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엊그제 1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소유한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절반을 기부해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장학금 등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안 원장의 통 큰 기부는 오랫동안 품었던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기에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안 원장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밝혀, 새로운 기부문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최근 들어 안 원장은 그를 빼놓고는 정치 구도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그 때문에 그의 진의와 무관하게 기부행위와 관련해 정치적 맥락에서 이런저런 풀이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정치 참여를 위한 계산된 행보라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작위적이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이 말한 대로 정치란 무릇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안 원장은 정치를 하든 안 하든 이미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큰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될 터이다.
 
안 원장의 기부는 나눔에 대한 그의 철학에 바탕한 새로운 기부의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순수한 기부로 보기 힘들었던 일부 재벌 총수와 정치인들의 사재 출연과는 격이 다르다. 일찍이 무료 백신 보급 등으로 나눔을 실천해온 안 원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왔다. 그는 자신이 이룬 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혜택을 받은 만큼 앞장서서 공동체를 위해 공헌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왔다. 게이츠재단을 설립한 뒤 280억달러를 기부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부자증세를 주장하고 나선 세계적 자산가 워런 버핏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이다. 
기부가 구조적인 문제를 온정주의로 돌린다는 지적도 있지만 순수한 나눔은 값지고 소중하다. 게이츠와 버핏이 주도하는 기부 서약에 미국의 400대 억만장자 상당수가 동참하고 영국에서도 부자들 사이에서 유산 10%를 자선단체에 기부하자는 캠페인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전 재산을 기부하는 독지가나 남몰래 기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지만 정작 재력 있는 기업가들의 통 큰 기부는 유한양행 창업주인 고 유일한 박사가 유일할 정도로 드물다. 안 원장의 실행으로 우리 사회를 보듬는 아름다운 기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 The River In The Pines -

지난 11월 2일, 로이 톰슨 홀에서 있었던 죤바에즈(Joan Baez) 콘서트를 구경 갔다. 80년 대 초반에 가고, 근 30년 만에 두 번째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다.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캐나다로 막 이민을 오기 전, 시를 쓴다는 여자를 그녀의 학교 앞 다방에서 기다릴 때였다.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아 만남이 늘 마지막 같을 때, ‘The River In The Pines’가 흘러나왔다. 영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내용은 몰랐지만 슬픈 노래라 느꼈고 예감처럼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에 슬픔처럼 강물이 흐르고……. 
이유 분명치 않고 명분 없던 이라크 전쟁 중에 그녀는 왜 노래도 없이 침묵을 지켰을까? 나이가 많아 은퇴를 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역사와 전통인 마녀사냥을 당했을까? 그녀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사코와 벤자티’, ‘사이공 신부’를 노래했고, 융단 폭격이라는 무차별한 폭격을 반대해 하노이에 가서 전쟁에 반대했다.
 
그녀는 살아 노래 부르고 있었다. 가로수의 낙엽은 떨어지고 늦가을인지 아니면 초겨울인지 애매한 2009년 밤 토론토의 메시 홀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를 우연히 보았다. 70년 말, 20대 초반에 바다를 건넌 텅 빈 가슴을 달구었던 그녀의 노래는 슬픈 사랑보다 분노에 떨리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 기타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월남에 젊은 병사를 파병한, 반공이 국시인 우리의 군사정권 아래 대부분 금지곡이었다.    
겨울의 문턱, 남의 땅 걸을수록 키가 작아지는, 바람 불지 않아도 어깨 움츠리는 소시민이 되고, 60년대 월남에서 싸우던 미군은 먼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젊은 병사들 죽어 영웅이 되어 자랑스러운 성조기에 덥혀 돌아오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의 피는 강물처럼 흘러도, 촛불을 들고 잠시 데모했을 뿐, 열기는 촛불처럼 이내 꺼지고 60년대의 뜨거운 반전운동은 없었다, 이제 먹고 살기 바쁘고 자유를 누리기에 바쁜 선진국 시민들은 먼 나라 일에 분노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이년 전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과 비싼 입장료를 생각했다. 전쟁이 전쟁을 끝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평화는 전쟁 사이의 휴식시간,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일까? 쳐들어간 이유가 잘못이라면 사과를 하고 나와야 하는데, 눌러 앉아 점령한 땅 나올 생각 하지 않는다. 미국식 민주주의 가 사막에서 꽃 피우기를 바라며…… 역사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남의 나라 점령하여 주둔한 군대 영원히 머물 수 없다.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고음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가끔 쉰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혼자서 거의 서서 1시간 30분이나 노래를 부른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노래 중간 중간에 말을 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We have to see this world in both eyes, not to left, not to right.”
 이번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Occupy에 대해서 말했다. 
 “They are extraordinary people, and we are extraordinary people, too.” 
나는 이번이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갔지만,  그녀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았다고 공연장을 나오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야 말로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뜻이 담긴 노래는  강물처럼 흐르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괴담으로 연명하는 정권?

