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항의하려고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에 전화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한테 얘기하지 말고 미국 국무부나 국방부에 하시오. 제주 기지를 만들라고 우리를 압박하는 게 그들이니까.’” 지난 5일 <뉴욕 타임스> 오피니언 난에 ‘원치 않는 미사일 강요당한 한국 섬(제주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코리아 정책연구소’ 사무국장 크리스틴 안의 글에 나오는 얘기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도 실린 그 글에서 크리스틴 안은, 미국이 밝히길 꺼리지만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을 위한 기지라고 주장했다.
그 다음날 <뉴욕 타임스> 오피니언 난에는 ‘파라다이스에 밀고 들어온 군비경쟁’이라는 제목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제주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미즈> 편집장을 지낸 ‘여성미디어센터’ 공동설립자 스타이넘은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면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제주도의 환경이 파괴되고, 제주 기지를 중대 위협으로 간주할 중국을 긴장시켜 국제적 안보위기를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타이넘 역시 한국이 미국 국방부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걸 걱정한다며 제주 기지가 미국 뜻대로 건설되고 있음을 내비쳤다.

크리스틴 안은 제주 기지 배치 이지스함의 미사일 요격체제로는 북의 저고도 단거리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남한의 북부지역 3분의 2를 지켜낼 수 없다는 1999년 의회 제출 미 국방부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제주 기지는 따라서 중국 남동부 해안지역에 일본과 대만 겨냥 장거리 미사일들을 배치해둔 중국을 겨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의 강력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미국이 동중국해와 그 아래쪽 해역(동남아)에 대해 힘을 행사하는 데 제주 해군기지가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이라고 한 2009년 랜드연구소 보고서도 인용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대국들 패권경쟁으로 제주도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됐다는 얘기를 크게 실었다. 지난 3월, 엘런 타우셔 미국 국무부 차관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미국 동아시아 지역 미사일방어(MD) 체제와의 통합을 강화하는 쪽으로 저고도 미사일방어 체제를 확대하도록 한국에 요구했다. 매사추세츠공대 미사일방어 전문가 시어도어 포스털은 “제주도는 일본 방어에 이상적인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제주 기지 배치 이지스함들이 한국·일본으로 가는 중국의 탄도탄미사일들을 막아주며, 특히 일본을 중국·북한 미사일로부터 지켜줄 거라고 한 사람은 몬터레이 국제문제연구소 군축 전문가 제프리 루이스다. 이들은 그러나 한국은 별로 그 덕을 못 볼 거라고 했다. 북한 미사일들은 진행 고도가 낮아 남쪽 요격체제가 제대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위험하다!

1999년 미 국방부 보고서도 같은 얘길 했다. 그러니까 전문가들 얘기가 옳다면, 제주기지 건설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일본 지키기다. 적어도 미국인들이 제주 기지를 얘기할 때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게 일본 방어라는 건 분명하다. 우리 당국이야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겠지만,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 설계의 이지스체제와 무기들을 장착한 세종대왕함은 미-일 동맹군과의 합동군사작전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다. 타우셔 차관 얘기도 한·일 함정의 미사일 요격 성능을 더 향상시키라는 거였다.
율곡함과 서애 유성룡함도 같은 KDX-3(KD-3)급 이지스함들이다. 대당 1조2000억원이 넘는다. 이지스함들은 미사일방어 체제의 핵심 요소다. 당국은 제주 기지 건설은 미국과 무관하며 세종대왕함에 탑재하는 건 미사일방어용 SM-3 미사일 체제가 아닌 SM-2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 해군이 도입한다는 SM-6 장사정 미사일은 미사일방어용으로도 쓸 수 있다.
독도가 리앙쿠르암이 되고 다케시마가 된 건 일본과 결탁한 미국 덕이 컸다. 동해, 한국해가 일본해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지배를 위해 일본의 조선 병탄을 보장해줬던 미국은 일제 패전 뒤에도 전범국 일본을 살리고 한반도를 분단했다. 한국은 그들의 동아시아 핵심 파트너 일본 방어를 위한 기지였을 뿐이다. 그 덕에 일본은 아직도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이었고, 독도는 일본 땅이며, A급 전범도 잘못한 것 없다는 파렴치한 주장을 계속한다. 미-일 유착은 레너드 코언의 야유처럼, 부자들이 계속 부자로 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들이 설계한 세계가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그들은 금융업자들처럼 아직 멀쩡하고, 분단 반쪽인 우리는 어리석게도 여전히 그들에게 모든 걸 기대고 있다.

