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서울 광화문에선 너무나 허망하고 참담하게 숨진 한 장애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장애인에게 차별 없는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 일하다 33살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장애인운동가 김주영씨의 장례식이다. 뇌병변장애 1급 장애인인 김씨는 지난 26일 새벽 서울 행당동 집에 불이 나 질식해 숨졌다. 그는 당시 터치펜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눌러 119에 “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팔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탓에 누워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씨가 화마와 홀로 싸우며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참담함과 안타까움을 가눌 길이 없다.
 
김씨의 죽음은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3위의 선진 대한민국”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의 외형 규모는 클지 모르나, 양극화 심화와 소극적인 복지정책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삶은 피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장 김씨만 해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합쳐도 하루에 12시간밖에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밤에 혼자 집에 있다가 무방비 상태로 변을 당했다. 장애계가 절실하게 요구해온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김주영씨 죽음은 예고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월 최대 183시간인 활동보조 서비스조차도 현재는 ‘만 6살 이상 65살 미만의 1급 장애인’만 제공받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장애인 251만여명 가운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20만여명으로 8%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이런저런 제약으로 실제 서비스를 받는 장애인은 5만여명에 불과하다. 반면 장애인들 쪽에선 활동보조인이 필요한 중증장애인을 40만명으로 추산한다. 만약 김씨와 달리 가족이 있는 장애인의 경우라면 서비스 시간은 다시 월 최대 103시간으로 뚝 떨어진다고 한다. 유럽과 일본, 미국 등 선진국들이 대부분 활동보조 서비스에 상한 시간을 정해 놓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김씨의 죽음 앞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더는 억울한 장애인의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제도 개선을 미뤄선 안 된다. 중증장애인에겐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가 보장돼야 하며, 장애등급제와 부양가족에 따른 서비스 시간 제한 등은 폐지하는 것이 옳다. 누구보다도 18대 대선에 나선 유력 후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구상을 밝혀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사회의 기본 가치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애덤스, 해리슨, 부시, 세 가문은 직계로 대통령을 둘씩 배출했다. 애덤스와 부시 가문에서는 부자 대통령이 탄생하고, 해리슨 가문에서는 손자가 또 대통령이 된다. 공통점은 가문의 두 번째 대통령이 선대에 훨씬 못 미쳐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리슨 가문은 미국 대통령 선거를 타락시킨 것으로도 정치사에 남았다.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은 선거를 정책이 아닌 쇼와 흑색선전의 대결장으로 만들고 당선된 첫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그는 테쿰세가 이끄는 인디언 동맹을 잔인하게 토벌하고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 인디언한테 경기도만한 땅을 강탈해 치부하고도 통나무집에 사는 서민으로 포장하고 선거를 치렀다. 처음 로고송을 도입해 전국을 누비는가 하면 폭로와 비방으로 이미지 선거전을 폈다. 그러나 취임식장에서 추운 날씨에 외투까지 벗고 100분 가까이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한 달 만에 죽었다.
 
대통령 할아버지와 상원의원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 후보가 된 벤저민 해리슨 역시 흑색선전으로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유권자를 이간질하고 상대 후보를 매도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도 잇단 정책 실패로 지지자들마저 실망시키고 말았다. 흑색선전과 이미지 선거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진실보도를 외면하고 이미지 만들기에 앞장선 미국 언론이었다. 
2012년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도 시대와 나라가 다를 뿐 놀랄 만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대통령의 딸이 유력 후보로 등장했을 뿐 아니라 흑색선전과 이미지 선거 양상도 흡사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탈한 재산으로 정수장학회와 영남대재단을 만들었으면서도 ‘청렴한 이미지’로 남았는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 또한 윌리엄 해리슨을 닮았다. 권력의 ‘세습’을 돕기 위해 유수 언론이 후보의 이미지 만들기에 적극적인 것도 기시감이 있다. 
선대 대통령의 공과가 뚜렷하면 그 공적이나 과오 자체가 선거 이슈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후광효과를 최대한 누리면서 과오에 대해서는 얼버무리려 든다. 그 대신 말꼬리 잡기와 흑색선전으로 국면을 전환하려 한다. 북방한계선(NLL)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때 정론지의 역할은 역시 진실 추구다.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논란에서 중요한 진실은 녹취록의 유무가 아니라 북방한계선의 성격이다. 그 성격 규정에 따라 남북관계가 더 경색될 수도 있고 해빙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노무현-김정일 회담 당시 ‘비밀 녹취록’이 있었다며, 특히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후보에게 이념공세를 폈다. 그들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월북을 막기 위한 북방한계선이 영토선임을 인정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지만, 그거야말로 진실과 거리가 먼 흑색선전이다. 새누리당의 뿌리인 김영삼 정부는 물론이고, 그 선을 그은 미국 정부조차 영토선이 아닐뿐더러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고 ‘북방한계선 사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유신시대 재조명과 관련해서는 <한겨레>가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문화방송(MBC) 간부들의 비밀회동과 대화록을 특종보도(13, 15일) 함으로써 장학회와 박근혜 후보가 어떤 유착관계인지를 파헤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시작(10.17)과 끝(10.26)이 모두 들어 있는 10월에 유신시대의 참혹한 정치사회상을 취재해 내보내는 연재물 하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유신은 박근혜 후보의 말처럼 역사에 맡길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집중조명이 필요하고, 기자들이 직접 나설 사안이었다고 본다. 당시 끔찍한 고초를 겪고도 가슴속으로만 끙끙 앓아야 했던 사람이 한둘인가?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언론이 증언을 들어두어야 역사학자들이 ‘사초’로 활용할 게 아닌가?
 
