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예상대로 맥빠진 공방만이 오간 부실 청문회였다. 검증에 필요한 자료가 대부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황 후보자의 답변에만 기댄 답답하기 짝이 없는 청문회였다. 황 후보자가 교묘한 발언으로 의혹을 피해 가도, 불성실한 답변으로 진실을 은폐해도 추궁할 자료가 없으니 검증 작업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병역 기피 의혹 문제는 대표적이다. 황 후보자는 “신검을 받을 때 저희가 어려운 집안이고 배경 없는 집안이라 특혜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병을 입증할 ‘자료’인데도 황 후보자는 어떤 근거 자료도 내놓지 못했다. 황 후보자는 신체검사 당시 군의관들이 자신의 두드러기 상태를 보고 “군에 가서 긁히면 집중할 수 없다. 결국 전투수행에 문제가 생긴다”며 면제 판정을 내렸다고 말했으나, 이 역시 상식과는 어긋난다. 두드러기로 고생하는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전투수행 문제’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두드러기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사람이 불과 네 명이라는 사실 자체가 황 후보자의 병역 면제가 얼마나 이례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라면 황 후보자 스스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해 의혹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마땅한데도 그는 오히려 ‘실력이 있으면 내 병역 비리 의혹을 한번 밝혀보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병역 기피 의혹 자체도 문제지만 이런 교만한 자세도 국민의 눈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변호사 시절의 전관예우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가 변호사 시절 수임한 19건에 대해서는 법조윤리위원회가 수임 내역을 삭제한 상태에서 보냈다. 황 후보자는 야당이 청문회 보이콧까지 거론하며 압박하자 뒤늦게 “공개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으나, 인사청문 위원들이 이 사안을 깊숙이 들여다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밖에 증여세 탈루 의혹 등을 밝힐 가족 간 금융거래 기록도 제출하지 않는 등 곳곳에서 자료 공백 상태가 빚어지고 있다.

황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지루한 말씨름만 계속하다 흐지부지 끝나고 말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메르스 사태로 청문회 자체가 국민의 관심사 밖으로 벗어난 것을 기회 삼아 여당은 어물쩍 인준 절차를 마무리지으려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얼렁뚱땅 청문회로 내각의 최고책임자를 인준하는 게 옳은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점입가경이다. 메르스 공포에 국민은 공황 상태인데 청와대는 쓸데없는 싸움만 걸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여당과 대립하더니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판했다.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가 한몸이 되어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대립과 갈등을 보는 국민은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다. 박 시장 회견을 비판하기 전에 정상적인 정부라면 서울의 대형병원 의사가 메르스 증상이 의심되는데도 1500여명이 모인 재건축조합 총회에 참석한 사실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대처했어야 마땅했다. 그 장소에 모인 사람에게 정확한 상황을 알려서 추가 감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옳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조합원 명단도 입수하지 못해 쩔쩔맸다. 이 의사에게 메르스를 옮긴 환자가 시외버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동 경로와 버스에 함께 탔던 승객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전염병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속·철저하게 대응하는 게 생명인데, 정부 대응은 메르스 바이러스보다 몇 배나 굼뜨고 비체계적이다.
왜 그런가. 지금 정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메르스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탑이 없다는 점이다. 메르스와 싸우는 최일선의 책임자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그러나 그는 잇단 판단 잘못과 능력 부족으로 전선에 여러 차례 구멍을 냈고, 국민과 의료계의 신뢰를 잃었다. 국무총리는 공석이다. 부총리라도 중심이 되어 모든 부처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궁극적으로 메르스와 같은 국가재난 수준의 전염병 대처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중심에 서서 지휘하는 게 맞다. 그래야 국민이 안심하고 정부·민간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 국회의 법적·제도적 지원을 신속하게 받고,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하게 공조하며 지역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청와대는 뒷짐만 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비치는 게 현실이다. 한 예로,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5일 박 시장을 비판하면서 “서울시와 복지부가 서로 긴밀하게 협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게 할 주체가 다름 아닌 청와대와 대통령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마치 제3자처럼 말하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이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부처간 협조가 발 빠르게 진행될 리가 없고, 대응도 체계적일 리 없다. 골든타임에 보건복지부가 환자의 동선과 접촉자 파악에만 며칠을 허비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대통령이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 필요하면 중앙대책본부에서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현장을 찾아가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믿음을 잃은 장관 뒤에서 보고만 받고 있어서는 메르스와의 전쟁에 이길 수 없다.



