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한국정부

● 칼럼 2011. 12. 23. 19: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부의 대북 정보력이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과 김관진 국방장관은 어제 국회에서 북쪽 방송을 보고서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김 위원장이 숨진 것도 모른 채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다고 나라를 비웠다. 그동안 북쪽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김 위원장의 건강 관련 정보를 슬며시 흘리곤 하던 정부기관들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다. 
더욱 문제는 정부가 구체적인 정보를 놓친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개된 정보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북은 그제 정오에 ‘특별방송’을 할 것임을 아침부터 예고했다. 특별방송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 한차례 한 게 전부임을 근거로 일부 민간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유고 가능성을 예견했다.
 
반면에 통일부 당국자들은 우라늄 농축 중단 발표 아니겠느냐고 헛짚고 있다가 허둥댔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특별방송을 앞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고깔모자를 쓴 청와대 직원들한테 둘러싸여 자신의 생일축하 잔치를 벌이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한 것은 이런 외교안보라인의 무능 탓이다. 정부의 상황파악 능력이 이 정도이니 국민이 불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은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선 다양한 남북 교류와 인적 접촉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정보가 비교적 활발히 소통되었다. 아울러 한-중 외교 경로를 통해 핵심적인 정보가 교환됐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미국 편중 외교를 벌이고 대중국 외교를 소홀히 한 결과 비상 상황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동안 정탐활동을 강화한다며 막대한 정보예산을 쏟아부은 게 무색할 지경이다.
 
한반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북 지원이든 뭐든 하려 해도 돌아가는 걸 알아야 판단을 하는 법이다. 북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은 곧 상황 관리를 위한 지렛대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북한 상황과 관련한 국제 협의 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정보력이 없다면 주도적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북 정보력의 허점은 정세관리 능력의 부재로 직결된다. 국정원장은 허점을 드러낸 일차 책임자로 당연히 문책해야 한다. 아울러 문제의 근원이 범정부 차원의 그릇된 대북정책 기조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칼럼] 조문논쟁과 보수-진보

● 칼럼 2011. 12. 23. 19: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9일 아침 지인으로부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차 이동 중 급성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전해진 뒤 우리 사회가 겪었던 후유증을 바로 떠올리게 만든다. 역사상 처음 있을 뻔한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김일성 주석의 급서는 그 파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의 화해와 공존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의 아쉬움과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천만다행으로 받아들이고 김 주석의 사망이 북한의 붕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김 주석의 뒤를 이을 계승자와도, 앞서 합의되었던 정상회담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조의를 표하고 조문사절단을 보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라고 간주하는 보수 인사들은 조문이나 조의 표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1994년 7월11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질의·답변이 있었다.
 
