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민주평통 부의장, 회고록 출판 기념회서 밝혀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1945616만주국 싼장성 자무쓰시’(현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쓰시)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지 두달 만에 광복을 맞아 아버지의 고향 전라북도 장수로 귀향했다. 일제강점기의 끄트머리에 세상에 나와 한국전쟁과 오랜 분단의 세월을 헤쳐온 그의 삶은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서른셋의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학위 과정 학생이던 197711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공산권연구관실 보좌관(4)으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 자료도 맘껏 보고 월급도 챙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첫 걸음이다. 하지만 그는 그뒤로 40년이 넘도록 끝도 시작도 없는 통일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운명이다.

북한과 마주한그 긴 세월 속에서 가장 슬픈 기억과 기쁜 기억을 물었다. 10일 오전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그의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대담자 박인규·창비)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다.

“1994725~27일로 예정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199478)으로 무산됐을 때가 가장 실망스러웠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여기까지인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비서관으로 잠도 자지 않고 회담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때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쪽의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주며 군사적 도발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관리할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김영삼 대통령한테 입력한 개념은 분단 한반도에서 군사적으로 조마조마하게 사는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북쪽이 군사적으로 대남 적대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경제가 어려운 북쪽의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06·15 공동선언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기쁨의 다른 얼굴이다. 삶의 역설이다. 그가 가장 희망적인 날로 기억하는 건, 2000410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613~15일 평양) 발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기회를 잃고 우리한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나하고 한탄을 했는데, 6년이 지나지 않아 그날이 왔다.” 그는 이 대목에서 환하게 웃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그는 다양한 자리에서 북한을 상대했다. 남북관계가 대결로 점철된 냉전기에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이후 탈냉전기를 관통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땐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을 잇는 길을 맨 앞에서 열어갔다.

687쪽에 이르는 벽돌책인 회고록은 정세현 특유의 입담과 통찰력이 잘 버무려진 생생한 사례와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의 부친은 해방된 조국에서 한의원을 개업했고, 그 덕에 어려서부터 한학에 익숙했다. 70년 분단 사상 최대 인적교류의 장이던 금강산관광사업의 별칭인 햇볕정책의 옥동자는 그의 작명이다. 그는 통일부 장·차관 시절 숱한 출입기자들의 아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미국의 간섭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고 그는 회고록 서문에 적었다. 한국 외교의 전제처럼 인식되는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탄생과 관련한 그의 전언은 서늘하다. “김영삼 정부 때 핵문제로 미국과 엇박자가 심했다. 그때 미국이 한국을 묶어놓으려고 꺼낸 게 한미공조라는 말이다. 공조를 이유로 사사건건 쥐어박으니 그 기가 센 김영삼 대통령도 결국 미국 하자는 데로 끌려가더라. 1994년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실행됐으면 한반도가 어찌 됐겠나?”

그가 새삼스레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본질을 상기시킨 건, 20189·19 남북군사합의 뒤 미국이 꺼내든 한미 워킹그룹한국 외교부가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인데 대한 짙은 아쉬움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한미워킹그룹은 제재를 빌미로 남북의 자율적 협력을 가로막는 미국의 덫이다.

출판사 창비는 정세현의 회고록을 학자의 머리, 행정가의 눈, 시민의 가슴으로 북한을 바라본 평생의 기록이라 표현했다. 과장은 없다. 그는 40년 넘게 북한과 마주한 고위공직자일뿐더러,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다. 그는 기대를 거는 것은 국민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 이제훈 기자 >

독일 베를린에 전시된 전직 미군의 사진.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22, 백악관에 감축 반대 서한

시위에 군동원트럼프 시도와 겹쳐, 보수 주류 불만 팽배

 

독일 주둔 미군 병력을 절반으로 감축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조처에 집권당인 공화당 내부에서 반대가 거세지고 있다. 이 조처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에 현역 군을 동원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군부가 반발한 사건과 겹쳐, 트럼프와 미국 보수 주류들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맥 손베리 의원 등 공화당 하원의원 22명은 9일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 주독일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서한에는 군사위 소속 공화당 의원 26명 중 4명을 빼고 모두 서명했다. 의원들은 이 서한에서 우리는 그런 조처들이 미국의 안보이익을 현저히 해칠뿐 아니라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해 우리를 해롭게 할 것으로 믿는다며 철회를 촉구했다.

