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의 근거가 돼온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돈은 묶고 입은 푼다’는 선거법의 대의에 비춰 보면 당연한 결정이다. 그동안 수사기관들이 이 조항을 빌미로 선거 때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적극적인 선거참여를 제한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정치발전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결정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운동을 일체 제한받고 있어 기본권 제한이 지나치다”며 “정당에 대한 지지나 반대 의사 표현을 금지하는 것은 국민의 비판을 봉쇄해 정당정치 구현이라는 대의제의 이념적 기반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실제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이 조항을 이유로 트위터나 인터넷 등을 통한 정치적 의사표현 자체를 막아왔다.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만 해도 중앙선관위가 유명인의 투표 인증샷도 불법이라며 ‘인증샷 10문10답’을 내놓았다가 여당 의원한테서까지 “투표율을 높여야 할 주무기관이 제정신인가”라는 비판을 받았다. 검찰 역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선거운동을 집중 단속하겠다고 밝혔다가 여당으로부터 자제해 달라는 경고를 듣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헌재가 “인터넷은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고 저렴해 선거운동 비용을 낮출 수 있는 정치공간”이라고 밝혔듯이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가능해지면 선거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그동안 선거 후보자의 누리집(홈페이지)에서만 허용되던 제한조건이 풀리면 정치 무관심층이나 젊은층의 참여가 높아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여야 정치권은 이번 기회에 금지와 규제 중심으로 복잡하게 규정돼 있는 현행 선거법을, 돈은 철저히 묶되 입은 대폭 푸는 방향으로 손보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해보기 바란다.
 
이번 헌재 결정은 방송통신심의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을 심의하는 전담조직을 신설하는 등 단속 강화에 나선 방통심의위의 조처가 법적 근거와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심의대상을 음란물·도박으로만 제한하자는 야당 추천 위원들의 절충안을 거부한 것은 사실상 정치심의도 하겠다는 것이어서 위헌 가능성이 크다. 방통심의위의 조직 신설은 재고돼야 한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암흑기에 온몸으로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일궈낸 투사였다. 그는 어려운 이웃과의 연대를 향한 열정을 한순간도 꺾지 않았다. 그는 곧 우리 사회 민주화와 희망의 뿌리였다. 
김근태 고문은 1967년 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도하면서 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이어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절정에 이른 1983년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 의장을 맡았다. 어느 시기이든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영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 말에 강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폭력으로 억압한다고 복종해버린다면 우리 모두가 패배자가 될 것임을 늘 경계했다.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체포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 64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것도 독재정권의 고문 탓이 크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고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고문을 폭로하고 나섰다. 뒷날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세계의 양심수로도 선정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가를 평가한 결과였다.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정치나 세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공학적 기술에 능한 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진정성의 정치를 실천한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생전의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들이 ‘근태형’ ‘근태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정중하고 진지하게 후배들의 말을 경청했고 후배들한테도 존댓말을 썼다.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늘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민주주의를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퇴행이 심각하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자리잡게 된 제도와 가치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들이 만만찮다. 너무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김근태가 그래서 더욱 그립다. 그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왔던 민주화운동의 짐을 내려놓고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1500자 칼럼] 나는 꿈꾸는 사람

● 칼럼 2012. 1. 9. 15:24 Posted by SisaHan
- 샤갈(Chagall) 특별전에 부쳐 -

I am a dreamer.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온타리오 미술관(AGO)에서 열리는 샤갈 특별전에 갔다 왔다. 각 나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들을 모은 대규모의 전시회는 아니었고, 프랑스 파리의 퐁피듀 미술관에 소장 된 작품들이었으므로 전시된 작품 수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작품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참고로 전시회는 1월 15일 까지 한다.
솔직히 나는 샤갈을 잘 모른다. 아니 미술 자체를 잘 모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고 다만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노력한다. 문학을 하기 때문에 미술은 전혀 모른다거나 음악을 모른다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단지 표현의 방법과 도구가 다르다 뿐이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말보다는 Writer라는 말이 좋고 또 Writer 보다는 Artist라는 말을 내심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그림 속에도 분명 읽어야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샤갈의 그림은 나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그의 그림 속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어 비교적 이야기가 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색깔마저 환상적이어서 꿈을 그리기 쉬웠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는 무엇보다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사이의 사랑이 있다.
 
