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가 첫 회동을 통해 대통령선거 후보 등록 이전에 야권 후보 단일화를 해내기로 합의했다. 대선이 40여일 남은 상황에서 두 후보가 단일화의 대원칙에 합의함으로써 야권 단일화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두 후보는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배석자 없이 1시간15분 정도 만나 모두 7개 항에 합의했다. 후보 등록 전에 단일후보를 누구로 할 것인지 결정하고 정당혁신과 정권교체를 위한 새정치 공동선언을 내놓겠다는 게 주요 합의사항이다. 두 후보는 새정치와 정권교체를 위한 국민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에도 인식을 같이했다고 한다. 두 후보는 공동선언을 위해 양쪽에서 3명씩으로 실무팀을 꾸려 본격적인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두 후보의 첫 단일화 회동은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의 우려를 씻어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듯 후보 등록 전에 단일후보를 내겠다는 대원칙을 천명한 것은 큰 진전이다. 두 후보는 유리함과 불리함을 따지지 않고 국민의 뜻만 보고 단일화를 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날 회동으로 야권 단일화는 움직일 수 없는 대전제로 자리 잡은 셈이다.
 
두 후보가 새정치와 정권교체에 동의하는 양쪽의 지지자들을 크게 모아내는 국민연대가 필요하다고 밝힌 점도 주목된다. 두 후보는 새정치 공동선언을 통해 국민연대의 구체적인 틀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두 후보 진영에선 단일화를 전제로 민주당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이른바 ‘국민정당’을 창당하는 방안도 거론된다고 한다. 대선 전까지 창당 작업을 마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창당의 대원칙을 천명하는 가운데 대선 이후 구체적인 창당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신당 창당이 정치혁신의 종착점일 수는 없지만 두 후보가 대선 이후에도 개혁을 위해 협력한다는 구체적인 협력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논의해볼 수 있는 방안이다. 신당이든 연대기구든 양쪽 지지자를 묶어 세울 수 있는 협력틀을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25~26일로 예정된 후보 등록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다. 딱 20일이 남았을 뿐이다. 세세한 협상 내용에는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민만 바라보고 단일화에 나선다면 못 해낼 것도 없다. 실무협상도 중요하지만 두 후보가 직접 만나 담판하는 것 이상의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국민들은 단일화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것이다. 두 후보가 어제 밝힌 대로 국민의 뜻만 보고 마음을 비우는 이가 결국은 단일후보가 될 것이라는 점을 두 후보는 명심하기 바란다.


[사설] 북한, 대선 개입 언동 중단해야

● 칼럼 2012. 11. 13. 15:37 Posted by SisaHan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외곽단체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지난 3일 “남조선 각 계층은 새누리당의 재집권 기도를 절대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대선을 계기로 정권교체를 기어이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조평통은 서기국 보도를 통해 “새누리당은 민족의 재앙거리이고 온갖 불행의 화근”이고 “보수 골동품의 집합체인 새누리당이 집권하면 남조선 사회와 북남관계는 이명박 정권 때와 똑같이 될 뿐 아니라 유신독재가 부활하며, 초래될 것은 파쇼적 탄압과 전쟁뿐”이라고도 했다. 부적절하고 노골적인 선거개입이자 내정간섭이다. 북은 이런 언동을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남쪽 정부가 나라의 발전과 안정, 통일을 염두에 두고 북의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북쪽이 남쪽의 대선 동향을 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남쪽 유권자를 대상으로 ‘누가 되면 안 되고 누가 돼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은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는 것이다. 분석과 전망을 넘어 행동을 촉구하는 건 명확한 내정간섭이다. 상호 체제 인정 및 존중, 내부 문제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제1장(남북화해)의 정신에도 정면으로 반한다. 북은 6.15선언과 10.4공동선언을 중시하듯이, 7.4공동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중요성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국제법이나 남북 합의보다 더 중요한 건, 북의 이런 언동이 전혀 그들이 바라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북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고 역효과만 낼 뿐이란 점을 북은 알아야 한다. 실제 그동안 남쪽의 주요한 선거를 앞두고 몇 차례 ‘북풍’ 또는 ‘북풍 공작’이 있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유권자의 판단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왔다. 2000년 4월 총선과 2007년 대선 직전에 각각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있었으나 야당이 승리했고,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급히 이뤄진 천안함 사건 발표도 역풍을 불러왔다. 남이건 북이건 북풍으로 유권자의 표심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자체가 시대착오이며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다.
 
새누리당은 조평통의 성명에 대해 북이 ‘남한 내 제 식구 돕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내용의 반박 논평을 냈다. 북을 비판하는 듯하면서 야당 후보에 대한 색깔공세에 이용하는 나쁜 수법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남남분열을 노리는 북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북의 대선 개입을 막는 최선의 길은 여야 모두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리지 말고 북의 잘못된 행동을 함께 비판하는 것이다.


[한마당] 나눔의 미학

● 칼럼 2012. 11. 10. 19:56 Posted by SisaHan
‘나눔’은 아름다운 단어다. 나눔은 배려, 성찰, 소통 등과 함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단어가 ‘먹다’와 만나면 갑자기 불결한 언어가 되고 만다. ‘먹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들어버리는 치명적 마성을 지니고 있다. 음식물의 섭취는 인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위인데도 실제 현실에서 먹는다는 말은 그다지 아름답게 쓰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다른 단어들까지 오염시키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단어다.

‘나눠 먹기’는 정치권에 들어오면 더욱 불결해진다. 권력의 나눠 먹기는 탐욕, 음모, 편법, 비겁함 등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도 이미 나눠 먹기에 대한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채 본격화하기도 전부터 새누리당은 이들을 향해 “권력을 나눠 먹으려 혈안이 돼 있다”며 핏대를 올린다.

