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어제 파키스탄 은신처에서 미군에 사살당했다. 2001년 9.11 테러를 일으킨 지 10년 만이다. 이로써 지난 10년간 세계를 흔들어온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도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구심점을 잃은 알카에다 조직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빈라덴의 죽음이 테러 없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한다.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3000여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의 주모자를 끝까지 추적해 응징한 미국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빈라덴 사살을 두고 “정의가 이뤄졌다”고 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선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빈라덴의 죽음이 테러조직의 와해로 직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테러 없는 세상이 저절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카에다의 전사 빈라덴을 만든 것은 사실상 미국이다. 1979년 소련이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 아프간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슬람 무장세력을 양성해 대적했다. 빈라덴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도된 그가 반미로 돌아선 것은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이 여군이 포함된 30만의 미군을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장기 주둔시킨 데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와 알카에다는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 폭파 기도에 이어 1998년엔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을 폭파했다. 9.11 사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엔 서방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와 아랍세계의 좌절감도 큰 영향을 끼쳤다.

9.11 사태 직후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빈라덴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아프간을 침공했다. 탈레반 조직도 중앙아시아 원유들을 인도양으로 실어내는 아프간 내 송유관 건설을 위해 미국이 양성한 세력이다.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고, 이에 맞선 테러가 빈발했다. 결국 미국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자신이 뿌린 씨를 스스로 거둔 셈이 됐다. 이것이 9.11 사태 이후 전개되는 불안정한 세계의 실상이다.  빈라덴 사살이 미국에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이자 그 전쟁을 정당화해주는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 성과에 우쭐해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로 활용해선 안 된다. 오히려 대내외 정책과 테러와의 전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특히 아프간 침공 명분이 사라진 만큼 신속히 아프간에서 철군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아프간 파병부대도 조속한 철수안을 마련해야 한다.

[칼럼] 원숙한 삶의 길을 향하여

● 칼럼 2011. 5. 5. 14:36 Posted by Zig

인생이 그래도 무엇인가 알만하려면 적어도 50은 넘어야 한다는 말을 숫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기까지 이순을 넘어서야 겨우 할 수 있었으니 철이 조금은 난 건지 모르겠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물의 이치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면서 다듬을 것은 더 다듬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며 한 우물이나마 정성스럽게 파서 맑은 물 나올 때 까지 인내해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남의 실수를 관용으로 받아줌은 실수 많았던 지난날의 부끄럼 때문이오, 비판의 눈이 이해하려는 눈보다 날카로웠을 때는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 진리가 내 것이 안 되었기 때문이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고 질타했던 것을 뼈아프게 후회한 것은 내가 그 꼴을 당하고 난 후 몸살을 겪고 난 경험 때문이었다. 과거의 노예가 된 사람은 불행을 만들고 현재에 만족한 사람은 어리석게 살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와 행복을 얻는다는 어느 분의 말이 살면서 조금씩 알겠더라.
때가 되어야만 이해되고 현실감이 생기는 일이 있다.

나이테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테가 굵어질수록 관념적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이 구체적인 사실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비로소 어른들이 일러주고 말해주었던 당신들의 경험 이야기가 피부로 전달되면서 아 ! 그래서 그런 말씀들을 어른들이 들려주었구나. 내가 어른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품위와 맵시를 잃지 않고 쓸모있는 사람으로 늙어갈 수 있는 길을 걷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 아닌가.
멋있게 창의적으로 완숙의 미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연륜의 테를 쌓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국이 낳은 노인학의 선구자이며 의사요 병리학자요 문필가인 알렉스 콤퍼트 박사는 그의 저서 「A Good Age」란 책에 수북이 실어 놓았다.
20세기의 거장으로 영향력있는 사상가요, 철인인 버드란트 럿셀이 핵무기 반대 캠페인에 앞장서서 일하다 사임한 것이 그가 88세였던 1962년이었고 그의 자서전이 출판된 것은 1969년 그의 나이 95세 세상 떠나기 1년 전이었다. Cecil B. Demille은 헐리우드 창설자로 영화 감독이며 동시에 연출가이기도 했다. 그가 ‘The Greatest Show on Earth’란 영화를 감독하여 아카데미 수상을 받은 것이 71세였던 1952년이었고 4년 후엔 그의 70번째 영화가 된 그 유명한 ‘십계명’을 만들어 냈다. 위대한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91세로 그가 운명 할 때까지 젊은이들이 따를 수 없는 힘찬 정력으로 16세 첫 번 전시회를 가졌을 때부터 75년 동안 그림과 조각 드로잉 등 불멸의 작품을 창작해 냈다.

