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Thank You and Sorry

● 칼럼 2015. 5. 15. 18:52 Posted by SisaHan

처음 이민 왔을 때, 신기한 일 중의 하나는 여기 애들이 말을 할 때, ‘Thank You’ 와 ‘Sorry’를 너무 자주 그리고 쉽게 쓰는 일이었다. 정말 입만 벙긋하면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시의 내 입에서는 정말로 감사하고 싶은 경우에도 쉽게 튀어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그 것이 우리 문화이기도 했다. 동시에 감사나 사과의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은 그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가벼워 보이게도 했다. 그에 반해 내쉬는 숨소리처럼 해대는 이 곳 사람들을 볼 때 처음에는 참 예절이 바르고 매너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아가서는 그 것이 가진 자의 여유이며 풍요로운 서양문화의 특징일 거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

지금이야 그 단어들이 그냥 습관적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지, 진심이 담겨 있을까 의심해야 하는, 적지 않은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상생활을 하며 어느 단어보다 자주 써야하는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루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자주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학교 교실이나 직장에서 사소한 다툼이 있을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한 쪽에서 ‘Sorry.’라고 하면 문제가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같은 경우는 분명히 내가 잘못한 일도 상대방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문제만은 아니고 그 간단한 말이 자주 하던 말이 아니어서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밀며 미안하다 했을 때, 마지못해 손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유교 문화의 전통 때문이었을까? 나는 군자 내지는 선비의 후손? 왠지 먼저 사과를 하면 상대방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과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감사의 말, 고맙다는 말도 그때는 이상하게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일이 있다. 그 때 혼자 한국식당에 간 적이 있는데, 늦은 오후여서 손님도 별로 많지 않을 때였다. 마침 내 옆에 내 또래의 백인 녀석이 앉았다. 지금 같으면야 한국식당에 백인이 앉아있는 것이 흔한 일이었지만 그 때는 흔치 않을 때였다. 근데 이 녀석이 연신 ‘Thank you.’ 그러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시작하여, 물컵을 받으면서, 메뉴판을 받아 들면서, 반찬, 음식, 계산서, 거스름돈…기타 등등, 처음에는 무심히 들어서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10번은 넘게 말했던 것 같다. 나야 다 먹고 나오며 감사합니다 딱 한 번 했지만….., 나오면서 그는 도대체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온 것인지 감사하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인지 의문이 갔다.


가끔 지하철에서 보는 풍경이다. 특히 센트 조오지역에서 출입문이 바뀌는 것을 모르고 문을 가로 막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전 역인 스파다이나에서는 바깥 쪽 문이 열리지만, 안 쪽 문이 열린다. 그 사실을 모르고 친구와 이야기하며 서있는 경우가 있다.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뒤늦게 알았으면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비켜서면 되는 것이다. 그냥 머뭇거리면 상대방은 인상을 쓰며 욕을 하고 나갔다. 지하철 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그렇다. 오른 쪽으로 붙어 서있는 것이 예의다. 친구와 이야기 하느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실례다. 물론 두 경우 그 분들은 옷차림이나 한국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실정에 밝지않은 분들 같았다. 그 상황에서 판단을 하여 ‘Sorry.’라고 한마디 했다면 욕을 먹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본인도 기분 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몰랐기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지만, 사과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 애들 같으면 Sorry라는 말이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나도 이제 오랜 이민생활 끝에 ‘Thank and Sorry’ 를 입에 달고 다닌다. 입만 열면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다. 가끔 나는 살면서 만나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 진심으로 하고 있는지 물어 보지만…., 아무튼 빈말을 하기 싫다해도,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Thank you, Sorry는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 것 같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남북이 철저히 단절된 근래, 그나마 북한 지원의 명백을 잇고있는 것은 해외동포들 특히 한인 기독교계다. 그런데 북한은 돌연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를 억류했다. 그리고 3개월이 넘도록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않아 답답하게 속을 태우고 있다. 북한선교의 대부격인 임 목사를 구금한다는 것은 북 정권의 악수임에 틀림없다. 그의 억류는 북한 돕기에 찬물을 끼엊는 사건이 됐다. “그런다면 누가 어떻게 북 지원에 나서겠느냐”는 선교단체들의 비판과 활동중단이 뒤따른 것이다.
이렇게 냉각된 와중에, “그래도 중단해선 안된다, 그럴수록 속히 더 나서야 한다”는 교계움직임이 일고있어 주목된다.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처럼 크리스천들의 믿음과 선교열망은 ‘통일 준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선교단체 ‘모퉁이돌 선교회’가 지하교회 실상을 전하며 토론토에서 선교훈련을 가진데 이어 토론토 영락교회는 서울 영락교회 등과 공동으로 통일준비 사역훈련인 ‘So One(소원) 통일 선교세미나’를 5월15~17일 개최한다. 뒤이어 ‘기드온 동족선교회’가 북한의 동족구원과 지하교회 지원 등에 캐나다 동포들이 동참해 줄 것을 적극 호소하고 나섰다.
기드온선교회는 북한정권 간부가 16년이나 고통을 견디며 지하교회 확장에 노력하다 순교한 간증일기를 발굴해 책으로 펴내 큰 반향을 불렀다. 북의 혹독한 동토에 번진 지하교회는 영적해빙을 통한 북의 군열과 통일의 소망이라고 진단한다.
얼어붙은 북한 땅을 녹이고 동포들에게 자유를 안길 일이라면 무슨 수든 써야한다. 그래야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민족이 하나가 되어 열방을 호령할 때가 오지 않겠는가.


