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colm Gladwell는 ‘Outliers’에서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건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합니다. Stephen R. Covey는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습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습관을 따라하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Times지에서는 최근 더 빠르게 성공하는 새로운 법칙을 내 놓았습니다. 책상보다 현장에 더 오래 머물러라, 뇌를 위해 낮잠을 자라, 노트를 활용하라... 굳이 1만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게 노력하고, 적은 시간을 들여서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 할까요? 왜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걸까요?
 
아마 그 성공 속에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부와 명예, 권력, 여가시간 등이 다 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이 시간들을 잘 참고 견디면 그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성공을 향한 치열한 경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성공 속에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일까요?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생을 걸만큼 의미 있고, 가치있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의 걸으신 길은 성공을 위한 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길은 성공과는 정 반대의 길입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시는 ‘성육신’의 사건이나,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성찬’의 사건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절정입니다. 그것은 성공을 위한 걸음이 아니라, 열매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늘에서 시작하신 주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 서신 자리는 사람들이 실패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인 그 길을,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한 계단 더 높이 오를 때마다 복 받았다고 기뻐하는 우리들에게, 한 계단씩 내려서도록 요청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성공의 삶이 아니라, 열매 맺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누리게 되는 성공하는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 그 혜택은 소수만이 누립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 맺는 삶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삶이며, 그 삶의 혜택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쳐지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하고, 기쁘게 만들고, 힘을 주고, 위로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아름다운 이유는 각각의 열매 속에 또 다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은 노력과 자기 관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열매는 자기 죽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만드는 일이기에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은 그가 그 시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이르는 성공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죄없으시면서 스스로를 죽이시는 밀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2014년 고난주간을 통해 부활주일로 나아가는 우리들을 성공의 삶이 아닌, 열매 맺는 삶의 본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는, 교회에는 성공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죽여 열매 맺는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장성환 목사 - 런던 한인교회 담임목사 >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한 것이다(행4:28).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리라”(사53:12)고 예언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악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다니 이 얼마나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계획없이 아무렇게나 행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하에 주님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일 등, 곧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의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당하셨다. 즉 비인간적인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시고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죄값을 치를만한 이가 아무도 없기에 독생자를 친히 대속제물로 만드셨다.
 
또한 최초 인간 아담의 죄성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죄의 담으로 막혀 있었으나 독생자로 하여금 친히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게 만드셨다. 따라서 독생자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대속제물로, 화목제물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내가 도맡았으니 나를 형벌하시고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중보 기도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여 예수님의 피는 생명이기에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고 사함이 없은즉 구원이 없는 것이다.
 
독생자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8). 따라서 이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시며 완전히 영원한 죄 사함을 받게 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롬8: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것이며 누가 능히 정죄할 수 있겠는가(롬8:33-34).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이후로 지은 죄들에 대하여는 회개하기만 하면 징계로 죄의 대가는 반드시 받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용서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의 뜻대로 살면서 영광을 드려야만 할 것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그를 배반하면 즉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불만이 있으리라 (히10:26-27) 하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은 본디 한 점의 죄도 없고 거짓이 없는 거룩하시므로 부활 승천케 하셔서 함께 계시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큰 뜻을 믿기만 하면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인간들이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이를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한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불신하고 구세주로 계속 거부할 것인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이요 오직 십자가의 길인 진리를 불신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된다. 불신의 죄가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보 행

● 교회소식 2014. 4. 15. 20:34 Posted by SisaHan
20년 전 쯤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소장파 젊은 철학 교수가 쓴 ‘육탈의 근대성’ 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근대라는 시대에서 인류는 주체, 그러니까 자신을 찾는 일에 몰두해 왔는데 결국 빈껍대기 영혼없는 자신만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려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로 부터 시작된 모든 이성 중심의 근대 철학의 노력은 실패한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아는 것은 끊임없이 사고하는 이성, 들숨과 날숨의 멈춤없는 숨결, 그리고 진리를 찾아 나서는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팔다리의 보행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 자아와 진리를 찾기에 갈급해 하던 어린 저로서는 그 소장파 철학자의 말이 어찌나 매력적이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애매 모호한 결론이 주는 몽환적 매력도 있었지만 자아를 찾지 못한 근대를 넘어서는 ‘보행’이라는 또 다른 모험적 희망이 젊은 가슴을 다시 뛰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철학자의 말을 따라 저는 그 보행을 쉬지 않았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사고하고, 팔다리를 쉼없이 움직이며 들숨과 날숨을 세밀하게 느끼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적없는 보행은 중년의 높은 문턱 앞에서 소리 없이 멈추었습니다. 지친 어깨와 촛점 잃은 눈동자, 혼미해지는 이성, 그리고 약해져 가는 심장의 박동은 더 이상 저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주체적 보행으로는 나머지 인생의 길을 갈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린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열병을 앓은 아이처럼 낯이 뜨거웠습니다. 눈물 한방울이 주루룩 소리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존재적 슬픔입니다. 저의 모든 보행에 동행하신 듯한 분이 뜨거운 제 이마를 짚어 주십니다. 그 분의 봄바람 같은 숨결이 제 콧잔등에 느껴지고 저는 이내 그 분의 촉촉하고 진실어린 눈망울에 깊이 빠져버립니다. 아! 그 안에 제가 보입니다. 제 눈물이 보입니다. 그 분께서 저를 태고부터 동행하셨음이 직감적으로 알아집니다. “사랑한다” 하시던 끊임없는 그분의 말씀이 이제서야 들립니다. ‘아! 나는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구나! 그 분의 사랑안에만 존재하는구나! 그 분의 사랑의 눈망울 속에서만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구나!’ 그때서야 알아먹어 집니다. 

< 최봉규 목사 - 토론토 드림교회 담임목사 >


4월16일 개강… 건강·교양 등 다양한 프로그램

가든교회(담임 정관일 목사)가 60세 이상 동포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가든 실버칼리지’ 2014년 봄 학기가 4월16일(수)개강을 앞두고 수강할 노년학생들을 모집한다.
4월16일부터 6월25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2시40분까지 유익하고 다채롭게 운영하는 가든 실버 칼리지는 이번 학기 주제를 ‘노인들이 공경을 받으시는’(레 19: 32)으로 정하고, 각 분야 전문인들이 강사로 나서 참가 학생들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삶의 질을 높여 신바람 나는 행복한 노년을 살아가도록 돕는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건강한 삶을 위한 체조와 골프지도, 탁구, 줌바댄스 등과 노래교실, 실용영어, 수채와 유화 등 그림지도, 컴퓨터, 서예, 리코더연주, 그리고 한방치료, 전문의가 지도하는 건강관리 예방과 치료, 성인병관리 등 웰빙, 레크레이션 등이 진행된다. 특별강의로 낙상방지 강의도 마련되며,리무진버스를 타고 St,Jacob 메노나이트로 봄 수학여행도 다녀올 예정이다.
60세 이상이면 누구나 환영하며, 참가회비는 쉘본과 핀치, 던밀에서의 차량픽업과 점심을 포함해 $10이다.
 
< 문의: 416-490-90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