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나눔의 미학

● 칼럼 2012. 11. 10. 19:56 Posted by SisaHan
‘나눔’은 아름다운 단어다. 나눔은 배려, 성찰, 소통 등과 함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단어가 ‘먹다’와 만나면 갑자기 불결한 언어가 되고 만다. ‘먹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들어버리는 치명적 마성을 지니고 있다. 음식물의 섭취는 인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위인데도 실제 현실에서 먹는다는 말은 그다지 아름답게 쓰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다른 단어들까지 오염시키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단어다.

‘나눠 먹기’는 정치권에 들어오면 더욱 불결해진다. 권력의 나눠 먹기는 탐욕, 음모, 편법, 비겁함 등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도 이미 나눠 먹기에 대한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채 본격화하기도 전부터 새누리당은 이들을 향해 “권력을 나눠 먹으려 혈안이 돼 있다”며 핏대를 올린다.

후보 단일화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후보 단일화=나눠먹기’라고 규정하는 것도 성급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눠 먹기라는 게 그처럼 매도해야 할 ‘절대악’인지도 참으로 의문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나누어지기를 거부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권력이다. 이런 대단한 권력을 나누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일이다. 민주주의 역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눠지기를 거부하는 권력을 기어코 나누려는 인간 분투의 기록이다.

나눠 먹기보다 훨씬 위험한 것은 오히려 ‘혼자 먹기’다. 권력 독식의 위험성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져온 권위주의 체제뿐 아니라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서도 질릴 만큼 목도했다. 그들 본인과 친인척, 측근들의 왕성한 먹성은 그냥 ‘먹다’가 아니라 ‘해먹다’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 특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앞세운 한 전직 대통령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먹다 앞에 ‘따’라는 한 음절을 더 붙여야 온전한 의미가 살아난다.

따라서 권력 나눠 먹기는 무작정 비난만 할 대상이 아니다. ‘권력의 분점’은 오히려 적극 권장하고 고무 격려해야 할 미덕일 수도 있다. 특히 권력을 혼자 먹으려는 쪽은 감히 나눠 먹기를 욕할 자격이 없다.

나눠 먹기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도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권력 나눔의 예가 매우 희소한 것도 이를 증명한다. 안철수-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도 마찬가지다. 공동정부니 역할분담이니 하는 말은 무성하지만 아직까지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동안의 흐름을 보면 후보 단일화 문제마저 승자 독식의 논리에 매몰돼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문-안 두 후보가 진정 후보 단일화를 이루려면 그 과정에서의 나눠 먹기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보란듯이 제대로 된 나눠 먹기를 해보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여기서도 충실히 작동해야 한다. 80~90%를 자신이 차지하고 상대방에게는 10~20%만 주겠다는 이기적 태도로는 제대로 된 나눠 먹기를 할 수 없다. 각자의 정치적 욕망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얼마나 적절히 조화시키느냐가 나누기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관건이다.
둘째, 둘만의 나눔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나눔의 원칙과 의미뿐 아니라 나눔이 구체적으로 국리민복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나눔이 가져올 정치사회적 발전의 미래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나눔의 과실을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혼자 먹기’에 대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지나치면서도 ‘나눠 먹기’에 대해서는 손가락질을 하는 모순된 심리의 밑바탕을 허물지 않고서는 나눔의 정치적 의미는 퇴색한다.
셋째, 이번 기회에 나눔의 제도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표상되는 권력의 쏠림 현상을 완화하는 문제는 이제 당면한 시대적 과제로 대두했다. 두 사람의 나눔이 이런 논의의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위한 첫 만남을 가졌다. 앞으로 다음과 같은 평범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경구를 떠올리기 바란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나의 맨 얼굴

● 칼럼 2012. 11. 3. 18:15 Posted by SisaHan
산책하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잠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 이들이다. 고독한 만큼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참모습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무로 둘러싸인 숲을 드나드는 바람이며, 바다세상에서 밀려나와 해안에 머물다 돌아가는 모래알갱이들이다. 숲과 바다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그들은 두 세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닌다. 객관적이라는 단어 앞에 ‘비교적’이라는 제한을 두려는 이유는 세상 어느 것도 ‘주관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회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해야 할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산책길에서는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집 안팎의 잡다한 일들은 이미 접어두고 길을 나섰으니 과거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는 셈이고, 산책이 끝나면 어차피 마주치게 될 불확실한 미래를 굳이 앞당겨 불러들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선택의 순간이 많이 주어진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가보지 않아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호기심 어린 선택을 하며 새로운 길을 고집하기도 한다.
 
