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잘 계시나요?

● 칼럼 2011. 9. 16. 20:48 Posted by SisaHan

특별히 살 게 없어도 나는 자주 시장엘 간다. 시장도 백화점처럼 공간이며 품목에 나름의 질서가 있고, 그 속의 사람들 역시 비슷한 패턴을 보이건만 지루함을 모르겠으니 시장을 찾는 건 일종의 습관이 아닌가 싶다.
무심한 듯 지나치면서도 양말 더미에 기대 곯아떨어진 아줌마, 무표정하게 다리 뻗고 앉아서 날마다 밤을 까는 할머니, 사모님 소리가 입에 붙어버린 정육점 총각, 물 건너온 덕에 비싼 가격표를 붙이고 배배 말라가는 체리 따위를 눈여겨본다. 그러면서 걱정도 한다. 붙박이 상인 누군가 나를 익숙한 사람으로 바라볼까봐. 뭘 그다지 사지도 않으면서 자주 나타나는 여자라고.
올여름 지겨웠던 비 때문에 어느 상점이고 물건이 시원치 않다. 부실한 채소나마 양이 부족하고 값도 만만찮으니 명절대목의 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씁쓸하다. 이맘때만 보이는 애호박이 있어 냉큼 사들고 가다가 시장 끄트머리 횡단보도 앞에서 문득 발이 멎었다.

“한 바구니에 만원!”을 외치는 젊은 여자 목소리. 온종일 외쳤는지 허스키한 목소리의 그녀는 잘해야 삼십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였고 시장 나들이가 익숙한 내게 낯선 사람이었다.
한 바구니에 만원이라는 물건. 푸른 사과다. 길바닥에 늘어놓은 탓인가 낙과처럼만 보이는 사과 더미 속에서도 여자 목소리에는 단호한 무엇이 있었다. 바구니마다 대여섯개씩 담아놓고 목 언저리가 붉어지도록 외치는 그녀에게 끌려 사람들이 푸른 사과에 눈길을 주곤 했으니.
어서어서 팔아치우고 돌아가야 한다는 듯 그녀는 재빠른 손놀림과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꿋꿋함으로 손님을 불러 세우곤 했다. 어떤 아이의 엄마일 것만 같은 사람.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용감할 수 있겠나.
그런데 별안간 “한 바구니에 만원!”을 외치는 그녀에게 “떨이요, 떨이!”를 외치던 엄마가 겹쳐졌다. 나도 모르게 찡그리며 돌아섰으나 횡단보도의 신호가 끝나도록 나는 발목이 잡힌 채 서 있었다.
곁눈질조차 안 하는 그녀를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저 구경이나 하려던 손님을 기어이 붙잡아 덤까지 얹어주며 팔고 재빨리 다른 손님을 향해 손 까부르는 여자. 저기에 엄마가 겹쳐질 게 뭐람. 어쩌자고.
나는 내 가슴에 깊고 커다란 구멍이 있다는 걸 안다. 그건 평소에 바늘이 찍은 점처럼 희미하지만 너무나 외로울 때면 내 등 쪽을 시커멓게 뚫어버리고 감당할 수 없게 시린 바람을 일으키는 구멍이다. 그 구멍에 내 엄마가 살고 있다.

5일장을 따라다니며 생선과 꽃게를 팔았던 엄마한테서는 늘 비린내가 났고 지문이 닳고 자주 피가 터져서 손가락에는 반창고가 친친 감겨 있었다. 떨이도 못하고 막차마저 놓치고 나면 하염없이 먼 밤길을 걸어오던 엄마. 그런 엄마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나가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왜 안 자고 나와 있느냐는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엄마를 나는 정말 싫어했고, 공부 작파하고 일찌감치 돈 벌러 나가라는 성화를 들은 척도 않는 나는 엄마가 징글징글하게 여기는 딸이었다.
우리가 엄마와 딸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비껴나갔을 텐데, 인연은 때로 너무 가혹한 것이라서 끝내 속을 파 먹히는 아픔을 남기고야 만다. 병든 몸은 마비되어 가는데 정신은 너무나 말짱해서 괴로워했던, 내가 벌을 받는 거라면 죽은 꽃게를 섞어 팔았던 게 죄였다고 말하던 엄마. 내 깊은 구멍이 엄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나는 잘 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고 보낸 엄마를 오늘 시장 귀퉁이에서 만났다. 엄마, 잘 계시나요. 그래야만 해, 꼭. 거기가 어디든지.