전시된 그림 중에서 나란히 걸어 놓은 Blue Circus 와 The Dancer 가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다. 어쩌면 그 그림 속에는 샤갈의 그림 속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사람, 말, 달, 닭, 생선, 꽃…….사람도 악기(나팔, 첼로, 아코디언)를 연주하고, 닭이 북을 치고, 달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모두 한데 어울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전체에 깔려 있는 블루나 여자의 몸의 빨간색, 그리고 The Dancer에서의 눈이 부신 노란 색등이 원색적이어서 차라리 환상적으로 보였다. 
샤갈의 그림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림 속의 인물들이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옆으로 누워, 때로는 거꾸로......,  유태인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파리로 또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고향을 타의에 의해 등져야 했던 그의 가슴 깊이 묻혀 있는 슬픔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전시회 마지막 방에서 보여주는 비디오에서는 그렇게 설명한다. 75세의 나이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파리 오페라하우스의 천장화를 그리는 모습은 참 감동적이었다. 사실 그냥 스쳐 나오려 했는데, 그 영상물은 샤갈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Clown in the Night도 너무 어둡고 슬펐지만 좋았다. 그리고 샤갈처럼 광대와 서커스를 좋아했던 이태리 영화감독 Fellinni가 생각났다. 무엇보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한 말이었다. I am a dreamer. In art, as n life, everything is possible, if it is based on love.
 
나도 오래 전에 ‘꿈’이란 시를 쓴 적이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꿈뿐이다. 떠나올 때 가지고 온 짐이라곤 꿈뿐이었지만 오래 전 성공하여 돌아가리라 던 꿈 깨져버린 그 후에도 남은 건 꿈뿐이다.’ 나의 시와 샤갈의 그림을 생각하며, 결국 모든 예술과 삶의 바탕은 꿈과 사랑이 아닌가 생각했다. 
한국이나 여기나 갈수록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흑룡의 해라는 새 해 새 아침, 꿈을 잃지 말고 다시 일어나 하늘을 날자고 권하고 싶다. 용이란 원래 하늘을 날아 용이 되 지 못하면 이무기가 된다고 했던가?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떠오르는 태양처럼…

● 칼럼 2012. 1. 8. 08:57 Posted by SisaHan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은 내 마음 속에 있다」
새해 화두로 삼고 후세에 부끄럼 남기지 않았으면”

새해 아침 동포들에게 띄우는 편지

새해입니다. 내 마음에 펼쳐지는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릅니다. 지난 해의 회한은 밀려가는 파도에 맡기렵니다. 솟아오를수록 더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가는 태양처럼 새해를 밝고 따뜻하게 살고 싶습니다. 타오르는 기쁨과 소망으로 동포들에게 건강과 다복(多福)을 기원드립니다
제가 존경하는 인생의 선배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60대가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조언을 합니다. 이미 이순(耳順)에 접어든 저로선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말이지요. 평균수명이 짧았던 때에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평균수명이 80대로 늘어난 요즘의 60대는 분명히 활동이 자유로운 시기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돌봐줄 자녀들도 제 갈 길을 떠나 빈 둥지만 지키고 있는 때이니 마음껏 하고 싶은 일과 뜻을 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때가 맞습니다. 단지 그 편안함에 안주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도전하며 살 것인가가 문제겠지요.
 
지난 해를 마무리하며 존 러보크의 ‘젊은이여, 인생을 이야기 하자’를 읽었습니다.  20대에 감동으로 만났던 책인데 왠지 다시 읽고 싶었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란 제목에서 다음의 말이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 파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시간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의한 파멸보다는 자신 스스로에 의해 파멸되는 경우가 더욱 많다.” 
내 인생의 걸림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은 내 마음 속에 있다”를 화두로 삼고 싶습니다. 제 생애 최고의 황금기를 만들어 가겠다는 힘찬 의지도 솟아납니다. 
캐나다 한인 이민역사가 깊어 갈수록 나날이 동포들의 주류사회에 대한 의식 변화와 참여도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통의 한계가 아쉬움으로 남는 실정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차세대들과 교량이 시급하고, 더 늦기 전에 올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삶을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 역사적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1세들이 터전을 잡고 키운 모든 단체들이 상식이 통하는 건실한 단체로 성장하여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말아야겠지요.
 
아울러 그런 시대적 사명에 앞장서는 신문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시사 한겨레의 창간 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간지로서 어쩔 수 없는 신속성의 한계를 성실한 기사와 유익한 생활정보, 적은 지면이지만 다양한 칼럼으로 오늘의 참신한 이미지와 진정성 있는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김종천 발행인과 직원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찬사를 드립니다. 

<원옥재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