어있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인간의 한계요 불쌍한 우리네 존재들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원자력은 ‘파멸’의 에너지

● 칼럼 2017. 8. 16. 14:04 Posted by SisaHan

2015년 12월21일 일본 후쿠시마현 후타바마치 지방정부는 상가 진입로를 가로질러 세운 간판 하나를 철거했다. 간판엔 ‘원자력은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고 쓰여 있었다. 이 표어를 쓴 사람은 올해 마흔두 살인 오누마 유지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 7, 8호기 증설이 결정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숙제로 이 표어를 제출해 상을 받았다. 표어가 쓰인 간판은 그의 자랑거리였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다. 한때 도시로 나갔다가 29살 때 인구 7천명의 자그마한 이 소도시로 돌아와 있던 그도 출산을 앞둔 아내를 데리고 집을 등져야 했다. 마을은 방사능으로 짙게 오염됐다. 간혹 방호복을 입고 방문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사람이 머물러 살기는 어렵다.


오누마는 자신이 그런 표어를 만들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잘못은 스스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옛집에 들를 때마다 손팻말을 이용해 간판의 표어 내용을 고쳐보았다. 방사선 방호복을 입고, 간판 앞쪽에 서서 ‘밝은 미래’라는 글자를 ‘파멸’이라 쓴 손팻말로 가렸다. 그런 모습으로 아내가 찍어준 사진을 블로그를 통해 세상에 내보냈다. 이 일로 간판이 유명해지자, 지방정부는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간 나오토 전 총리를 비롯해 6천여명이 철거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철거는 강행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기자는 도쿄에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피난 보내고 홀로 남아,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던 그때를 다시 생각한다. 사고를 수습하지 못하면 도쿄도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될 상황이었다. 핵발전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도 오누마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인공 핵분열은 인류가 에너지원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만들어놓고 보니 악마의 선물로 드러난, 무시무시한 핵무기 기술이었다. ‘평화적 이용’이란 명목으로 ‘발전소’에 그 기술을 응용해 쓴 것은 전 세계에 감시·통제망을 만들어 핵무기 확산을 막자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핵발전이 시작된 지 불과 50여년 만에 인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두 곳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대재앙을 맞았다. 핵발전의 부산물인 사용후핵연료 등 핵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방사성 물질이 자연상태에서 핵붕괴를 할 때 나온다. 핵붕괴를 거듭하면서 방사성 물질은 줄어든다. 반감기(핵붕괴를 거듭해 절반으로 줄어드는 기간)가 17억년 정도인 우라늄235의 경우 지구 생성 초기에 견주면 지금은 100분의 1로 줄어 있다. 지금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은 우라늄을 비롯한 방사성 물질들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라늄 235를 농축해 인공 핵분열을 조성하면, 우라늄은 방사선을 대량으로 내뿜는 수많은 핵분열 생성물질로 쪼개진다. 괴물의 잠을 깨우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핵발전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 괴물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오누마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2011년 3월, 원전 사고로 인해 후타바마치에서 사는 ‘밝은 미래’를 나는 빼앗겼다.” 그는 2014년부터 피난지인 도치기현에서 태양광 발전 사업을 시작했다. 거기에서 밝은 미래를 찾고자 하나, 시련의 연속이라고 한다. 지난 4일 오누마가 옛집에 들른 김에 찍은 사진을 보니, 지방정부가 철거한 그 간판은 비닐에 대충 싸여 지붕도 없는 빈터에 버려진 듯 놓여 있다. 결국 폐기하려는 것일 게다. 왜? 부끄러우니까!

< 정남구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백범이 독립운동가 묘역 조성 뒤 자신도 묻힌 곳
역대 대통령 중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광복절 참배
이승만은 축구장 건립, 박정희는 골프장 건립하려 해
노무현, 효창독립공원 만들려다 축구계 반대로 무산
임시정부와 촛불 계승한 이번 정부에서 어떤 변화 맞을까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으로 가기 전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부터 들렀다. 문 대통령은 백범 김구 선생 묘역에 이어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의 묘가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을 차례대로 참배했다. 문 대통령이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통령이 광복절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을 찾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보인다. 청와대~효창공원~세종문화회관의 동선이 복잡하다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유일하다. 문 대통령의 발길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잦았다. 지난 3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 2012년 10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확정, 2015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출 직후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이곳을 찾았다. 이전 대통령 11명은 저마다 속내나 사정이 달랐겠지만, 그들 마음의 내비게이션은 예외없이 청와대에서 곧바로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도록 안내했다. 재임 중 이곳에 참배한 이는 김대중 대통령뿐인데, 광복절이 아닌 백범 49주기 기일(1998년 6월26일)이었다.

효창공원에 대한 역대 대통령들의 태도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한 이곳의 상징적 위상이 이상하리만치 낮은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산책하기 좋은 고요한 숲길이다. 1980년대까지는 효창운동장이 훨씬 유명해서, 효창공원은 운동장의 부속시설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땐 음주가무와 고성방가도 흔한 풍경이었다. 닭과 달걀의 관계는 명확하다. 일부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을 넘어 적극적인 상징 지우기에 나섰고, 결과는 얼마간 성공적이었다.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묘소 앞에서 비를 맞으며 참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959년 6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한국이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하자 효창공원에 축구장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백범 묘소를 이장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서울에 축구장 지을 자리는 널려 있었다.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백범 묘소 바로 앞에 운동장을 짓게 했다. 15만 그루의 나무를 베고 연못을 메워 1960년 개장한 효창운동장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효창공원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1968년 애국지사 묘소들을 경기 고양 서오릉으로 옮기고 이곳에 골프장을 지으려다가 유족 등의 강한 반대로 뜻을 접었다. 그 뒤 박 대통령은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등 독립운동가 묘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념물들을 잇달아 세웠다. 1972년엔 대한노인회 건물을 지어줬고, 대한노인회는 그 보답으로 육영수 여사 경로 송덕비를 세웠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효창공원을 대했던 태도는 백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친일파를 대거 권력의 자리에 불러들였던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 백범을 경계하고 질시했다. 이승만 정권은 백범 묘소를 참배하려는 시민들뿐 아니라 백범 유족들까지도 공원 입구에서 검문했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항일의 상징을 한사코 지우려고 했다.

백범은 1945년 환국한 뒤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조성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쓴 이도 백범이었다. 그리고 1949년 암살된 뒤 백범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효창공원의 옛 이름은 효창원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어린 나이에 사별한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 의빈 성씨 등을 이곳에 묻었다. 일제는 조선 왕가의 묘역인 이곳을 1924년 공원으로 만들고, 왕실의 무덤도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겼다. 근처에는 유곽도 만들어졌다. 백범이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효창공원을 주목한 건 이런 역사적 맥락과 닿아 있었다.

효창공원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뒤인 1989년, 효창공원은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 1990년엔 이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7위를 안치한 의열사와 공원 정문인 창렬문이 건립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10월엔 백범김구기념관이 준공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엔 효창운동장을 용산 미군기지 터로 옮기고 공원과 합친 17만여㎡을 2008년까지 ‘효창독립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축구계의 반대에 부닥쳐 표류하다가 결국 좌초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부 차원의 이렇다 할 사업이 없었다. 멀게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부터 가깝게는 촛불 정신까지의 계승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 들어 효창공원은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안영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