● 칼럼 2011. 11. 21. 08:46 Posted by SisaHan
2008년 경제부 선임기자로 일하던 때다. 한가지 괴담이 떠돌고 있었다. ‘9월 위기설’이다. 경제가 다소 불안하기는 했다. 외국 자본 유출로 환율 오름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앞날을 내다볼 능력도 없거니와 개인적으로 괴담이나 음모론을 믿지 않는 까닭에 크게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8월31일 일요일.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신문에 ‘9월 위기설’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위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기사를 썼다. ‘9월’과 ‘위기’란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금융시장이 열리자마자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했다. 이른바 금융위기의 시작이었다. ‘내 기사 때문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기사와 상황은 잘 맞아떨어졌다. 하루 앞서 정확한 예측 기사를 썼으니 이보다 더한 특종이 있겠는가.
 
사실은 경제가 불안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전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투자자들은 9월이 되자 혹시나 해서 자금을 뺐고,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가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괴담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실제 위기를 야기하는 데 일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위기설이 없었다고 금융위기가 오지 않았을까? 그건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금융위기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괴담이 위기를 부른 게 아니라 위기의 전조로 괴담이 돌았다고 보는 게 맞다. 그것이 정확한가 여부는 둘째 문제다. 괴담은 사회가 불안하고 정부가 신뢰받지 못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사회현상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계기도 사실은 괴담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 와중에 한가지 소문이 돌았다. 70년 이상 존재해온 상인 비밀조직이 정부와 결탁해 고의로 기근을 유도하고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조직이 프랑스 전역에 침투했고, 공무원들을 모두 매수했다는 얘기가 더해졌다. 루이 15세가 1000만파운드를 챙겼다는 소문과 함께. 시민들은 격분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왕정을 무너뜨렸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괴담을 믿고 낫과 창을 들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빵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 죄 없는 빵가게 주인이 몇 조각 빵을 숨겨놨다는 이유로 군중에 의해 처참하게 목이 잘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혁명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괴담이 아니었다 해도 역사적인 상황이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담은 사회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언제나 괴담이나 음모론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때 급속도로 퍼져간다는 점이다. 사건의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괴담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사회가 괴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을 괴담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괴담을 단속하겠다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싸우겠다는 말과 같다. 그보다는 정부가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협정 체결 과정에서 얼마나 소통하고 여론을 반영했는지 돌아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사실 국회조차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정을 타결하지 않았던가. 
정부는 촛불시위 때 광우병 괴담, 금융위기 때 미네르바 괴담을 탓했다. 언제까지 괴담으로 연명할 것인가. 괴담을 부풀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장본인은 정작 정부가 아닌지 묻고 싶다.

< 한겨레신문 정남기 경제부장 >


[한마당] 내가 믿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 칼럼 2011. 10. 29. 14:57 Posted by SisaHan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섬에는 군대를 두 번 갔다 온 청년이 있었다. 어렵게 의무복무를 끝내고 돌아왔는데, 또다시 징집영장이 나왔다. 입대 환송회까지 열어주었던 면사무소의 병사계가 그의 복무기록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섬의 권력자였던 한 유지의 아들을 대신해서 군대에 갔던 것이다. 청년의 집안에는 이 일을 해결할 만한 능력자가 없었고, 그 내막을 알고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을 바루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속절없이 군대를 다시 가야 했다. 그러나 몸은 튼튼해서 두 번째 복무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으니,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또 하나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다행한 편에 속한다.
 
중학교를 다닐 때 우리 가족은 목포의 변두리 동네에서 살았다. 옆집 청년이 제대를 석 달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나는 그때 내 발이 세 개는 들어갈 군화를 처음 신어 보았다. 청년은 신실해 보였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군대를 제대하면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귀대한 후 편지가 한 번 왔다. 시내의 큰 식당에 찾아가서,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달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편지를 내가 그 집 사람들에게 대신 읽어주었기에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나 청년은 제대 날짜를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다섯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청년의 어머니가 어렵사리 노자를 구해 전방부대를 찾아갔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청년이 탈영을 해서 자기들도 행방을 모른다며, 청년의 어머니를 도리어 죄인처럼 다루더란다. 아들이 무슨 일로 부대에서 사망했겠지만 탈영병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보상을 받기는커녕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그 부모들도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겠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일들인데, 요즘은 잠자리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문득 그 사람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게 된다. 몸이 허해지면 옛날에 아프던 자리에 다시 통증이 온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다. 눈앞의 참혹한 광경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볼 수 있다 해도, 옛날의 마음 아팠던 기억에는 손발이 묶여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내가 우선 나를 위로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 혼자 말해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많이 달라지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사일구를, 유신시대를,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이 나라가 진실로 억울한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해 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더 나이가 들어, 제도 속에 들어가 어쭙잖게라도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들어섰기에, 그 책임을 어디에 전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서도, 젊은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지배해온 사람들이 동상이나 기념관을 세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가 그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나라의 글자를 만든 임금이 있었고, 어떤 도를 실천하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