앞서 백악관은 오는 9월까지 독일에서 미군 병력을 적어도 9000명 감축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 5일 보도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이 서명한 이 지시는 또 국방부에 독일 주둔 미군 병력의 상한을 25000명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다. 독일 주둔 미군의 상한은 52000(현재 인원은 34500)이어서, 궁극적으로 독일 주둔 미군 병력을 절반으로 줄이는 조처다.

미국 관리들은 이 조처가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규정하는 국방비 지출 수준을 충족하지 못한데 대한 징벌이라고 말한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올해 미국이 주최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불참키로 한 결정한데 대한 트럼프의 보복이라고 판단해 더 큰 우려를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과 나토를 이끄는 최대 국가인 독일과 미국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서 집단안보를 강화하려고 기울여온 중요한 노력들을 훼손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화당 소속 제임스 인호프 상원 군사위원장은 이 조처가 트럼프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며, 트럼프와의 직접적 갈등을 피하면서 감축 결정을 되돌릴 공간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다. 인호프 위원장은 <폴리티코>와의 회견에서 이는 오브라이언에게서 나왔고 그가 서명했다며 오브라이언 보좌관을 비난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오브라이언의 결정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나는 그가 시작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점만은 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안팎에서는 주독 미군 감축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국가안보보좌관이 주도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5<로이터> 통신도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 주둔 미군을 9500명 감축하라고 지시했다면서 이 경우 현재 34500명인 주독 미군이 25천명으로 줄어든다고 보도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 이번 작업을 수개월 간 해왔고, 이 지시가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서명한 각서' 형식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 정의길 기자 >

 


남영동 옛 대공분실서 6.10항쟁 33주년 기념식 열려

문 대통령 가정·직장·경제서 삶 속에 스며드는 민주주의를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행정안전부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0일 열린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이었던 종교계·학계·시민사회 인사들에게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훈장은 고인이 된 이들을 대신해 가족들이 받았다.

박형규 목사는 군사독재에 맞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평가된다. 교회 갱신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1986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변론하며 국가 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한강물 역류로 수해를 입은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등 약자 변론에 앞장섰다. <전태일 평전>을 썼다.

지학순 주교는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구국선언 등을 주도했다. 1974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해 구속됐고, 이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의 기폭제가 됐다. 1993년 타계했다.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조비오 신부는 1980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9년 열린 5·18 진상규명 국회 청문회에 나와 신군부의 학살 행위를 증언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성유보 전 <한겨레> 편집위원장은 1974<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언론 자유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등을 거쳐 1988<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2014년 별세했다.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는 진보사회과학계의 거목으로 1980년 서울대에서 강제 해직된 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의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적 개혁을 위해 힘쓰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은 진보적 신학자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강제 해직 뒤 재야운동에 헌신했으며, 복직해 연세대 부총장과 상지대 총장을 역임했다. 2009년 별세했다.

권종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농민운동에서 시작해 통일운동까지 헌신했다. 1978년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한 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결성해 초대 의장 등을 지냈고 2004년 별세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 등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서서 변론을 했다. 이돈명·조준희·홍성우와 함께 인권 변호사 4인방으로 불렸으며, 1993년 타계했다. < 송경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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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꿈 이어받아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부모들

