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그제 국공립대의 정원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대학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제정신으로 한 말인지 의심스럽다. 등록금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유력하게 제안되고 있는 것이 사립대의 국공립화다. 고등교육을 아예 망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할 얘기가 아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국공립대 등록금의 두 배에 이르는 사립대, 그것도 의존도가 80%를 넘는 사립대 때문에 제기됐다. 사립대 의존도가 20% 밑으로, 아니 절반 이하로만 떨어져도 등록금 문제가 이렇게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공립대를 닦달해 등록금 인상을 주도해온 일부 명문사립대보다 경쟁력이 높아지면, 등록금 통제기능이 커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기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같다.
역대 정권들은 가뜩이나 적은 고등교육 재정을 더욱더 줄이려 국공립대의 규모를 축소해 왔다.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 재학생 가운데 국공립대 재학생은 1980년 31.3%에서 2010년 13.8%로 떨어졌다. 2005년 이후 10개 대학이 통폐합되고, 학생 정원은 8768명이 줄었다. 이 정권이 입만 열면 거론하는 미국의 경우 주립대 재학생이 75%를 차지한다. 유럽은 영국을 제외하고 모두 국립 중심이다.

게다가 이 정권은 지금 국립대를 법인화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에 상정도 되지 않은 서울대 법인화법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해 날치기 처리하기도 했다. 국가가 책임지는 대학을 모조리 없앨 생각인 것이다. 어쩌면 법인화에 결사반대하는 지방 국립대를 협박하는 발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거기에 등록금 문제 해결 운운하는 핑계를 들이대선 안 된다. 정원 감축 대상이 하위 15% 대학이라고 하는데, 이럴 경우 주로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국공립대가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방 국공립대 공동화 우려가 곧바로 제기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국가 균형발전 정책에도 역행한다.
전체적인 대학 정원 줄이기 차원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학벌사회가 혁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인 정원 줄이기는 재수·삼수생만 양산한다. 이 경우 급증하게 될 사교육비 등 소모성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건지 눈앞이 아득하다. 제발 망국적 발상만은 좀 자제하길 부탁한다.

지난 17일 새벽 강화도 교동도에 주둔하는 해병대 초병들이 아시아나항공 여객기를 북한 공군기로 오인해 10분간 소총 사격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는 없었지만,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빚어질 뻔했다. 병사들이 항공기를 오인한 이유가 무엇인지, 군은 왜 사격 사실을 제때 발표하지 않았는지 등 궁금하고 걱정스런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돌발상황’으로 치부하며 어물쩍 넘기려고만 하니 답답하고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번 오인사격 사건에 대해 항공사 관계자들은 “유례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중국 청두에서 승객·승무원 119명을 태운 여객기가 정상 운항 중이었는데도 초병들이 사격을 가한 까닭이 불투명하다. 군은 “새벽인데다 바다안개가 끼어 있었다”고 자연환경 탓을 하고 있지만, 자연환경이 오인사격의 가장 큰 원인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새벽 서해에 안개가 끼는 것은 흔한 일이라 비슷한 사건이 언제든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의 대응방식에서도 허점이 적잖이 노출됐다. 군은 사건 발생 뒤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한 것 같다고 밝혔다가 나중에 항로 이탈은 없었으며 초병들이 오인한 것이라고 잘못을 시인했다. 항로 이탈 여부는 공항 관제센터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군이 당장의 책임 추궁을 회피하려고 항로 이탈을 주장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인사격이 군과 항공사의 공식 발표가 아니라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군은 내부적으로 쉬쉬하며 사건 자체를 숨기려 했고, 항공사 쪽에도 외부 공개를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인사격이 벌어진 항로는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출발하는 항공기는 물론 미국 동부지역에서 오는 항공기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국내외 여행객들이 불안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경계지역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오인사격이 발생해 외국 언론의 관심도 높다. 군은 이번 사건이 불필요하게 긴장을 증폭시키지 않도록 정확한 진상을 공개해야 한다. 아울러 초병들의 민항기 식별 교육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지휘체계를 갖추는 등 대응방안 마련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1500자 칼럼] For The Good Times

● 칼럼 2011. 6. 26. 16:22 Posted by Zig
며칠 전에 십 년 동안 인터넷을 모뎀을 쓰다가 하이 스피드로 바꾸었다. 나는 컴퓨터를 글을 쓰는 일과 이 메일을 보내고 받는데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쩌다 친구가 보내온 노래를 들으려 하거나 사진을 다운로드 받을 때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나는 노래를 잃어버리고 산 셈이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유 튜브였다. 노래를 제목만 두들겨도 나온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도 몰래 두들긴 첫 제목이 ‘For The Good Times’였다. 한 때 내가 꽤나 좋아하던 노래였다. 특히 이민 초기에 그 노래를 좋아했는데. 아마 이 삭막한 이국 땅도 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온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처음에 부닥친 문제는 이 노래를 한 두 명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는 분명 아니고, Johnny Cash, Perry Como를 듣다가 Ray Price(처음 듣는 이름이다.)가 부른 것이 나의 기억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들렸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생각해보니 벌써 40년 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냥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마주친 극장 간판에서 서부의 사나이가 총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왠지 답답할 때여서 신나는 총 싸움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총 한 방 쏘았는지 안 쏘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한 영화였다. 당시 서부영화가 그러하듯 주인공이 악당들을 모두 물리치고 말 타고 떠나는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차례로 잃어버리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간판에 속았다는 사실에 당연히 분노해야 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영화에 빨려 들어가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영화 전체에 깔리는 차분한 음악 때문이었을지 않을까 싶다. 그 노래가 ‘For The Good Times’이었다. 

