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지상파 TV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놀자판, 먹자판’ 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연예인들이 떼거지로 스튜디오에 모여앉아 시시콜콜 떠들썩한 잡담과 ‘영양가 없는’ 수준 이하의 말장난을 벌이고, 시도 때도 없이 얽히고 설킨 불륜드라마가 종일토록 화면을 장식한다. 물난리가 났는데도 시끌벅적 농담 따먹기 프로들, 흥미일변도에 자극적인 오락물 일색이다. 심지어 뉴스마저도 ‘연성화’되어 맥빠진 나열로 흘러간다.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이슈들은 뒤로 밀려 일부러 관심권에서 떼어놓고 있지않나 의심이 들 정도의 뉴스편성이다. 시사고발 프로는 눈을 씻고 보아야 겨우 구석에서 찾을 수 있거나, 그나마 고리타분한 이슈, 아니면 물에 물탄 듯한 제작수준이 태반이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 정권에 뒷덜미가 잡힌 언론은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정권의 눈치를 보며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뉴스와 분석들만 넘쳐났다. 국민의 ‘알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사치요 때론 위태로운 일이었다. 특히 방송은 그야말로 ‘나팔수’에 충실해 정권의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은 철저히 배제됐다. 당연히 연예·오락과 스포츠 이벤트 보도의 비중이 높아져 TV는 웃음과 함성으로 도배됐다. 나라가 태평성대임을 보여주는 최고의 가장행렬이 연일 화면을 통해 벌어졌던 것이다.
글자그대로 ‘바보상자’요, 국민은 ‘바보’나 ‘졸’ 신세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날이면 날마다 웃고 즐기는 프로그램에 정부 찬양 일색이니, 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어 세상이 정말 즐거운 곳이구나, 살기좋다 하며 무념(無念)으로 생업에 전념하거나, 아예 화면은 현실과는 전혀 딴판이니 관심을 끄고 미디어 밖의 담론에 귀를 기울이며 속 끓이고 살든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곤혹스러움이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도 10년이나 지난 이 마당에, 방송의 그런 ‘국민 바보만들기’ 행태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면 각 방송사 소속직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대통령의 특보출신, 혹은 절친한 후배가 KBS·MBC, YTN 등에 입성을 시도할 때부터 오늘의 ‘바보상자 가장행렬’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요 비판·고발 프로그램 말살과 치열한 기자정신의 언론인, 일부 정치성향 연예인 퇴출 등이 이어지더니, 친일인사 미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치권 도청사건을 일으키고…, 국민의 방송이며 사회 공기(公器)여야 할 방송의 ‘타락’이 끝이없다.  멀리 영국, 그리고 전세계에서 벌이는 ‘언론황제’ 머독 그룹의 신문과 방송이 보여주는 추태를 경쟁이라도 하듯 따라하고 있다.  
언론의 가치는 진실과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에 있다. 인간이 누릴 자유와 행복권과 공정·공평한 세상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정치의 대척점에 선 언론에게도 지상명제인 것이다. 그래서 파헤쳐 알리고, 때로는 비판하고, 앞서가며 비전제시도 필요하다.
그런 언론의 사명과 역할은 언제 어디서나, 사회체제가 어떠하든, 공동체가 크든 작든, 불변의 것이어야 한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던 미국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시대나, 사관(史官)에 화살을 쏜 조선 연산군의 폭정 아래서도, ‘종편’이 보상물로 오가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그 것은 또한 이민 동포사회라고 다를 바가 없다. 삶에 지치고 분망한 동포들에게 청량제 같은 언론은 되레 절실하다. “설마 여기서야 어떠랴”하는 언론의 타락과 오도(誤導)는 동포들 자존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짓밟고 이민겨레의 미래를 혼돈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근자 많은 이들의 지적과 한탄을 듣는다. 내년의 모국 선거 참여를 앞두고 잦아진 정치행사에 동포언론 관계자들이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행태가 과연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중간자로 좌정해 정확한 논점을 제시해도 부족할 터인데, 그렇잖아도 갈등이 우려되는 터에 몇 안되는 한인언론이 편향으로 흘러 한쪽 편들을 들기 시작하면 동포사회 이전투구가 심화되지 않겠느냐는 간곡한 질타다.
정말 엄중히 귀담아 들을 일이다. 그 질타는 모국의 극우를 본따 시대역행적 ‘친북’이니 ‘종북’을 거론하며 과도한 발언을 서슴지 않은 일부 단체장도 마찬가지다. 특정정당의 활동을 하라고 뽑아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편집인 >


Share! Share OK?

