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디지털 세대와의 가을 캠핑

● 칼럼 2011. 12. 4. 15: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몇 년 만에 온가족이 모였다. 객지에서 활동하던 아이들이 겸사겸사 돌아와 에너지 충전을 해야겠단다. 그들에게 아직도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부부를 흐뭇하게 했다.
호젓했던 빈 둥지가 모처럼 활기를 되찾나 했더니 며칠 못가서 다시 조용해졌다. 방마다 자신의 컴퓨터와 소통하느라 여념이 없는 탓이다. 어쩌다 한 공간에 식구들이 모여도 각자의 기기를 소지 한 채 들어서니 일상의 대화는 뒷전인 듯 하여 씁쓰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최신형 기기가 출시되면 될수록 열외로 밀려나는 우리 집 텔레비전, 장기 폐업 상태로 벽면을 지키고 섰는 가구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하여 깜깜한 모니터를 쓰다듬어 본다. 손끝으로 밀리는 허연 먼지가 소외층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삭막한 전자기기에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 준 아이들에게 양질의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 제공만이 능사가 아닌 듯 하여 캠핑을 제안했더니 순순히 응했다.

장성한 두 아들과 가을 캠핑을 준비한다. 기껏해야 사흘 필요한 것들인데 순식간에 산더미가 된다. 텐트, 침낭, 코펠, 등등 십 수 년간 잠자던 캠핑도구들이 줄줄이 엮여 나와 어리둥절해 하는 반면, 방마다 엎드려 있는 노트북은 굳은 침묵이다. 단 며칠이지만 자신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놓고 가야하는 녀석들은 아예 체념한 듯 연연해하지 않는 눈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그들은 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지 궁금하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올망졸망한 일용품들을 한 차 가득 실은 우리는 약 400km를 북상하여 캠핑장에 도착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가랑잎을 쓸고 있는 넓은 캠핑장은 주인도 손님도 모두 떠나 을씨년스러웠다. 사나운 산짐승이 수시로 찾아 들 것 같은 숲속에서 네 식구는 텐트를 치랴 모닥불을 피우랴 바삐 움직인다. 기껏해야 잠자리 준비와 먹거리 마련인데 온 식구가 매달려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보니 컴퓨터 앞에 있는 것 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좋다.

아름드리 상록수가 하늘을 가린 밀림지대를 누비며 하이킹도 하고 텅 빈 호수에서 카누도 타고 호숫가 산책도 빼놓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자 주위는 금방 어둠이 짙어갔다. 물소리, 거센 바람소리, 짐승들의 포효로 숲은 차츰 야성의 기질을 뿜어내며 번잡해졌다. 모닥불을 더 높이 올린 우리는 오랜만에 둘러앉아 옛이야기도 하고 별도 헤아려 보고 자연의 소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어느 덧 밤이 이슥해지자 한사람씩 분산되기 시작했다. 작은 녀석은 셀룰러폰을 충전한다며 인근 마을로 차를 끌고 나가고 큰아인 배낭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든다. 뜨악해 하는 나를 보곤 영화 상영시간이 되었다며 다가앉는 아들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다.
한 사흘 문명과 담을 쌓고 자연속에 파묻히려던 계획은 남편과 나의 생각이었을 뿐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준비가 있었던 것이다. 천지가 노오란 단풍나무 숲, 모닥불 앞에서 수시로 영화감상은 물론 독서며 글쓰기 등을 입맛대로 즐기는 아들을 보며 디지털세대와 아날로그세대의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연과 문명은 항시 충돌만 하는 게 아니라 운용에 따라서 조화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아침, 적요를 깨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의 아이팟에서 흘러간 가요가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칼럼] 한인사회의 쿠데타들

● 칼럼 2011. 12. 4. 14:5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년 6월28일 중미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발생, 마누엘 셀러야 대통령이 코스타리카로 추방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세라야가 권좌에서 쫓겨난 배경을 보면 “그래도 싸다”는 말이 이해됐다. 그는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장기집권을 겨냥한 개헌을 추진, 국민투표를 강행하려다 투표일 새벽 전격적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 경우 어느 쪽이 옳고 정당한 것일까.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주변의 압도적 반대에도 귀를 막고 개헌을 밀어부친 게 잘 한 일인가. 대통령의 일방독주를 막으려 무력을 써서라도 몰아낸 쿠데타 세력이 정당한가?

