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보람 있는 삶을 위하여

● 칼럼 2012. 10. 2. 18:38 Posted by SisaHan

인간의 본성가운데 삶의 질을 높이며 살려는 끝없는 욕망, 그리고 보람을 추구하며 살고자 함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간의 괴리로 갈등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우리들의 고민이며 현주소이기도 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피라밋모양의 다이어그램으로 잘 설명해 놓았다. 먹고 입고 자는 육체적인 욕구, 안전과 안정감에 대한 욕구,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 그리고 다음 두 단계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와 자기실현의 욕구다. 생리적인 욕구나 안전에의 욕구는 지극히 본능적으로 동물들과 별 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최고봉은 보람과 자아실현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보람되게 사는 데서 찾는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스스로 자신감을 갖기를 원한다. 마슬로우는 자아실현의 내용엔 잠재적 능력 및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개인의 본질이 갖고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함에 있음이오 자아실현이란 질병·신경증·정신병 또는 인간능력의 상실 또는 감퇴가 가장 적게 존재하는 상태를 유지됨이 있어야한다 했다.

아는 것이 머리에 속한 것이라면 행동으로 옮기는 마음은 가슴에 속한다. 머리와 가슴사이의 거리는 불과 18인치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나 때론 천리 길도 더 될 만큼 멀기 만하다.
천리 길도 더 된다는 것은 말은 많으나 행위의 결실이 적어 덜컥거리는 빈 수레 소리같이 요란스럽다는 말이다.
인간 두뇌의 조화로 인간사가 펼쳐지고 있으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요 그 마음은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 마음이 두뇌 속에 존재하는지는 아리송하나 희로애락의 현장은 가슴에 있음을 경험한다. 기쁨과 감격적인 순간이 벅찬 가슴으로 표출된다. 가슴 속에 심장이 있고 심장 박동은 감정 표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인정해달라는 아우성은 끊임없다. 인관관계 문제의 도화선은 많은 경우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평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을 인정해주는 것, 남을 배려해 주는 마음, 이런 사회라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주기보다 받기를 원하며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란 것을 깨우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때론 자기희생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실천하지 못한다.
보람은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만족을 느낄 때다.
아는 것, 지식의 축적은 혼자 할 수 있으나 행하는 것은 상대가 있고 더불어 하는 작업이다. 수혜자와 공급자 양자구도적인 입장에 처할 때 수혜자가 되기보다 공급자의 임장에 서있기를 소원한다. 공급자는 군림 또는 지배자의 입지를 세울 수 있으나 수혜자는 자칫 비굴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질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면 모순된 발상일까?. 나를 보람있게 해주는 일은 진정 어떤 것일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로 인하여 단 한 사람의 이웃이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 있을까!
진정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을까도 자문해본다.
인간 본성 가운데 선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 좋은 가치관 형성…등이 있음은 분명 구원의 심볼이다. 이른 새벽, 오늘도 보람 있는 삶을 위하여 마음을 들여다 본다.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

정치가 난장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상이 나돌고 있다. ‘어느 나라나 똑같아요’라는 제목의 영상이다. (www.youtube.com/embed/4CYqw4s6XF8?rel=0)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한 여성의 젖가슴을 은근슬쩍 만지는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영상에는 돈, 술, 여자, 지퍼, 까만 세단, 그리고 지루해 못 살겠다는 표정으로 졸고 있다가 삽시간에 몸싸움을 벌이는 날렵한 국회의원들이 등장한다.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정치 막장 드라마를 보여주는 이 영상은 정치란 ‘맷집 센’ 이들의 게임이라는 것, 온갖 무시와 모욕을 거뜬히 견디는 특이한 권력적 인간들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섣불리 나설 게임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일본의 친구는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그나마 선택을 고민할 후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선거가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바쁘게 움직이는 국민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만들기를 하는 ‘정치꾼’들과 이참에 돈을 벌어보려는 장사꾼들만 극성을 부리고 있다. 조지 클루니가 주연한 <킹메이커>라는 영화가 보여주듯이 대통령 후보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연기를 잘하고 감독과 연출자를 잘 만나면 된다. 실세는 돈, 조직, 두뇌를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이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국민들이 있다. 대통령 후보들과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협상하고 후보가 당선된 뒤 약속한 것을 받아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행보가 종종 진정한 대안을 향하기보다 전리품을 나눠먹으려는 집단이익주의로 흘러 다수 국민의 등을 돌리게 한다. 그래서 선거는 외면당하고 정치 난봉꾼들만 신명을 내는 스펙터클한 쇼로 전락해버린다.
선거는 힘겨루기의 장이 아니다. 인류사회의 정치는 중지를 모으고 합의에 도달하는 기술이자 예술이었다. 정치가 특이체질 인간들의 힘겨룸의 장이 된 것은 정치가 교착상태에 빠져버린 최근의 일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몸을 맡긴 채 모두가 투자자와 소비자, 투기자가 되어야 했던 상황, 국민국가 단위가 독자적으로 할 일이 줄어든 문명전환의 혼란기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인 것이다.
지금 인류는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거대한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세계 수준에서,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생활 차원에서 일고 있는 무수한 위기를 함께 타개하는 일이다. 이는 현재의 갈등과 반목, 대립의 상황을 직시하고 중지를 모아 그 ‘너머’로 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잡다한 기득권 조직이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는 현 체제를 바꾸어내고, 정치를 그 본래의 자리, 곧 합의에 이르는 기술이자 예술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번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이를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어느 후보도 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풀 사람은 실은 현재의 정치판에서 멀찍이 떨어져 팔짱끼고 있는 국민들 자신이다.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노년과 장년 세대가 자신들의 공이 인정되지 않음에 분노와 상실감을 드러내는 것, 정당한 일이다. 또한 이전 세대가 채택한 불균형 발전의 결과로 엄청난 국가부채와 자연 고갈, 그리고 환경오염의 위험부담을 떠안게 된 ‘빈털터리 청년 세대’가 분노하지 않고 은둔하는 것, 역시 이해 가능한 일이다. 이번 선거가 이런 복잡한 감정을 가진 다양한 국민들이 소통하고 역지사지하는 장이 될 수는 없을까? 성인이 된 자녀들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과 삶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청년들이 나선다면 분명 지각변동은 일어날 것이다.
우리 자신 역시 언제든 ‘권력지향적 괴물’이 될 위험이 다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성숙한 시민들이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약속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해내야 할 일이다. 하늘이 드높아가는 가을, 나라의 주인으로 소통과 상생의 싱싱한 축제판을 열어가 보자.