후보 단일화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후보 단일화=나눠먹기’라고 규정하는 것도 성급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눠 먹기라는 게 그처럼 매도해야 할 ‘절대악’인지도 참으로 의문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나누어지기를 거부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권력이다. 이런 대단한 권력을 나누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일이다. 민주주의 역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눠지기를 거부하는 권력을 기어코 나누려는 인간 분투의 기록이다.

나눠 먹기보다 훨씬 위험한 것은 오히려 ‘혼자 먹기’다. 권력 독식의 위험성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져온 권위주의 체제뿐 아니라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서도 질릴 만큼 목도했다. 그들 본인과 친인척, 측근들의 왕성한 먹성은 그냥 ‘먹다’가 아니라 ‘해먹다’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 특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앞세운 한 전직 대통령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먹다 앞에 ‘따’라는 한 음절을 더 붙여야 온전한 의미가 살아난다.

따라서 권력 나눠 먹기는 무작정 비난만 할 대상이 아니다. ‘권력의 분점’은 오히려 적극 권장하고 고무 격려해야 할 미덕일 수도 있다. 특히 권력을 혼자 먹으려는 쪽은 감히 나눠 먹기를 욕할 자격이 없다.

나눠 먹기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도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권력 나눔의 예가 매우 희소한 것도 이를 증명한다. 안철수-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도 마찬가지다. 공동정부니 역할분담이니 하는 말은 무성하지만 아직까지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동안의 흐름을 보면 후보 단일화 문제마저 승자 독식의 논리에 매몰돼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문-안 두 후보가 진정 후보 단일화를 이루려면 그 과정에서의 나눠 먹기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비판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보란듯이 제대로 된 나눠 먹기를 해보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여기서도 충실히 작동해야 한다. 80~90%를 자신이 차지하고 상대방에게는 10~20%만 주겠다는 이기적 태도로는 제대로 된 나눠 먹기를 할 수 없다. 각자의 정치적 욕망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얼마나 적절히 조화시키느냐가 나누기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관건이다.
둘째, 둘만의 나눔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나눔의 원칙과 의미뿐 아니라 나눔이 구체적으로 국리민복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나눔이 가져올 정치사회적 발전의 미래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나눔의 과실을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혼자 먹기’에 대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지나치면서도 ‘나눠 먹기’에 대해서는 손가락질을 하는 모순된 심리의 밑바탕을 허물지 않고서는 나눔의 정치적 의미는 퇴색한다.
셋째, 이번 기회에 나눔의 제도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표상되는 권력의 쏠림 현상을 완화하는 문제는 이제 당면한 시대적 과제로 대두했다. 두 사람의 나눔이 이런 논의의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위한 첫 만남을 가졌다. 앞으로 다음과 같은 평범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경구를 떠올리기 바란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나의 맨 얼굴

● 칼럼 2012. 11. 3. 18:15 Posted by SisaHan
산책하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잠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 이들이다. 고독한 만큼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참모습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무로 둘러싸인 숲을 드나드는 바람이며, 바다세상에서 밀려나와 해안에 머물다 돌아가는 모래알갱이들이다. 숲과 바다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그들은 두 세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닌다. 객관적이라는 단어 앞에 ‘비교적’이라는 제한을 두려는 이유는 세상 어느 것도 ‘주관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회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해야 할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산책길에서는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집 안팎의 잡다한 일들은 이미 접어두고 길을 나섰으니 과거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는 셈이고, 산책이 끝나면 어차피 마주치게 될 불확실한 미래를 굳이 앞당겨 불러들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선택의 순간이 많이 주어진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가보지 않아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호기심 어린 선택을 하며 새로운 길을 고집하기도 한다.
 
기웃거리며 망설이다 선택한 숲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린 홀가분함과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정신적 자유로움으로 타자와의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만남이 이어진다. 산책길에서는 우선 치장부터 간소하고 소박하다. 화장으로 돋보일 필요도, 부족함을 감출 필요도 없다. 사회에서 걸치고 있던 겉치레용 포장을 벗어버리고 자연인 자격으로 걷는 길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도 빈부의 차이도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말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좋고 혼자 고독해도 그런대로 좋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개인 또는 인격으로 해석하는 ‘person’은 연극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된 단어다. 연극배우는 가면을 써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다. 삶이 연극이라면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면을 쓰고 거기에 어울리는 겉옷을 걸치고 극중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란 퇴직할 때까지 역할극이 계속되는 연극 무대가 아닐까. 자신이 맡은 역할이 마음에 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할 배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 스스로 결정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는 하나 왠지 역할을 부여한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을 접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자신에게 잠시 맡겨진 운명적 역할에 우쭐하거나 주눅이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극 중에서 주어진 역할이 끝나면 가면과 포장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선생이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왔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외출복을 벗으면 선생이라는 역할극의 소품들도 함께 내려놓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장소만 바뀔 뿐 엄마라는, 아내라는, 주부라는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벗어도 벗어도 찾기 어려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참모습의 정체성에 회의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일까, 끊임없이 의심했으나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은 낙엽 지는 숲 길을 택하여 걸었다. 노쇠한 잎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늙으면 생기를 잃은 누런 색으로 생을 마감하듯 자신의 역할을 마친 낙엽들도 그 비슷한 색깔이 되어 오솔길에 누워있었다. 어디선가 소슬바람이 불어왔다. 벗은 나무들이 내뱉는 가녀린 숨소리와 나뭇가지 끝에 걸린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세속의 경계를 넘나들던 바람결에 나의 페르소나가 잠시 벗겨지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나의 맨 얼굴이 궁금했지만 감았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나’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그랬을까.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