그로부터 20일 뒤 제헌절인 2009년 7월17일, 토론토 한인회에 유례없는 정변이 일어났다. 회장이 불법 무효라던 임시총회가 회관에 몰래 잠입한 이들에 의해 개최돼 회장과 이사회를 즉각 업무정지 시키고 임시운영위원회라는 정관에도 없는 비상기구가 설치됐다. ‘임운위’는 회장단과 이사회는 물론 선관위 역할도 하는 무소불위의 기구였다. 한인회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차기회장 선거를 놓고 여러 잡음과 ‘미운 털’이 박혔다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법적기구’를 일거에 와해시켜 버린 초법적 행동을 ‘속시원하고 멋지다’고 박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초법행동’에 나선 이들 가운데는 한인사회에서 명망있다고 알려진 이들이 포함됐기에 더욱 아연했을 수 밖에-.
세계 각지 한인단체들이 내분으로 낯뜨거운 것은 알려진 일이로되, 토론토에서 또 다른 희한하고 괴이쩍은 사례를 만들어 기록에 남겼으니 동조자나 반대자나 모두 개운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협에서 마침내 사단이 벌어져 동포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왜 우리 한인들은 그렇게 밖에 못하나” 하는 자조의 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참으로 실망스럽고 한심하다는 실소와 자괴의 탄식들이다.
짚어보면 양비(兩非)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몇몇 양상만을 보자. 선거에 후보를 내지않아 단독을 허용해 놓고는 당선은 못마땅해 했다. 총회인준 요구에 당당히 임했으면 될 일을 감정만 돋웠다. 이런저런 시비에 아량으로 대화의 성의를 보일만도 했다.  총회에서 적법하게 의결했으면 물리력이 아닌, 적법하게 사임과 퇴거를 시키면 됐다. 서로 감정을 접고 대승적으로 한발짝씩 물러날 여지도 찾아야 했다. 밤낮 먹고살기에 매달리는 수천 회원들의 처지부터 최우선으로 헤아려야 했다.
그런데 ‘너 죽고 나 살자’는 적개심만 나도는 전쟁터다. 상대방에 귀를 막고 감정적인 일방 독주만을 외치며 충돌을 향해 마주 달렸다. 마침내 한바탕 ‘코피가 터진 뒤’ 실협은 이제 마비와 분열, 그리고 와해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어느 쪽이 잘했고 못했다거나, 정당과 불법을 따지는 것은 전체 실협 회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법관의 판단에 의지한다 할지라도 그 것은 지금 시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한시라도 급히 민주적 상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사태는 우리가 과연 민주 질서의 틀 안에서 살고 있는지 조차 의구심을 낳았고, 회원 분란을 자초했으며, 한인사회에 실망을 안긴 큰 말썽이기 때문이다. 
잘했고 정당하다 해서 절차와 방법이 폭력적·독선적이어서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비록 잘 못했어도 피고인이 존중받고 절차와 방법에 정당성을 두는 게 민주주의다.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지키며 순리에 따름이 대명제다. 과연 작금의 실협 사태는 질서와 절차와 상식과 순리가 통용되고 있는가, 모두가 자문해 볼 일이다. ‘비정상’을 바로 잡겠다며 결과적으로 비정상적 방법에 의존한다면, 그야말로 ‘비정상’이며 ‘비민주’ 가 아닌가.   
실협은 일부의 소유가 아니다. 1천여 회원이 있고, 그 뒤에는 10만여 한인 동포들이 있다. 양측은 어서 속히 감정을 접고 대화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걸음씩 물러나 회원과 동포들의 걱정과 자존심을 헤아려 달래주어야 한다. 속은 상할 테지만, 상식과 순리로 돌아가야 뒷탈이 없다.

[칼럼] 수구의 본질과 친일의 악취

● 칼럼 2011. 11. 21. 13:0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얼마 전 중국을 방문했다가 그곳 학자로부터 난감한 얘기를 들었다. 누구보다도 친한적인 학자가 조심스럽게 “한국 사람들은 왜 자기 나라를 남에게 지켜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 정부에 애걸하다시피 해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3년7개월이나 연장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내 나라 흠집에 맞장구칠 수는 없었지만,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져 있고 남한이 북한에 비해 최소한 10배 이상의 국방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에게 구차하게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하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만큼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 상식인데, 주권국가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군사주권조차 돌려주겠다고 해도 못 받겠다는데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과 여권은 야권 단일후보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종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평양시장도 아니고 서울시장이 된다는 게 정말 끔찍한 일”이라며 막말을 해댔다. 집권세력은 고질병이 도진 듯 오로지 시민운동 한길을 걸어온 그에게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터무니없는 색깔론의 패악을 행한 것이다. 
국정운영세력의 행태치고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 걸까? 나는 그들의 본질이 수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것은 위장에 불과하다. 반칙과 특권이 몸에 밴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수구일 뿐이다. 
그들의 뿌리는 친일이다. 속성은 반주권적 기회주의이며 생존방식은 배타적 독식이다. 해방 후 친일파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청산은커녕 오히려 집권세력으로 소생하였다. 그리고 장면, 박정희 시대를 넘나들며 기득권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반민족 행위의 전력 때문에 그들에게 국가주권이나 민족이라는 말은 ‘경기’가 날 만큼 부담스러운 용어였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대신 붙잡은 것이 반공의 끈이었으며 미국 숭배주의였다. 그들의 반공은 맹목적 반공주의로 흘러 오늘의 색깔론으로 이어졌으며 숭미는 우리 사회에 과도한 대미의존심리 구조를 고착시켰다. 수구세력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은 분단체제이며 남북대결구조였다. 그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기를 서슴지 않으며 여러 세력 간의 공존을 거부하고 부와 권력의 독식을 추구해왔다.
 