기웃거리며 망설이다 선택한 숲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린 홀가분함과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정신적 자유로움으로 타자와의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만남이 이어진다. 산책길에서는 우선 치장부터 간소하고 소박하다. 화장으로 돋보일 필요도, 부족함을 감출 필요도 없다. 사회에서 걸치고 있던 겉치레용 포장을 벗어버리고 자연인 자격으로 걷는 길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도 빈부의 차이도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말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좋고 혼자 고독해도 그런대로 좋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개인 또는 인격으로 해석하는 ‘person’은 연극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된 단어다. 연극배우는 가면을 써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다. 삶이 연극이라면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면을 쓰고 거기에 어울리는 겉옷을 걸치고 극중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란 퇴직할 때까지 역할극이 계속되는 연극 무대가 아닐까. 자신이 맡은 역할이 마음에 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할 배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 스스로 결정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는 하나 왠지 역할을 부여한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을 접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자신에게 잠시 맡겨진 운명적 역할에 우쭐하거나 주눅이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극 중에서 주어진 역할이 끝나면 가면과 포장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선생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왔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외출복을 벗으면 선생이라는 역할극의 소품들도 함께 내려놓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장소만 바뀔 뿐 엄마라는, 아내라는, 주부라는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벗어도 벗어도 찾기 어려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참모습의 정체성에 회의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일까, 끊임없이 의심했으나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은 낙엽 지는 숲 길을 택하여 걸었다. 노쇠한 잎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늙으면 생기를 잃은 누런 색으로 생을 마감하듯 자신의 역할을 마친 낙엽들도 그 비슷한 색깔이 되어 오솔길에 누워있었다. 어디선가 소슬바람이 불어왔다. 벗은 나무들이 내뱉는 가녀린 숨소리와 나뭇가지 끝에 걸린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세속의 경계를 넘나들던 바람결에 나의 페르소나가 잠시 벗겨지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나의 맨 얼굴이 궁금했지만 감았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나’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그랬을까.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

 

