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글마당] 복음과 사역과 기도 (29)

● 교회소식 2018. 9. 4. 16:2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복음>은 우리를 주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이끌어주고 즉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면케 하며, 우리의 마음이 주하나님을 향해 고양되고 개방될 수있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복음>은 주하나님을 창조주로, 섭리자로, 통치자로,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로 경외하는 경건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영혼에 등불을 켜주는 <빛>이 되신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진리와 선과 악에 관한 율례(법칙)가 쓰여진 말씀이고, 또한 ‘복음’은 우리 모두가 기쁨의 우물을 길을 수 있는 풍성한 우물인 것이다. 만일 크리스천들이 먼저 주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던져 버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더욱이 믿음의 봉사를 젖혀 놓을때 그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태만은 범죄의 길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므로 태만으로 인해 마음이 매우 경화 되어서 마침내 그들은 ‘오만한 자’가 된다.

그런고로 어떤 확실한 규범에 의해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정욕의 지배와 유혹에 따라 행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정의 할수있다. 또한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여 그것을 그들의 업으로 삼고 있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오만한 자’란 ‘하늘을 대적하여 입을 벌리는’ 자들이다. 주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주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계시, 그리고 주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인도해 주는 <성서-복음>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지혜롭고 선한 자가 될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숙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깊이 반성함으로써 오류를 잘 살피고 알아서 고치도록 하여야 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묵상에 잠기도록 하자! 선한 것에 나의 생각들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견실히 지키도록 하자!

밤에 잠들기 전에 그날 우리가 향한 것에 관해, 특히 잘못 행한 것에 관해 우리 양심을 살펴 그것에 대해 회개(자복)할 수 있도록 하자! 우리가 밤 중에 깨어 있을 때 주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우리를 화평케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묵상하며 살아가자. 소란한 때일지라도 우리 심령을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키도록 하자! 크리스천들은 인도와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끈질기게 드려야 되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주하나님께 깊숙히 다가가자. 주하나님을 의지하고 주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생을 사는 것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우리 자신을 주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 아래 두어야 한다. 주하나님의 약속을 부여받은 모든 신자들이 우리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도록 하자. 그리하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 모두에게 주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긍휼과 은혜 속에서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하나님께 늘 진지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그것은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온것”이어야 되고 우리의 감정은 입에서 나온 표현과 일치하는 <기도>이어야 됩니다. 거짓된 기도는 효과가 없고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면 주하나님은 은총으로써 <기도>를 맞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기도’를 간절히 드려야 한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시27:7),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다면 주하나님은 은혜롭게 들어 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그들의 고통이 심하고 괴로울 때는 쓰러지기 쉬울 것이며, 그들의 영은 압도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믿음>이 특효 있는 활력제가 된다. 그러므로 계속 소망을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게 해 주며, 주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스스로 편안한 즐거움을 갖도록 해준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주하나님과의 우리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고, 주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주하나님께서 그 <신뢰>에 의하며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자들은 강하고 담대할 만한 이유를 가지며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되도록 할 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누가 우리에게 상을 찡그리든지 간에 우리 자신과 아울러 서로 서로를 격려하여 그리스도의 여정을 계속해 나가고 그 걸음을 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기 ‘죄악’이 사해짐으로써 위로를 받고자 원하는 이들은 그 죄악을 뉘우쳐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수치감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 두려움과 성스러운 떨림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회심한 즉시의 ‘사도 바울’을 바라보자! 우리는 기도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호흡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 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팔십…

● 교회소식 2018. 9. 4. 16:1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시편90:10)는 성경 말씀이 있다. 읽을 때 마다 팔십이라는 숫자가 멀게 느껴지고 아주 오랜 시간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던 기억이 있다.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팔십’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한 인생이 태어나 팔십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말 그대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숫자요 아직 젊은 나에게는 근접 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또한 분명한 듯 하다.


지난 몇 주 전 부모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2~3년 주기로 방문하셨기에 이번 방문 또한 시간이 되어서 오시는 구나…” 생각했지만, 왠지 이번 방문은 오시기 전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나의 마음을 놓아 주지 않았다. 왠지 반복되는 방문 일정이 이번으로 끝이 날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다 ‘팔십’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회중을 압도 했으며, 몇 주를 연속해서 부흥회를 인도하셔도 여전히 주일 아침 밝은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그 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제단을 지키셨던 그 분이, 팔십을 훌쩍 넘긴 세월 앞에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나를 당황하게 하고, 두렵게 만든 이유였던 것이다. 시간이 되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의 진리일 진대, 그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만 끝나는 것이 아닌 나의 삶에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점점 쇠하여지는 기력을 붙잡으면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당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일들을 들려주려는 부모의 마음이 그 어느 때 보다 강했던 만남의 시간이었다. ‘팔십’…조금만 더디게 올 것이지 시편의 말씀처럼 “날아가듯” 빠르게 찾아 온 시간인 것 같아 야속할 뿐이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나도, 우리도” 날아가는 새처럼 빠르게 어느 순간 ‘팔십’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에게 아버님이 그랬듯이…누군가가 도움이 될 만한 그 무언가를 전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보람과 후회가 교차할 것이다. 팔십, 그 순간이 찾아올 때, 과연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소망해 본다. 팔십이라는 시간의 무게에 남은 삶이 짓눌리지 않기를,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팔십’을 압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한다. 아니 그 압도 되는 모습이 팔십이라는 시간 앞에선 나에게, 우리에게 ‘평안과 여유’를 선물해 주기를 기도한다.