● 칼럼 2011. 7. 31. 13:41 Posted by SisaHan
노남석의 생활칼럼       

 



 이젠 가족의 수가 점점 늘어갑니다. 저희 부부와 아들 셋의 단출한(?) 가정에서 아들들이 결혼해 며느리들이 생겼고, 각 집에 두 부부만 사는 것이 지루했던지 집집마다 강아지를 한 마리씩 입양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안가서 첫 손녀가 생겼고, 그 다음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아이들을 낳더니 한 집에 아이들이 둘씩이나 됩니다. 저희 부부는 아들들에게 둘이면 충분해!” 라고 세뇌교육을 시키지만 아들들은 엄마 아빠는 셋을 낳았잖아요!” 합니다. 언제 누가 먼저 시작할지 모르지만, 누군가 세번째 아이를 낳으면 모르긴 해도 한 집에 아이들이 셋씩 될 것 같습니다.

 

가끔 온 가족이 다 모일 때가 있는 데, 모두 모이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른 여덟에, 손녀 손자가 여섯, 거기에 개 손자 셋! 젖 달라고 우는 녀석, High Chair에 앉아서 음식을 숫가락으로 퍼서 뿌리는 녀석, 공 하나를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식탁 밑으로 뛰어다니는 개 손자들!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전에는 가족들이 모이면 제일 많이 쓰던 말들이 ~ 참 예쁘다!” “~ 참 잘 한다” “어쩌면~ 요렇게 잘 생겼냐? 누구 새끼냐?” 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제일 많이 쓰는 말이 “Share!!! Share OK?”로 바뀌었습니다. 재롱떠는 손주들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손주들의 싸움을 말려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약통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홍색으로 아내의 것이고 하나는 파란색으로 제 것입니다. 하루는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큰 손녀와 둘째 손녀 둘이 하나는 질질 짜며 울고 있었고, 하나는 이게 내꺼야!!!” 소리지르고 있었습니다.

 

달려가 보니 분홍색 빈 약통의 귀퉁이들을 잡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큰 손녀는 저를 닮아서 마음이 여리고, 둘째 손녀는 아내를 닮아서 좀 드셉니다.ㅎㅎㅎ 그래서 싸우면 항상 큰 손녀가 먼저 울고, 둘째 손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씩씩거립니다. 파란 약통을 집어들고 누가 이걸 가질래? 난 이게 더 좋은데했더니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똑같이 생긴 약통인데 왜 꼭 분홍색이어야 하는 지 이해가 안되는 데, 아마 계집아이들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어쩝니까? 서로 분홍색 약통이 좋다는데……

 

그때 두 애비가 달려오더니 똑같이 하는 말이 “Share! Share OK?” 였습니다. 요즘엔 “share!!!” 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듣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서로 깔깔거리면서 잘 놀다가도 일단 누가 한가지를 집어들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니 말입니다. 지난 Father’s Day에 큰 손녀의 Daycare에서 Father’s Day 행사를 하면서 아빠들을 초청해서 함께 행사한다고 했습니다. 아들 부부가 모두 일하니까, 행사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저더러 가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아내와 같이 처음으로 이곳 Daycare에 갔었습니다. 다들 아빠가 왔는데 손녀만 아빠가 없으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 생각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할배가 가기로 했습니다. 병아리 같은 꼬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기도 하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뒷마당 놀이터에 세발자전거가 세 대 있었습니다, 큰 손녀가 그 중 하나에 올라 타려는 순간, 손녀보다 약간 큰 여자아이가 달려오더니 “This is mine!” 하며 손녀를 밀치고 있었습니다. 손녀는 저를 쳐다보며 울상이 되었습니다. 손녀에게 다가가서 “Ava, share OK? You’re a good girl. Let her have it. 저기 있는 자전거도 참 좋은데?” 저도 알게 모르게 “share” 라는 말을 많이 쓰는 요즈음 입니다. 손녀는 못내 아쉬워 하면서 다른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자전거를 뺏은 아이가 손녀가 다른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는 그 얼굴 표정이 변했습니다. ‘이 자전거 보다 저게 더 좋은 데…’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내 것보다 남의 것이 더 커 보이고 더 좋아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탐내기도 하고, 빼앗을려고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가 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면, 저희들이 사는 세상은 훨씬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 같은 데, 아이들에게만 “share! Share OK?”를 외치고 삽니다. 어떤 유명인사는 절세미인인 아내를 놔두고 생김새로 봐서는 별볼 일 없는 가정부와 바람을 피워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한가지만은 Share 하면 안되겠지요? 아내만은! ㅎㅎㅎ