[기고] 둘이냐 하나냐

● 칼럼 2012. 11. 3. 18:14 Posted by SisaHan
너도밤나무는 동해 울릉도의 나무다. 나도밤나무는 본토 바닷가의 나무다. 둘 다 참나무 권속이다. 
그간 서너 차례 대선 야권의 두 진영에 대한 단일화가 촉구되었다. 단일화가 안 되면 촛불집회라도 열어서 그것이 되게 하련다는 절박한 발언도 나왔다. 
나 또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싶었으나 대선정국의 단련 기간을 좀더 지켜보는 쪽이었다. 이제 내 입이 열려 뒷북소리를 낸다. 
지금 새 세기의 입문 10년을 넘겼다. 이것은 세계사 내재로서의 한국사가 새로운 성찰이 담긴 실천사로 나서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제는 용왕제를 지낸 배가 난바다에 뜬 시간이다. 서론이 아닌 본론의 시대이다. 
이번 대선은 이러한 시대의식의 사유를 구현하는 정치축제이다. 여기에 이제까지의 정치행태에 대한 질적 전환을 전국민적 염원으로 삼는 이유가 있다. 그 어느 시기보다 국민적 또는 시민적 열망이라는 정치 자발성도 놀라운 노릇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표면의 역동성이 무색하게 절망으로 만연됐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길과 역사의 길이 합치되기를 바라는 합의 지향이 거기에서 뭉쳐진 것이다. 
특히 단일화의 명제 앞에 선 두 진영은 직업정치력보다 시민정치력을 자신의 품성 환경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성이 있다. 요컨대 둘은 대동소이하다. 어쩌면 이 사실은 하나는 청춘의 편이고 하나는 추억을 토대로 삼고 있는 자기조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의 본연성이 결코 인종의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다 기존 정치의 현장에서 닳아버린 전술주의가 아닌 역사 신인으로서의 정치지성이 풍부하다는 강점이 있다. 
우리에게 지겨운 정치욕망의 갈등과 그 답보로는 장차 도래하는 한국사의 운명에 필수적인 창조행위를 발휘할 수 없다. 나는 두 진영의 경박하지 않은 깊은 사려와 고민을 이해한다. 그들의 신중하고 겸허한 닮은꼴의 선택은 이른바 세습주의나 출세주의와는 또 다른 명분에 있다. 
이러한 상대성은 하나가 살면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죽으면 둘 다 죽는다는 그 상생의 가치 앞에서 하나가 죽어 하나가 사는 것이 아닌 둘이 살아나는 방식을 꿈꾸는 그 공존정치를 만들어내게 할 것이다. 
두 진영은 정치적 시간의 협약도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의 공동체도 가능할 것이다. 둘이 사는 방식은 곧 둘이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것은 연합 또는 복합이나 정치로서의 전기와 후기라는 접속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관념론인지 모른다. 관념은 현실을 설정하는 힘이다. 
가능한바, 둘의 단일화는 현대 한국 정치사의 최고 형태를 과시하는 명예미학이 될 것이다. 정치가 온갖 음모와 술책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유례가 없는 신기원으로서의 정치윤리를 온 세상에 고양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이겠는가.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두 진영과 맞서고 있는 한 세력은 현 정부의 의지와 장기간 쌓아온 보수의 막강한 환경역학이 총동원되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다 맞서고 있는 두 진영의 단일화를 야합이라고 탓하며 자신은 앞장서서 특정 지역의 기반을 흡수하는 정당 통합을 처리했다. 바로 이런 한 세력에게도 고언한다. 어떤 비판이나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선 구도의 현실은 여야의 실력으로 대결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바에야 한 세력이 상대방 두 진영의 분열을 조장해 그 이익을 챙기려는 내심보다 두 세력 단일화 이후의 양자대결에서 정당하게 이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선의 당위 앞에서 야권 단일화가 가지는 창조의 정치를 합작해내는 위대성을 기대한다.
 

< 고 은 - 시인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국회의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과 우리 쪽이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한다고 확인했다. 두 정상 간 비밀 단독회담은 없었고, 북한에서 전달한 녹취록도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녹취록 공개 요구에 대해서는 “국가안보가 더 중요하므로 여야가 합의해서 요구해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원 원장의 설명은 그간 정상회담에 관여해온 사람들이 말한 사실과 아귀가 맞는다. 당시 회담에 배석했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우리 쪽이 녹음한 것과 받아적은 것을 토대로 2부의 대화록을 작성해, 1부는 청와대에 보내고 1부는 국정원에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며칠 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바로 그 문서이다. 청와대 전달 문서는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에 따라 당연히 대통령기록관에 넘어갔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초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단독 비밀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고, 이런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 보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녹취록은 북한이 전해준 것이라고도 했다. 이 발언을 이어받아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야당에 국정조사를 하자고 나섰다. 박근혜 후보도 거들었고, 이명박 대통령도 백령도를 방문해 NLL 문제를 거론하며 측면지원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정 의원의 주장이었는데, 원 원장의 확인으로 그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 됐다. 정 의원과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도 공개되지 않은 대화록에 그런 발언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고 의문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문서를 봤다는 사람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내용을 말하거나 공개할 수 없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추정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당시 회담에 배석했던 김 전 원장,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NLL 포기 발언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 시점에서 정 의원이나 새누리당이 할 일은 ‘공개할 수 없는’ 문서를 마치 무엇이 있기라도 한 양 공개하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계속 문서의 공개를 요구하며 뭔가 있는 것처럼, ‘아니면 말고’식 정치공세를 펴는 것은 스스로 ‘국가안보’보다 ‘선거’를 앞세우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