‘팔십’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되어도 시간에 구해 받지 않는 것, 그 것이 성도요 믿음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가 영원할 진대 이 땅에서의 ‘시간’이 돌아보면 그리 길지 않았음을 곧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어머니! 평생 변함없이 여전하실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일평생 사명 감당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아버지, 일평생 가정의 가장으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셨던 아버지… 하늘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 시간까지 이 땅에서 평생을 전하셨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이 아침 간절히 기도해 본다.

< 민경석 목사 - 한울교회 담임목사 >


밀알교회, 아기학교 ‘꿈.씨.’ 개설

● 교회소식 2018. 9. 4. 16:1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엄마·아기 함께 성장” 주간 영유아 프로그램으로

영아·유아 각 20명씩 10주간 다채로운 내용
“아기 첫 사회경험 돕고 발달 단계 특성 맞춰 다양 활동·경험, 정보도”

밀알교회(담임 노승환 목사: 405 Gordon Baker Rd. M2H 2S6)가 ‘엄마와 아기가 말씀 가운데 함께 성장해 가는’주간 영유아 프로그램 「아기학교 꿈씨」를 개설, 제1기 입학어린이를 모집한다.


영아반(18~28개월)과 유아반(29개월~JK전)으로 나눠 각 20명씩을 정원으로 제1기를 9월26일(수요, 영아반)과 27일(목요, 유아반) 개강해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운영하는 밀알 아기학교 꿈씨는 각각 11월28일과 29일까지 10주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아기의 첫 사회경험을 도우며, 엄마와 아기가 함께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발달단계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통해 성장해 가도록 돕는”아기학교 꿈씨의 프로그램은 제1기 주제를 ‘신기한 나의 몸-신체편’으로 정해 오감을 통한 다양한 놀이와 언어, 신체 및 음악과 미술활동(Yomoyomi체험),월령별 도서교육과 야외 체험학습, 그리고 자녀 양육에 관한 정보제공 등으로 짜여진다.


등록비는 $180으로, 재료비와 간식비를 포함한 수업료 $150과 입학금 $30이 들어있고,가방과 야외학습체험, 음악CD, 특별활동비 등이 제공된다. 등록은 밀알교회 홈페이지(www.milalchurch.com)에서 등록서류를 다운받아 작성, 교회사무실에 직접 제출하거나 이메일(milalbabyschool@gmail.com)로 신청한 후 우편으로 등록서류와 등록비를 보내면 된다.

< 문의: 416-226-4190 >


[목회자의 편지] 영(靈)

● 교회소식 2018. 8. 29. 12: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영에 관해서 특별히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 ‘영의 이치’ 즉 영리학(靈理學)이라는 학문이 있다. 하나님의 영! 영을 그림으로 그리면 동그라미다. 수학으로 말하면 동그라미를 영(零)이라 한다. 모든 숫자, 하나에서 아홉까지 이 모든 숫자를 담고 있는 그릇이 영이다. 모든 근거가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이 없으면 수가 성립되지 못한다.
이 영이 제일 발달된 곳이 인도이고, 그 다음 영이라는 생각이 아랍 사람들에게 들어와서 아라비아 숫자에 비로소 영이라는 동그라미가 생겼으며, 그것이 서양에 들어와서 서양 수학의 기초가 되었다.


영은 철학적인 개념으로는 자유라는 말이고 수학적으로는 영이고, 성경에서는 진리의 영, 성령이라고 한다. 이것을 키에르케고르(Soren A, Kierkegaard)의 말로 하면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다. 영이란 말 대신 사랑이라는 말로도 쓸 수 있다.
즉비(卽非)의 논리가 영이라는 말인데 수학적으로 말하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Zero) 라는 말이다. 즉(卽)이라는 것은 플러스이고, 비(非)라고 하는 것은 마이너스이고, 그래서 논리학에서는 A= -A 로 표시한다. 이것을 우리 말로 표현할 때는 A는 A가 아닌 것이 된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나 아닌 것이 나다” 그러니까 나 아닌 것이 될 때 그 때 진짜 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자기 자신이 아닐 때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머니가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다. 자신이 아니고 어린애를 생각할 때 그 때가 어머니다. 예수가 예수 일 때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일 때 예수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정반대의 개념인데 이 두 개념이 합쳐져서 예수 그리스도란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 아닐 때 나라는 걸 확실히 믿게 되면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 아닐 때 나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절대로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는 말도 내가 나 아닐 때 나라는 말이다. 바울의 말로는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 말은 바울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는 나 아닌 거라는 것이다.
내가 나 아닌 것이 될 때 그 때 진짜 나다. 그리스도가 살아서 바울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바울이다. 그래서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겸손해야지 교만하면 사람이 안 된다. 기독교에서는 교만한 것을 제일 나쁘다고 지적한다. 실존주의란 나를 조금이라도 내 놓지 말고 자꾸 나를 감추는 것이다.


믿음의 시작이 무엇인가? 졌다는 것이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졌다. 모세는 졌고 하나님이 이겼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에게 졌다. 나는 종이라고 했다. 이 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졌다는 말이다. 나는 노예다. 이긴 건 누구인가?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은 나의 주님이다. 나는 제로가 되었다. 바로 나는 나 아닌 것이 나라는 말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 돈 많고 명예가 있는 사람들이 나 아닌 내가 될 때 이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된다. 오늘부터라도 나 아닌 내가 되어 보자. 그리스도가 살아서 내가 되는 신비로운 삶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