수구세력은 진보진영에 ‘친북’ ‘종북’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억압하려 하지만 따져보면 이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진보가 ‘친북’ 혹은 ‘종북’이라면 북한의 세습체제가 진보적이라는 말인가? 터무니가 없다. 내가 보기에 북한의 세습정권은 북한판 수구세력이다. 그렇기에 굳이 남한에서 북한 정권과 유사성을 지닌 집단을 찾는다면 오히려 수구세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수구세력이 진보를 북한 정권과 얽어매려는 것은 그들이 분단의 모순을 먹고 사는 비합리적 반칙 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뒤 기고만장하여 자신을 키워준 독재를 정당화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미화한 식민지근대화론을 역사교과서에까지 넣으려 하고 있다. 특히 과거 수구세력은 자신의 뿌리인 친일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라도 식민지 시대를 정당화할 엄두를 못 냈는데, 지금의 수구는 정부·정치·언론·경제를 망라한 광범한 연대를 통해 뉴라이트라는 이념 집단을 전면에 내세워 역사교육을 흔들어대며 민족정기에 말뚝을 박으려 하고 있다. 이제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는 수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져서는 안 된다. 수구는 보수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보수로 진화할 수도 없다. 이제는 수구세력을 우리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서 몰아내고 상식과 원칙이 통하고 국가주권과 남북평화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며 여러 세력 간의 공존이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대한민국 제대로 세우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2013년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2012년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


[사설] 역사의 이름으로 교과부 장관을 경질할 이유

● 칼럼 2011. 11. 21. 13: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400여 시민사회단체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사퇴를 촉구했다.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인한 그의 진퇴 문제가 역사학계에서 시작해 교육계와 정치권을 거쳐 시민사회단체로 확산되고 있다. 무수한 경고와 반발에도 아랑곳 않고 권력을 앞세워 사실을 왜곡하려 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어제 집필기준 설명회를 열어 진화를 시도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집필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균형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5.16 군사정변이나 5.18 민주화운동 등 구체적인 사례들은 집필기준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통과되기 어렵다고 쐐기를 박기도 했다. 일부 물러선 셈이다. 하지만 대원칙인 교육과정 각론과 집필기준은 그대로 두고, 심사기준만 바꿔 바로잡겠다는 이들의 태도는 억지춘향의 본보기다.
이들 말대로 자율성을 존중했다면 학계의 절대다수가 반대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는 문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기술 문제부터 자율에 맡겼어야 했다. 당장 소나기나 피하자는 속셈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정권의 의도가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났는데 어떤 출판사가 집필기준에도 없는 내용을 자율적으로 기술할까. 정권의 역사 농단 의지를 심사기준의 손질로 바로잡을 순 없다. 장관 사퇴 요구가 빗발치지만 그것도 해법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학문 그리고 역사의 이름으로 경질돼야 한다.
 
그는 학계의 일치된 연구결과나 의견은 물론 정해진 절차마저 철저하게 유린했다. 역사교육과정 연구위원회와 심의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내용을 멋대로 바꿨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위원회의 다수의견도 묵살했다. 이를 위해 역사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급조해 들러리를 세웠다. 개악 이후 학계의 항의는 모두 외면하거나 묵살했다. 친일 청산 과정, 독재체제의 폐해, 이를 바로잡으려는 민주발전의 중요 계기들에 대한 기술이 집필기준에서 빠진 것은 그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맹종한 것은 사익추구 혹은 이념 집단에 불과한 수구언론이나 관변학자들뿐이었다. 
이제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중립성은 치명상을 입었다. 실무선에서 이를 미봉하려 하지만 정권에 의한 역사 농단의 과오를 덮을 순 없다. 최소한 이 장관을 경질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