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용기와 오만의 차이

● 칼럼 2011. 9. 30. 18:11 Posted by SisaHan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내년 경제 전망이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내년 경제 기상도는 어둡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을 4%로 내다봤다. 삼성경제연구소는 3.6%로 더 낮게 점쳤다. 올해 예상 성장률(4%)에다 내년 전망치들까지 모으면 이명박 정부 집권 5년 동안의 경제운용 성적표가 나온다. 
연평균 성장률은 3%대 중후반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내건 ‘747’(연평균 7% 성장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 목표가 반토막짜리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전임 국민의 정부(연평균 4.4% 성장)나 참여정부(4.3%)에 견줘서도 초라한 성적이다. 이 대통령은 ‘어떻게 된 거냐’는 국민의 면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뭐라 답할지도 짐작할 수 있겠다. 나쁜 대외여건을 강조할 것 같다. 
대외여건이 이명박 정부 들어 유독 나쁜 건 맞다. 출범 첫해부터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팀은 일찌감치 7% 성장 목표를 접어야 했다. 다만 집권 후반기에 한번쯤 7% 성장을 맛볼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다가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7% 성장 능력을 갖춘 경제’로 두루뭉술하게 바꿨다. 
경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국민 약속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예기치 않게 대외여건이 너무 나빠졌다. 그래서 임기 안에는 7% 성장이 어렵다. 하지만 다음 정권에서 도약할 수 있도록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두루뭉술한 약속마저 지키기 어려울 듯하다. 대외여건만큼이나 내부 체질도 나빠진 탓이다. 수출 둔화는 물론이고 소비 둔화, 재정과 통화 여력의 소진까지 겹쳐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성장의 주요 동력들이 모두 허약한 상태다. 그래서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부터 본격 저성장 시대를 예고했다. 이명박 정부가 다음 정권에 도약의 발판을 넘기는 게 아니라 침체의 수렁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경제의 체질 저하는 위기를 내재화한 결과다. 위기 징후가 나타날 때마다 뿌리를 찾아 제거하기는커녕 땜질 처방으로 일관하다 보니 도처가 지뢰밭이다. 
온 나라가 주저앉을 뻔했던 9.15 정전사태, 끝없이 불거지는 저축은행 부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계부채 등은 지뢰 폭발의 서막이다. 숨어 있는 지뢰가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데다 폭발력은 더 클 것 같아 두렵다. 
잠복한 위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전에 경고음이 울렸는데도 정부와 당국이 ‘폭탄 돌리기’ 식으로 처리했다는 점이다. 저축은행 부실화 과정에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저축은행 부실의 원흉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채권은 위험지수가 올라간 지 오래됐다. 그런데 금융당국은 보증을 선 시중은행들에 채권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종용하는 한편, 2008년 하반기부터는 자산관리공사(캠코)를 시켜 환매조건부로 사주게 했다. 사실상 공적자금을 동원한 부실 감추기였다.
 
가계부채는 더 커진 시한폭탄이다. 지난해 정부가 8.29 부동산활성화 대책으로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한 뒤로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성장률의 세 배를 웃돌고 있다.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에 빠져버렸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저축은행보다 가계부채가 더 큰 문제”라고 진단할 정도다. 
경제에는 바깥이든 안이든 위험요소가 늘 있기 마련이다. 예방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치면 근본적인 처방으로 조금씩 누그러뜨려야 한다. 
용기 있는 자는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극복하려 든다. 반면에 오만한 자는 겉으로만 큰소리칠 뿐 뒤로는 비겁하게 위기를 다른 데 떠넘길 궁리나 한다. 용기에는 역사적 평가가 남지만 오만이 앞서면 치욕이 뒤따른다고 했다. 그것이 용기와 오만의 결정적 차이다.

< 박순빈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행정안전부가 국가행정전산망에 들어 있는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전산자료)를 채권추심회사와 금융회사 등에 돈을 받고 제공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한테는 주소와 가족 구성, 거주 형태 등이 포함된 개인정보를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면서, 정부는 정보를 흘리며 돈벌이까지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고 믿기지 않는다. 정부의 개인정보 유출은 국민 사생활과 인권 침해를 방조·조장하는 행위로 당장 멈춰야 한다. 
장세환 의원(민주당)이 어제 국회 행안부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행안부의 개인정보 처리 실태는 충격적이다.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민간기업 52곳에 건당 30원씩 모두 17억8000만원을 받고 5935만건에 이르는 개인정보를 줬다. 한달에 평균 13만건의 개인정보가 행안부를 거쳐 민간에 흘러간 셈이다. 행안부의 정보제공 대상 가운데 80%는 채권추심회사인 것으로 돼 있다. 장 의원은 “행안부가 민간에 넘긴 개인정보는 사후관리도 매우 허술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제2, 제3의 피해를 우려했다.
 
이에 대해 행안부 쪽은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반응만 보이고 있다. 현행 주민등록법에 채권·채무관계 등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민간업자도 행정전산망의 개인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안부가 중시해야 할 것은 법적 근거보다 개인정보를 민간에 넘겨 생길 수 있는 피해의 방지다. 행안부는 전체 공공기관과 민간사업자들을 상대로 개인정보 보호대책을 시행하는 부처다. 그런데 국민의 개인정보를 30원씩 이용료를 받으며 채권추심기관 등에 넘기고 사후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행안부가 어떻게 개인정보 보호를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최소한 민간기업들은 개인정보 유출로 피해가 발생할 경우 처벌도 받고 민사상 책임도 진다.
 