노동자나 대학생으로서 유신을 뼈저리게 체험한 세대는 지금 50대 중반 이후이다.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오늘의 사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고통을 기억하는 이가 적어진 탓이 크다. 언론들은 유신시대의 진실 규명보다 박근혜 후보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데 목소리를 보탰는데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결과가 무엇인가? 그의 신념이 바뀌었을까? 
‘민족중흥의 지도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명에 보낸 고아,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온 처녀 가장, 그러고도 웃음을 잃지 않는 고상함, 이명박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여당을 지켜낸 ‘선거의 여왕’, 거기에 아버지의 과오를 반성하기까지!’ 어떤 인생도 뺄 거 빼고 묘사하면 감동의 드라마가 된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보수언론의 이미지 만들기와 진보언론의 직무태만이 만들어낸 합작품일 것이다.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주변 사람들은 부일장학회 창설자인 고 김지태씨를 몇 차례 죽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강압으로 재산을 빼앗아 그의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 후보는 그를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았던 분”이라고 비난했고, 박 후보의 측근인 이정현 공보단장은 ‘친일파’라고까지 매도했다.
김지태씨는 5.16 쿠데타 후 서슬 퍼렇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손에 수갑을 찬 채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부일장학회 등의 재산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날인했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박 후보는 가해자 쪽이고, 김지태씨와 유족들은 피해자들이다. 박 후보가 엎드려 잘못을 빌어도 시원치 않을 형편인데도 오히려 고인을 모욕하고 있으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모든 것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박 후보의 ‘입’을 자처하는 이정현 공보단장의 친일파 발언이다. 이 단장은 김지태씨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일제의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에 입사한 것 등을 들어 그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이 단장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혈서까지 써가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고,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 이름)는 뭐라고 불러야 옳은가. 친일 부역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면 박 전 대통령은 당연히 특A급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친일파의 딸’이 재산을 강탈당한 피해자를 친일파로 몰고 있는 물구나무선 풍경이다.

박 후보 쪽이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주장을 잇달아 내세워 정수장학회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에서 김지태씨가 헌납한 돈은 전체의 5.8%에 불과하다”는 등의 주장도 숫자 장난을 통한 진실 흐리기일 뿐이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가 밝힌 5.16장학회 재산 내역을 봐도 김지태씨 재산은 부산일보·문화방송 주식 3억4800여만환에 토지 10만147평으로 김씨 재산이 외부 성금보다 훨씬 많았다. 이정현 단장이 뜬금없이 노 무현 전 대통령과 박연차씨 등을 들먹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정부가 공개적으로 헌납을 받은 반면, 노 전 대통령 쪽은 사적으로 돈을 수수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도 전형적인 물귀신 작전이다. 엉뚱한 논쟁을 일으켜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정수장학회 문제의 초점을 흐리려는 유치한 술책이다. 하지만 박 후보 쪽이 이런 치사한 작전으로 정수장학회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1500자 칼럼] 아직도 헤매는 그곳

