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안보장사’로는 미래 없다

● 칼럼 2012. 10. 22. 18:12 Posted by SisaHan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열렬한 환대를 받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물병 세례를 받는 등 봉변을 당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도 “저 ××가 왜 여기 왔어”라는 등의 냉대를 받았다. 지난 일요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이북도민 체육대회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일부 실향민들이 세 후보에게 보인 각기 다른 반응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해묵은 숙제 하나가 여전히 우리 현실을 짓누르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른바 ‘반공 이데올로기’다. 해방 이후 극심했던 좌우익 대결과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반공 이데올로기가 6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6.25를 전후해 고향인 북한땅에 모든 것을 남겨둔 채 쫓겨나다시피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에 대해 갖는 적개심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실향민들 중에서도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은 증오심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우리 사회 전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산시킨 것은 수구성향의 정치권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5.16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도 광주민주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붙였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숱한 간첩사건도 북한을 끌어들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조작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간첩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시대착오적인 이런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새누리당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이 저지른 일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민주당이 추천한 조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인준안을 올 2월 부결시켰다. 최근 새누리당이 제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새누리당은 NLL 문제는 영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그들이 무얼 노리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노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했던 문 후보에게 ‘종북 올가미’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대선 과정에서 정치적 타격을 주고자 하는 뻔한 속셈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색깔론’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일정 정도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효창운동장에서 그 효과가 나타났다. 일부 실향민들은 문 후보에게 ‘영토포기 매국행위’라는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며 ‘함경도 빨갱이 물러가라’고 윽박질렀다. 한 참석자는 문 후보에게 ‘종북 아니죠’라고 다그쳤고, 문 후보 쪽은 ‘네 아닙니다’라는 응답을 해야 했다. 이 와중에 열렬한 환대를 받은 박 후보는 “누구보다도 안보라든가 자유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 앞장서시는 분들을 만나서 반갑다”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자신만이 안보를 책임질 후보이고 나머지는 대북관이 의심스럽다는 분위기를 은연중 풍기고 있는 것임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새누리당과 박 후보는 국가 안보를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는 ‘안보장사’를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됐다. 퇴행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대 정권을 유지하려는 건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남북관계가 어그러지면서 소모적인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남북 모두 나라 안팎에서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르고 있음은 지금 보는 그대로다.
박 후보는 올해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함께 국민대통합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도 상대에겐 끊임없이 ‘네 색깔을 밝히라’며 편을 가르려 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다. 제발 미몽에서 깨어나기 바란다. 케케묵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정치세력에겐 미래가 없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1500자 칼럼] 가을에 머무는 생각들