역사적인 인물에서만 찾아 볼 필요도 없다. 오늘 날 우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있는 우리들의 어른들이 계시다. 9순에 접어드신 종교음악. 동요작곡가의 거장 박재훈 박사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공연을 목표로 오페라 ‘순교자 손양원 목사’작곡에 노혼을 불태우고 계시다. 그분에 의하여 한국의 성자로 불리우는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가 오페라로 재생되고 있다. 나의 청년시절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드린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사랑의 원자탄’을 무척이나 감명깊게 읽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신 87세 되신 이상철 목사님이 계시다. 2011년 1월 그분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장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삶의 일대기는 현재 이민을 살고 있는 동포사회에서나 캐나다 교계의 지도자로 우뚝 서 계심을 극명하게 들어 올려놓는데 손색이 없었다. 문필가로서의 예지로 가득한 글은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기도 한다. 지금도 당신이 필요하다면 달려가시는 홍안(紅顔)의 백발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노욕(老慾)은 추하다. 그러나 원숙한 삶의 모습은 향기를 발산한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무산일기>가 부산영화제를 시작으로 트라이베카영화제에 이르기까지 유수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배고픔에 지쳐 강냉이 한 자루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싸우다 친구를 죽이고 남한으로 넘어온 젊은이의 남한 내 생존 기록을 극도의 절제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과연 그 국제적 찬사에 값할 만했습니다. 특히 분신처럼 아끼던 강아지의 죽음을 주인공이 오랫동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주인공 전승철은 125로 시작되는 탈북자 주민번호를 가진 까닭에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합니다. 벽보 붙이기나 노래방 아르바이트로 입에 풀칠을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관할구역을 침범했다고 주먹질을 당하고, 노래방에선 오해를 받고 쫓겨납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다른 탈북민들에게 사기나 치고. 그러다 보니 거리에서 주워 온 백구가 그의 유일한 마음붙이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친구가 빼돌린 돈을 대신 차지하고 새 삶을 시작한 순간, 그 백구가 차에 치여 숨지고 맙니다. 주인공이 죽은 백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것은 그 속에서 폭력적 자본주의 사회의 희생물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화는 남과 북의 위정자들과 우리 사회가 북한 동포들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전승철은 강냉이 한 자루를 차지하기 위해 친구와 죽도록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도 북한 정권은 체제 수호를 위한 핵개발에 매달리며 나 몰라라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 사회도 그를 품어주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승철뿐이 아닙니다.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어김없이 남한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차별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배제와 차별의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2류 시민으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해 왔습니다. 북한 인권 전문가를 국가인권위원에 임명하고, 민간단체에서 북한 주민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킨다며 대북 전단을 뿌리는 것도 방치합니다. 그런데 유독 인권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에 대해선 눈을 감습니다.

물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처럼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식량지원이 사실상 북한 정권에 대한 지원이 된다는 현실적 딜레마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식량 배분에 대한 모니터링을 허용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현실적 딜레마를 내세워 동포들이 굶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군사적 문제와 연관시켜 대북 식량지원을 회피하는 것을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비판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을 받아들여 2류 국민으로 만드는 것 역시 그들은 물론 우리 사회에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나 프랑스의 이민자 폭동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것은 북한 정권이 북한 동포들의 생존을 감당하게 만드는 일일 겁니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합니다. 우선 인도적 식량지원으로 당장의 식량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주는 한편 체제에 대한 위협을 줄여줌으로써 가용자원을 체제 유지가 아닌 주민생활 개선에 투입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남북대화와 6자회담의 재개가 긴요한 까닭입니다.
올해 들어 북한은 다양한 경로로 대화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카터를 통해서도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제기했습니다. 정부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안 된다며 북한의 진정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만나야 합니다. 북한 동포의 인권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남북한 주민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존의 대북정책을 전면 전환할 때입니다.

<권태선 - 한겨레신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