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봄은 오는가?

● 칼럼 2014. 3. 10. 17:13 Posted by SisaHan
진짜 금년의 겨울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얼음 폭풍(Ice Storm)이 몰아쳐서 토론토를 암흑 천지로 만들더니 날씨는 어느 때보다 추웠다. 거의 영하에서만 왔다갔다 하고 어떤 때는 영하 20도로 내려가기도 하고 뉴스에서는 한국은 영상 15, 6 도라고 하는데 여긴 아직 영하 10도에서 헤맨다. 지난 주간에는 장례식까지 있어 하관예배를 드릴 때는 모두 코가 빨개질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내가 이민을 온 게 75년도였는데 그 때도 정말 추웠고 늘 눈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온난화란 말이 나오면서 눈도 드물어졌고 날씨도 그렇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또 온난화설에 양극의 빙산이 녹는다 하여 어떤 면에서는 추위는 그대로 있어 빙산이 녹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추위와 눈바람에 슬슬 넌더리가 나고 있다.
몇 년 동안 캐나다의 겨울 같지 않은 눈이 없는 포근한 날씨에 아내가 예전의 캐나다의 설경이 그립다고 노래를 했는데 그 그립다는 눈이 폭설로 바뀌고 쉼 없이 쏟아지는 눈에 질리기도 했다. 집 앞의 눈을 치우기도 힘이 들자 아내가 회개(?)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내가 공연히 옛날의 겨울 어쩌고 하며 떠들었구나 하고.
 
그런데 아직도 춥다. 어느 날 함께 동역하는 정목사님이 내게 “봄은 언제 옵니까?”하고 물었다. 나 또한 글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 겨울 두 계절 밖에 없었던 캐나다. 언제부터인가 사계절이 있었는데 올 겨울은 옛날 캐나다의 날씨 같아 봄을 기대하기는 아직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봄은 오는가? 물론이다. 조금만 있으면 한 두 달만 있으면 계절의 움직임은 틀림없이 봄을 오게 하고야 만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옛사람에게도 동일하여 대춘부를 쓰기도 했다.
어느 분의 글에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하고 썼다. 봄은 이처럼 누구나 기다린다. 그것도 겨울이 추울수록 더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추운 겨울 봄 타령을 하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회가 너무나 혹독한 추위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TV에서 오르내리는 목사와 교회들의 이야기를 읽고 들을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다. 교회의 잘못된 관행이나 태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교회는 과거 어느 때 겪지 못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책임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에게 있다.
 
목회자의 눈으로 볼 때 이 겨울은 너무 춥고 또 앞으로 얼마나 길게 주어질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의 봄은 달력과 계절의 바뀜과 함께 틀림없이 돌아오지만 교회가 기다리는 봄은 달력과는 상관없다. 그러나 봄은 온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바람이 불 때 나타나는 역사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얼음짱 같은 우리의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할 것이며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뉘우치는 통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성령의 뜨거운 바람이 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대춘부가 교계에 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추운 겨울을 탓하지만 말고 하나님의 마음이 교회를 향해 훈풍을 주시면 얼마나 감사하랴.
진정 봄을 기다린다. 계절의 봄이 아닌 기독교의 부흥을.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칼럼] “광화문에 3.1혁명 기념탑을”

● 칼럼 2014. 3. 10. 17:11 Posted by SisaHan
기미 3.1혁명 95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3.1운동이라 표기하고 3.1절을 국경일로 기념해왔다.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다른 국경일은 그 의미가 명칭에서 충분히 드러나는데 유독 ‘3.1절’은 가치중립적인 숫자로 불러왔다. 정부가 1949년 10월1일 법률 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때부터 ‘3.1절’ 호칭은 논란이 많았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3.1혁명일(절)’로 고쳐야 한다.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사상은 나라의 근본에 속한다.
기미년 3~4월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추구하는 가치와 저항, 참여 민중, 세계 피압박 해방운동에 끼친 영향, 한민족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못지않았다. 세계혁명사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우리는 스스로 ‘운동’이라 비하해왔다. 어떤 외국인이 ‘스리 콤마 원 스포츠’라고 불렀다는 것을 우스개로 탓할 수만은 없다.
 