● 칼럼 2012. 10. 16. 14:42 Posted by SisaHan
‘논산집’에선 혼자 있을 때가 많다. 혼자 있으면 밥이 문제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어서 설령 냉장고에 반찬이 많이 있어도 꺼내 먹을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이른바 ‘절필’하고 용인 변방의 외딴집에서 혼자 3년여 살 때도 몸무게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그 이유가 모두 밥 때문이다. 혼자 먹을 때는 단지 생존을 위한 식사인지라 김치 한 가지만 내놓고 물에 만 밥으로 겨우 공복을 때우기 일쑤다.
아내가 따라 내려와 있으면 식사 시간이 원만하다. 따뜻한 밥과 국을 정갈히 차려주는 건 물론이고 식사 동행이 있으니 식욕이 상한가로 발휘된다. 결함이 있다면 계속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함께 산 아내는 어느덧 그 포즈가 ‘늙은 어미’ 같아져서 철없는 막둥이가 된 듯이 잔소리를 종일 들어야 삼세끼 밥을 얻어먹는다. 아내가 늘 돌보는 집이 아닌바, 보는 것마다 마음에 차지 않아 잔소리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논산집’에서의 아내는 반가우면서 동시에 성가시기도 한 ‘손님’ 같은 존재가 된다.
2박3일 동안 아내가 내려와 있다가 올라가는 길. 저녁을 먹고 읍내까지 데려가 버스를 태워 보내고 나니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다. 차를 몰고 혼자 호숫가 집으로 되돌아오는데 어느새 수북이 깔린 낙엽이 노변에서 밤바람에 들까불며 날린다. 어떤 벚나무는 그 잎이 이미 붉어 단심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고, 어떤 낙엽송은 아직 푸른 청춘의 모습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 그래 봤자 도긴개긴이라, 머지않아 낙엽은 다 져서 제 근본인 뿌리로 돌아갈 터이다. 버스 속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아내의 얼굴이 어둔 호수와 낙하하는 나뭇잎들 사이에 잔영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게 “언젠가 네 곁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모든 연애는 필연적으로 ‘일상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 수상한 세월 속에서 낭만적 사랑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나날이 깨달아야 되는 제도권 결혼생활에선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결혼을 통해 사랑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의미에선 착각에 불과하다. ‘연애’는 나날이 조금씩 까먹고 그 자리에 ‘우의’를 더께로 쌓는 것이 결혼생활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꼭 쓸쓸해할 일만은 아니다. ‘연애’란 고도의 생물학적 긴장상태일 터, 만약 계속 뜨거운 연애를 지속해야 한다면 일찍 죽게 될 게 확실하다. 연애의 ‘일상화’는 그러므로 우리를 오래 살게 만든다. 지혜로운 자는 오래 산다고 하지 않던가. ‘연애’를 ‘우의’로 바꿔가는 걸 ‘지혜’라고 불러도 좋은 이유가 거기 있다.
순서는 알 수 없으나 아내와 나는, 젊은 날 철없이 맹세했던 그대로 어쨌든 ‘곁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게 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감수성이 예민해 아직도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인생을 사는 나 같은 사람이 굴절 많았던 세월 속에서 아내와 함께 이만큼이나마 지내온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사랑이 나보다 깊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성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물론 실패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 보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취향에서 아흔아홉 가지가 다르고 겨우 한두 가지쯤 같은 타인과 만나 이렇게 오래 함께 걸어온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가을이다.
가을은 초월을 생각하게 만든다. 초월은 허황한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꿈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주체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디에서 비롯돼 어디를 어떻게 지나와 오늘, 여기 있는 것일까. 속절없이 나뭇잎 지는 계절과 만나면 생각은 저절로 여기에 이른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생이다. 오래 함께 걸어와 이제 갈무리의 계절에 당도해 있으니 아내는 이미 나의 초월적인 꿈속에 깃들어 있다. 삶의 연속성이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져 온 먼길이려니와, 과연 나의 초월적인 꿈속에 들어와 이 가을, 함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또 누구누구일까.

< 박범신 - 작가, 상명대 석좌교수 >


[칼럼] 왜곡과 편파의 부메랑

● 칼럼 2012. 10. 16. 14:38 Posted by SisaHan
2007년 대선 때 조중동 등 수구언론은 노골적으로 이명박 후보 편을 들었다.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그랬다. 경선이 끝난 뒤 박근혜 후보의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그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도 언론계 (생활을) 40년 했는데 절실하게 반성합니다… 막판에는 우리도 (언론들을) 다 포기했어야 했어요. 다 저쪽(이명박 후보) 편인 것 같으니까.” 그의 발언에서 조중동 등의 왜곡과 편파적인 정치 플레이의 혹독함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2007년 대선 때 나온 수구언론의 ‘박근혜 불가론’은 실제 훨씬 이전 시작되었다. 대표작품이 2005년 9월의 조선일보 인터넷판 ‘조선닷컴’의 기사인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다.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가장 먼저 든 이유는 “내용은 별로 없으면서 ‘이미지 정치’만 한다” “‘민생정치’의 전도사로 그는 자처하고 있으나, 대선 예비후보로서 민생의 기초인 경제 등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콘텐츠가 없다는 말이다. 조선닷컴은 심지어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미지는 좋은데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전했다. 그밖에 △‘박정희 후광’과 ‘유신공주’라는 비판 △정치지도자라기보다는 연예인 같은 인기 △정수장학회 등 재산 의혹 △스킨십이 부족한 박근혜식 정치 △물러서지 않는 고집 △베일에 가린 사생활 △비정상적인 개인 성장사 등을 ‘대통령 불가론’의 근거로 내세웠다.
조선일보의 이 작품이 올 대선을 앞두고 요즘 새삼 인기다. 인터넷과 에스엔에스(SNS)에서 왁자지껄하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 편을 적극 들면서 ‘박근혜의 약점’으로 끄집어냈던 내용들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트위터에서 바로 이 작품을 되치기했는데, 이른바 ‘역관광’이다. ‘조선이 까발린 박근혜의 약점.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라는 트위트의 ‘역관광’에 반응이 뜨겁다. “조목조목 급소를 때렸네요.” “(조선일보가) 이런 깜찍한 기사를 쓴 적이 있군요.” “2012년 대한민국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상식” 등의 반응이 잇따랐다.
 
