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주변 인물들의 비리 의혹이나 일탈 행동이 불거질 때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공식’이 있다. 당사자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꼬리자르기용 탈당(또는 제명)’을 한다. 새누리당은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다가 나중에 혐의가 확인되면 ‘개인적 차원의 일’이라며 발뺌한다. 부정부패, 특히 측근 비리에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공언해온 박 후보 역시 측근들의 문제가 터지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현영희 의원의 공천헌금 사건이나 정준길 전 공보위원의 ‘안철수 원장 불출마 협박’ 사건이 모두 이 공식대로 진행됐다.
박 후보의 경선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홍 전 의원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부인하면서 어제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이번에도 당 차원의 진상규명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친인척 및 측근 실세들의 부정비리 차단 대책을 발표하며 기세를 올리던 정치쇄신특별위원회(위원장 안대희)도 막상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유명무실한 모습이다.
 
홍 전 의원 사건의 진상은 앞으로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중앙선관위가 한달 이상 면밀히 조사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선관위가 수사의뢰보다 한 단계 높은 고발 조처를 한 것도 사건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일부 친박계 핵심 인사들은 “선관위가 여당인지 야당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불만까지 토로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다.
새누리당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박계 실세로 꼽히는 송영선 전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용’이라며 정치자금을 요구하고 다닌 사실도 밝혀졌다.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국방부 장관으로 갈 수도 있고, 차관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 녹취된 송 전 의원의 발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눈을 넓혀보면 박 후보의 측근 인사임을 내세워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단지 송 전 의원 한 사람뿐이겠는가.
 
박 후보의 측근비리 척결 의지는 이제 중요한 시험대에 올랐다. 현실로 등장한 홍사덕·송영선의 비리 의혹은 외면하면서 계속 허공에 대고 정치쇄신 구호를 외쳐서는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검찰의 수사 결과 역시 주시할 대목이다. 검찰의 새누리당 봐주기 수사는 더는 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선관위가 고발한 사건까지 흐지부지 만들어버리는 파렴치한 행태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결국 내곡동 사저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모양이다.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권재진 법무장관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고 법제처 역시 최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대통령과 정부의 이런 태도는 법리적으로 설득력이 약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무책임한 짓이다. 특검 대상자이기도 한 이 대통령 개인으로선 인간적으로 구차하고 비겁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부처가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 정도다. 고발 당사자가 특검을 추천하고, 그것이 특정 정당이라는 점에서 특검의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008년 1월의 헌법재판소 판례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특검법 거부 사례를 들고 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설득력이 약하다.
 
이번 특검의 수사 대상이 바로 이 대통령이기 때문에 위헌 여부도 이를 전제로 판단하는 게 옳다. 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측근인 김백준씨를 시켜 비비케이특검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린 게 바로 2008년 1월 판례다. 결정문엔 “국회의 정치적 정책적 판단이 권력분립 원칙에 어긋난다거나 입법재량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며 특검 선정에 대한 국회의 재량을 넓게 인정하고 있다. 청와대 주장대로 특정 정당이 추천해서 위헌이라면 대통령을 조사하는 특검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야말로 위헌 소지가 더 큰 게 아닌가. 이런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해 여당이 먼저 야당에 추천권을 양보한 것을 두고 위헌 운운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야당 의원들 말처럼 “피의자가 검사 교체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여당과 박근혜 후보에게 상당한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지난 2일 청와대 단독회동에서의 ‘양해설’이 확산될 수도 있고, 국회에서의 재처리 부담도 박 후보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론, 이 대통령 개인의 태도 문제도 걸려 있다. 잘못을 했으면 설사 참모들이 반대하더라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게 지도자의 기본자세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특검의 칼날을 피해보려 발버둥치며 정부와 여당, 나아가 대선 후보에게까지 부담을 지우는 건 대통령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인권의식 등 여러 면에서 ‘헌법’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대통령이 이런 때만 ‘위헌’ 운운한다면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독일 베를린은 특별한 정신적 공기가 있는 도시다. 시내 한복판엔 2차 대전 때 폭격당한 교회가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독재가 낳은 재앙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훔볼트대학 맞은편 베벨 광장엔 텅 빈 책장들만 있는 지하 조형물이 있다. 히틀러의 분서갱유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어느 횡단보도 앞 길바닥엔 이 블록을 깔았던 노동자가 독재에 저항하다 1944년 몇월 며칠에 희생되었다는 동판이 있다. 모든 곳이 역사의 기록이다.

독일 민주주의의 심장인 이곳 베를린에서 역사는, 나치 체제가 무너진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를 읽는 창이자 미래를 건축하는 지반이다. 
역사인식은 단지 과거 해석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틀이자 미래에 대한 상상이기 때문이다. 독재의 역사를 심판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암묵적으로 긍정하는 것이고, 현재 속에 남아 있는 그 유물에 불감한 것이며, 미래의 독재를 은연중에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선 후보와 새누리당 의원들, 여러 보수인사들이 박정희 군사반란과 유신독재, 인권유린에 대해 취한 태도는 이들의 역사인식 문제뿐 아니라, 이들이 말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게 한다. 이 사안을 과거사 인식과 반성 문제로만 대할 것이 아니다. 대권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앞에 두고 무엇을 못 하겠는가? 사과도 하고, 생각도 잠시 바꾸고, 엎드려 절도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독재와 단절하지 못한 이 집단의 존재 자체고, 이들이 구상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다.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만들어질 역사가 관건이다.