3.1혁명은 사망 7500명, 부상 1만6000명, 피검 4600명을 낸 장엄한 피의 혁명이었다. 당시 2000만 국민 중 210만명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자진해서 항일시위에 참가했다. 이념·성별·지역‥신분에 상관없이 범국민적인 항쟁이었다. 국민의 10분의 1 이상이 항쟁에 나선 것은 세계 식민지 역사상 초유의 현상이다.
3.1혁명이 추구한 가치는 고종의 기일을 기해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코 복벽주의가 아닌 민주공화주의였다. 이후 상하이를 비롯해 몇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되면서 내세운 것이 하나같이 민주공화제의 정체로 나타났다. 이것은 4.19혁명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되고 있다.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은 개국 이래 최초로 근대적인 시민혁명을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봉건적 신민(臣民)의식에서 근대적 신민(新民)의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3.1혁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산하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현행 헌법은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명시한 것이다.
 
5년 뒤면 3.1혁명과 임정 수립 100주년이다. 하여 제안한다. 광화문광장에 3.1혁명 기념탑과 근처에 임시정부기념관을 짓자. 친일파들을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회·상·기념관은 넘치는데 임정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얼빠진’ 모습이다. 헌법정신의 위배이기도 하다. 지금 광화문에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두 분 다 우리 민족 구원의 지도자다. 그런데 두 분은 조선왕조 시대의 인물이다. 민국을 세우고도 100년을 앞둔 나라에서 수도 심장부에 민국의 상징이 없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1혁명기념탑(물)은 1919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었으면 좋겠다. 박근혜 정부 성향으로 보아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국민 성금으로라도 세웠으면 한다. 다행히 2019년은 새 정부가 들어선다. 지금부터라도 3.1정신을 잇고자 하는 국민·단체들이 뜻을 모으고 아울러 선포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도록 준비했으면 한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침략주의 언설이 끊이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 파동이 말해주듯이 일제식민지배를 동경하는 세력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광화문 3.1혁명기념탑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근원, 민족 정체성의 정립, 국민통합,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발, 자주독립정신, 남북통일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1혁명 당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광화문으로 진출하여 일경과 맞섰다. 광화문은 3.1혁명의 성지였다. 3.1혁명 100주년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을 수 없다.
<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


‘탈북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된 국가정보원의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사실상 확인됐는데도 국정원과 검찰 쪽은 이치에 닿지 않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검찰 진상조사팀이 국정원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통해 빨리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특검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3건의 문서가 모두 위조된 것이라는 확인 공문을 2월 중순 우리 정부에 보내온 바 있다. 피고인 유우성씨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됐다는 시기에 중국에서 북한으로 갔다는 내용의 ‘출입경기록’, 중국 화룡시 공안국이 이를 발급해준 사실이 있다는 ‘사실조회서’, 유씨 변호인 쪽이 이 두 문서가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한 ‘정황설명서’에 맞서 국정원•검찰이 나중에 제출한 ‘정황설명에 대한 답변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정황설명서와 답변서는 모두 중국 삼합변방검사참(세관)이 발급한 것으로 돼 있는데,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의 조사 결과 두 문서의 도장이 다른 것으로 28일 드러났다. 사실상 답변서가 위조됐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도장이 다른 것과 문건의 진위 여부는 별개 문제’라든가 ‘같은 기관이라도 도장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도장을 찍을 때 힘의 강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등의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이 답변서가 우리 정부의 공식 협조요청 공문이 중국 정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급된 것으로 날짜가 적힌 점도 조작 의혹을 높인다. 검찰은 그동안 이 문건 등에 대해 ‘공문을 통해 정식으로 발급받은 것’이라고 말해왔다. 게다가 답변서는 출입경기록 및 사실조회서와 맥락상 연결돼 있어 답변서가 위조된 것이라면 다른 두 문서도 위조됐다고 볼 수 있다.
 
문서가 위조됐다면 국정원이 주도했을 것이지만 국정원과 손잡고 유씨를 기소한 검찰도 공범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수사·공판 관여 검사들은 일상 업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나아가 증거조작 의혹 재판에도 참여하고 있다. 검찰의 탈법적인 제 식구 감싸기 행태다. 또한 검찰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확인 공문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는 등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문서 조작 등을 통해 간첩을 만들어내고 정의를 모토로 삼는 검찰이 이에 동참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검찰이 이제라도 불명예를 덜 길은 국정원과 검찰 내부를 막론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신속하게 진실을 밝혀내는 것뿐이다. 검찰은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