민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10+2 재재협상안’을 내놨다. 이 안은 미국과 재재협상을 해야 할 10가지와 국내 보완과제 2가지로 구성됐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8월 임시국회에서 비준동의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혀 야당과 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놓고 정치권이 정략적 공방만 벌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국회가 그동안 제기된 비판과 문제의식을 수렴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끄는 생산적 토론의 장을 열 때다.
민주당은 최근까지 ‘참여정부가 맞춰놓은 이익의 균형이 이명박 정부 들어 추진한 재협상에서 깨졌다’며 재재협상을 통해 원점으로 되돌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어제 낸 제안은 한발 더 나아갔다. 애초 타결된 협정문 가운데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ISD) 등 이른바 ‘독소조항’으로 지적된 내용도 미국과 재재협상을 통해 폐기 또는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민주당 스스로 처음부터 잘못된 협정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권국가라면 자유무역협정은 선택의 문제인 만큼 필요하면 재재협상도 요구할 수 있다. 미국도 자국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자 재협상을 요구해 핵심 조항을 대폭 수정한 바 있다. 민주당은 애초 잘못된 협상안을 받아들였던 과오를 바로잡는다는 뜻에서라도 재재협상안 관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정부·여당 역시 미국 의회가 이미 이행법률안 심의에 들어갔다는 이유 등을 들며 비준동의 절차를 서두르는 대신 국익의 관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특히 국내 보완과제, 즉 통상절차법 개정과 무역조정지원제도의 강화는 여당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통상조약 심의·의결 절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부터 적용할 필요가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은 국회에서 통과되면 곧바로 특별법의 효력을 갖게 된다. 협정은 두 나라 사이의 교역 질서뿐 아니라 공공정책과 국민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량만 무려 763쪽에 이르는 또하나의 큰 법전이다. 협정과 충돌하는 국내 법률이 정부 쪽 추산으로도 30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주요 내용에 대한 정부의 설명은 달랑 3쪽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한나라당이 8월 국회에서 야당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처리하려 한다면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전면 재검증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제국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이 해킹 사실 폭로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영국 의회는 어제 마침내 머독 부자와 뉴스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 리베카 브룩스 등 뉴스코프 3인방을 불러놓고 청문회를 시작했다. 해킹 사실을 처음 폭로한 전직 기자의 죽음으로 청문회의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됐다.
이번 사태로 지금까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전 공보보좌관 앤디 쿨슨과 브룩스 등 10명이 체포됐고, 런던경찰청장과 <월스트리트 저널> 발행인 등의 무더기 사임 사태를 빚었다. 머독은 나름의 반격을 가하고 있지만 흐름을 뒤집긴 어려워 보인다.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적 회의가 커가고, 머독 제국을 키운 권력과의 유착관계에 금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머독은 유명인 스캔들과 루머, 섹스, 범죄, 사생활 폭로, 인신공격 등 대중의 관음증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기사들을 양산해 전통 저널리즘을 밀어내며 성공가도를 걸었다. 기자들을 돈으로 정보를 매수하는 부도덕하고 무자비한 경쟁에 몰아넣었다. 여기에다 보수우파 취향의 편향적인 뉴스들을 배합한, 엔터테인먼트와 뉴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선정적 보도는 단절과 소통 부재의 정치적 패거리 문화를 확산시켰다. 1970년대 이후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 혁명과 영국의 신자유주의 우경화에는 미국의 <폭스>와 영국 인쇄미디어의 37%를 장악한 머독의 매체들이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캐머런 총리가 납치된 13살 소녀의 휴대전화 해킹을 지시한 <뉴스 오브 더 월드> 당시 편집장 출신 쿨슨을 공보책임자로 불러들인 건 바로 이 미디어제국의 막강한 독과점적 영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배가한 뉴스코프의 권언유착은 경찰까지 부패시켰다. 돈과 정보를 맞거래하고 편의를 봐주던 런던경찰청장은 물러나면서야 캐머런과 뉴스코프의 유착관계를 폭로했다. 해킹 사실 폭로를 계기로 폭발한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배경에는 이런 권언유착과 언론 독과점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깔려 있다.
한국도 보수 일변도의 거대신문들이 방송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권언유착과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의 도래가 예고되고 있다. 자사 이기주의의 추악한 몰골을 보여준 한국방송공사 도청 논란도 거기서 멀지 않다. 머독 미디어제국의 타락과 추락은 결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