이홍구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김용준 대남담당비서가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 왔다고 보고했다. 필자는 이 보고를 듣고 ‘김정일 체제가 되더라도 정상회담을 계속하겠다는 화해의 신호’로 해석했으며 정부에 조문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했다. 필자는 조문에 네 가지의 전제조건을 달았다. 첫째 북한체제와 대화를 해야 한다면, 둘째 김정일 후계체제의 안정이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부가 갖고 있다면, 셋째 정상회담이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넷째 우리 국민의 양해가 성립된다면 등이었다. 필자는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조문할지 물은 것이었다.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런 발언이었다. 
그 정도의 발언에도 남북관계 추이에 불만을 가졌던 강경보수 인사들은 과잉 반응을 보였다. 여당인 민자당은 “수백만명을 죽인 전범인 김일성은 실정법상 여전히 반국가단체의 수괴이므로 조문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했고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필자를 비난했다. 필자는 정부의 정책을 질의했는데 여당과 보수언론은 도덕을 내세웠다. 지난 며칠 전까지도 정상회담을 당연시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의 조문 논쟁을 관리하지 못했다. 도덕적 판단과 정책적 대응을 구분하지 못했다. 김일성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적대적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지도자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정책적 대응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조문외교는 죽은 자에 대한 인간의 예의와는 다른 수준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조의를 표명한 것은 외교적 필요가 있어서이고,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들이라고 해서 도덕적 판단이 없었겠는가. 외교는 냉혹한 국제 현실이다. 미국·일본이 외교를 선택할 때, 김영삼 정부는 국내 정치를 택했다. 
더욱 아쉬운 점은 한국의 보수다. 당시는 보수가 집권당이었다. 닉슨 행정부처럼, 혹은 포드 행정부처럼, 보수라도 미래지향적인 국익을 우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분단체제에서 냉전 반공주의는 보수적 정체성의 근원이다. 그러나 ‘반공주의자’ 닉슨이 세계적인 데탕트를 주도하고, 서독의 ‘실용주의적 보수주의’가 통일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냉전 반공주의를 벗어나 얼마든지 보수적 정체성을 재규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민주화의 주역이던 김영삼 대통령이 보수적 블록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한국에서도 ‘보수의 현대화’를 이룰 수는 없었을까? 조문 논쟁은 좋은 기회였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응했다면 한국의 이념 지형은 달라졌을 것이며, 남북관계도 한반도 정세도 달라졌을 것이다.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에게도 합리적인 지침이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남북관계 개선과 전진을 바란다면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1994년에도 대학 캠퍼스에 분향소를 차린다든지 하는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 있었는가 하면 도에 넘치는 분노를 표시하여 국민적 통합을 깨뜨리는 사례도 있었다. 1994년과 달리 이번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사태를 보수·진보 진영 모두 냉정하고 유연한 자세로 맞기를 기대해 본다. 

<이부영 - 민주 평화 복지포럼 상임대표/ 전 국회의원>


[한마당] 비상한 시기, 지혜롭게

● 칼럼 2011. 12. 23. 15:5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돌연한 사망으로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한 상황에 직면했다. 한반도 남과 북의 위정자들과 주민들이 이 시기를 얼마나 지헤롭게 넘기느냐에 한민족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이 가져올 한반도의 불안정성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 가져왔던 불안정성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것이다. 당시 북한은 공산권 몰락의 여파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지만, 그래도 74년부터 후계수업을 해온 김정일이란 후계자가 존재했다. 물론 김정은도 후계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그 기간이 일천하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는 김일성 주석을 승계할 당시 김정일 위원장 나이의 절반을 조금 넘는 29살에 불과하다. 통상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경험이나 경륜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이다. 여기에 더해 북한에는 94년에는 없었던 핵무기가 존재한다. 자칫 잘못 대응했다간 한반도와 동북아를 격랑 속으로 빠뜨릴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런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느냐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김정은 체제의 안착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한 북한 방송은 말미에 “김정은 동지의 영도에 따라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특별방송과 동시에 장의위원 명단과 장의절차 등이 질서정연하게 발표됐다. 이는 북한 권력 내부가 당장은 큰 동요 없이 김정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김정은 체제가 이미 안착되었음을 알리는 징표로 해석할 수는 없다. 북한 군부의 움직임을 우려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은 북한이 오래전부터 타이의 입헌군주제를 검토해왔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 대북정책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여러 차례 만났던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북쪽 인사들이 타이의 입헌군주제를 높이 평가해 상당한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북한의 차기 지도자인 김정은에겐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같은 절대권력이 없다. 따라서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과 리영호 북한군 총참모장 등이 집단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회와 내각 대신 당과 군이 권력을 행사하는 변형된 입헌군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김정일 사후 북한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급변사태를 초래하리란 분석은 북한을 자멸시켜 흡수통일하자고 해온 이들의 희망적 관측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할 일은 자명하다. 모험적인 흡수통일론자들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이 기회를 대북관계 개선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조문파동을 일으켜 이후 남북관계를 크게 경색시켰던 김일성 사망 당시 상황이 재연돼서는 결코 안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권은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당장 이틀 전에 일어난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우리 정부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의 대북 정보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얄팍한 단기적 이익을 위해 경거망동하다간 민족과 국가를 전대미문의 위난에 빠뜨릴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말해 현 상황이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지금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김 위원장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꽉 막혀 있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일이다. 이를 통해 북한의 새 지도부와 신뢰관계를 형성한다면 북을 개방사회로 유도해 한반도를 안정화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진지한 대응을 기대한다.