올해 33돌을 맞은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모란장이 수여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1929~2011)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1928~2018),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80)씨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다. 세 사람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중심으로 함께 활동하며 동지애를 키웠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20056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에서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소선 여사는 1970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 등 노동자 권리 보장을 외치며 분신해 숨지자, 아들이 꿈꾼 세상을 만드는 데 투신했다.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설립한 게 시작이었다. 이씨는 1978~1979년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자 투쟁에 나섰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땐 진상규명 투쟁에도 나섰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민가협) 설립을 주도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998~1999년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장기간 농성을 했고,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등의 노동 현장도 계속 지켰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4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소선 여사가 별세한 20119월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했으나 기각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개인 활동 업적보다는 전태일 열사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더 크기에 다른 사람과 업적을 비교하기 곤란해 훈장을 추서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1990822일 서울 홍제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아들의 고문치사 및 범인 은폐조작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결에 항의하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고 박정기씨는 19871월 막내아들 박종철 열사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숨지자 6월 민주항쟁의 선봉에 서게 됐다. 1988년과 1998년 장기 농성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 제정을 이끌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치사사건 때는 법정소란죄로 석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0183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박정기씨를 찾아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에게 사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넉달 뒤 그는 고인이 되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최루탄부상자전국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던 1989510일 국회 앞에서 최루탄 사용 금지를 위해 여야가 노력할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7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어머니 배은심씨는 한열이의 이름으로유가협과 함께 전국의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정권 차원의 사과와 인권보호 대책 마련에 목소리를 높였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슬퍼하는 자리엔 어김없이 찾아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배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서른세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며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다. < 성연철 송경화 기자 >

남영동 그곳에서문재인 대통령 일상 민주주의 이루자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붉은 꽃이 걸렸다. ‘살인기계’ ‘고문공장으로 불렸던 곳. 김근태와 박종철 등 숱한 민주 인사들의 몸과 영혼을 파괴한 곳. 꽃은 33년 전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진 509호 조사실, 고문받는 자들의 투신을 막으려고 검은 벽돌 외벽에 좁고 길게 낸 창문 위에 붉게 피었다. 그 꽃 아래서 대통령은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자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열린 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포용과 상생, 연대와 협력으로 민주주의를 우리 삶에 스며들게 하자고 말했다. 행사가 열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는 과거 치안본부 대공분실 자리다. 문 대통령은 2년 전 기념사에서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6월 항쟁으로 세운 민주주의가 촛불 혁명과 코로나19 극복을 이끌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민과 노동자 등 6월 항쟁의 주인공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가정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렸다는 평가였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촛불을 들었고,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의 민주주의를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였다. 그는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때도 정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속가능 사회를 향한 상생과 협력의 중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지속가능하고 평등한 경제가 우리가 지향할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날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고 말한 것의 연장이다.

코로나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협력과 통합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갈등과 합의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갈등 속에서 상생의 방법을 찾고 불편함 속에서 편함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에 관해서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민주주의로 이뤄야 한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최근 북한이 남한과의 연락선을 끊은 데 대한 곤혹스러움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조영래 변호사, 지학순 주교 등 민주화 운동 유공자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청와대는 민주화 공로를 독립과 호국과 동등한 차원에서 예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 숨진 509호실 창문에 붉은 꽃문 대통령 기적 같다

배은심씨 ‘33번째 6·10에 보내는 편지낭독 경찰청장 국가폭력사과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아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외벽에 꽃이 달려 있다.

10일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 마당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 대표와 유공자 등이 자리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이후 3년 만에 행사에 다시 나왔다. 오랫동안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린 이곳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건축계 거장 김수근의 설계로 탄생했다. 애초 5층이던 건물은 1983년 전두환 정권 때 7층으로 증축됐다. 이곳에서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22일 동안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19871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50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2년 전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문 대통령은 기적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 불행한 공간을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마치 마술 같은 위대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엄혹한 시절을 이겨내고 끝내 어둠의 공간을 희망과 미래의 공간으로 바꿔낸 우리 국민과 민주 인사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날 훈장을 받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와 박정기씨에게 ‘33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해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이 옆에 가 계시고, 종철 아버지도 아들하고 같이 있어서 나 혼자 오늘 이렇게 훈장을 받습니다. 나 혼자 이래도 되는 건가 싶네요. 종철이 아버지도 이런 날 보고 거서 뭐 하고 있는 거요라고 하실 거 같아요라고 했다.

기념식을 마친 문 대통령은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 조사실을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문 대통령은 조사실에 설치된 고문용 욕조를 보며 “(보는 순간) 공포감이 온다. 철저한 고립감 속에서 (저항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김 여사는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이 거리에서 건넸던 장미와 카네이션, 안개꽃, 손수건을 박종철 열사 영정에 올렸다. 행사에는 민갑룡 경찰청장도 참석했다.