올해로 분단 67년이다. 남과 북이 갈려 총부리를 겨누고 이념과 언어와 문화와 생활이 단절된 이래 갈수록 괴리의 골은 깊어만 간다. 그 사이 수많은 대화와 협상이 있었고, 한 때는 통일의 기대가 부푼 때도 없지 않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최근에는 아예 그마저 끊기고 북이 핵개발에 틈만 나면 미사일을 쏘아대니 긴장파고가 오히려 높아만 간다. 젊은 층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응답 통계수치가 늘어가는 현실은 정말 가슴 아프다. 남과 북의 분단상황을 교묘히 활용하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외교적·군사적 손실과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를 분별한다면, 한민족 어느 누구도 통일을 간절히 원할지언정, 반대할 이유란 전혀 없을 터임에도, 그저 지금 안락하다는 이유로 현상에 안주하려는 속물적 단견에는 참 안타깝고 속이 쓰릴 뿐이다.
요즘 미-일의 밀착과 한국경시, 중-러의 연대와 미-중 대결 첨예화 와중에 한국 입지는 더욱 쪼그라들고 방향을 잃은 듯하다. 거기에 제어조차 못하는 북한의 잇단 돌출망동이 겹치니, 나라와 민족의 장래가 어찌될지, 마치 조선말의 위기를 보고있는 것 같은 걱정도 커진다.


어찌보면 진통제로 통증을 덮은 암환자에 비유될까. 세계적 경제강국을 자부한다고 위세를 부리지만, 속으론 모래 위에 궁성을 지은 것처럼 취약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 불안한 평화는 항상 주변 4강의 꽃놀이패에 그칠 뿐이며, 남북 균형이 깨져 단 한방이면 경제도 나라도 뒤뚱거린다. 그러니 통일 때까지 분단고통은 민족 최악의 아킬레스건이요 발전 저해요소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만일 통일이 이뤄진다면, 외교·군사부문 뿐만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 이르기까지 국력의 확장을 가져 올 시너지 효과는 헤아릴 수가 없다. 굳이 독일의 사례를 들지 않아도, 비용이 얼마에 이르건 어서 속히 통일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팔을 걷어 부쳐야하는 이유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보면, 그래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던 시기에 통일의 기대가 높아졌다. ‘퍼주기’ 운운 억지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이 본격화 됐을 때 화해와 해빙의 기운이 번졌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든 북과 대화하고 소통의 문은 닫지 말았어야 한다. 설령 일부가 고대하고 장담하듯 북한 정권이 일거에 무너진다 쳐도, 소통과 협력의 통로가 뚫려있는 쪽이 훨씬 충격파와 후유증 수습에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북을 궁지로 몰아 ‘발악’을 유도하는 데만 몰두하고, 북녘동포를 도우려는 혹은 소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친북이니 종북으로 몰아 남한 내에서도 갈등과 적대의 벽을 쌓는 것은 지극히 멍청한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민족통일의 열망과 실행의 열정을 가진 많은 동포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이젠 멈출 때가 되었다.


< 김종천 편집인 >



북한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의 파장이 길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12일 외교안보장관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점검했다. 최윤희 합참의장도 커티스 스캐퍼로티 한미연합사령관과 회동했으며,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다음주 서울 방문 때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북한의 동향을 엄중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점검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북한의 행동을 과대해석하는 일부의 움직임은 우려스럽다. 북한 군사동향의 실체와 의도를 냉정하게 읽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확 쏠려가는 것은 안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군당국에 따르면 북한의 시험발사는 실제 미사일이 아니라 모의탄을 물 위로 150미터쯤 솟구치도록 한 사출시험 수준이라고 한다. 실제 전력화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시간도 꽤 필요하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미국의 여러 군사전문가도 모의탄 1발 쏜 것을 두고 실전 배치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견해다.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가 한계에 부닥쳤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성급하다. 상황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일각에선 북한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시험했으니 우리도 잠수함 전력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대잠수함 헬기를 대거 확충하자거나, 심지어 우리도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맞서자고 한다. 북한이 위협을 늘린다면 우리도 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이 특정한 무기체계를 갖고 시위를 벌인다고 그때마다 북한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춤을 추어선 안 된다. 안보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고 막대한 군사비만 낭비할 따름이다. 어느 나라든 미사일 같은 군사자원 개발은 숨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북한은 설익은 기술 수준에서 시험발사 장면을 공개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아마도 무력 과시를 통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거나 북한 주민들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등의 대내외적 선전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단절된 지난 몇년 새 북한이 이런 식으로 도발적 행동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번 사출시험을 두고 갑자기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면 북한 강경세력의 무력시위 의도에 말려드는 효과만 가져올 수도 있다. 최고의 안보전략은 역시 강력한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되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와 한반도 현안들이 풀려나간다면 북한도 군사적 위협 필요성을 덜 느낄 것이다. 6.15 공동행사를 비롯해 남북 사이에 약간의 사회문화 교류가 움트려는 참이다. 나아가 경제협력과 정치·군사적 주제로까지 남과 북이 대화 범위를 넓히는 게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