지금 박근혜 대선 후보와 새누리당은 독재정권과의 정치적·정신적 연계를 은닉하고 오직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한다. 경제민주화로 국민통합 하는 미래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미래는 중요한 정치적 맹점을 하나 갖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경우에 따라’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전제 위에선, 어떤 대단한 공약도 공허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독재권력의 품에서 탄생하여 그것을 긍정하며 성장한 이 집단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다. 역사는 밟고 지나가면 사라지는 과거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제도와 문자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는 영원한 현재다. 살아남은 썩은 역사를 도려내지 않는 한 새 역사는 없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역사논쟁 없는 미래담론을 유도하는 것,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를 대립시키고 문제는 오직 경제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시민들을 당장의 경제적 이해 관심에 감금하고,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공통된 통치술이었다. “우리가 밥을 주겠다. 그러니 밥을 주지 않았던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 왜 일까? 미래의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해서, 미래의 약속에 걸맞지 않은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 실은 미래의 세력이 아니라 과거의 세력임을 잊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민주화 이후’라는 말을 즐겨 썼다.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민주화 이후라는 단계론이 유행했다. 민주/반민주의 대립은 구시대적이고, 이제 경제, 복지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는 없다. 민주주의는 한번 손에 쥐면 그대로 있는 사물이 아니라, 퇴화하고 진화하고 쓰러지고 일어나는 생물이다. 기득권 계급의 경제권력, 관료권력, 언론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민주적 권리 신장과 제도적 진보 없인 경제정의도 복지국가도 없다. 유신의 후예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1500자 칼럼] 스쿠발로지

● 칼럼 2012. 9. 17. 18:04 Posted by SisaHan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속으로 실소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글의 내용도 그렇고 제목도 그렇다. 
먼저 제목을 보자. 이 ‘스쿠발로지’란 옥스포드 사전이나 웹스터 사전에 나오지도 않는 영어 단어이다. 영어를 쓰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라 해도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 이 단어를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세상에! 영어 단어를 만들다니. 이 단어의 출처는 헬라어의 ‘스쿠발론’인데 성경 빌립보서에서는 ‘배설물’이라고 한다. 이 스쿠발론에다 학문이나 론을 말하는 로지를 붙여 ‘스쿠발로지’란 단어를 만들었다. 
 
이 스쿠발론은 사람의 몸에서 배설되는 것으로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이것은 최고의 것으로 만든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자신이 먹을 때는 어쨌던 최고 최상의 것으로 먹고 몸 속에 들여다 놓은 것이다.
둘째 늘 가지고 다닌다. 적절한 시간이 올 때까지는 몸 속에 늘 담고 있으며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셋째 그러다 적절한 시간이 되면 꼭 버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만든 것이라해도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스쿠발론에 대한 나의 지론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배설물 스쿠발론을 말할 때 자신이 가졌던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과감히 버렸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실소를 한 것은 나의 실수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는데 저자가 한 번은 전남의 한 사찰을 방문했다가 해우소(뒷간)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씌어진 글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의 내용은 이랬다. “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세요.” 저자는 이 글을 읽고 해우소에서 나와 그 앞에서 쪼그리고 그렇게 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실수한 것은 이 글을 읽은 뒤 너무 감동적이어서 글의 내용만 기억하고 내 나름대로 각색해서 전달했다가 실제 내용과 약간 다른 것 같아 나의 실수에 실소를 했다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번뇌와 고민을 밀어내기 위해 얼마나 힘썼습니까? 그러니 원문과는 차이가 있으니 저자께서 아시면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그런데 나는 내가 한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쿠발론을 결코 몸속에 가지고 있으면 안되기에 밀어내려고 얼마나 용을 쓰는가? 특히 변비 때를 생각해 보라. 안간힘을 쓰면서 힘을 주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스쿠발론과 같은 것을 과감히 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의 신앙생활하는 모습이다. 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하고 이제는 결별해야 할 때는 버려야 한다. 그것이 혹시 사랑스럽고 귀한 것이라 해도 버려야 한다는 각오를 했다면 용을 써야 한다.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쿠발론을 그대로 몸 속에 둔 채 그냥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선택의 길이 아닌가? 
또한 내게 주어진 어떤 문제나 고통을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고 기도할 때 또는 자신이 가진 교만이나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포기하려 할 때 그게 쉽지가 않아 고민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럴 때 해우소에 들어간 사람처럼 용이라도 써 봤을까? 그냥 그렇게 있다가 어정쩡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나 않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