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야당 대표 회담의 묘미는 통 큰 결단과 타협에 있다. 이들의 만남에 ‘영수회담’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것도 회담의 이런 성격과 무관치 않다. 지난 정치사를 돌아보면 여야 대표 회담이 난마처럼 얽힌 정국 현안의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 분수령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회담 결과를 보면 영수회담이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민망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게 허무하기 짝이 없는 회담이었다. 본질적으로 ‘주고받기’ 자체가 없으니 성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오랜만에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얼굴을 마주했다는 점 정도다.

이 회담이 ‘민생 영수회담’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뭔가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한 가지라도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일자리 대책, 저축은행 사태, 가계부채 문제 등 그나마 합의가 이뤄졌다는 사안도 발표 내용을 들여다보면 원론적 수준의 하나 마나 한 이야기뿐이었다. 정부가 가계부채 대책을 이른 시일 안에 발표한다느니, 저축은행 부실 문제를 다루는 국회 국정조사에서 여야가 최대한 협조한다느니 따위의 합의사항이 과연 청와대 회담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대학 등록금 인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등 핵심 현안은 아예 각자의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끝났다. 이 대통령은 완강했고, 손 대표는 어설펐다.
물론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이렇게 만나다 보면 이해와 교감의 폭이 깊어져 난제를 풀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양쪽 태도를 보면 그럴 전망도 별로 없어 보인다. 말로라도 후일의 만남을 기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미뤄온 ‘숙제’를 해치워버려 시원하다는 분위기가 공통으로 감지된다.

이번 회담 결과를 놓고 청와대와 민주당은 각자 ‘윈윈 게임’이라며 흡족해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청와대는 ‘불통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희석시키는 데 회담을 충분히 활용했고, 손 대표 역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민생에 신경 쓰는 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윈윈’했는지는 모르지만 민생고에 허덕이는 서민들이 승리한 회담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의 민주당 비공개 회의 녹취록 공개로 촉발된 도청 시비가 확산되는 가운데 녹취록을 한 의원에게 전달한 사람이 <한국방송>(KBS)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잇따라 주목된다. <한겨레>와 <조선일보>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한 의원은 “녹취록은 민주당 당직자 쪽에서 나왔으며 또다른 한 명을 거쳐 받았다. 중간에 녹취록을 준 사람은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러 정황상 한 의원이 말한 ‘신뢰할 만한 인물’이 바로 한국방송 관계자가 아니냐는 의혹인 것이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도 “이 문제(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이 (회의장에) 마이크를 갖다댄 것 같다는 심증을 갖고 있다”고 말해 한국방송 쪽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물론 이번 도청 의혹 사건에 한국방송이 연루된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다. 하지만 도청 의혹이 제기된 직후부터 정치권에는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통과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방송 쪽이 민주당의 회의 내용을 빼내 한나라당에 건넨 것 같다’는 관측이 파다했다. 민주당은 실제로 도청 범인과 관련한 구체적인 제보도 접수해 경찰에 넘겼다고 한다. 단순히 소문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한 것이다.

취재 현장에서 취득한 정보를 보도 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론으로서는 금기 중의 금기다. 만에 하나 한국방송이 부당한 방식으로 민주당 회의 내용을 녹취해 은밀히 한나라당에 넘겼다면 실로 충격적인 일이다. 게다가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최대 논쟁거리는 바로 한국방송의 공정성이다. 이런 파렴치한 행동은 그것만으로도 수신료 인상 불가론을 생생히 입증하는 사례가 되는 만큼 진상규명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한국방송으로서는 자신의 연루 의혹에 명확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의혹이 확산되는 마당에 계속 침묵하고 있으면 오히려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이번 사안은 한국방송뿐 아니라 언론계 전체의 명예와도 관련된 사안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있다, 없다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잡음 확산을 막는 길이다.
한선교 의원도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녹취록을 건네준 ‘신뢰할 만한 사람’이 누군지를 진솔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정치권에 평지돌풍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그것만이 그나마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는 길이다.

김주영의 <천둥소리>라는 소설로 기억한다.
때는 한국전쟁 당시. 달도 안 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정적 속의 산간마을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무장괴한들이 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묻는다. “좌면 손등을, 우면 손바닥을 내보이라.”
고단한 일상에 쫓겨 자신이 좌익인지 우익인지 가늠할 여유조차 없었던 이 땅의 수많은 양민들은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단지 물음과 답변의 어긋남만으로도 죽음을 맞아야 했다.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소설 같은 실제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총알이, 포탄이, 공중폭격이 어디 좌우 이념 따져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했던가. 스스로 좌 또는 우여서 당해야만 했던 운명이었다면 그리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들(주류든 비주류든 이들은 ‘완장’이다)의 필요와 요구로 좌 또는 우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곤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만 했던 사람이 무려 100만명에 이른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이념과 사상이란, 그저 화려한 장식장 속의 귀금속처럼,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가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좌우? 그게 어느 나라 짬뽕이던가?