<한겨레신문 권태선 편집인>


[한마당] 멧돼지를 퇴치하는 법

● 칼럼 2011. 12. 19. 11:0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중국 어선들의 서해 불법조업은 단지 폭력적 약탈행위여서만이 아니라 치어까지 쓸어가는, 미래가 없는 공멸적 자살행위라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멧돼지들이 인가에까지 출몰하며 말썽을 피우자 사람들이 생각해낸 대책은 고작 사냥개와 엽사들을 늘려 더 철저히 멧돼지들을 때려잡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비명과 선혈 낭자하게 쓰러져 가는 그들의 최후를 자랑스런 노획물이라도 전시하듯 의기양양 텔레비전 화면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보기 딱하다. 아직도 야생동물을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글을 보니 독일의 멧돼지 퇴치법은 우리와 달랐다. 독일에서도 늘어난 멧돼지들이 인가를 휘젓는 통에 골머리를 앓다가 묘안을 찾아냈다. 그들은 사냥꾼과 개들을 늘려 때려잡는 대신 인가와 숲 사이에 완충지대를 설치했다. 사람과 멧돼지 세상이 직접 충돌하지 않도록 그들 사이 일정 폭의 땅에 멧돼지가 먹고 쉴 수 있는 여러 야생식물이 자랄 공간을 조성했다. 그 뒤 사람을 보면 공격하던 멧돼지들은 공원의 사슴처럼 온순해졌고 인가 출몰도 급감했다.
 
요컨대, 멧돼지의 인가 출몰은 먹이 부족 및 서식공간 파괴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야생동물도 먹이가 없고 사는 곳이 불편하면 다른 영역을 넘볼 수밖에 없다. 이는 멧돼지 개체수가 증가한 탓도 있지만 인간이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야생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옥죄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은 바로 그로 인한 인간과 야생의 갈등과 화해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한 수작들이다. 멧돼지가 농사를 망치니 죽이는 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면 해결 방법이 없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 자연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사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저쪽이 살아야 이쪽도 사는 공생의 장이다. 멧돼지의 습격은 인간의 농사 영역 확장이 멧돼지 일가의 삶터를 망가뜨린 탓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독일은 이미 거기까지 갔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과 야생동물의 습격은 물론 전혀 다른 문제다. 불법조업도 세계의 불평등 구조와 무관하진 않지만, 그로 인한 피해를 우리 어민들이나 해경, 자연환경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발상 전환이다. 중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을 대응 물리력 강화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고, 그로 인한 희생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몫이다. 중국 어부들이 밀려오는 것은 중국 연해에 잡을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당연히 남획과 오염을 방치하는 중국의 연근해 어업과 부의 편중, 불합리한 법체계 등 중국 내부 문제다. 그럼에도 적어도 우리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문제에 대해서는 신속한 협의와 조정을 요구해서 따질 건 따지고 고칠 건 고쳐야 한다. 필요하면 개입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 정부와 외교의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단속 강화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그것은 정부의 무능과 외교부의 직무유기를 자인하는 변명과 같다. ‘조용한 외교’가 ‘아무것도 안 하는’ 또는 ‘못하는’ 외교여선 안 된다. 중국도 이대론 21세기를 이끌 수 없다. 공존방식을 찾아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간 대안 부재의 강경대응 일변도는 정부와 통일·외교부의 무능과 직무유기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뼛속까지 친미·친일적’인 단순사고야말로 중국 및 북한과의 접촉통로를 차단해서 문제를 키운 건 아닌가. 통로가 좁아지면 유사시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외교전략의 포괄적 재조정이 필요하다.
선거방해라는 만행까지 저지른 자들의 치매증상도 한쪽만 보는 병든 외곬 탓이다. 생각을 바꿔야 산다.

< 한겨레신문 한승동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