 “Don’t looks so sad, I know it’s over.
   But life’s go on and this world keep on turning......,
   For the good times.”

한국말로 번역하면 ‘좋은 시절을 위하여’ 또는 ‘좋은 날을 위하여’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일이 틀어져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언젠가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오리라.”는 말이 영화 속의 대사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십 년 만에 듣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나는 듣고 또 듣는데, 뜻밖에 가사의 정확한 뜻은 그 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젠가 와야 할 ‘좋은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이나 영원을 말하지 말고, 헤어져야 하는 연인에게 지금 좋은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데도 나는 그 옛날 총소리 울리지 않는 서부영화를 보았을 때처럼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가사보다 차분히 가라앉는 멜로디를 들으며, 모든 것이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실에다 제 멋대로 뜻과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감상에 빠진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오랜 착각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직도 나는 좋은 시절이 온다고, 와야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가지만 오늘 속에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기대가 있어 오늘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에게 벌써 왔어야 할 좋은 시절은 보이지 않지만, 아니 언제 올지 막연하고 차라리 점점 멀어져 가며 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는…….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칼럼] 6.15와 6.25

● 칼럼 2011. 6. 26. 16:20 Posted by Zig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불린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이들을 기리고 그 은혜를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현충일이 6월에 있음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현충일은 극우보수 진영의 궐기대회 날이 되어버렸다. 야당과 민족화해 세력을 싸잡아 종북세력이자 김정일·김정은 비호세력으로 단정해버리는 극렬 보수 인사들은 이번 현충일에도 진보진영과 야권을 비난하는 데 열중했다. 무상급식을 주장해도 빨갱이이고 4대강을 반대해도 친북이며 반값 등록금을 외쳐도 종북세력이다. 순국영령과 호국열사의 뜻을 독점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그들에게 부여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떤 근거로 민주주의와 민족화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체제 친북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현충일의 참뜻이 일부 수구진영에 의해 이념적 공격과 색깔 공세로 덧씌워져 버린 셈이다.

6월의 현충일이 민주진보 진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계기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외부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것이 현충일의 정신이라면,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미래의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6.15의 의미이다. 건국과 호국의 역사와 노력이 소중하고 귀한 것처럼 민족화해와 통일한국을 위한 노력 역시 소중하고 절실하다. 건국과 호국이 북한과의 대결과 경쟁을 통해 가능했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고 북한의 변화를 이뤄냄으로써 통일의 완성이 가능하다. 6.15의 대북 접근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우리 주도의 평화통일을 이뤄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북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건국과 호국의 정신이 6.15의 정신과 배치되고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인식이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역사적 퇴행으로 안내하는 과거지향적 편가르기의 전형이다. 결국 건국과 호국의 성과를 바탕으로 6.15의 정신이 결합함으로써 미래의 대한민국은 온전한 통일국가로 완성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6.15의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올해 6.15는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하고 침체된 분위기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대규모 방북단이나 남북 공동행사는 이제 가능치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민족화해와 남북관계 개선 대신에 민족대결과 남북관계 파탄의 현실을 맞고 있는 현 시기 6.15의 힘은 그만큼 약해진 것이다. 오히려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6.25 발발 60주년을 전국가적 차원의 대대적 행사로 치러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정부 예산으로 거행했다. 동시에 1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의 6.15는 6.25의 그늘에 밀려 볼품없는 민간 차원의 행사로만 치러졌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고 전쟁에서 사수해낸 6.25는 분명 호국과 순국의 핵심이자 토대이다. 6.25의 비극과 교훈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놓고 북을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만으로 6.25가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참혹함과 민족상잔의 안타까움을 재확인하고 미래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해냄으로써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6.25는 발전해야 한다. 결국 6.25의 미래지향적 극복은 6.15의 정신과 접목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고수한 ‘반6.15’의 접근, 즉 남북관계 중단을 통해 대북 제재와 압박으로 북을 굴복시키고 변화시키겠다는 희망적 사고는 완벽하게 실패했음이 이미 드러났다. 북은 괴로워하지도 굴복하지도 않았고 북한의 도발은 오히려 증가했으며 평화는 더더욱 위협받았고 북핵문제는 해결난망의 최악으로 치달았다. 6.25식 접근방법에 올인하는 이 정부의 대북정책이 백전백패의 총체적 실패로 귀결되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건국과 호국을 넘어 대한민국을 완성하고, 6.25의 되새김을 넘어 6.25의 아픔을 온전히 극복하기 위한 일관되고 합리적인 전략이 곧 6.15의 시대정신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6.15의 힘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올바른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정치권력을 교체하는 길 외에 현실적 대안이 없음 또한 실감하고 있다.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였던 6.10의 정신이야말로 우리에게 6.15의 정신을 되돌려주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근식 - 경남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