● 칼럼 2012. 10. 29. 18:07 Posted by SisaHan
아침 숲에 들었다. 연일 잦은 비로 촉촉해진 숲은 바짝 마른 나의 감성에 물기를 더 하는 것 같다. 화려하게 물든 단풍잎이 그냥 아무렇게 휘날려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가을 풍경 속으로 나는 자연스럽게 빨려들어 간다. 열 일 제쳐두고 운동을 위해 나온 길이건만 땀 흘리는 노역 따윈 안중에 없고 마음 가는 데로 발길 닿는대로 걷는다. 시인이 되었다가 때론 화가도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둘 사이를 넘나들며 마음속 화폭에 아름다운 계절을 새겨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동안 목적은 물론 동행도 잊은 채 숲의 일부가 되어 걷고 있는데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그이의 부름이다. 나무 사이사이를 숨바꼭질 하듯 다가가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진행 방향이 아닌 그 반대쪽이란다. 혼자 가을 숲에 심취해서 방향 감각쯤은 안중에 없었는데 그이는 길 찾기에 꽤 골몰했던 듯하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오늘만은 들어왔던 길로 나가겠노라 큰소리를 친다. 그이와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나누며 방향을 튼다. 십년 경력의 베테랑 하이커가 동네의 조그만 트레일을, 그것도 열 대 여섯 번씩이나 들어와서 한 번도 제대로 나간 적이 없다는 이 사실을 그 누가 알랴.

생업에 매달려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지 못하는 우리부부에게 하이킹은 최고의 오락이요, 취미생활이며, 건강 지킴이 이기도하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숲속에서 실컷 헤매다 나오면 만병이 치유된 듯 개운하기도 하고 어떤 놀이에서 느끼지 못하는 만족감이 있어 흔쾌히 즐긴다. 이런 우리에게 이웃집에 마실 가 듯 드나들 수 있는 숲이 있다는 건 큰 행운 아닌가. 하지만 몸과 마음이 쉽게 가 닿을 수 있는 그 곳, 일상에 좋은 휴식처가 될 것 같아 접근했다가 연일 낭패를 보고 있다.
새로 이사 온 집 가까이 하이킹 트레일이 있다. 나의 침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소나무의 청정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런 거리쯤이다. 주택단지를 삥 둘러싸듯 형성되어 있는 이 트레일은 주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진입로를 군데군데 만들어 놓았다. 입구에 비치된 지도를 보면 두 시간정도면 사방 어디든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하이킹 경력 십년에 장거리 원정도 꽤 다녀온 우리의 실력에 비하면 좀 약하다는 점도 없지 않지만 짧은 시간을 활용하기엔 그만 일 것처럼 보였다.

이삿짐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하이킹부터 했다. 새로운 지역의 트레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음이다. 쭉쭉 뻗은 잣나무 군락 사이로 백양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숲이 적당히 어우러진 곳은 우리의 발길을 바쁘게 했다. 또한 길의 형세는 완만함과 내리막을 고루 갖추고 있어 적은 운동량을 보충하기에 그만이었고 사람들의 통행이 없어 숲 전체가 우리 차지가 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시간만 걷자던 계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길에 취해 계속 걸었다. 사방으로 나 있는 오솔길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이쪽, 저쪽 눈 가는대로 걷다 보니 돌아 나오는 길이 꽈배기처럼 여러 가닥으로 꼬여 종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우중충하던 날씨가 소나기까지 동반하여 빗길에 길 찾느라 애초의 계획보다 시간이 세 배는 더 소요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돌아왔다.

첫 경험에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 간파한 우리는 두 번째부터는 지도며 간단한 산행 도구를 챙겨서 나섰다. 물론 갈림길의 이정표며 몇 미터 간격으로 표시된 사인을 시시때때 확인함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길은 또 우리의 의식을 흐려놓았다. 큰 길, 작은 길, 샛길, 꽃길, 등 등 수없이 많은 유혹 앞에 초심을 지키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하여 뜻대로 갔다가 중간에서 헤매고 마지막은 으레히 엉뚱하게 빠져나오기를 숱하게 해 오고 있다. 이젠 헤매는 그 길도 익숙하여 자연스럽지만 한 번 정도는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바랄뿐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 아닐까 기대해 본다. 
흔히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단순한 수단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길 위에서 대어를 낚았다. 쉽게 결판이 났다면 한 두 번 더 오르고 싫증이 났겠지만 열릴 듯 열리지 않기에 나는 오늘도 시지프스의 바위를 나르고 있다. 삶의 행로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 임순숙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