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일본모델 엄습의 불안

● 칼럼 2016. 4. 8. 19:53 Posted by SisaHan

우리 한국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그래서 심정적으로 극히 싫어하는 일본의 그림자가 불행하게도 한국 땅에 엄습해오는 것 같다. 이번 20대 총선의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서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야당의 분열로 ‘1여 다야’ 구도가 된 선거판세는, 야당 후보단일화가 거의 물 건너 간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아무리 야당들이 발버둥 친다 해도 거대여당의 출현은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빙 승부가 많은 서울·경기지역이 전체 의석의 절반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여당의 어부지리 당선이 늘어나면, 야권은 참패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비관적으로 보는 선거분석가들의 예측 그대로 여당이 200석 안팎까지 석권할지도 모른다.
집권여당이 가령 200석 내외를 차지했다고 치자. 이른바 ‘선진화법’을 고쳐 국회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국정을 입맛대로 운영하게 됨은 물론이요, 야권에서 걱정하는 개헌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일본식 모델, 즉 보수여당의 장기집권 체제구축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상당히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전승국 미국의 점령과 간섭으로 새 정부가 출범했고, 과거사는 깔아뭉갠 채 미국식 스타일의 민주주의가 구현됐다. 한국은 이후 6,25 동란으로 폐허가 된 뒤 독재와 군부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비틀어졌다. 한일 간 국교수립과 베트남전쟁으로 발전의 터를 다지며 경제가 일어섰고, 폭발적인 민주화 운동의 기세로 민주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과거 친일세력과 군부 독재세력이 혼합된 지배계층은 보수정권을 다지며 여전히 권력의 중심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번 총선이 그들에게 압승을 안겨준다면, 장기집권의 열쇠를 쥐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일제 군국주의 관료들이 재등장한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부흥의 기틀을 다졌다. 평화헌법으로 전쟁없는 나라, 국방비를 거의 쓰지않는 나라가 된 일본국민은 평화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천황제와 일본제국 시대의 보수정객들이 이끄는 정치체제에 미국식 민주주의가 접목된 내각제하에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한 때의 학생·노동운동과 적군파 등의 준동마저 사그러들자 정치는 자민당 일당체제로 아예 굳어졌다.


자민당의 ‘일당독재’가 잠시 무너지던 90년대 중반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당시의 정치격동을 지켜본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만년여당 자민당의 거물들이 정경유착으로 줄줄이 뇌물수뢰와 부패 비리로 쇠고랑을 차고 정계를 떠나면서 일본국민은 야당에 눈을 돌렸다. 그래도 한 당으로는 정권을 잡지 못해 일곱 야당이 합세한 연립정권을 이뤄 ‘호소카와·무라야마’ 정권이 잇달아 들어섰다. 하지만 자민당의 오랜 악령은 연립 정권을 오래 두지 않았고, 결국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짧은 비 자민당 시절, 단적인 예로 한국과의 과거사문제가 큰 진전을 이뤘다. 무라야마 정권 시절 이른바 ‘고노담화’로 군위안부 문제 사죄와 반성, 피해보상 시도 등은 잘 알려진 그대로다. 그리고 다시 자민당이 집권하고, 일제 전범의 손자 아베 총리가 들어서면서 과거사를 되돌리고, 교과서와 독도문제 등으로 한국과 갈등을 키운 것은 익히 보아 온 그대로다. 최근에는 안보법제를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고, 공영 NHK를 비롯한 언론도 장악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머잖아 평화헌법도 뜯어 고칠 기세다.