그렇게 ‘박근혜 불가론’을 폈던 조선일보 쪽이 표변하여, 종합편성채널 개국 첫날 방송 때 보인 ‘박근혜 사랑’과 아부는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지난해 12월1일 개국 방송 때 조선일보 종편은 박근혜 의원과의 회견을 내보내면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그리고 그 이후 줄곧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이 지금 대선 국면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서 여론조사 결과가 야권에 조금 유리하게 전개되자 그들의 수구 카르텔의 집권연장 가능성에 조바심을 내면서 야권 후보에게는 매몰찬 잣대를 들이대는가 하면,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에는 적극적인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6일치 조선일보 사설 “‘새누리당 헌 체질’론 12월 대선 보나 마나다”는 적극 훈수의 한 예다. 이 사설은 한편으로는 대선 승리를 위해 새누리당에 심기일전을 세차게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4.11 총선 때처럼 여권의 위기의식을 촉발해 수구성향의 여권표를 결집시키고, 야권에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전략도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불가론’을 폈던 조선일보의 놀라운 변신이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 편을 들 당시 박근혜의 치부와 약점을 들추어냈던 그 칼날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일고 있는 역관광의 신바람은 특히 젊은 세대에 치명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박근혜 후보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렇듯 적은 늘 가까운 곳, 내 편, 내 안에 있다. 단일화가 지상명령이 된 야권에서도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자기분열, 자만은 내 안에 있는 가장 큰 적이다. 

< 정연주 - 언론인 >


한글날은 이름만 국경일일 뿐 마지못해 치르는 기념행사일로 전락했다. 그런데 올해는 연초부터 유별난 주목을 받았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선풍적인 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압도적 다수로부터 지지를 받는 한글날 공휴일 지정 운동 덕이 컸다.
한글학회와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가 발동을 걸었고, 찬반 논란이 많은 정부 안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운동의 총대를 멨으니 불은 쉽게 붙었다. 여기에 민주통합당이 지난 5월 19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관련 법안을 발의했고,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차원에서도 공감대가 넓다. 문제는 담당부처인 행정안전부다. 법정 공휴일이 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업들의 눈치를 보는 청와대와 경제부처 때문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반대 이유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한 1991년이나 비슷하다. 당시 총무처는 이완된 사회분위기를 바로잡고, 연휴를 줄여 수출부진 등 업계의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영세민 취로사업 감소와 병원 휴무로 인한 불편 따위의 핑계도 댔다. 지금도 자영업자 수익 및 일용직 노동자 일감 감소 따위를 대는 건 그때와 판박이다. 산업구조 재편 등으로 근거가 사라진 주장들이다. 오히려 공휴일 지정이 생산성 향상, 고용 확대, 내수 촉진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이 더 많다.
반대론이 간과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의 구성 요소가 영토, 국민, 주권이라지만, 국가 정체성 형성의 근본은 말과 글이다. 한글은 일제의 병탄과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그런 한글을 무시하면서 애국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한글은 이 정부의 영어 중시 정책으로 말미암아 2등 언어로 밀려날 판이다.
 
한글은 우리의 자랑일 뿐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다. 창제의 주체, 원리, 목적, 철학이 뚜렷한 세계 유일한 언어가 한글이다. 발성 구조와 철자를 일치시켜 세계의 어떤 말이든 표기할 수 있고 또 표기된 것을 소리로 재현할 수 있다. 이런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문서의 작성, 전송 그리고 음성 인식 등 디지털 시대에 뛰어난 효율성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창제의 위민정신은 모든 위정자의 본이 된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국력에 실려 언어가 확산됐다면, 이제는 국력이 문화의 힘에 의존한다. 한글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최고의 소프트파워다. 문화로 승부를 걸겠다면 당장 한글 르네상스를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한 첫발은 공휴일 지정에서 떼야 한다. 더 미룰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