30일부터 개인정보보호법이 본격 시행된다. 이 법은 개인정보의 수집·유출·오남용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로, 지난 3월 국회에서 제정했다. 정부는 어제 국무회의에서 시행령까지 통과시켰다. 따라서 앞으로 모든 공공기관과 하루 이용자 수 1만명이 넘는 개인정보 처리 사업자한테는 개인정보 보호 의무가 더 강화된다. 이래 놓고 개인정보 보호에 가장 앞장서야 할 행안부가 개인정보 장사를 계속한다면 모양이 더 우스워진다. 행안부는 개인정보를 민간회사에 팔아넘기는 것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어제 일본 도쿄에서 대규모 원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수습돼가고 있다는 정부 발표를 믿지 않고 있으며, 기존 원전정책 유지를 고집하는 정부 방침에 분노하고 있다. 
사고 당시 200~300㎞ 바깥의 도쿄 일대까지 피난 대상에 포함될지 모를 상황에서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그렇게 되면 3000만명이 피난해야 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립이 불가능해진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나라의 절반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는 사고라면 100년에 한번뿐일지라도 그런 위험부담은 져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단 한번의 원전사고로 도쿄 등 수도권이 초토화되고 나라가 망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악몽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농작물과 수산물 방사능 오염 공포 때문에 지역경제가 주저앉을 지경이다. 여전히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원자로 냉각수로 다량의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가 생겨나 땅과 바다를 망치고 있다. 오염 토양 거죽을 5㎝ 두께로 1억㎥나 걷어낸다는 계획은 실행하기 쉽지 않다. 그곳 주민들은 생전에 다시 고향땅을 밟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앞으로 100만명 이상이 방사능 오염으로 숨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럼에도 후임 노다 요시히코 정권은 기존 원전정책 유지를 공언하고 있다. 원전 기득권을 누려온 원전마피아의 반격이 그만큼 거세다. 도쿄 시위는 이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2022년까지 원전을 모두 폐기하기로 한 독일의 원전업체 지멘스가 원전 관련 사업 포기를 선언한 것은 ‘원전 르네상스’가 근거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뒤 녹색·사민당으로 쏠린 민심은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련 정부가 최근 지방선거에서 7번 연속 패배하는 데 일조했다. 지멘스는 이런 상황에선 원전사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탈원전 바람이 불고, 원전 전력생산 비용이 더 싸다는 신화는 무너졌다. 사고 뒤의 참상과 비용까지 고려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세계 최고의 첨단 원전을 개발하겠다며 거꾸로 가고 있다. 시민들마저 일본의 참화를 이미 지난 일로 여기는 듯하다. 동아시아 3국 중 원전사고에 가장 취약한 나라는 중간에 놓인 우리다. 사고는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로 인한 비극을 막으려면 우리도 하루빨리 탈원전 쪽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1500자 칼럼] 고통 나눔의 묘미

● 칼럼 2011. 9. 30. 15:05 Posted by SisaHan
삶의 나눔은 참 소중하다. 더욱이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더 소중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J씨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위기를 맞이했던 때가 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1년 후였다.  장애인 큰 아들을 기르며 다져졌던 강한 의지와 씩씩했던 J씨 모습은 막내아들의 교통사고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아들이 차에 치어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는 전화는 큰아들이 뇌성마비 진단이 내려졌을 때 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는가 앞이 보이지 않더란 것이다.
생명엔 지장이 없었으나 심한 뇌진탕은 막내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쉴 새 없이 찾아드는 두통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없는 형벌이었다.
 
‘엄마가 강해져야 하는데…’  견디기 어려울 때 마다 근교 바닷가로 나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너머 세계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기를 소원했다.
왜 하필이면 우리 아들들이냐구요? 차라리 나를 넘어뜨리지 날 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소리치며 절규하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아들이 너무 가엾어 너무 마음이 아파 가슴 쓰림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러나 J씨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고 기다려주고 견디며 애정을 쏟아 붙은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단 말인가.    
J씨 막내는 한창 잘 나가는 30대 청년이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인정받는 엘리트 일꾼이었다. J씨 가정에 더할 수 없는 자랑스런 막내였다.  그런 그가 횡단보도를 걷다가 차에 부딛힌 것이다. 몇 날 동안 코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아들은 더 이상 총명한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1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J씨와 나는 공원묘지를 소요하며 그간 하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J씨는 고통을 통해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죽고 싶도록 견딜 수 없는 절망가운데 처해 있었음에도 우리를 붇들어 주고 견딜 수 있었음은 사랑과 믿음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서로는 고백했다.

J씨나 나도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한 참변을 당했을 때 제일 먼저 떠 올랐던 것이 죄책감이었고 후회스런 일로 점철 되었었다. 잘못해 준 일만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아니 심지어는 혹시 내 잘못 때문에 생긴 결과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을 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세상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절망의 구덩이에서 기어올라 J씨도 장애인 된 아들과 나도 남편과 더불어 살면서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긴 것은 적어도 10여년의 세월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거기엔 끊임없는 인내와 수용력, 사랑만이 가능했음을 지나놓고 보니 그러했다. 이는 한시적인 간병인의 의무가 아니고 평생 간병인의 사명을 끝내해야 할 우리지만 J씨는 함께 일어나준 아들이 되어주어서 고맙고 나는 의연하게 당신의 갈무리를 깔끔히 하며 견뎌주는 남편이 늘 고맙기만 하다. 
불행의 경중이 결코 비교급은 될 수 없다 해도 J씨의 삶의 모습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모정의 한 표본임을 만날 적마다 피부에 와 닿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작업은 혼자서 됨이 아님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고통분담의 묘미는 나누면 나눌수록 적어져 간다는 것이다. 고통의 예술성이 여기에 있다.  불행은 누구에나 닥칠 수 있다. 선하게 산 사람이나 악하게 산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닥쳐온다. 그런데 이 불행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로소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겪고 난 후 부터였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