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김훈의 봄나물

● 칼럼 2014. 4. 15. 20:41 Posted by SisaHan
내가 가장 먼저 봄을 느끼는 곳은 옷가게나 패션 잡지의 화려해진 표지에서가 아니다. 목젖을 타고 내려간 독주가 저 깊은 곳에서 따뜻한 열을 전해주듯이, 에이는 듯한 바람의 한기 속에 뭔지 모를 은근한 설레임이 느껴질 때, 그 때 내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촉이 봄을 감지한다. 완연해지지 않은 봄기운이 몸의 구석구석을 나른하게 할 때, 식품점 한켠에 나타난 작고 푸른 것들의 완강함이 나를 들뜨게 한다. 시골 장터의 큰 그릇이 아닌 식품점의 선반에 놓여있다는 것이 안쓰럽지만 덕분에 이 먼 곳까지 내 땅의 봄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니 이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금은 개별 포장해서 팔고 있지만 얼마전까진 원하는 만큼 구매할 수 있도록 큰 봉투에 담겨져 있었다. 나는 한참씩 식품점의 선반앞에 서서 한 움큼씩 봄을 집었다 놓으며 찬 기운안에 느껴지는 거칠고 쓴 겨울의 시간들로 내 봄바람을 달래곤 했다. 뿌리와 줄기와 잎마다 흙의 기운과 색을 단단히 장착한 이 진한 것들은 낮고 작고 억센 줄기와 향으로 우리를 당황케 한다. 미나리 ,달래, 냉이, 쑥, 봄동, 돌나물, 두릅 등.. 이름은 작고 봄바람처럼 귓가에서 살랑거리지만 척박과 혹독함을 생존 방식으로 택한 이 거칠고 검푸른 것들의 단호함은 식탁에서 우리의 여리 여리한 입맛과 생각을 기분좋게 두들겨준다.
 
봄나물과 함께 봄이면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김훈은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오십가까이 되어서 수필과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다. 그가 신문기자 생활을 하던 시간은 한국 정치사의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역동의 시간이었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그가 목격하고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이 녹아 우리는 지금 봄나물처럼 싸한 그의 문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의 글들, 특히 수필을 읽을 때, 인위를 벗어난 원초, 원형의 모습은 감동이 아니라 입가에 잠깐 앉았다 가는 동감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었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수필집에 남긴 봄나물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며 봄을 느껴보자.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끝을 만들어낸다. 달래는 기름진 땅에서는 살지 않는다. 달래의 구근은 커질 수가 없다.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달래는 인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 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이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 쪽으로 끌려간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쑥 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미나리는 출신지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가 묻어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봄이 멀지 않았다. 오늘은 냉이밥에 달래장을 넣어 쓱쓱 비벼먹는 저녁을 준비해야 겠다. 

< 김유경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간첩 혐의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탈북자가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가 유출돼 보도되는 바람에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연락이 끊어졌다’며 이를 유출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을 7일 검찰에 냈다. 이 탈북자는 국가정보원이 탄원서를 특정 신문사에 제공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증거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탈북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 된다.
 
이 탈북자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는 지난해 12월6일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씨 사건 비공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1월6일, 그는 북한에 있는 딸로부터 “아빠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거짓말로 겨우 수습하고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1월14일 이런 사실과 함께 “유출자를 찾고 싶지만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못 한다. 이런 일 다시 없게 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다. 그때까지는 증인 출석 사실 정도만 유출된 것 같았는데, 4월1일 탄원서 내용이 사진과 함께 <문화일보>에 보도된 뒤에는 가족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한다. 비공개 재판 내용이 북한에 넘어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재판부에 낸 탄원서가 통째로 유출된 경위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 탈북자는 유출 경위에 대해 “심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탄원서를 낸 뒤인 2월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탄원서 내용대로 <동아일보> 등과 인터뷰를 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인터뷰를 요청한 시점은 국정원이 유씨의 재판에서 낸 증거서류가 위조된 것이라는 중국 정부의 회신으로 증거조작 논란이 불붙은 때다. 국정원이 곤경에 처하자 유씨에 대한 의혹을 부풀려 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언론 인터뷰를 주선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탄원서 내용이 보도된 4월1일도 증거조작의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국정원 ‘윗선’에 대한 수사 요구가 거세던 즈음이다. 이 탈북자는 당시 자신이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승인했다고 알려준 사람이 있다는 <문화일보> 담당 간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의심대로 국정원이 그런 말을 한 유출 당사자라면, 우리 정부가 세심하게 보호해온 중요 정보원을 당장 이해에 필요하다고 국정원 스스로 내친 셈이 된다. 그 경위와 책임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
몇몇 신문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자의 증언대로라면 이들 신문은 국정원의 주선과 정보 제공에 기대, 국정원 주문에 맞춰 기사를 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당원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해 기초선거 무공천 철회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결과를 확실히 점치기는 어렵지만 당원들 사이의 압도적인 무공천 철회 여론을 고려하면 결국 공천을 하는 쪽으로 최종결론이 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그동안의 무공천 강행 소신을 꺾고 출구전략을 마련한 셈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회군’은 어느 면에서는 늦은 감이 있다. 한 선거에서 어느 당은 공천을 하고 어떤 당은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은 정당 간의 유불리를 떠나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 정치권 한쪽이 선거 규칙 개정을 완강히 반대할 경우 현행 방식대로 가는 게 당연한 상식이기도 하다. 어느 면에서 이 사안은 굳이 여론조사 방식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번 결정으로 새정치 의지가 훼손됐다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애초부터 기초선거 정당공천 배제는 새정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기초선거 공천·무공천은 각기 장단점이 있을 뿐 ‘선과 악’이나 ‘새정치-헌정치’ 따위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게다가 ‘한 선거 두 규칙’으로 정치가 난장판이 되는 상황에서 새정치 타령이나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안철수 대표로서는 ‘약속 파기’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킬 수도 없고 지키는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닌 약속에 매달리는 것이 꼭 ‘신뢰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안 대표는 야당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다. 당이 처한 극심한 혼란과 불협화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약속 준수만을 외치는 것은 정당 지도자의 자격이 의심스러운 치명적인 직무유기다.
 
새누리당은 새정치민주연합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전혀 없다. 자신들은 약속 파기로 이득을 보면서 상대편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치는 뻔뻔한 모습을 더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동안 기초선거 무공천 문제를 놓고 너무나 오랫동안 소모적 논쟁을 벌여 왔다. 하루빨리 이런 혼란상에 마침표를 찍고 각 정당이 정책과 인물로 정정당당히 유권자 심판을 받기 위해 진력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