<한승동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7월 1일 캐나다 데이(Canada Day)때 토론토의 중심지에 있는 던다스 스퀘어에서 열린 기념행사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념공연이었다. 높은 사람이 나와서 길게 하는 지루한 연설은 없었고, 춤을 추는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댄스로 행사가 시작됐고, 우크라이나, 필리핀으로 이어졌는데 나는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념공연에서 나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처음에 사회자가 캐나다가 특히 토론토가 다민족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토론토는 162개의 언어를 말하는 도시다.”

현재 유엔 가입국이 몇 나라인데 162개의 언어라는 말인가? 물론 언어는 한 나라에서도 여러 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로 여러 나라에서도, 다시 말해 영국, 미국, 캐나다처럼 영어를, 중남미의 대부분의 나라처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놀라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또 한사람이 들어와 163개의 언어를 말 할지 모른다.’ 그 만큼 세계가 토론토로 오고 있다는 말도 된다. 또 특이한 점은 다른 민족들이 주최하는 행사가 여름이면 토론토의 거리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나는 올해 처음 서아시아 인들이 하는 행사를 구경 갔다. 규모도 작고 별로 볼거리도 없었지만 자기 나라의 고유의 의상을 입고 걸어 다니는 여인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행사가 그 민족들만의 행사가 아닌 토론토 시민 전체의 행사로 자리 잡고 있음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얼마 전에 길을 지나가는데 한 흑인이 차에 국기를 달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나라 국기였다. 토론토에 오래 살면 다른 나라 국기에 익숙해진다. 그날 저녁 TV를 보면서 새로 생긴 수단에서 분리한 남수단의 국기라는 것을 알았다. 차에 국기 달기는 월드컵 축구 때면 더욱 심하다. 한 때 다운타운의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다. 축구시합의 결과를 알기는 쉬웠다. 밖이 시끄러워 내다보면 어느 국기를 달고 또는 흔들며 지나가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한 때 캐나다가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할 때, 토론토를 피한다고 했다. 홈경기의 이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민자들이 더 많이 와서 응원하기 때문에 Away Game이 되버린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민자들을 피해서 에드몬튼이나 밴쿠버 부근의 버나비에서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축구 전용경기장이 있고 TORONTO FC라는 프로 축구팀이 있어 어느 정도 축구 팬이 형성되어 있는 탓인지 토론토에서 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데, 돈은 벌어야 하기에 토론토에서 하는지 모른다.

나는 종종 올림픽을 토론토에서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늘 관중석이 메어져 사람들이 목이 메어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며칠 전 포드 토론토 시장이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35년의 이민생활을 하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사회의 변화를 보았다.
이민사회를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지만 Discrimination(차별)을 말하다가, Difference(차이)를 말하다가, 이제는 Diversity(다양성)을 말한다. 내가 사는 토론토가 다양한 사회로 변하는 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토론토뿐만 아니라 캐나다가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다양해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사회가 됐으면 참 좋겠다.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1500자 칼럼] 아바(ABBA)의 존재

● 칼럼 2011. 8. 14. 14:11 Posted by Zig
책꽂이에서 몇 년 동안 잠자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영 낯설어 선듯 읽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책이다. 홍성사란 출판사와 믿음의 글들 130 131편으로 나왔다는 소개로 사두었던 책이다.  
정진호 교수는 토론토에도 다녀간 분이다. 연변과기대교수요 평양과기대 부총장 되고 난 후인가 설립 모금 차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뵙던 분이다. 나와 친분이 전혀 없는 그가 작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문영을 2권 저자로 쓴 수수께끼 같은 의구가 문영이 곧 그분의 아들 이름인 것을 알게 되자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2권 끝말에 문영이 정진호라 밝혔다.  한번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 강형수의 처절한 삶과 그의 고뇌와 저항의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형틀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2권 합하여 600쪽 가까이 되는 이 소설을 일주일 동안 씹어가며 읽었다. 이제나 저제나 믿음의 글로 올라와있는 진의를 파악하기 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답답하리 만치 강형수의 방황과 욕망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감은 지독했다. 강형수가 완전히 파멸되고 더 밑바닥까지 내려 갈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이르자 비로소 ‘아바’의 존재를 찾는다.
 
