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우리 내면의 식민사관

● 칼럼 2014. 2. 17. 16:19 Posted by SisaHan
1960~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학자의 한 분은 이기백(1924~2004) 선생이다. 그의 <국사신론>(1961)은 낡은 역사서술에 싫증난 우리의 시야를 활짝 틔워준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저서의 서론 부분은 ‘식민주의적 한국사관 비판’이란 제목의 독립된 논문으로 그의 사론집 <민족과 역사>(1971)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에서 짐작되듯 그의 역사연구는 지난날의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를 털어내고 주체적인 민족사학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40여년 만에 <민족과 역사>를 새로 들춰보면서 그의 역사관이 나 자신의 사유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을 위해 노력한 사학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다. 해방 후 국사학 제1세대라고 하는 천관우·김철준·이우성을 비롯하여 더 선배인 홍이섭, 후배인 김용섭·강만길 등 많은 학자들이, 전공 분야가 다르고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민족사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수십년 연구에 매진했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애썼던 식민주의 사관의 실체에 관하여 오늘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돌아보자.
 
일제 관변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는 이미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학 전공자들에게는 상식에 불과한 이 얘기가 일반인들에게는 놀랍게 들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으로서는 침략을 위해서나 통치를 위해서나 조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했다. 하야시라는 학자의 <조선사>(1892)와 <조선통사>(1912)가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라는 것은 부끄럽지만 정시해야 할 우리 역사학의 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야시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의 역사연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결국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철퇴를 맞았다. 일본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 군대에 점령되었다. 민주주의 평화체제로 나라의 틀이 바뀐 것은 점령국 미국의 강제의 결과였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영광의 기억마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중에는 식민지 지배자의 우월감이 깊숙이 남아 있어서, 망언의 형태로 끊임없이 표출되어 왔다. 패전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3년에 벌써 한일회담 일본 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이 조선에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여 발전에 공헌했다”는 주장을 폈고, 1965년에는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독도는 예로부터 일본 영토라는 데 의심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로부터 50년, 60년이 지난 아베 정권 아래서 망언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 문제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강압성·불법성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는 합법적 통치기관이었고 3.1운동 같은 총독정치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불법이었다. 이 점에서 일본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시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으로서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부터 1945년 종전까지만 일본이 범죄국가인 반면에 우리로서는 적어도 1905년 을사늑약부터 40년간 일본이 침략국가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100여년에 걸친 세계사의 무대에서 영국·프랑스·독일·미국 같은 나라들의 행태와 일본의 그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 다수의 무의식 속에 옛 지배자의 관점, 곧 식민지사관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관계에서도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공격적 심성을 자기화하는 수가 많은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 경우 내면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것은 가해자·피해자 모두가 새 삶을 얻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민중들은 공동의 과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적 민주국가가 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1500자 칼럼] 역사(국사) 교과서

● 칼럼 2014. 2. 17. 16:15 Posted by SisaHan
지난 한 해 한국은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 무엇을 더 관심있게 지켜보았는지가 다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역사교과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국사교과서이다. 그 단어가 주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나라의 국사라면, 국민에게 정체성과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는 역사여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 자기 나라 역사교육의 목표다.
나는 한 때 역사를 좋아해서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역사를 전공하느냐 문학을 전공하느냐 를 놓고 망설인 적이 있었다. 결국 역사는 부전공이 됐지만…더욱이 내가 주로 공부했던 분야는 한국, 중국, 일본의 근현대사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힘이 들지만, 이왕 밖에 나와서 서양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것, 객관적으로 보는 눈으로 공부하려 노력하였다.
 
이번에 문제가 된 교학사 교과서를 직접 구해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올라 온 것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친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독립된 한 나라의 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근대화가 됐고, 더 잘 살게 됐다는 이론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아줌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은 먼 곳으로 여행도 가능하게 됐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서양역사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이다.” 아마 그는 한국이 놓여있는 지정학(Geopolitics) 때문에 그런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중국에게 있어 ‘등을 노리는 단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반도,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이다. 이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이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몽고의 일본 침략과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조 말에 들어와서,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동양 3국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려면,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한다. 러시아가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면 또 한국을 거쳐야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까지 합세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한국을 사이에 두고 영향력을 행세하려 한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또 중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은 주된 이유가 자신들의 대륙 침략에 군인을 이동시키고 공급선을 만들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 한국사람들의 먼 곳으로의 여행을 위한 것일까? 지도를 보아도 일본이 왜 철도를 놓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만주로 가는 최단거리로 철도가 놓여있다. 그리고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몇 퍼센트가 한가롭게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는지, 그 때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 몇 명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식민지가 됨으로서 빨리 근대화가 되고 더 잘 살게 되었다는 논리에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 아프리카는 어떠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됨으로 근대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더 잘 살게 되었다면, 그들은 계속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야 할까? 한국이 일본이 없었다면 근대화가 될 수 없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요지다. 당시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노리고 있었고, 그 밖의 나라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노리고 있지 않았는가? 한국의 경제 발전도 그렇다. 일본은 인적 자원이나 물적 자원이 넉넉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에 초기에 기습적 공격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장기전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에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자신들 능력이상으로 벌려 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강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말기의 우리의 경제는 그들의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기간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한국사 학자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일본의 국사학자라면 모를까? 또 일본의 적지않은 일본사(국사) 학자들은 지금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기간이 있어 한국이 근대화 되었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사설] 자살특공대를 세계유산이라니

● 칼럼 2014. 2. 17. 16:12 Posted by SisaHan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시가 태평양전쟁 당시 자살비행특공대 ‘가미카제’의 유서를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관내에 있는 ‘지란특공평화회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살특공대원들의 유서와 편지 등 기록물 1만4000여점 중 본인 이름이 확인된 333점을 ‘지란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신청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이없고 뻔뻔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들이 제정신인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가미카제는 태평양전쟁 말 궁지에 몰린 광기의 일제 군부가 젊은 청년 병사를 비행기에 태워 미 함정을 자살공격하도록 한 행위와 거기에 동원된 병사를 말한다. 바다에서 1인용 어뢰정을 타고 미 군함으로 돌진했던 ‘가이텐’과 함께 전쟁사에서도 가장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공격 방법으로 꼽힌다. 지란은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발했던 비행기지가 있던 곳인데, 이곳 등에서 출격해 희생된 특공대는 모두 1036명이나 된다. 이 중에는 조선인 대원 11명도 포함되어 있다. 이름이 확인된 333점에는 조선인 대원의 것도 들어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제3자처럼 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일본의 후안무치와 몰역사성을 지적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당사자로서 적극 나서야 한다.
 
시모이데 간페이 시장은 세계유산 등재 추진 배경에 대해 “내년에 전후 70년을 맞아 특공대원의 메시지를 널리 알려 전쟁의 비참함과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20살 미만의 조선인을 비롯한 순진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에 대한 자성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전쟁의 비참함을 운운하는 정신 상태가 놀라울 뿐이다. 마치 아베 신조 총리가 태평양전쟁의 에이(A)급 전범을 합사해 놓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고,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 갔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꼭 빼닮았다.
일본의 뻔뻔함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상징인 하시마(일명 군함도)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의 유산이라는 명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달라고 신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조선인 강제징용자 122명이 숨진 곳이다. 일본으로서야 산업혁명의 상징일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한이 사무쳐 있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