[칼럼] ‘각자 도생’

● 칼럼 2015. 6. 12. 16:33 Posted by SisaHan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큰소리치던 이승만의 심복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6·25 북한군의 기습을 맞아 총 한번 대포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내빼다가, 결국 모든 군인은 “각기 양식대로 행동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 나라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전쟁 중 ‘각자도생’의 지시를 내린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인민군의 기습으로 정작 본인은 이미 대전으로 내려가 놓고 국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하라고 거짓 방송을 내보낸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은행 창고에 은행권을 그대로 두고 내려갔다. 국회 부의장 조봉암이 도망간 ‘대한민국’의 뒷수습을 하고서 서울을 떴지만 시민들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그 혼돈의 피난 상황에서도 전국의 특무대 요원과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여 위협세력이라고 간주했던 보도연맹원 수십만명을 구금, 학살하는 일만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수행했다. 국가 경제, 국민 안전과 생명은 나 몰라라 했지만, 권력 안보에는 그렇게 철저했던 정권이었다.

메르스 첫 환자가 확인된 지 14일이 지나서야 첫 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는 등 허둥대기만 한 박근혜 정권과 종편은 온 국민이 공포감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던 이 위급한 상황에도 박원순 시장 공격하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4일 밤 청와대는 국회법 통과를 두고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발언을 반박하는 내용의 전화를 기자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전염병 확산 막는 것보다 도전 세력 견제하는 일이 더 다급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정권이 어디에 최대의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가 드러난 장면이었다. 연출한 사진을 언론에 보내거나, 국민을 위한다는 담화로 한두번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지만, 그런 제스처가 계속 먹힐 수는 없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고, 입만 열면 태극기 게양을 강조한다고 해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북 세력 제거한다면서 촛불시위 단순 가담 대학생들까지 치밀한 사진 채증을 거쳐 찾아내어 300만원이라는 거액의 벌금을 때리는 이 공권력이 왜 메르스 방역에는 이렇게 우왕좌왕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무능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강한 관심과 완전한 무관심이 공존한다.

우선 장관인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 분야의 전문가, 공직자로서 도덕성을 갖춘 자를 찾아내서 각료로 임명하지 않고, 공인으로서는 너무나 많은 흠을 갖고 있지만 충성심만은 확실한 사람들을 고르는 것을 여러 번 보고 나서 우리는 다 알았다.
6·25 당시 그렇게 도망갔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뒷수습을 했던 조봉암을 결국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형했다. 조봉암은 사형 직전 “이승만은 소수 잘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했고, 나는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정치를 하려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조봉암이 사형당하는 것을 본 모든 국민들은 “이 나라에서 사회와 약자를 위하는 것은 ‘빨갱이’ 것이며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더 나은 삶 지수’ 조사에 의하면 “정작 어려울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한국 사람의 비율이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고 한다. 위급할 때 달려와 보살펴주는 정치가나 관리가 없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이웃 사람들을 찾기 힘든 세상의 스산한 풍경이다. 그래서 과거 전쟁 중에 ‘각자도생’해야 했던 국민들은 전염병이 창궐한 오늘 ‘자가격리’ 할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의 세상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적 지옥’이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 고도위험사회에서 전염병, 탄저균, 방사능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와 정치를 완전히 개조해서 모두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권한만 쥐고서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권력을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