< 조한혜정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올해 대선을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은 ‘새로운 정치’다. 정치 개혁의 깃발을 전면에 펄럭이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후보 때문만이 아니다. 안 후보가 대선 출마의 변으로 ‘새로운 정치’를 들고나온 것은 기존 정당의 후보들을 ‘낡은 정치’의 프레임에 가두려는 정치적 포석의 성격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정치 문외한인 그를 대선 주자로 이끌어낸 가장 큰 동력이 새로운 정치에 대한 대중의 갈증인 점 또한 분명하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앞다투어 정치 쇄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이런 국민적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세 후보가 내세운 새로운 정치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진정성과 현실성을 갖추고 유권자들한테 다가올 것인지다. 새 정치 실현의 첫번째 리트머스시험지는 올해 대선의 선거전 양상이 될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검증을 가장한 상대방 흠집 내기, 흑색선전, 의혹 부풀리기 등 구태의연한 선거 풍토가 되풀이돼서는 정치권은 새로운 정치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새로운 정치는 선거운동의 변화 차원을 떠나 정치의 관행과 제도, 문화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사람은 바로 안철수 후보다. 안 후보는 정당에 기대지 않는 선거운동, 네거티브 없는 선거운동 등을 새로운 정치의 아이콘으로 제시했다. 이런 항목은 새로운 정치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새 정치를 실현할 정치조직 구성의 문제, 책임정치 구현 방안 등 ‘구호로서의 새 정치’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서의 새 정치’를 선보여야 할 책무를 안 후보는 안고 있다.
박근혜 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 후보는 지난 총선에서 정치 쇄신의 깃발을 내걸고 승리했으나 총선 이후의 행보를 보면 새로운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과거사 인식을 둘러싼 새누리당의 난맥상, 측근들의 잇따른 비리 의혹에 대한 대처 방식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인지배의 정치, 궁정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준길 전 새누리당 공보위원의 ‘안철수 교수 대선 불출마 협박’ 사건 등에서 보인 박 후보의 태도도 새로운 정치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한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의 경우 낡은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가장 큰 압박을 받고 있다. 당내 패권주의와 계파정치 등의 타파 요구는 이미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강하게 분출됐다. 시민사회의 열정과 요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폐쇄적 정당 구조,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설득력있는 정책 비전을 내놓지 못하는 당의 무능력 등에 대한 해법도 내놓아야 한다.
낡은 정치와의 결별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창출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새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열망에 누가 더 잘 부응하느냐는 바로 대선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될 것이다. 세 후보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선거의 수준, 나아가 한국 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길 기대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대학 강연에서 법관으로서 겪었던 유신시대의 아픈 과거를 생생히 증언했다. 사법부 수장까지 지낸 이 전 대법원장의 육성 증언은 유신이 그 잘잘못을 역사가 판단하도록 남겨둘 과거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냉철한 판단과 평가를 요구하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이 전 대법원장은 고려대 강연에서 1972년 유신을 위한 계엄 선포 직후의 코미디 같은 사법부 풍경을 소개했다. 마리화나 사건, 폭력 사건, 윤락녀 단속과 같은 일반 형사사건들이 하루 사이에 계엄사건으로 둔갑하면서 집행유예 판결에서 징역 3~5년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재판정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계엄사건’으로 딱지를 붙이자 검사와 판사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이 전 대법원장은 “폭압적인 정치권력 앞에서 헌법이고 법치주의고 다 소용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아픈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대법원장은 “유신헌법은 1인 독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라며 “헌법이란 이름으로, 헌법에 기초한 걸로 해서 6년간의 1인 독재가 시작된 게 유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신을 독일 나치의 일당독재와 비슷한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유신시대의 긴급조치에 대해선 “긴급조치 사건 내내 피고인들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모두 적법하다고 판단했다”며 “우리 사법 역사의 큰 오점으로 너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했다.
이 전 대법원장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깨어있는 법률가, 저항하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법률가들이 법대로 나라가 통치되고 있는지 (검증하는) 비판세력이 돼야 한다”며 “우리나라나 독일에서 법률가들이 사회의 건전한 비판세력이 된 적이 없다는 게 법률가들의 비애”라고 말했다. 그는 “법률가가 역사를 모르면 얼마든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악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선진국”이라며 “저항하는 깨어있는 국민이 있어야 진정한 민주국가”라고 말했다.

이 전 대법원장의 강의는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유신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과거의 일을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고 묻어두는 국민에겐 미래가 없다. 과거의 사건은 항시 현재를 사는 이들이 평가하고 재해석함으로써 그 존재 의의를 갖는다. 유신에 대한 평가를 흐지부지 묻어두고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