<황선미 - 동화작가>

올해는 저희 부부에게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저는 2년 전에 은퇴를 했고, 그 동안은 아내가 하는 세탁소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아내는 일당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마당쇠(?)가 마음이 쓰였는지 작은 용돈을 쥐어주곤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말에 아내가 18년간 해오던 세탁소를 좋은 적임자가 있어서 인계했습니다. 아내가 세탁소를 18년간 열심이 한 덕분에 세 아들들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고 이제는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들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살림하랴, 아이들 기르랴, 세탁소하랴, 정말 많은 수고를 한 아내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게 무얼가 생각하다가, 남들 다 가는 Cruise여행을 한번도 못 간 아내를 위해서 거금을 써서 지중해 Cruise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세탁소를 하느라 제대로 휴가를 가보지 못한 아내를 위로도 할 겸, 또 저희 결혼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습니다. 이태리는 기독교 문화유산의 극치였고, 터키와 스페인은 기독교와 회교 문화유산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럽의 역사는 종교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지은 성당을 회교도들이 점령하면 모두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 회교 사원을 다시 지었습니다.  아니면 건물이 너무 아깝거나 재원이 없어서 변형시켜서 사원으로 사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중에서 터키 이스탄불에서 본 Hagia Sophia (성스러운 지혜: 예수 그리스도 칭함) 성당과 Blue Mosque는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종교의 힘과 무모함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Hagia Sophia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360년 이스탄불이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을 때, 콘스탄틴 대제의 아들 콘스탄틴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답니다. 여러 차례 수난을 거친 후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서 완공되었고,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건물의 웅장함과 정교함 때문에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를 점거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Hagia Sophia 대성당으로 향했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답니다. 이 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의 십자가는 떼어지고, 정교한 모자이크 성화는 석회칠로 덮어졌고, 그 후 네 개의 첨탑이 증축되었답니다.
Blue Mosque는 왕궁 근처에 술탄 아멧드 1세에 의해 건립됐고, 6개의 웅장한 첨탑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스크입니다.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Blue Mosque라는 이름을 얻었답니다. 술탄 아멧드 1세는 기독교의 소피아 사원을 능가하도록 지으라고 명령했고, 성 소피아 성당 바로 건너편에 이 모스크를 건립하였답니다. 두 건물 모두 ‘어떻게 이런 건물을 그 옛날에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있었을까?’ 상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의 영광을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렸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한 죽음을 당했을까? 하느님이든 알라이든 신들은 이 건물들을 보며 기뻐했을까? 많은 생각들이 저의 머리에 스쳐갔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은 종교의 힘과 무모함이 만들어 낸 인류의 문화유산” 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준 분들께 가만히 머리숙여 감사했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뺐고 빼았기고 부수고 다시 짓는 종교전쟁의 악순환 속에서도 몇몇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Hagia Sophia 성당의 정교한 모자이크 성화를 회교도들이 모두 뜯어내거나 부셔버리지 않고 석회로 덧칠을 해서 안 보이게 했답니다. 지금은 석회 덧칠을 벗겨내고 복원해서 옛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성화를 보는 순간 ‘이 세상에서 서로 다른 종교가 함께 손을 잡고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Hagia Sophia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답니다. 터키정부는 Hagia Sophia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Aya Sofya 박물관으로 개조했고, 그 안에서 기독교든 회교든 종교적 행위를 일체 금지했답니다. 이제 911사태가 일어난지 10년이 됩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그 중에 많은 것은 종교의 다름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고 했던가요? 그렇게 많은 사건들을 역사를 통해서 보면서도, 우리는 같은 일을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로 부터 바른 교훈을 받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수필가 - 어진이의 이민수기 필자>

[한마당] 누구를 탓할까?

● 칼럼 2011. 9. 16. 19:59 Posted by SisaHan
2주 전 루이비통코리아로부터 인천공항 면세점 개장 관련 기자간담회 연락을 받았을 때 담당 기자 대부분의 반응은 “뭐하자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원자력 발전소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달력의 빨간 날에 기자간담회가 열리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게다가 이날은 1년 중 50번 있는 그냥 빨간 날이 아니라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휴일이었다.
주최 쪽인 루이비통코리아나 루이비통이 입점한 신라면세점의 운영자인 호텔신라는 “10일이 개장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간담회는 보통 개장 전날 이뤄진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인천공항 면세점인지라 언론에 공개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프랑스에서 날아오는 루이비통 대표와 본사 스태프들이 한국에서 하루나 이틀 더 시간을 낼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게 주최 쪽의 말하지 못한 속내였을 게다.
고향 가는 열차표까지 취소하게 만든 루이비통의 일방적인 간담회 일정을 받으면서 “초대받은 게 굴욕” “진정한 슈퍼갑의 태도다” 농반 진반으로 가시돋친 반응이 오갔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갔다.
특혜 수준의 낮은 수수료 혜택을 주면서도 ‘입점만 해주신다면’ 하고 두 손 모으는 백화점들이 수두룩하고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사겠다는 소비자들이 줄을 서는데 한국 시장에서 뭐가 아쉬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행사를 준비하겠는가 말이다.