‘아바’란 보화를 만나기 위해 소설의 3/2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 과정을 거쳐가야 했던가. 완전한 실패자, 모든 것을 상실한 그가 아바를 만나는 그 길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처절한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실낱같은 빛 미세한 아바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다. 
주인공 강형수는 서울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며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 정진호 역시 서울공대 재료공학과 출신이며 MIT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자전적 구도소설이라 밝혔지만 어디까지가 실화요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 최문선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이 소설에선 다만 첫 번 결혼한 아내 민희와 아들 윤석이 이야기가 극적인 효과를 내며 펼쳐지고 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아내와의 이별이 강형수로 하여금 영적인 wake up call에 결정적인 역활을 해주고 있다.
주인공을 의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설정은 처음부터 없는 듯 싶었다. 아니 고백적인 이야기가 철저하게 진솔하다. 강형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예수쟁이’에 대한 거부감이 내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다는 자각에 나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위선과 교만이 묘하게 크리스천이란 명패로 포장되었다는 자신을 보며 아연해지는 것이다. 믿음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요 떠드는 것이 아니라는 이 간단한 이치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서울 대학교 입학식 날 만났던 이 구절이 강형수를 황홀하게 해주었지만 그 참 뜻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가 완전히 부서지고 난 다음이었다.

친구 박병훈의 입을 빌어 고백하고 있는 저자의 말에 눈이 고정되었다. 
“세상은 수많은 지혜서와 철학서와 종교의 경전들이 있어 왔지만 ,성경은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지혜서들이 모두 한결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서만 열려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닫혀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절대 무능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그 놀라운 신비의 문을 조금씩 열어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2권 236쪽)
강형수씨가 만난 예수라는 그 생명의 강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가 비록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참 진리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신비가 이 책 속에 있다는 거다.   저자 정진호와 나는 20년 차이다. 38년생인 나와 58년생인 그와 이 소설 속에서 만남이 신기로울 만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다. 
평양과기대가 도마 위에 올라와 있다. 철저하게 북한의 정치꾼의 이용물로 전락되었다는 위기에 달하고 있다했다. 잘나가는 공학도가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그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이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이 소설은 간접적으로 저자를 대변해 주고 있다.
(필자 주: 아바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며 이 작품에서는 ‘아빠’로의 의미도 있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별 개정 교육과정 각론을 제시했다. 2009년의 총론에 따라 교과서별 개편 지침을 내놓은 것이다. 
각론 개발이 지난 3월부터였으니 불과 4개월 만이다. 출판사에는 내년 3월까지 교과서를 만들라고 하니 새 교과서는 1년 만에 만들어진다. 이건 과욕도 오만도 아니다.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직전 교육과정 개정은 2007년 이뤄졌다. 그에 따라 각론이 제시되고, 교과서 제작이 이뤄져 이제야 일선 학교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정권은 임기 안에 이명박표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애꿎게도 출판사들은 2007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교과서를 제작하자마자 폐기하게 됐으니, 참으로 나쁜 정권이다. 
교과서 개정은 5년 단위로 이루어진다. 교과서는 지식 전달과 함께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평가하는 틀을 제시한다. 따라서 오로지 사실만을,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치우침이 없이 전달해야 한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총론 마련에 1년, 총론에 따른 각론(교과목별 개편 지침) 개발에 2년, 그리고 출판사들의 교과서 제작에 2년 등 5년의 기간을 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런 최소한의 준칙마저 짓밟는 이유는 정치적 고려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 정권과 정권을 떠받치는 족벌언론, 재벌, 기득권 세력 등은 집권하자마자 친일·냉전·신자유주의 시각에 따른 교과서 개편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들의 의도는 이미 제시된 사회과정 개편 시안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 지배와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간을 상품화하고, 국가를 시장에 예속시키는 등 자신의 치부는 합리화하고, 권력과 부의 유지·확대를 제도화하는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도덕 교과서 지침은 충효와 복종을 강조하던 유신 시절로 돌아갔다. 학생을 정권 이념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