주류든 비주류든 권력을 위해 쟁투하던 엘리트들에게는 좌우의 문제가 사상적 순결성과 정치적 생사존망을 다투는 중차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판에서 죽어나간 건 정작 그들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고한 양민들, 바로 우리의 부모형제, 친척, 이웃들이었다.
평생 사상은커녕 권력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이들 말이다. 그러나 주류든 비주류든 완장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패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양민들에게 어느 편인지 캐묻고, 줄 세우고, 자기편이 아니라고 처단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0년 5월. 학살의 비보를 접하고 차마 방구석에만 있을 수 없어 광주로 잠입(?)을 시도하던 시인 황지우는 끝내 계엄군의 불심검문을 받는다. “너 뭐야?” “넷,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 웃기고 자빠졌네. 이 빨갱이 새끼!” 돌아온 건 쌍욕과 개머리판과 발길질이었다. 그는 그래도 요행히 생명은 부지했다. 살이 발리고 피가 튀던 때였다. 권력의 불심검문은 종전 30년이 지나도록 이 땅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광주의 소박한 민주화 요구는 아직도 권력의 완장이 설치한 이념의 덫에서 헤어나오질 못한 채 구중산천을 헤매고 있다. 그들은 묻는다. “너는 뭐냐”고. “좌냐, 우냐”고. 어느 편인지 캐묻고, 줄 세우고, 자기 편이 아니라고 처단한다. 이도 저도 아닌 건 없다. 뭐라? 시인? 민주주의? 그런 건 안드로메다에나 있는 것이다.
다시 또 30여년이 흐른 2011년 오늘, 권력의 완장들은 여전히 캐묻는다. “너는 뭐냐”고.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고. 이 우스꽝스럽고 살벌한 줄 세우기 앞에 양심의 자유란 한낱 휴짓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으로 처박힌다.

개인이 가진 내면의 신념에 대해 정체를 밝히라고 추궁하는 건 적어도 문명사회에서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는 점잖은 항변은 한마디로 묵살된다. 묵살을 넘어 예의 그 올가미가 또 동원된다.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답하지 못한다고 몰아세운다.
이런 물음은 그 자체로서 혐의를 덧씌우고 진영을 가른다. 파시즘적 프레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지겹고 난폭한 진영논리 앞에 너무 피로하다.
이제 그만 좀 물으라. 언제까지 ‘그들만의 리그’에 평범한 사람들이 패가 갈리고, 동원되고, 단죄되어야 하는가. 독립군 때려잡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전쟁영웅으로 둔갑시켜도 좋다. 군사독재 세력을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 세력으로 미화해도 좋다. 다만 진실을 가려 거짓을 세우는 데에 더 이상 애먼 사람 몰아붙여 잡지는 말아 달라.
새 출범에는 의례 과한 기대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단 나팔을 불었으면 최소한의 열의와 존재감은 동포들에게 보여줄 일이다. 그저 기를 꽂는데 만족하거나, 모국정치권에 선을 대 ‘재수 좋으면 한자리 노리고’ 식의 계산 속만 엿보인다면, 머잖아 힐난에 직면할 것이다.
원래 야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영광보다는 가시밭길이다. 그만큼 정력과 결기가 필요한 길이다.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 >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그제 국공립대의 정원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대학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제정신으로 한 말인지 의심스럽다. 등록금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유력하게 제안되고 있는 것이 사립대의 국공립화다. 고등교육을 아예 망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할 얘기가 아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국공립대 등록금의 두 배에 이르는 사립대, 그것도 의존도가 80%를 넘는 사립대 때문에 제기됐다. 사립대 의존도가 20% 밑으로, 아니 절반 이하로만 떨어져도 등록금 문제가 이렇게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공립대를 닦달해 등록금 인상을 주도해온 일부 명문사립대보다 경쟁력이 높아지면, 등록금 통제기능이 커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기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같다.
역대 정권들은 가뜩이나 적은 고등교육 재정을 더욱더 줄이려 국공립대의 규모를 축소해 왔다. 2년제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 재학생 가운데 국공립대 재학생은 1980년 31.3%에서 2010년 13.8%로 떨어졌다. 2005년 이후 10개 대학이 통폐합되고, 학생 정원은 8768명이 줄었다. 이 정권이 입만 열면 거론하는 미국의 경우 주립대 재학생이 75%를 차지한다. 유럽은 영국을 제외하고 모두 국립 중심이다.

게다가 이 정권은 지금 국립대를 법인화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에 상정도 되지 않은 서울대 법인화법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해 날치기 처리하기도 했다. 국가가 책임지는 대학을 모조리 없앨 생각인 것이다. 어쩌면 법인화에 결사반대하는 지방 국립대를 협박하는 발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거기에 등록금 문제 해결 운운하는 핑계를 들이대선 안 된다. 정원 감축 대상이 하위 15% 대학이라고 하는데, 이럴 경우 주로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국공립대가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방 국공립대 공동화 우려가 곧바로 제기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국가 균형발전 정책에도 역행한다.
전체적인 대학 정원 줄이기 차원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학벌사회가 혁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인 정원 줄이기는 재수·삼수생만 양산한다. 이 경우 급증하게 될 사교육비 등 소모성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건지 눈앞이 아득하다. 제발 망국적 발상만은 좀 자제하길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