지난 7월 런던 출장을 갔을 때 고급 백화점의 대명사로 꼽히는 해러즈백화점을 잠시 들렀다. 아동복 코너만 해도 베이비 디오르, 베이비 펜디, 베이비 구치 등 명품 브랜드가 빼곡한 이 백화점의 명품 매장을 가 보니 너무 소박해서 놀랄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명품 브랜드 입점의 기본에 속하는 대형 단독매장도 드물뿐더러 ‘명품 가방’을 일개 ‘가방’으로 다루는 종업원이나 손님들의 태도도 한국 매장과 달랐다. 누구나 쉽게 들어보거나 만져볼 수 있고 내키지 않으면 전시대에 살짝 던져놓더라도 도드라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명품 매장에 들어가 제품 하나 구경할라치면 흰 장갑을 낀 종업원이 신줏단지 모시듯 제품을 ‘모셔와’ 보여주면서 사실상 손님들의 접근을 은근히 차단한다. 그 앞에서 제품에 핀잔이라도 줬다가는 불경죄에 해당할 것만 같다.
해묵은 문제임에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애프터서비스는 또 어떤가. 얼마 전 한 친구는 명품 브랜드에서 산 구두의 밑창이 닳아 해당 매장에 가져갔더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수선이 되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어이없는 대답에 친구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다시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그냥 버리세요. 저희 브랜드 신는 분들은 원래 그렇게 하세요.”
구두창 좀 갈아달라고 했다가 지지리 궁상맞은 소비자로 찍힌 내 친구는 그 브랜드에 발을 끊었지만 그 브랜드의 한국 매출은 해마다 승승장구하기만 한다.

못 만지게 하고 고쳐주지 않고, 이런 ‘무시’ 전략이 한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희소성 가치’ 전략으로 바뀌어 소비자들을 점점 더 열광시킨다.
명품 소비가 이제 차별화를 넘어서 동조화 시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과 다르게 보이고 싶어서 명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명품 소비의 대중화를 가속한다는 것이다.
명품이 일상화된다는 현상 자체는 우려할 것도 자랑할 것도 못 된다. 다만 명품 소비가 흔해진다면 명품의 권위도 ‘갑’에서 소비자가 우위인 ‘을’로 바뀌는 게 정상인데 한국의 명품 브랜드들은 점점 더 ‘슈퍼갑’이 되간다. 누구를 탓할까.

< 김은형 한겨레신문 경제부 기자>

세상이 온통 안철수 교수 이야기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안철수 교수의 압도적 지지로 나타나는 것은 심상치가 않다. 서울시장 선거를 넘어서 내년 총선과 대선 판도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란 전망도 속출하고 있다. 언론에서 이름 붙인 것처럼 가히 ‘안철수 쓰나미’라 할 만하다. 
하지만 아직도 정치권은 자기 당의 표를 갉아먹는 안철수만 볼 뿐, 안철수의 등장 뒤에 숨겨진 민심의 흐름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안철수의 등장을 비판하는 제1 논거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적실성을 가지려면, 그간 ‘혼자 하는 게 아니었던’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한 달 8·24 주민투표를 치른 한나라당은 ‘오세훈 당’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 정책투표에 원내 169석의 거대 정당이 중심을 잃고 떠밀려갔다. 당내에서 ‘주민투표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식으로 당도 함께 주민투표 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당 대표의 표현대로 ‘사실상 승리한 투표’(?)라고 하면서도, 곧 이은 서울시장 보선에선 ‘무상급식에 반대하지 않는’, 적어도 ‘무상급식 투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후보를 공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 및 야권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오세훈 시장 사퇴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서울시장 후보 출마 선언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당내 주류와 비주류 간에 세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서울시장 보선의 큰 전략은 세워놓았다. 야권 대통합. 그런데, 이 메뉴는 작년 지방선거 때도 들었고, 4·27 재보선에서도 들었던, 아니 야권이 정권을 뺏긴 이후 4년 동안 고장난 확성기처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던 레퍼토리다. 왜 통합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통합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안철수의 등장과 부상은 기존 정치권의 무능과, 정책 하나하나에도 물든 지나친 정치화의 반작용에 기인한다고 본다. 대중의 눈에 비친 안철수의 이미지에는 기존 정치권이 결여한 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청장년층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의 시각에서 생각을 나누는 ‘소통’의 이미지이다. 지난 4년간의 청춘콘서트를 통해서 안철수·박경철은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철수가 ‘국민 멘토’라고 불리며 수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청년들이 듣고자 하는, 필요로 하는, 위로받고자 하는 말들을 통해 ‘벗’으로서 다가가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둘째, 대중은 안철수의 이미지에서 신실(integrity)을 찾고 있다. 현 정권은 ‘실용’에서 ‘친서민’으로, ‘공정한 사회’에서 ‘공생’으로 일년 단위로 언어공해를 남발했지만, 실질적으로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도, 그 효과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빈부 격차는 더욱더 커지고, 가지지 못한 이들의 경제적·사회적 기회 또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부가 넘게 팔리지만, 알면 알수록 정의롭지 못한 비뚤어진 사회구조에 대한 절망과 자괴감만 늘어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지로서의 안철수는 단순한 정치적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담보해 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신뢰를 시민들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거라는 논평에 대한 답이다. 때묻지 않은 정치신인이 변화와 신실함, 자기 성공신화를 걸고 중앙정계에 태풍으로 등장한 사례는 우리만 경험하는 건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3대째 중앙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부시와 체니, 럼스펠드 등 공직 경력만 30년이 넘는 이들이 벌여놓은 금융위기, 이라크 전쟁을 청소하기 위해 미국인이 선택한 사람은 중앙정치 경력 갓 3년이 넘지 않는 40대 중반의 흑인 변호사였다.

< 김준석 동국대 정치외교 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