한국의 최근 두 정권이 걸어오고 걸어가는 길을 보면, 경제대국이면서 극히 후진적인 일본의 모델이 자꾸만 오버랩 된다. 민주정치를 퇴색시키고, 시민의 행동을 제약하며, ‘고등계형사’들 같은 정탐과 강압, 재벌위주 정책에 언론장악 등 보수우익의 나쁜 습성이 날로 심화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국회도 장악하여 장기집권을 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맹점이 권력을 방호해 주는 격 이랄까. 민주적 방식으로 포장된 권력독점인 소위 ‘민주독재’를 연명시키게 되는 것이다. 단 한가지, 과거사 문제 대처만 보아도 일본모델 정권으로는 전혀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난 ‘12.28 위안부 문제 합의’로 드러난 바 있다. 지금 추세라면 가속적으로 일본편에 더 다가가지 않겠는가.
대국 미국을 보아도, 캐나다를 보아도, 정권은 여야 교체되는 것이 나라 발전과 국민 삶에 절대 중요하다. 장기집권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음을 역사가 말해준다. 문제는 국민 개개인이 깨어나는 것이다. 국민이 깨어 잘못된 권력은 단호하게 심판하는 나라야 말로 선진 대국이 될 수 있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희망도 슬프다

● 칼럼 2016. 4. 8. 19:50 Posted by SisaHan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꽃은 이렇게 지랄스럽게 피어나지” 하면서 울먹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위로할 길이 없어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살 거라고, 몇 번이나 봄을 더 맞을 거라고, 그냥 오늘을 즐기라고, 나에게인지 친구에게인지 모를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만물이 새롭게 피어나는 봄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봄에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뒤 맞는 봄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끔찍하다. 생의 환희에 들떠 있었을 어린 생명을 잃은 사람에겐 봄은 더 잔인하다. 대학에 막 입학한 해 봄 캠퍼스는 눈 돌릴 곳도 없이 온갖 꽃을 그야말로 지랄스럽게 피워댔다. 꽃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 봄 내가 사랑한 사람 하나가 저세상으로 갔다. 새파란 청춘이었다. 사고였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봤다.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관을 확립하는 데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는 대통령의 극찬 이후 공영방송이 자사 드라마를 기다렸다는 듯 홍보하고 있다. 잘생긴 육군 대위가 청와대와 연결된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국가, 뭐 아무렇게 대하면 어때. 이렇게 내뱉고는 납치된 애인을 혼자서 구하러 간다. 며칠 전 읽은 세월호의 기록이 오버랩되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은 방대한 재판 기록과 증언 등 모든 사실을 토대로 시간대별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세 장에서 반복되는 결론이었다. 모든 상황이 구할 수 있었던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런 염병 해경이 뭔 소용이여. 눈앞에 사람이 가라앉는디. 일단 막 갖다대서 살리고 보는 게 이상적이제. 지시 들었다가는 다 죽이는디.” 세월호에 이물을 무조건 들이대고 승객들을 잡아 내려 20여명을 구한 어선의 선장이 내뱉은 말이다.


육군 대위의 말과 선장의 말은 동의어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3월21일이었고, 나는 그 뒤에 보았다. 애국심 고취와 국가관에 나쁜 영향을 주는 드라마라고 했어야 마땅했다. 의사와 군인을 극한상황에 놓고, 작가 말대로 판타지 러브스토리를 펼치고 있는데, 애국심과 연결시킨 것은 모든 사안을 애국심으로 연결시키고 싶은 대통령의 애국심 판타지의 발로이다.
남산예술센터에서 본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박근형 작·연출)도 국가란 무엇인가, 군인의 의무와 국민의 의무는 무엇인가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2015년의 대한민국 탈영병, 1945년의 일본 오키나와에서 가미카제를 지원한 조선인, 2004년 이라크에서 미군에 식품을 납품하던 업체의 한국 직원, 2010년 백령도 인근의 초계함 선원들…. 시공간은 다르지만 죽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국가를 믿고 따르는 모든 국민의 전쟁터와 같은 삶으로 이입된다. 군인이 아니라 ‘모든 국민은 불쌍하다’고 말한다.