병상의 백기완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백기완

올들어 5개월째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백기완 선생.

6월항쟁을 이끌었던 투사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0일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6월항쟁 33돌 기념 말씀을 친필로 써보냈다.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 두 개의 글이다.

지난해 심혈관 수술에서 회복해 잠시 대외 활동을 했던 백 소장은 지난 1월말 폐렴 증상으로 입원한 이래 지금껏 투병중이다. 통일문제연구소의 채원희씨는 젊은 시절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으신데 지난해 수술 후유증으로 체력이 약화되자 재활성화해서 중환자실도 몇차례 오갈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백 소장은 19875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으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해 호헌철폐 투쟁을 비롯 6·10 시민 항쟁의 선봉에서 싸웠다. < 김경애 기자 >


 


지난달 25일 경찰의 목에 짓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관을 실은 마차가 9일 텍사스주 휴스턴 외곽의 메모리얼 가든 묘지로 향하고 있다. 시민들이 따라 걸으며 플로이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다.

 

생애 대부분 보낸 곳에서 장례식 동생들 우리 형을 위해 싸워주세요

바이든 이제 인종적 정의를 실현할 때트럼프, 플로이드 언급없이 음모론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짓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46)9일 생애 대부분을 보낸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영면에 들었다. 지난달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붙잡힌 뒤 경찰관 데릭 쇼빈에게 846초 동안 목을 눌려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다가 숨진 지 보름 만이다.

장례식은 휴스턴 파운틴 오브 프레이즈교회에서 유족과 지역 정치인, 활동가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플로이드의 동생들은 우리 형을 위해 싸워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장례식장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플로이드의 6살 딸 지아나를 언급하면서 이제 인종적 정의를 실현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왜 이 나라에서는 흑인들이 그냥 사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실베스터 터너 휴스턴시장은 69일을 조지 페리(플로이드의 미들네임)의 날로 선포하고, 경찰의 목조르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들 나머지는 이제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플로이드가 숨진 뒤 나도 숨을 쉴 수 없다며 인종차별과 경찰폭력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로 퍼졌다. 미국 민주당은 경찰개혁 법안을 내놓는 등 제도 개선 논의에도 불이 붙었다.

민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는 이날 추도사에서 전세계에 걸쳐서 나는 노예주의 자손들이 노예주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걸 봤다. 백인들이 통행금지 시간을 지나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고 말하는 걸 봤다고 말했다. 플로이드는 휴스턴 외곽의 메모리얼 가든 묘지에, 먼저 잠든 어머니 곁에 묻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플로이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첫 흑인 참모총장이 된 찰스 브라운 미 공군참모총장 지명자의 상원 인준 소식을 트위터로 알리고 미국을 위해 역사적인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트럼프는 오히려 지난 4일 뉴욕주 버펄로 시위에서 경찰에 밀쳐 넘어져 머리를 다친 75살 마틴 구지노에 대해 근거 없는 음모론을 폈다. 그는 트위터에 구지노를 안티파(극렬좌파) 선동가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가 밀친 것보다 더 세게 쓰러지는 걸 봤다. 설정일 수도?”라고 적어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비판을 자초했다.

이런 가운데 뉴저지주에서 비무장한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의 총 6발에 맞아 숨지는 영상이 이날 공개됐다. 뉴저지주가 규정에 따라 공개한 영상을 보면 지난달 23일 오전 교통경찰 랜들 웨첼이 시속 약 180로 달린 모리스 고든의 차량을 갓길에 세우고 속도위반 딱지를 발부하려 했다.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고든이 차량 밖으로 나간 뒤 실랑이가 벌어지다가 총성이 울렸다. 웨첼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CNN>은 또 지난해 328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도 흑인 남성 하비어 앰블러가 경찰 체포 과정에서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한 끝에 숨졌다고 9일 보도했다. 현재 이 사건은 트래비스카운티 지방검사가 수사를 지휘하고 있으며, 담당 마거릿 무어 검사는 대배심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밝혔다. <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