이 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활약한 화가 변월룡의 전시회를 보면서도 디아스포라의 74년 생애와 작품에 마음이 저렸다. 원정출산으로 태어나 어떤 때는 미국인으로 어떤 때는 한국인으로 행세하지 않는 이상,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듯 국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국민은 국가를 버리지 않았는데 국가가 국민을 버린다면… 국민은 디아스포라, 난민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태양의 후예>가 판타지 러브스토리여서 그렇지 현실이라면 애인을 구하러 간 대위는 실패하고, 용케 살아남는다 해도 국가가 명령불복종으로 당연히 버릴 것이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손에 죽는 무기상인의 운명과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김정헌 선생의 전시회에서 본 작품의 제목이 마음에 남는다. <희망도 슬프다>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 아래 시커먼 바다와 거기에 떠 있는 노란색 창문 하나…. 희망이 있는 듯 있는 듯 실은 없는데 그것에 기대는 것이 슬프다.
희망도 슬프지만 망각이 슬프다. 잊으라 잊으라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슬픔들을 간직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봄날을 보낸다.
< 김선주 - 언론인 >



제재 이후 한 달, 효과 예측은 엇갈린다. 분명 북한의 대외무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운 물류는 위축되고, 금융거래도 어려워졌다. 북한으로 들어가는 국제무역의 그물망이 촘촘해졌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북한과 무역이 없는 한·미·일 3국의 제재는 빈총이다. 거래가 없으면 제재할 일도 없다. 입으로 빵 빵 빵 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
역대 최강의 결의안이 과연 역대 최강의 효과를 거둘까? 답은 중국에 달려 있다. 중국은 유엔 결의안의 이행 의지를 밝혔다.
다만 중국이 강조하는 ‘완전하고 충실한 이행’은 박근혜 정부의 해석과 많이 다르다. 박근혜 정부는 단둥에서 신의주로 넘어가는 화물이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고, 과연 중국이 결의안을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 묻는다. 박근혜 정부는 결의안을 잘못 읽었다. 결의안은 민생 목적의 거래를 허용했다. 모든 무역을 중지하라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은 군수품이나 전략물자에 대한 통관절차를 강화했다. 국경의 밀무역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다. 북한 입장에서 분명 아프다. 그러니 불만의 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과 다르다. 정상적인 무역을 막지 않고, 자기 나라 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고, 국가이익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또한 동북 3성의 지방정부는 대북 제재에 소극적이다. 동북3성은 2000년대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고속성장을 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정부 주도의 성장 전략은 한계에 직면했다. 성장률이 하락했고, 인구가 빠져나갔으며, 임금이 상승했다.
단둥, 훈춘, 허룽 시가 북한과 ‘변경 경제 합작구’를 추진하는 이유가 있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북한의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방정부는 접경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광산업의 활성화도 추진한다.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신압록강대교는 공사가 끝났고, 10월에는 훈춘과 나진을 잇는 신두만강대교도 완공될 예정이다.


제재의 정치학은 북한을 포함한 ‘분업의 경제학’을 보지 못한다. 북한은 동북아시아에서 노동집약산업의 생산 공장이다. 북한이 일부 공정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은 ‘중국산’이라는 원산지 증명을 달고 세상으로 나간다. 화려한 옷에 새겨진 자수로, 전자제품의 일부 부품으로, 혹은 소프트웨어의 밑그림으로 북한산이 중국산에 숨어 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중국산에 포함되어 있는 ‘불온한 일부’를 제재할 수 있을까? 일부 공정만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잘못하면 한-중 무역 마찰을 각오해야 한다. 수요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공급이 따른다. 경제논리로 형성된 분업의 경제학을 그렇게 쉽게 소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제재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고, 해당 국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취약계층의 피해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실패 확률이 높은 정책수단이다. 물론 성공한 사례도 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제재처럼 목적이 분명하고 거의 모든 국가가 제재에 참여했을 경우다. 대북제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어떻게 해야 중국의 협력을 얻을 수 있을까? 제재의 목적을 중국과 공유해야 한다. 유엔 결의안 50항은 분명히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의 지지’를 명시했다.
제재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제재로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생각은 국제사회의 합의와 거리가 멀다. ‘한반도 평화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49항의 정신과도 충돌한다. 중국과 목적이 다르면 협력을 얻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는 너무 빨리 모든 수단을 탕진했다. 손에 쥔 패가 없으니, 남은 것은 구경뿐이다. 목적을 잊은 제재만 길을 잃었다.
< 김연철 -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